본문 바로가기
종교

3세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주교가 교회와 구원에 관해 인터뷰하다 - '신학논쟁'

by tat tvam asi 2024. 5. 24.
반응형

                                             

 

- 로저 E.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교회사와 기독교 신학사에 관한 책들에서 그가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꽤 영향력 있는 교회 지도자였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누구든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자, 들어가 보자!

 

. 들어가는 말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에로 부른 받은 자들의 모임(κκλησία)이다. 교회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나는 내가 섬기는 사당중앙교회 공동체가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영적인 자유함이란,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으로 분주한 우리들의 일주일을 뒤돌아 볼 때, 성령 안에서 7일이 한결같기를, 하루하루가 일관성 있기를 바란다. 우리 공동체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은혜의 순간이기를 기도한다.

 

이 마음으로 키프리아누스의 사상과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 키프리아누스

 

3세기 아프리카(Africa)의 카르타고(Carthage) 지역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Cyprianus Thascius Caecilius)는 교회의 내적이고 외적인 어려움들에 직면했다. 교회는 내부적으로는 감독의 권위를 정착시키는 문제,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계속되는 박해의 문제였다. 특히 키프리아누스가 직면한 대외적인 중요한 신학적 문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정체성의 문제와 감독의 역할,

박해 이후의 교회의 일치와 순수성의 문제,

재세례의 문제와 배교자들과의 화해의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교회의 일치라는 저서를 통해 표현되었고, 이 저작을 통해서 키프리아누스는 감독 중심의 견고한 제도로써의 교회를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교회론의 근간에 성령의 역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현대 교부학자들에게는 간과되어 왔다.

 

 

1. 생애

 

카르타고(Carthago)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의 본명은 타스키우스(Thascius)이며 기독교에로의 개종 시에 카에킬리우스(Caecilius)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고향은 카르타고로 추정된다. 키프리아누스가 200-2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 당시 북아프리카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기독교는 그곳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250년경에는 교회 감독의 수만 해도 250명을 헤아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자란 키프리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언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종하기 전에는 궁전 변호사와 수사학 교사로 활동했다. 그의 개종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당시 사회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가 개종할 당시 북아프리카 교회는 로마교회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개종 직후 약 245-248년 사이에 세례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례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집사로 장립되었고 곧이어 장로가 되었다. 그는 2487월과 2494월 사이에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택되었다. 250, 즉 감독직에 오른 지 1년 정도 지났을 즈음에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가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 박해는 특별히 기독교 지도자들인 감독들에게 집중되었다. 데키우스 박해의 최초 순교자는 로마 감독이었던 파비아누스(Fabianus)였다. 박해에 대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는 적극적이고 용감하게 보이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보이는 피신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자신의 안전만을 고려한 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르타고 교회 전체를 위한 공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피신의 길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생애 내내 그를 괴롭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박해의 강도가 줄어들자 키프리아누스는 약 13개월 만에 다시 카르타고 교회로 돌아왔다. 이 때 그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박해 기간에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배교자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그의 자세는 중도였다. 당시 배교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는 이교 신들에게 분향한 자들(sacrificati 혹은 thurificati)이요, 다른 하나는 분향하지는 않았으나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들에게서 매입한 자들(libellatici)이다.

 

배교자들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공식적인 회개 절차를 무시한 채, 당시 영적 권위를 가진 고백자들(confessores), 즉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고백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석방된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쉽게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다.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던 고백자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배교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사죄 문서를 받은 배교자들을 어떤 회개 조건 없이 교회에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고백자들의 사죄 문서, 평화의 문서들’(libelli pacis)은 남용될 가능성이 높았고 심지어 매매가 되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정한 공적인 회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회에 돌아오려고 하는 편법적인 방법에 대해 반대하면서 너무 쉽게 배교한 자들과 극심한 고문을 당한 후에 배교한 자들을 구분하여 차등적으로 참회 기간을 부과할 것을 요구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강력한 저항 세력, 즉 고백자들과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진 카르타고 교회의 두 사람,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 집사와 노바투스(Novatus) 장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노바투스는 키프리아누스가 카르타고 감독으로 선출될 당시 경쟁자였으며 펠리키시무스는 키프리아누스가 박해로 인해 교회를 비웠을 때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바투스에 의해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로 임직된 사람이었다.

 

배교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북아프리카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로마교회는 감독 파비아누스가 순교되자 후임에 코르넬리우스(Cornelius)2513월에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가장 강력한 후보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였다. 코르넬리우스가 로마 감독이 되자 노바티아누스는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스로 로마의 대립 감독이 되었다. 배교자들에 대해 노바티아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용납불가라는 강경한 입장이었던 반면에 코르넬리우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키프리아누스를 대적하기 위해 노바투스는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전혀 다른 로마의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연합은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아누스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감독들이 로마 감독 코르넬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으며, 로마 교회의 노회가 노바티아누스를 파문함으로써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고백자들이 포함된 반대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박해 시에 도피했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위한 진정성 있는 헌신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북아프리카 감독들 대부분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북아프리카 교회는 키프리아누스를 중심으로 안정을 되찾아 갔다. 로마 감독 코르넬리우스가 2536월에 순교함으로써 루키우스(Lucius)가 뒤를 이었으나 재임 기간을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로마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기 때문에 25412월에 스테파누스(Stephanus)가 로마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에는 박해가 잠시 소강 상태였으므로 교회가 안정을 찾았으나 이단자의 세례 문제로 내홍을 겪게 되었다. 문제의 요점은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과 분파주의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 할 때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하느냐 인정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255-256년 사이에 발생했다.

 

이단자가 베푼 세례라 할지라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것이라면 교회가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한다고 로마 감독 스테파누스는 주장했던 반면에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자신의 원칙에 근거하여 이단자의 세례가 교회 밖의 세례이기 때문에 원천 무효이며 따라서 그가 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테파누스는 키프리아누스를 출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문제로 2569월에 카르타고의 감독 87명이 회의를 소집하여 키프리아누스의 견해, 즉 교회 밖의 세례는 무효라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고 이 결정을 스테파누스 감독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교회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257년에 스테파누스 감독이 죽음으로써 그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10여 년의 험난한 교회 감독 생활을 한 후 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의 박해로 인해 258914일 카르타고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했다. 순교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용감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저술가로 인정되며 그의 라틴어 저술들은 상당수 남아 있다.

 

 

2. 사상

 

1) 성령 중심의 교회론

 

이레나이우스(Irenaius)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작들 속에서 발견되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던 것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몸으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세기 교회의 거룩성에 초점을 맞춘 여러 다른 유형의 교회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다양한 교회의 이해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의 교회론,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 그리고 스테파누스의 교회론으로 나눌 수 있다. 노바티아누스의 교회론은 각각의 성도가 거룩하다는 것이며, 키프리아누스는 감독은 교회 안에서 거룩함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주장을 했고 마지막으로 스테파누스 감독은 교회의 성례전과 교회의 모든 전통들은 거룩하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이후에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보다 폭넓은 관용을 베풀 것인가 아니면 좀더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배교자들의 문제를 치리해야 하는가의 양쪽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한다. 키프리아누스는 언제나 그 자신의 분명한 교회론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는 문제와 교회의 제도적 질서 속에서 나오는 권위를 유지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키프리아누스가 직면한 박해의 상황과 교회론을 둘러싼 신학적 불일치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키프리아누스의 서신 70성령이 하나이신 것처럼, 그리고 교회가 하나인 것처럼, 세례는 하나이다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 한 문장의 표현은 그의 교회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교회일치에 관하여4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론을 발견할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는 자신 이전과 이후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처럼 양립 가능하지 않은 두 가지 이상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나는 교회의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일치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교회를 이끄는 다수 주교의 동등한 협력관계다. 로마 주교인 코르넬리우스는 그 안에 내제하는 문제를 보았기에 로마 주교를 그리스도 아래에서 전체 교회를 총괄하는 유일한 최고의 권위로 선포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려 했다. 결국 현재 로마 가톨릭으로 불리는 서방교회는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코르넬리우스의 모델을 택했고 동방 정교회는 오늘날까지 키프리아누스의 모델을 수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국 국교회도 영국 군주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치의 상징적인 최고위자임에도 불구하고 키프리아누스의 모델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키프리아누스의 두 저작들, 특히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교회의 일치에 관하여(De unitae Ecclesiae)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의 특수성을 잘 보여 준다. 시모네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키프리아누스) 그의 교회론을 세우기 위해서 고심했으며, 그 결과 이 두 작품을 저술하게 되었다. 배교자들에 관하여는 당시의 두 가지 극단적인 교회론을 피하면서 배교자들의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고,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는 교회가 배교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참된 회개를 통해 교회의 영적이며 제도적인 질서를 알고 그 질서를 따를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의 교회론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교회란 단순히 가시적인 조직체나 또는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교제를 위해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장소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체험이 없이는 교회가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없이, 교회가 성립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영적 여정을 시작함으로 성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교회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지도력은 감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지도력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단순히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의 감독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위계질서만을 강조한다고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교회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에게 있어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리더십과 권위의 문제는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볼 때 그가 성령의 임재의 신비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에게 있어 교회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관계이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신비적 차원으로 확대되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각각의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사람들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키프리아누스가 사용하고 있는 일치라는 말은 관계라는 말로 해석될 수가 있다고 본다. 성령과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영의 일하심을 통하여 교회의 관계적 본질(the relational nature of the church)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한 일치의 신비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며 교회 안에서 모든 것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키프리아누스가 그의 교회론을 통해서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관심은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일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영적 여정을 통하여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차원의 영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동시에 제도적 차원 내지는 감독을 통한 위계질서를 따르는 권위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그 두 가지를 교회론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2) 교회의 권위의 문제

 

키프리아누스가 처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특별히 지역교회의 정황들 속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교회의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교회가 어떻게 권위의 문제를 가르치고 그것을 실행하느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스테파누스와는 달리, 키프리아누스는 진정한 교회는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스테파누스가 로마교회의 권위가 모든 감독들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에게 있어 감독의 중심은 감독을 통한 위계질서 그것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차원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목회적 차원에 있음을 보면 스테파누스의 주장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가 생각하는 감독의 직무는 전체교회 구성원들의 삶과 신앙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룩할 수 있는 이유는 신자들 개개인의 삶과 성령의 교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차원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교회는 신자들이 모이는 가시적 공동체이며 동시에, 모든 구성원들의 교제를 통한 성령에 의해서 연합되는 곳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교회 일치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일치는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또 보호되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의 감독들은 교회를 수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독의 권위는 하나이며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기만에 의해서 이와 같은 단결을 속이지 못하도록 합시다. 누군가가 불성실한 발뺌으로 우리의 신앙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합시다. 감독제는 하나이며, 각각의 감독들은 서로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교회는 풍성하게 자라는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키프리아누스는 균형 잡힌 방향을 지향했고 감독제와 각각의 감독들의 권위의 위치와 역할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에게, 교회의 권위, 감독의 권위의 문제는 전체 교회 안에서 성령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도 같이, 감독의 권위는 모든 지역교회의 근거이며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감독제의 권위와 지역 감독의 권위는 교회의 모든 문제를 통제한다는 의미에서의 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균형 잡힌 그리고 보다 통전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비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키프리아누스가 처한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들은 그의 성령 중심의 교회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깊은 영적인 체험들은 그의 교회론에 기초가 된다. 키프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의 감독으로서 교회 내적이며 외적인 어려움들외적으로 전염병과 기독교에 대한 박해 그리고 내적으로 재세례의 문제, 권위의 문제, 그리고 배교자들의 용서의 문제들가운데 처해 있었다.

 

이에 대한 그의 응답은 먼저 건전하고 균형 잡힌 교회론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키프리아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적 개념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테르툴리아누스의 로고스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자신의 목회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로고스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성령의 특별한 위치와 역할 속에서 발전한 것임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비전은 그리스도(Christ the Logos)와 성령으로 시작한다. 성령을 통해서, 각각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상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키프리아누스는 일치”(un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그에게 있어서 일치란 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사역은 일치의 신비(sacramentum)를 통해서 교회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치의 신비는 교회의 직제와 감독의 권위 가운데에서도 나타난다. 키프리아누스에게, 교회의 직제는 위계질서적인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성령과 연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교회됨의 기초적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나가는 말

 

키프리아누스는 죄를 용서하는 것, 아니면 적어도 누구의 죄가 용서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권위 없이는 그런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세부적인 참회 제도가 중세시대에 숲처럼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했고, 이에 반대하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참회 제도 특히 면죄부를 구매하는 것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개신교는 키프리아누스 때로 되돌아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참회제도에 명백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개신교가 혹시 원치 않는 것을 없애려다 소중한 것까지 잃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헌재 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은총의 사사화(privatizaion of grace)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 없는 교회', '회개가 없는 축복', 그리고 '개인구원만을 위한 은총'만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만인 사제설'의 의미가 이웃을 위한 사제가 되어 하나님 앞에 함께 나아가는 헌신의 의미가 생략된 채, 개인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 모습이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영성가들의 고백을 볼 때, 우리가 우리의 죄를 더 많이 깨달아 알수록, 그래서 단지 죄인이 아니라 죄인 중의 으뜸임을 고백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은혜의 양과 깊이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며, 영적인 자유를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구원을 비롯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키프리아누스의 성령 중심의 교회론, 최철, 내용을 참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