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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4세기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부제 아타나시오스와 사제 아리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에 관해 인터뷰하다 - '신학논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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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E.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하나님에게 두 번이나 빚을 졌다!”라고 묘사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창조를 통해 인간을 만드심으로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두 번째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새로운 우리를 선물로 허락하셨다는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해 늘 목이 마른 나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고 진지했다. 그러나 엄청 어렵게 느껴진다.

 

용어 자체가 제대로 내 안에 입력되지 않아 힘들었고, 등장인물들과 배경에 대한 지식이 짧았기에 여러 책들과 논문과 자료들을 찾고 검색해야했다.

 

그런데 아직도 어렵다...

 

 

.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1. 아리우스 생애와 교리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60- 336)는 리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모 밑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안디옥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한때 분열주의자로 몰린 멜레티오스에게 사상적으로 동조했다가 연좌,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312년 봄 아킬라스(Achillas) 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기독교세가 강한 바우칼리스(Baucalis)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다정한 태도와 엄격한 금욕주의, 순수한 정신,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주요 반대자중의 하나였던 키프로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감명을 받았다.." 라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는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산더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아리우스의 교리에 반대하는 편지에서 그의 교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은 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스스로 있는 자 또는 영원한 자)은 존재하지 않았던 그분[아들]을 무에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가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며, 실은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고, 그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지혜 자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며,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그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을 통하여 만들기 위해 그를 도구로 사용하였고, 우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의 생애와 사상

 

4세기 교회 지도자를 꼽으라면 아타나시우스(300-373)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앞장서서 변호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집트의 민족지도자요, 교회정치가요,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니케아 정통 신학을 수호한 신학자이다. 샤프는 말하기를 콘스탄틴이 정치계와 속계에 있어서 니케아 시대를 이룩한 중심인물이었다고 하면 아타나시우스는 신학계와 교계에 있어서 중심인물이다고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00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그리스도인인 그는 자연히 그리스도교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철학과 신학교육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청년시절에 종종 광야로 은수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름다운 표양을 보며 유익한 말씀도 많이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가 사막에 거주하는 동안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워 이를 스스로 지켜나갔다.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심지어 일부 적수들로부터도 경탄을 자아냈다.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는 인물들 가운데 아타나시우스야말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그 이유는 그가 아리우스파들의 유려한 점이라든가 다른 중요한 교구들의 감독들이 탐닉했던 사치에 빠지는 일없이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민중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심오한 신앙의 원칙 등이 그를 강력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가 열린 325년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한 젊은 장로였다. 그런데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아타나시우스를 자기의 후계자로 추천했다. 그는 비록 젊었지만 동방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와 리비아의 교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다. 그는 46년 동안 감독직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며 싸웠다. 그는 5번이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는데 4번은 아리우스파인 치리자에게, 한번은 배교자 줄리안에 의하여 결국 2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니까 5번이나 교회로 다시 불려가서 감독의 직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일생동안 걱정하고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려던 것이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들과 맹렬한 논쟁을 벌이고 투쟁하는데 보냈다. 그러나 정신적인 무기만을 사용하였지 다른 포악한 행동으로 그들을 제재하지는 않았다. 그는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지만 상대편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권고는 할지언정 이것을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통의 원리를 그대로 지켰던 것이다. 샤프는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정정당당하며,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또 그레고리 나지안조스는 말하기를 나는 아타나시우스를 찬양 할 때는 곧 덕을 찬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은 모든 덕으로써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사랑과 빛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갔던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를 입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 완전한 겸손을 닮기 원했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신처럼 만들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며 또한 완전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373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비록 니케아 신조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그는 진정한 승리자였다.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13년 이후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활개를 펴게 되었다. 황제와 고관대작들이 모두 다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모든 불이익을 당하고 목숨을 걸어야 했던 순교의 열풍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적 쇠퇴기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 사회적인 기반과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정도로 사회적 흐름이 뒤바뀌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풀무불 가운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멈추자 어느새 안일함과 영적태만에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324년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틴이 갈라진 동방과 서방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황제로서의 장래의 성공은 옛날의 퇴폐적인 이교보다 그리스도교에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공공연하게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이를 보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잠재력이 로마제국을 다스려 나아가는 데 얼마나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모양으로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힘썼지만 성과는 더디었다. 옛날의 전통과 이교주의, 사교주의가 아직도 로마에서 큰 세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삼위일체 논쟁)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감독과 감독이 서로 대립하고, 심한 충돌이 있었다. 기독교 자체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외형상으로 제국은 하나였지만 신학적으로는 둘인 셈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콘스탄틴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 또한 로마 제국을 강화하며 단합시키는 목적을 위해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325년 수도 콘스탄티노플 건너편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첫 번째 교회회의가 열렸다. 318명의 감독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나타났다. 정통적인 이들은 소수였지만,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이었다. 그의 수행원으로 온 아타나시우스는 비록 젊고 어렸지만 통찰력에 있어서 이미 미래의 정통주의 신학자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 20명의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따랐다. 그리고 대다수는 유세비우스의 중도파를 따랐다. 그러나 오랜 논쟁 끝에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정을 가졌던 감독들도 정통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오랜 회의 끝에 비로소 니케아 회의는 신앙고백을 만들어 냈다.

 

참 하나님의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나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만들어진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여기에서 그가 없었던 때라든가’, ‘그가 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자가 창조되었다든지 변하는 존재라든지 성부와는 다른 질이라든지하는 용어들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제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심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신앙고백이 뜻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분인가? 아니면 거의 같은 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를 애매하게 보았다. 결과적으로 논쟁은 거의 60년을 더 끌었다.

 

379년에는 신앙심 높은 데오도시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지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서방의 교회에서 니케아 신조대로 교육을 받았기에 아리우스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되자 니케아 신조는 로마제국의 신앙고백이 되었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확실하게 공포하였다. 이 신앙고백이 오늘날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의 조물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한 분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아버지의 질로부터 탄생하신 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온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 창조를 받지 아니하시고 나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동질이시다. 그로 인하여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만물은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셔서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고 다시 오시리라,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 니케아 신조 원문

 

 

. 동일본질에 대한 논쟁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마무리되면서 교회 공동체는 당연히 평화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했겠지만, 성자의 신성’(divinitas)을 정의한, ‘성자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표현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분열과 혼란이 발생하다. 이는 실체’(본질, ousia) 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를 보기 때문에 초래된 문제이다.

 

그 논제의 질문과 대답은 간단해 보인다. <‘성령=하나님이신가?> 그러나 전체 교회 공동체가 한목소리로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하기까지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고백을 담은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신경의 그 어디에도, ‘성령은 하나님이라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니케아 신경에는 성자에 대해 보다 확실한 표현으로 동일본질이라는 내용이 있지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성령에게 그러한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본질 ousia란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대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리 되었다. 즉 성자의 신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했던 것처럼 성령도 성부와 동일본질이다라거나 성령도 하나님이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보이지는 않지만, ‘성부와 성자와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결국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찰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에 가장 큰 문제이던 ousia의 해석 차이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던 덕분이기도 했다.

 

1. 논쟁의 시작

 

성자는 성부와 한 본체(homoousion)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성자 하나님의 신성(divinitas)에 대한 논란은 니케아 신경을 결정 지으면서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그 결정 사항 중 용어 사용에 대한 개념 차이로 인해서 교회는 또 다른 커다란 혼란을 맞이한다. , 아리우스가 주창한 성자 하나님의 종속적인 신학 성찰에 반대하여 니케아 신경 안에 천 명한 성자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대목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원래 동일본질이란 용어는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말도 아니었고, ‘본질혹은 실체라는 철학적 용어의 해석에도 많은 차이들이 발생함으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문인 신경 자체는 교회의 신학적 일치를 가져다주기보다 오히려 더 거센 혼돈의 소용돌이를 몰고 오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실체’(본질, ousia)가 무엇인가라는 해석에 따라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경의 내용 역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본래 아타나시우스가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성자도 성부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성찰을, 논리적으로 보다 명확하게 논증하기 위해서다. 그에게 있어, ‘본질혹은 실체, 한 사물을 그 사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끔 해 주는, 그 사물 기저(基底)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희랍어 ousia는 라틴어의 실체’(substantia)본질’(essentia)로 번역되는데, 이 두 용어는 때때로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실체는 앞서 설명한대로, 한 사물을 그 사물이게끔 하는 기저의 것이라면, ‘본질은 인간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인 실체의 내용적 측면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나 본질이 같다는 말은 두 가지 사물이 정확하게 동일한 것임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바대로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 종속되거나 성부 하나님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서 마치 두 번째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성자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닌 같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니케아 신경에 담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니케아파 학자들이 사용한 실체개념은 각 지역의 다양한 철학적 전통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credo)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에 대해 오해들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실체 개념의 철학적 경향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는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ousia 개념을 둘러 싼 갈등의 원인은 플라톤 철학적 경향이 강했던 알렉산드리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경향이 우세했던 안티오키아(안디옥)의 문화·사상적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안티오키아(안디옥) 학파
철학 노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 방식 관념적, 이론적, 추상적 경험적, 현실적, 구체적
인간 이해 영혼에 보다 큰 강조
때때로 인간의 육신을 경시
극단인 욕주의가 생기기도
육신·감각에 의한 심과 재인식

그리스도론 신성 육화, 인성
성경에 대한 해석 은유적, 비유적 자구적
삼위일체

한 분이신 하나님
(다신론 해석을 경계)
구별되는 세 위격
(단원론 극단을 경계)
대표 인물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디오도루스, 테오도루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2. <신학논쟁의 내용>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다. 송자와 성령은 영원히 그들의 원천인 성부로부터 나온다. 공의회는 성부의 왕권을 분명하게 확증한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부의 신성을 공유한다. 우리는 구원을 통해 은혜로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분리나 분열도 없이 하나의 신적 존재와 공동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완벽한 일치 안에는 차이 없는 구별이 있다. 성부는 누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났기에 성부에 의존한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출원하는 영이기에 성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성부에 의존하다.

 

오늘날 우리는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교리와 그 신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삼위일체론은 추상적이며 신비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한 쟁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의회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호모우시온을 선택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여기에 소속되기 원하는 회원조직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자 구세주라는 선언을 요구한다. 이는 세기에 걸친 교회의 하나의 보편적이며 구속력 있는 진술이다. 아타나시오스가 주장했듯이, 만일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구원은 위태롭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후기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은 구원을 주로 인간의 성취로 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신적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이유다.

 

구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을 명심하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이 선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은 길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을 연합시키심으로, 그리고 우리의 죗값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 길을 가능하게 하셨다. 아타나시오스는 속죄에 대한 대속 이론을 분명히 믿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속한 신적공동체를 설명하는 용어다. 신적 사랑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모든 삶이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것같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를 공동체의 삶으로 이끄는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공의회가 실수를 했다고 판단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조의 미세하지만 중요한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고 황제가 수정한 내용에 반대하며 열렬히 싸웠다. 그는 다섯 번의 추방을 당했으며, 아타나시오스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쟁의 최종 해결안을 내려 준 콘스탄티노플 공의화가 381년 열렸다. 아타나시오스의 세 명의 친구(카파도키아 교부),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그의 사역을 이어서 수행했고, 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3. ousia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안디옥) 학파의 해석 차이

 

1) ousia 개념에 대하여

 

ousia는 두 가지 종류의 개념으로 구분되어 사용된다.

먼저 개별적 사물들 안에 개개의 사물들이 다른 사물(객체)들과 구별되는, 사물이 그 사물의 고유한 무엇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별 실체가 있고, 이러한 개별 실체들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개개의 개별 실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보편 실체가 있다. 예를 들면, 자연에는 소··돼지 등등의 개별적인 동물들이, 소는 소로서 말은 말로서 서로 구분되도록 하는 개개의 고유한 개별 실체가 있고, 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동물이라는 개별 실체들을 포괄하여 아우르는 보편 실체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실체 개념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정의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는 1실체, 보편적인 실체는 2실체로 설명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ousia라 함은 제 1실체를 의미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이 제1실체로 하여금 제1실체 되게 해 주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그에 따르면 개별자로서 베드로바울은 모든 현상들의 핵심이고 기초다.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그들로 만드는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물을 통하여 보편적이고 상위의 개념으로서 베드로바울은 종(species) 이라는 것이 제2실체다.

 

삼위일체의 보편 실체는 제2실체라고 하고 이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들을 포함하는 상위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실체 개념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서로 구별되는 각각의 성부·성자·성령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성부·성자·성령이 갖는 공통적인 그 무엇’, 즉 신성인 본성을 의미한다. 서방 라틴교회에서는 이를 번역하여 ‘substantia’ 혹은 ‘natura’라고 하였다.

 

반면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들 사이에는 고유하게 서로를 구분되게 하는 그 주체들만의 무엇이 있는데, 이를 개별 실체혹은 1실체라 하고,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적용해 보면, 하나의 실체’, 즉 하나의 본성을 갖는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서로 구별되는 그래서 서로 다른 고유성’(proprietas)을 지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1실체들이 존재한다. 이를 라틴교회에서는 위격’(persona)이라고 번역하다.

 

여기에 세 명의 카파도키아 교부 곧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본질(ousia) 또는 본체(substance)를 위격(persona) 또는 실체(subsistence)와 명백하게 구분해 줌으로써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ousia
실체
본질
2실체
natura, substantia
신성(Deitas)
하나이고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
1실체
persona,
고유성(proprietas)
서로 다른 고유성을 갖고 계시는 세 격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2) 동일본질(homoousion)에 대한 두 학파의 견해 차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문을 둘러싸고 문제점이 발생되었다. 먼저 아타나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삽입한 ousia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통적인) 신성을 가리키는 2실체’, 보편 실체로 이해했다. 따라서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자도 성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본성(natura), 즉 신성(deitas)을 갖고 있기에 성자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 (실체)을 갖는다는 고백이 담긴 니케아 신경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었고, 그 문장이 갖는 논리 역시 매우 명확해 보였다. 또한 그들에게 니케아 신경에서 말하는 ousia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개별적인 그 무엇(quidditas)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공통적인 신성(natura divina)을 의미하기에, 성자의 신성을 논증하기에 더없이 확실한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생각의 틀에서는, 니케아 신경의 ousia개별 실체’, 1실체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보다 경험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사고하던 그들은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서 실체 개념을 이해하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니케아 신경의 동일본질(homoousion)’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신경의 동일본질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 자체가, 성부와 성자의 개별 실체가 같다는 말인데, 만일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에 대한 구원경륜의 역사 안에서 구별되는 모습으로 체험되고, 더 나아가서 성경에 기록된 각각의 개별적 고유성은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삼위일체론의 이단이었던 단원론’(monarchianism)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에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부와 성자의 구분이 없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나의 위격만이 존재했고, 구원 경륜사 안에 드러나는 성자의 모습은 성부 하나님의 단순한 외적 존재 양상일 뿐이라는 학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니케아 신경의 표현은 또 하나의 이단 출현 내지는 부활로 여겨졌다.

 

안티오키아 학파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우선적으로 각각 위격들이 구분되는 세 위격으로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이런 그들이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는 동일본질라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오히려 구분이라는 각각의 위격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개념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본다면, 당시 아타나시우스의 설명보다 아리우스가 말했듯이 성자가 성부 하나님보다 못한 2의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던 일종의 종속적(subordinatus)인 설명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하고, 실제로 많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노선에 있던 사람들이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하기도 하다.

 

이러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입장은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던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람들에게는 역시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개개 위격의 고유성을 강조하여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강조했던 안티오키아 학파의 생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일치성을 저해하는 삼신론(triteism)적 이론처럼 여겨지기 쉬웠다. 더더욱 아리우스의 학설로 인해 벌어졌던 니케아 공의회의 신경을 두고, 아리우스적인 사고의 연장으로까지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안티오키아 학파
실체(ousia)에 대한 이해 2실체로 이해 1실체로 이해
동일본질
(homoousion)
대한 해석
성자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지니는 하나님 성자와 성부의 구별되는 고유성을 무시하는 말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상방에 대한 오해

삼신론에 대한 가능성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했다. 단원론의 경향으로
이해하였다.
무엇을 방어하기
위한 이론들인가?
하나이신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주장
삼위일체이신 세 위격의 하나님의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한 주장

 

 

 

. 나가는 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세 위격을 통하여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영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충만함과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밀함에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고 있는 터라,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논의된 삼위일체의 내용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내가 이해한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하나님이고, 아들이 하나님이고, 성령이 하나님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세 분의 신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최고의 인격적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시며,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이고, 만물을 통합시킬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모든 다양성의 근원이 되신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아주 많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늘만큼 땅 만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나타난 ‘동일본질’과 ‘동일흠숭’(o`motimi,a) 개념에 대해서 ―바실리우스의 성령론을 중심으로― 정승익, 가톨릭신학과사상 제68호, 2011.12, 129-172 (44 pages) 내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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