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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스위스의 종교개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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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대적 배경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서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 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박해 받던 신앙인들이 모여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스위스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원천적으로 부족하였고 또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적인 특색은 물물 교역조차 힘든 나라였기에 매우 가난하였다. 따라서 가난을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다.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중세 서임권 논쟁이후 교황의 권력에 맞서는 세속적 국왕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진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전쟁들이 끊이지 않았다. 교황과 프랑스 왕의 갈등과 영토, 권력 확장을 위한 전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에 용병으로 팔려감으로 상호 전투를 겪는 민족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별히 찰스 5세와 프란시스 1세 사이의 전투에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었다.

 

16세기 츠빙글리가 살았던 스위스는 용병제도를 통하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거기서 수입을 얻은 것으로 살았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설 수 있는가 하는 개인적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가톨릭 사상과 대립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는 조국의 젊은이들이 각기 프랑스 왕과 교황을 위하여 용병으로 전투에 군종사제로 동참하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전장에서 느꼈던 비애와 교회의 위선과 모순을 바탕으로 종교개혁을 본격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사회개혁 보다는 개인적 차원을 더 중시하고 시작되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시작부터 용병제도와 연관된 구조적 사회개혁과 맞물려 있었다. 이처럼 용병제도는 츠빙글리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가져오게 했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준 사회문제이자 상황이었기 때문에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파악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주목하여야 할 단서가 된다.

 

 

2.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전개 과정

 

츠빙글리는 본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서 평화주의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으로 용병제를 반대하면서, 스위스 연방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는 상황 윤리적 차원에서 용병제 폐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도록 함으로써 초기에 그가 지녔던 에라스무스적인 원칙주의적 평화주의 혹은 평화 절대주의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츠빙글리가 평화를 지향하던 기본 입장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츠빙글리의 견해를 다음의 인용문에서 읽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전쟁의 폭력을 우리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대상을 향해서 정의롭게 사용한다면, 또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반 법질서를 따를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한 외국 군주의 종이 된다면, 그리고 죄 없는 나라를 약탈하고 점령하고 황폐화시킨다면 당신의 주장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돈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될 지도자들, 곧 교황과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한편 츠빙글리는 용병제도에 대하여서도 강력하게 비판한다. 츠빙글리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재정적, 도덕적 종속구조 때문에 용병에 참가하고 연금을 받기 위하여 지배층 사람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인식하며 용병제도에 대하여 고쳐 나가도록 노력하였다. 츠빙글리는 용병제를 옹호하고 유지시킨 교회 지도부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집단적 책임의식이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용병제도 자체를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던 다수의 책임의식부재와 이 과정에서 생겨진 신흥귀족과 교회 지도부의 소수 이익집단이 축적되어지는 부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러한 체제를 용인하고, 지속시켰다고 보는 것이 츠빙글리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었다.

 

츠빙글리가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도입했던 방법은 용병제의 모순에 대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용병 중개업과 연금 수령으로 이득을 챙기던 집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그 책임을 물었으며, 직접적인 당사자들이자, 희생자들인 젊은이들에게는 용병제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그 문제성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적 문제를 취리히 시의회를 통하여 단계적이며, 정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힘썼다. 용병제도의 모순과 교회의 부패한 연결고리를 비판하던 츠빙글리는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중세기 당시 강조되었던 사순절의 금식 규정을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규례와 율법준수의 문제성과 교회의 허상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 개혁적 성향을 담은 츠빙글리의 비판적 설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금식 규례에 대한 것이었다.

 

츠빙글리가 본격적으로 취리히 그로스뮌스터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행하였던 강해설교와 이와 같은 정치적

사안이 담겨있던 비판적 설교가 취리히 시의회에 영향을 입히게 되었고, 이러한 까닭에 15221월부터 용병제의 부분적 폐지가 실행되었다. 중세기의 가장 중요한 교회적 관습과 신앙적 규례가운데 한 가지는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금식 규정이었다. 이러한 규정을 어기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취리히의 소시지 사건이었다. 츠빙글리의 취리히 종교개혁은 바로 금식규례를 어긴 이 사건으로부터 공식화되어갔다. 문제의 발단은 1522년 사순절 첫 주일인 39일 저녁에 츠빙글리가 배석한 가운데 그를 포함하여 12명의 사람들이 취리히의 출판업자인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Christopher Froschauer1490-1564)의 집에 모여 소시지를 먹었던 사건이었다. 츠빙글리는 그 자리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소시지를 먹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프로샤우어가 식탁에 소시지를 대접한 것은 금식기간 중에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교회가 정한 예외 규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츠빙글리 설교의 핵심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심판을 두려워하던 중세기적인 분위기와 율법으로부터 종속되는 구조로부터 벗어나 복음에 의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사순절일지라도 사람들이 몸에 필요한 육식을 먹고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규례를 어기는 것보다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세우며 그 살을 취하여 이득을 보고 있는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죄는 금식 규정을 어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죄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을 옹호하면서 츠빙글리는 그로스뮌스터 교회 강단에서 1522323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금식규례문제에 대하여 설교하였고, 1522년 부활절 직후인 416일 이 설교를 인쇄하여 출판하였다. 그 목적은 첫째, 츠빙글리의 친구들을 주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둘째, 교회의 규정 때문에 동요하는 사람들을 진정하게 하며, 셋째, 자신의 종교개혁적 주제들을 공개적인 방식으로 발표하기 위함이었다.

 

츠빙글리는 사람이 음식을 못 먹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교회가 일방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고 조건 없이 적용하는 윤리로써 음식 규정이나 금식 등 가변적일 수 있는 것을 시간과상황을 초월한 율법으로 제정한다는 것은 억지임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 소시지 사건을 발단으로 취리히 시에서는 종교개혁의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츠빙글리는 기독교적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종교 개혁적 정신에 입각하여 복음을 해석하는 역할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와 같이 프로샤우어의 자발적 식사모임에서 출발한 사적 모임은 교회의 공적 교회 갱신운동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마침내 뜻을 같이하는 많은 이들과의 연대적 행동으로 확대되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152272일 뜻을 같이하는 사제 10명과 함께 자신이 속한 콘스탄츠 주교에게 설교할 자유와 사제들의 결혼할 자유를 달라고 청원한다. 당시 스위스 사제들 중 불법적으로 결혼한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출생한 사생아로 인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청원은 거부되었지만, 취리히 시의회는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취리히 시의회가 면죄부 판매와 용병제로 부를 축적하던 이들 교회 지도층 이익집단과 이를 묵인하고 독려한 전제 군주들에 맞서 성직자들의 재산축적을 막고 도덕적 타락을 방제하기 위하여 제도적이고 정치적 장치들을 마련하려는 양자 간의 뜻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취리히 시의회는 소의원제와 대의원제로 구성되어 일반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합의 구조를 정치에 도입한 모범적 사례였다. 이러한 개혁의 과정을 통하여 츠빙글리는 죄가 개인적 차원과 내면적 성찰로만 축소되지 않게 하고, 사회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눈을 뜨게 만들었다. 마침내 츠빙글리는 이 물결을 타고 1523년 소위 ‘67개조 논제를 제 1차 취리히 토론회에서 발표한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로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6년 만에 스위스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시의회는 4차에 걸친 토론회를(1523-1524) 통해 미사제도는 인정하되 성상(聖像) 폐지론은 결정하였으며, 신자들의 성가, 오르간 음악 등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모든 예배 수단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와 관련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반대하며, 새로운 양식에 의한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취리히 시의회가 개혁을 더디게 진행하자 재세례파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자 츠빙글리는 그들과 결별하였다.

 

 

3. 성만찬 논쟁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장 격렬한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었다. 루터는 이미 1520년에 1215년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 결의하였던 화체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화체설을 반대하면서도 성만찬 요소들 즉, 떡과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의 실재의 임재개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루터는 성만찬 시에 빵과 포도주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들어있다는 공재설을 주장하는 반면에,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는 단순히 상징이라고 맞섰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찬제정의 말씀 때문이다. , “이것은 내 몸이다”(26:26, 고전 11:24). 이 말씀에 대하여 루터, 츠빙글리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1525년 여름에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이다라는 의미를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떡과 포도주 주위에 모인 회중들은 승천 이후 하늘에 앉아계신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의 현존함의 육체의 보존성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하나님이 진실로 몸이 되셨고,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아주 똑같이 실재로 떡과 포도주 안에 육체적으로 현존한다고 믿었다. 이 성만찬 논쟁으로 1525년부터 1528년까지 개혁 주도세력의 결합을 가져 올 수 없었음으로 헷센의 백작 필립은 츠빙글리를 1529101일부터 3일까지 있었던 마르부르크신앙담화에 초대하였다.

 

담화 후 104일 루터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논의한 거의 모든 점에서 합의에 이르렀지만 성만찬 이해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15개 항목 중 그리스도 이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14개 항은 합의할 수 있었으나 성만찬 이해에 있어서는 일치를 이룰 수 없었음으로 통일된 전선의 형성은 좌절되었다. 이후 츠빙글리는 민족과 정의를 수호하고자 153110112차 카펠 전투에 참여하여 사망하게 된다.

 

스위스는 용병제도의 문제성을 비판하고 시작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통하여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며 착취의 구조로 내몰아 가던 경제적 불의를 극복하였고, 구조악에 저항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으며, 다른 나라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중립성을 지킴으로써 고유한 국가적 가치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츠빙글리가 거침없이 종교개혁을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충실한 것이 개혁의 첩경이다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츠빙글리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관행들을 성경의 기준으로 바로보고 그 모순을 혁신하려 하였다.

 

 

4. 재세례파

 

재세례파의 역사는 스위스 종교개혁가인 츠빙글리로부터 시작된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해도 된다는 주장이었고,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허락된 것만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자연히 츠빙글리의 제자들은 엄격한 보수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엄격한 성경의 기준에 예외를 두기 시작하자, 젊은 제자들이 의문을 갖게 된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 비폭력주의, 국가와 교회의 결탁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자 의문제기를 한다. 종교개혁에 현실적인 사회 질서를 고려한 츠빙글리와 오직 성경에 입각한 전면적 개혁을 주장한 청년들과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결국 이 청년들에 의해 재세례파가 시작된다. 흔히 이들을 스위스형제단이라 불렀는데, 이들의 관점은 막 16:16절에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의 말씀에 있었다. 즉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 전에 자발적인 믿음의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그룹사이의 중요한 쟁점은 유아세례 문제였다. 제세례파는 세례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그러니 유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만한 지적 능력이 없기에 세례가 합당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1524년 스위스의 취리히 청년 블라우록이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다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달 말에 블라우록은 다른 80여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5251월 스위스형제단은 츠빙글리를 중심으로한 국가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이들은 루터와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추진했지만, 교황청의 권력을 시의회와 귀족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한다. 재세례파는 통일된 조직이 없이 지역과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1527년에 비교적 일치 된 신앙강령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가 나온다.

1. 세례는 유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2. 두 번 책망 받은 후에도 죄에 빠져 실족한 자들은 출교시킨다.

3. 성찬은 오직 세례 받은 교인들만을 위한 의식이다.

4. 칼은 오직 강자가 약자를 해치기 위한 것이기에 전쟁 등 폭력을 금지한다.

 

신교와 가톨릭 양쪽에게 똑같이 재세례파는 위험한 이단인 동시에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맹세와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받는다. 1529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인 독일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재세례파인에게 재판 과정 없이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칙령을 발표한다. 재세례파인들은 가톨릭과 루터파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당하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게 되는데 호프만, 얀 마티스 등이 예수님의 재림을 예고한다. 1534년 얀 마티스는 예수의 재림은 독일의 뮌스터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많은 재세례파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이 도시는 18개월간 재세례파의 지배 아래 새예루살렘을 선포한다. 그러나 전쟁은 가톨릭과 루터파에 의해 진압 당하게 된다. 진압과정에서 많은 재세례파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되며, 지도자를 처형한 후 본보기로 철망에 넣어 뮌스터 성당에 걸어둔다.

 

뮌스터 진압의 영향으로 기가 꺾인 낮은 라인 지역의 재세례파는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새로운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전에 사제였던 그는 뮌스터 봉기가 막을 내린 1536년 재세례파로 전향하였다. 이미 사제 시절부터 그는 재세례파의 핵심적 신앙고백인 가톨릭의 화체설과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부 유럽에 흩어져 살던 재세례파의 모임을 찾아다녔고 야간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평화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성인세례, 정치와 종교 분리, 비폭력주의 노선을 걸으며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웠다. 과격한 재세례파에 대해 비판적이며 온건주의로 재세례파를 대표하는 교파가 되었다.

 

 

5. 칼뱅의 종교개혁

 

칼뱅은 1509710일 프랑스 북동쪽 노용에서 태어나 1529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러 오를레앙대학에서 공부하는 중에 루터의 종교개혁사상과 고전에 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153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칼뱅은 진로를 바꾸어 신학을 공부한다. 153310월 파리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한 니콜라스 콥을 위해 총장 취임연설을 칼뱅이 작성하였는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지지하는 내용과 천주교의 부패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으로 인해 칼뱅은 수배령의 떨어져 도피하게 된다. 1534년 도피하던 중 칼뱅은 프랑스 종교개혁자 르페브르 (1523년 프랑스어로 신약성경을 번역)를 만나게 되어 천주교와 단절하고, 개혁자의 길을 걷게 된다.

 

1차 제네바 개혁(1536-1538)

 

1536년 칼뱅은 파렐(Guillaume Farel)을 만나 그의 요청으로 15369월부터 제네바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사보이 가문의 영향으로 천주교의 지배아래 있던 제네바는 민족주의 바람이 일면서 주변 도시와 정치적 동맹을 통해 사보이 가문으로 부터 독립하여 시의회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제네바는 자치 도시 국가로 성장하였지만 종교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1532년에 파렐이 제네바로 들어와서 교황청을 비판하는 등 개혁적 설교를 하였다. 1534년 시의회는 사보이 가문과 결별하고 파렐을 위시하여 종교개혁을 적극 수용하여 천주교와 완전히 단절하고 말씀중심의 예배로 개혁하였다. 1536년부터 1538년까지 파렐의 지원을 받은 칼뱅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칼뱅은 성 피에르 교회에서 바울서신을 강해함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고 1537년에 제네바 목사회에 가입하고 교회 행정에 관한 조례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다. 그리고 칼뱅은 교훈과 신앙고백을 통해 모든 시민이 바른 신앙을 배우고 고백하게 함으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였고, “오직 성경만이 믿음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임을 강조하였으며, 천주교의 공로사상, 7성례, 성자숭배사상을 비판하였다. 칼뱅의 제네바 개혁의 목표는 제네바를 신앙공동체로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서약하는 과정에서 강압적인 시도는 제네바 시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칼뱅이 제네바 시 당국과 불편한 관계를 초래한 결과, 1538년 시의회는 파렐과 칼뱅을 제네바에서 추방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사역

 

칼뱅은 제네바를 떠난 후 부쳐와 카피토의 초청을 받아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게 되었다. 1538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뱅은 성 니콜라스 교회의 담임목회사역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칼뱅은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교회음악의 중요성을 발견하여 시편 찬송 18개를 작곡하였고, 1539년 찬송을 편집하여 찬송가”(Book of Music)로 출판한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로마서 주석기도서사돌레토에 대한 반박문”, “성찬론을 집필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초판보다 세배 정도로 증보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돌레테 더 뷰르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는 칼뱅을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스트라스부르그에 보내시고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2차 제네바 개혁(1541-1564)

 

칼뱅이 떠나고 사롤레토 추기경이 제네바에 편지를 보내어 천주교로 돌아올 것을 회유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에게 이에 대한 답변서를 쓰게 하여 칼뱅이 제네바 시민을 대표해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반박문을 써 제네바 시민을 옹호하게 된다. 마침내 1541913일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와서 약 25년간 제네바시를 완벽한 개혁의 도시로 만들어 가게 되었다.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법령을 제정하였다. (1542) 장로교 제도를 확립하고 당회(장로 법원)를 통해 시의 모든 일을 논의, 관장하게 하였다. 둘째, 설교를 강조하여 말씀 중심의 삶을 권면하였다. 셋째, 철저한 교회 교육을 통해 강력한 권징을 실시했다. 반대자들이 많았으나 시의회의 강력한 지지와 장로제도를 통해 엄격하게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555년 리베르탱 일파가 일으킨 폭동이 좌절되고 두목이 처형되자, 이때부터 칼뱅은 제네바 교회 규율을 제정한다. 장로회(長老會)를 조직하여 시민들의 종교활동과 일상 생활을 철저하게 감독하게 되었다. 장로회는 덕행이 높은 세속 신자들로 구성하여, 원래는 교회의 운영을 맡게 하였다가 점차 신자들을 감독하고, 좋지 못한 일을 한자는 성찬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시당국에 보고해서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였다. 칼뱅의 방침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한 것 중에는 세례식 때 웃으면 구류 3, 설교 중 졸면 구류. 노동자가 아침 식사 때 파이를 먹으면, 3일간 물과 빵만 먹어야 된다. 포도주를 걸고 내기를 하면 구류. 소녀가 스케이팅을 하면 훈계와 벌금.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사람들이 춤을 추게 하면 추방. 칼뱅의 예정설을 이유 없이 반대하면 매질해서 추방.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인쇄업자는 달군 쇠꼬챙이로 혓바닥에 구멍을 내서 추방. 젊은 청년과 결혼하려 한 70세의 노파, 예배 중에 떠드는 자, 설교 중에 웃는 자, 칼뱅을 풍자해서 노래를 부르는 자, 모두 응분의 처벌 대상이었다.

 

그의 이런 독재적인 신권정치에 희생된 사람 가운데는 에스파냐 출신의 의사이면서 인문주의학자 세르베투스(Servetus, Michael/ 1511-1553.10.27)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15531027일 생 피에르 교회의 광장에 끌려 나가 불에 달군 쇠줄로 기둥에 묶여지고, “영원한 신의 아들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의 저서들과 함께 산채로 화형 당했다. 후세의 칼뱅파는 세르베투스의 처형의 날을 개혁자 칼뱅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부르고, 19031027, 그가 불에 타죽은 광장에 속죄 비를 세워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칼뱅주의의 전파

 

칼빈은 교회개혁을 계승할 인물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학교 설립 자금을 모아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비레를 비롯한 5명의 교수가 임명되었고, 베자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제네바 대학은 개혁자 교육의 산실 역학을 담당하였다. 제네바에서 시작된 엄격한 성서주의, 신의 절대적 권위와 예정된 은총, 장로들에 의한 교회정치, 깨끗한 신앙생활 등 칼뱅주의는 제네바에만 머물지 않고 유럽 각지로 퍼져갔다. 루터파에 이어 칼뱅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루터파가 주로 전파된 곳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구의 나라들 이었고, 칼뱅파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북아메리카 등으로 전파 되었다. 그 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루터파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6. 나가는 말

 

교회와 사회 전반의 관행들을 성경적 기준으로 바라보고 그 모순을 혁파하려 했던 츠빙글리와 대면하면서, '일상에서 과연 나의 말과 행동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연이어 연구한 재세례파...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사회봉사에 헌신해서 이후 많은 이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은 그들을 보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삶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고 싶었던 그들의 마음이 읽어졌다.

순교의 피마저 거부하지 않으면서 이 땅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진정한 제자도를 실천했던 아나뱁티스트! 꼭 기억해야 할 종교개혁의 유산이다!!!

 

政敎가 분리된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추구하며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평화주의자여야 한다는 아나뱁티스트츼 주장은 내 안에 심어놓아야 할 외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칼뱅... 다른 것을 말할 권리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칼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에 집중하게 되었다. 평범한 학자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칼뱅...

나처럼 조마조마한 새가슴인 것 같은 그를, 하나님은 종교개혁의 현장으로 부르셨고 '종교개혁의 완성가'로 세우셨다. 그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성경을 읽으며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보면 볼수록, 또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의 영웅적 삶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부르시어 주님의 크신 경륜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나의 온맘이 집중됨을 깨닫는다. 기대가 된다, 주님이...

 

 

참고 논문

용병제도를 통해 본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사회경제적 배경, 정미현,

(http://web.yonsei.ac.kr/ieurope/학술지/15/10-정미현15-1.pdf)

칼빈의 종교개혁의 중요성과 영향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brahamkoo&logNo=100192115708)

 

 

참고 도서

중세교회사, 유토스 L. 곤잘레스, 은성.

훌드리히 츠빙글리, 마르틴 하아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츠빙글리 저작선집I, 훌트라이히 츠빙글리,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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