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경건주의 운동

by tat tvam asi 2024. 5. 24.
반응형

 

1.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에 관한 연구를 통해, 종교개혁의 명과 암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잘못된 교리와 신학을 개혁하려던 신학자들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작된 운동이었고, 그 결과 교회는 성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발견했으며,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설교와 회중 찬송이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게 되었고 성직자 중심, 예전 중심으로 드리던 예배와 신앙 생활에 평신도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종교개혁은 한 종단의 사건이 아니라, 유럽의 질서를 바꾸고 세계 질서를 개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인사제설과 직업소명설 같은 교리 덕분에 개인이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에 한정되어 있던 유럽 사회가,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의 상업 활동에 뛰어들면서 상업 자본주의가 빠르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자국어 성경 번역으로, 각국의 언어 문화 사상으로 이어졌고 개별국가들의 정치적 독립과 연관되어 민족주의로 발전되었다. 결국 종교개혁으로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다시 경건주의를 살펴보며, 신학적인 논쟁을 넘어서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곧 믿음과 삶의 간격을 줄이는 길을 모색해 본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배경

 

1) 30년 종교전쟁

 

16,17세기는 교회의 전통이나 제도, 그리고 신학체계에서 객관주의를 지향하는 정통주의 시대로 각 교파의 교리확립과 교리 논쟁을 중요시하였다. 종교개혁 후 개혁파의 교세 확장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에 정치적 탄압으로 전쟁이 시작했다. 30년 종교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보헤미아의 프라그시에서 시작되었다. 보헤미아는 개신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다. 1612년 루돌프 2세가 죽고 그의 사촌인 페르디난디(Ferdinand of Styria: 1578-1637)가 왕이 되자 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에게 주어진 종교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폐기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개신교 귀족들이 1618523일 황제 마티아스를 대표하는 두 명의 가톨릭 섭정을 프라하의 라드카니(Hradcany) 성채의 창문 밖으로 던져 죽였다. 이로 가톨릭의 무력적 억압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30년 종교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개신교도들의 대외적 명분은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유를 회복하고 페르디난디 왕을 가톨릭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곧 보헤미아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인접 국가들의 개입으로 국제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이 전쟁은 30년 간 계속되었고 수많은 협상 끝에 16481027일 웨스트팔리아 평화협정(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됨으로 종결 되었다. 30년 종교전쟁으로 독일은 국토 대부분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질병과 가난으로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종교가 마비되면서 교회의 타락과 경건생활에 무관심하게 되어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2) 사회적 배경

 

30년 종교전쟁이 독일 국민에게 미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에 짓밟혔고, 전쟁의 결과로 경제의 파탄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져 물물교환으로 경제적 삶을 지탱하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도 문을 닫았으며 교회는 잿더미가 되었고, 곡식 창고는 바닥이 나 집없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구걸하러 몰려 다니면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질병과 기근이 나라 전체를 휩쓸면서 1500만의 인구가 600만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반해 독일 귀족들의 삶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군주와 귀족들의 삶을 모방하며 향락을 즐겼다. 또한 귀족들과 통치자들은 더 안전한 장소로 피난 정치적 공백으로 사회는 더욱 불안해졌다. 사회적 질서 파괴와 영적인 황폐화는 독일 국민들을 신앙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이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종교개혁 이후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독일 경건주의를 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3) 종교적 배경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후 100여년간 각 교파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발전시켜왔다. 각 교파는 타 교파와의 일치보다는 자신들의 신학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1600년 즈음에 사회로부터 발생한 신앙 정체성의 불확실성 곧 경건성의 위기가 불어 닥친다. 즉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형성되는 객관적인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에게 주관적 확신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신앙 정체성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고자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다. 정통주의는 바른 교리 또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는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정통 교리(Ortho-doxie)를 규명하고 지키는 것에서 정통 실천(Ortho-praxis) 또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 쪽으로 강조점을 옮긴 것이다. 교리에서 삶으로! 그들은 교리와 삶을 두고 양자택일하지 않았다. 다만 무게 중심을 삶에 두었다.

 

 

3. 독일 경건주의 운동

 

1)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은 필립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이지만 슈페너 역시 경건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요한 아른트에게 많은 양향을 받았다. 경건주의 연구에 있어 아른트가 중요한 이유는 가톨릭의 영성과 고대 영성의 경건주의가 아닌, 개혁교회 안에서 경건주의를 시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생애

 

아른트는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가 열리던 해인 15551227일 독일 루터교 목사인 야곱 아른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31030일 목사 안수를 받고 데보른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니콜리이교회(1590-1599), 마르틴교회(1599-1609), 안드레아스교회(1609-1611), 첼레에서 10년간 목회와 저술활동을 하다가 1621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른트는 전쟁이 없는 시기를 살았지만 종파적 갈등과 사람들의 가난과 질병(페스트), 기근 등의 어려움이 일반화 된 시기에 살았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 체결 후 루터교는 법적인 보호를 받았지만, 교회 내적인 신학적 갈등을 격어야 했다. 이와 같은 교파분열과 신학적 논쟁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목양보다는 교파의 입장을 변호하고 교리를 세우는데 집중하게 하였다. 아른트 역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른트는 자신의 목회의 중점을 회개에 두었다. 그는 회중들에게 참된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올바른 삶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교리적인 논문보다는 영성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의 대표작인 진정한 기독교(1605)외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기독교는 아른트가 스라운슈바이크에 있는 마르틴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1605년에 진정한 기독교1권을 출판했다. 그리고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출생하고 사망한 도시인 아이스레벤에 있는 안드레아스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진정한 기독교를 완성하였다. 아른트는 진정한 기독교를 쓰게 된 동기를 굶주림, 질병 그리고 전쟁 같은 외적인 고통과 참혹함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황폐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른트는 진정한 기독교출판동기를 4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논쟁적이고 논증적인 신학에 빠진 설교자들과 학생들의 교화를 위해서, 둘째, 무기력한 그리스도교 사상들로부터 열매 맺는 사상들로 인도하기 위해서, 셋째, 과학이나 이론에 그치지 않는 실질적인 경건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넷째, 참 믿음과 일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출판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당시에 신앙과 삶의 위기, 경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시도된 경건서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본래 진정한 기독교는 신학자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이들을 넘어 평신도들에게도 널리 읽는 그리스도교 가정의 경건서적이 되었다. 그의 주 저서인 진정한 기독교(1605-1610)17세기와 그 이후를 훨씬 넘어서까지 성서 다음에 많이 읽혀진 신앙교과서적이다. 아른트의 처음 3권의 책은 신비주의의 3단계와 상응한다. 그것들은 영혼의 정화(Purgatio)와 조명(Illuminatio) 그리고 하나님과 신비적인 합일(Unio mystica)을 말하는 것이다. 아른트는 여기에서 하나님과 합일하는 길은 신비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한 길로 제시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누구든 그리스도를 신앙을 통해 알기만 하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신비주의는 '구원의 신비주의'(Heilsmystik)가 아니라 '성화의 신비주의'(Heiligungsmystik) 혹은 '새로와짐의 신비주의'(Erneuerungsmystik)이라고 볼 수 있다.

 

진실한 기독교 서문에서 아른트는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회개를 해야한다 라고 강조하면서 씨앗의 예를 든다. "각기 다른 씨앗들이 제 열매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열매들을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새로운 삶속에 살아야 되는 것이다."

1권의 제목은 '성경에 대하여'(Liber Scripturae)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다루면서 회개와 진실한 신앙, 그리고 거룩한 삶과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른트는 참된 그리스도교는 말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 속에 있으며, 그곳에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덕성과 열매가 우러난다고 보았다. 또 회개와 신앙의 문제를 다루면서 회개는 참된 그리스도교와 거룩한 생활의 시작이요. 참된 회개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2권의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대하여'(Liber Vitae Christi)이다. 이 장은 거룩한 생활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뿐 아니라, 또한 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아른트는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형으로 보았고,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사랑, 그리고 겸손이라고 말한다.

3권은 '양심에 대하여'(Liber Conscientiae)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래서 주로 신적 내주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일치와 관계된 내용들을 다루면서 중세 신비주의자 타울러의 신학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른트는 타울러를 따르면서도 자신이 루터파라는 것을 잊지 안고, 연합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연합을 이룰 수가 없고 연합을 이루는 것은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2)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생애

 

슈페너는 1635113일 스크라스부르크 근처 알사스 지방의 라콜트슈타인에서 태어났다. 슈페너의 아버지는 아폴트슈타인의 한 공작의 재산 관리인이었고 나중에 고문이 되었다. 슈페너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담임 목사인 요아킴 스톨(Joachim Stoll, 1615-1678)이었다. 슈페너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아버지의 책장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는 성경 다음으로 애독한 책이 존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였다. 이 책을 통해 자아 성찰, 거룩함의 열정적 추구,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이웃 사람들과 구별하는 초자연적 도덕적 기준을 배우며 자랐다. 슈페너는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 있는 동안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존 콘라드 단하우어(John Conrad Dannhauer, 1603-1666)였다. 단하우어의 권유로 루터의 작품을 읽게 되었고, “구원을 단순히 하나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선물임을 배웠으며,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위치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1666년 봄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의 수석 성직자로 초빙을 받아 약 20년간 봉사하였다. 이 시기는 슈페너의 교회갱신운동이 시작된 시기이며 경건주의 사상이 확립되는 시기이다. 시 종무국의 도움으로 제도적 종교개혁을 실시했고, “경건모임1670년 슈페너의 인도로 시작되었다. 1675년 경건주의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경건한 소원을 출판하고, 루터의 신약성서주석 편찬에도 함께 참여한다. 170525일 슈페너는 70세를 일기로 베를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경건한 소원1675년 슈페너가 40세 때에 프랑크푸르트 수석 목사로 있을 때에 썼다. 당시 요한 아른트의 설교집이 출판될 때 슈페너에게 설교집을 위한 서문 청탁이 들어 왔다. 슈페너는 그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의 타락을 보고 마음에 품었던 생각을 서문에 기록하였다. 설교집은 반응이 좋았고,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그해 가을에는 서문만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경건한 소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서론과 세 개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교회 타락의 원인을 다룬다. 슈페너는 교회의 타락을 신학적 접근을 통해 원인을 찾는다.

 

첫째로 세속 정치가에 관해 죄와 방탕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만 골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슈페너는 이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교회 발전을 위해 주어진 것임에도 그들은 이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성직자들이 선한 일을 제안할 때마다 그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둘째로 성직자의 타락에 관해 당시 성직자들은 세속적 정신을 따라 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과 교만함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들의 가르침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과 증거와 인치심으로 말미암아 일깨워진 참된 믿음이 결단코 아니라 인간의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슈페너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지식을 얻어야 함을 지적한다.

 

셋째로 시민들의 결점을 부도덕과 불신앙을 지적하면서 술 취함이 죄라는 것을 강조한다. 슈페너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해 죄와 악의 일상적 모습과 합리화의 모습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일상이 되어 버린 것들, 즉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모든 것을 위험한 죄로 규정한다.

 

넷째는 권력자, 성직자, 평민들의 죄의 결과에 관해 이야기 한다. 슈페너는 유대인들의 불신에 비유해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앙이 다른 불신자들의 구원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의 결점을 숨기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의 대적들이 결점들을 바라볼 때 그 결점들이 우리의 종교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마음이 전적으로 오염된 데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결점을 제한 없이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본래 교인들이나 형식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 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실수를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진리를 향해 나가야 한다. 이런 목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모든 결점들을 부지런히 성찰해야 함을 주장한다.

 

2부는 교회 개선의 가능성을 다룬다. 슈페너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온다는 천년왕국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슈페너는 신학자 에라스무스 사르체리우스 책을 인용해 하나님의 말씀이 소홀히 취급받는 곳에서는 참된 신앙이 무너진다고 지적한다. 이 신앙이 무너지는 곳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고 또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슈페너는 오늘 우리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회복되고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아야 함을 주장하면서, 지금 우리가 이런 칭송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허물때문이라고 말한다.

 

3부는 교회 개혁을 위한 제안들이다. 슈페너는 교회 회복을 위해 6가지 개혁안을 주장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다.

둘째, 영적 제사장직의 확립과 부지런한 실행을 권고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 즉 사랑의 삶을 주문한다.

넷째, 신앙고백과 교리적 논쟁을 삼가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주목 할 것을 요구한다.

다섯째, 정통신학을 넘어 경건한 훈련에 중점을 둔 신학 연구와 목회자 직무 개혁을 주문한다.

여섯째, 강론과 교리 논쟁을 벗어나 신자들을 교화시키는 양육과 학생들의 목회 훈련을 주문하면서 설교의 목적과 설교의 준비를 제시한다.

 

 

3)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생애

 

프랑케는 1663312일 범률가인 아버지 요한네스 프랑케의 아들로 독일 북부 뤼벡에서 태어났다. 프랑케의 어머니 안나 프랑케는 뤼벡의 시의원을 거쳐 이후 시장이된 다비드 그록신의 딸이었다. 프랑케는 요한 아른트의 경건성을 추구하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태어난 직후 세례를 받고, 허약한 체질과 주변 환경 때문에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과 킨데스 바인넨의 설교를 좋아하는 프랑케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16세에 이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해 히브리어와 논리학, 형이상학을 배웠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학문의 목적을 명예와 학문적 성과에 두었다. 1679년 외삼촌 안톤 그록신의 요청으로 키엘대학으로가 코르트 홀트 박사의 집에 기숙하며 철학, 논쟁학, 형이상학과 윤리학, 라틴어에 열중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면으로 신학, 교의학, 주석학, 변증법과 설교법까지 배운다. 그러나 그는 영적 공허함에 빠져 갈등하다가 자신의 신학이 죽은 신학임을 인지하게 된다. 1685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히브리어 문법의로 석사를 마치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근동언어를 강의하며 언어성경연구회를 조직 활동한다. 슈페너가 드레스덴의 수석 궁정목사로 오게 되었고 프랑케와 슈페너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슈페너는 프랑케에게 성경을 순수한 역사적차원의 연구가 아닌, 신앙의 각성을 위한 말씀으로 읽을 것, 즉 개인적 신앙교화에 역점을 둘 것을 충고한다. 프랑케는 이를 수용하여 삶과 연관된 실존적 해석과 정적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도 시작하였다. 1687년 외삼촌 안톤 그록신의 도움으로 뤼네부르크로가 성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프랑케는 이곳서 설교요청을 받고 준비 중 자신이 교인들에게 바라는 믿음을 갖지 못함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본 결과 아직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함을 발견한다. 프랑케는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의 24년 간의 삶은 잎만 무성하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쓸모 없는 나무와 같은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의 삶은 세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세상이 나를 사랑하고 나 역시 세상을 사랑하면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경건한 자들에게 경건한 체했고, 세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세상적이 되었고,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프랑케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 회개 그리고 은혜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에게 회개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데,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회개를 위한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는 중생에로의 준비과정으로서 율법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정통 루터파의 <칭의>사상과 경건주의의 <중생>의 사상을 연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중생한 자의 성장을 강조하여 완전을 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역설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스페너와 달리 프랑케는 교육을 강조하였고 개개인의 변화를 통한 세계의 변화를 기대하였다. 프랑케는 [기독교교육에 관한 간결한 논문]에서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한 교육은 신앙심과 지혜를 겸비해야 하며, 경건, 기도, 성경공부, 그리고 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모든 학문과 지식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이 그 기초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어리석 것이다." 프랑케의 그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케에 의하면, 가난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이 있는 나라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내리게 된다. 프랑케의 교육방식은 가정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본 불행과 타락을 종종 가정에서의 기독교교육의 부재 때문으로 보았다. 또한 프랑케가 전통적인 강의방식을 유지했지만, 그는 각 아동이 스스로 관찰하고 추리하고 생각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성경은 모든 측면에서 그의 교육과정의 핵심이었다. 프랑케는 성경의 진리들을 학생들의 양심과 가슴에 적용해 주었다. 프랑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요한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도들,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아교도가 있었다. 17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할레 경건주의의 대부로 명성을 떨치며 활동한다.

 

니고데모: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

 

프랑케는 참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믿는 자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의 원인과 양태를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 8장으로 구성된 본론, 마치는 기도, 프랑케 자신의 회심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1장에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정의하면서 두려움이란 자연적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앙적 측면에서 보여 지는 인간의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2장은 인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에 관해 내적인 원인을 불신앙, 세상을 사랑함, 육신의 정욕과 허용을 극복 할 수 있는 참된 자기부정의 결핍이라고 한다. 그리고 외적인 원인은 신앙의 양심을 억압하는 지배자들의 독재이란 이름으로 누명을 씌우는 신학자, 목회자들, 회심하지 못하고 직업적으로 직책에 오른 설교자와 목회자들, 인간의 부풀려진 명성 등이라고 지적한다.

 

3장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 하는 징표와 영향력에 관해 말한다. “참된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십자가를 통해 그러한 고백을 확증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같은 인간의 두려움의 결과는 불신앙의 딸이자 위선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4장은 인간의 두려움이 초래한 폐해에 관해 인간의 두려움은 바른 신앙의 회심에 이르지 못하게 함을 지적한다.

 

5장에는 인간의 두려움의 변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는 그리스도인 됨, 즉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변명입니다.

 

6장은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 신앙의 기쁨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해 말한다.

신앙적 자기 기만, 참 회개를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신앙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세상의 가치에 얽매인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부정해야 함을 말한다.

하늘의 영원한 것을 생각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극복 할 수 있다.

교회사에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을 그리며, 성령을 간구하는 것이다.

 

7장은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지혜의 사려 깊음에 관해 언급하며, 믿음의 참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한 신앙과 공허한 망상을 구별해야 한다. 참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앙의 즐거움은 참된 즐거움이 아니다.

 

8장은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한 기쁨이 주는 가치에 관해 기술합니다. 우리는 참된 믿음을 통해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길 힘은 믿음과 기쁨 안에서 무수한 신앙의 능력을 알게 되고 새로운 각성, 즉 성경 전체를 보는 눈과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프랑케의 마치는 기도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빛과 생명의 능력, 구원이 되신 주님이고, 이런 분을 친구로 삼는다면 두려워 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4. 진젠돌프 (Nikolaus Ludwing von Zinzendorf, 1700-60)

 

생애

 

그는 1700526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작센의 각료였던 아버지는 그가 6주밖에 안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외조모에게 가서 지냈다. 외조모는 경건한 신자로서 경건주의 운동에 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스페너의 친구였고 열정적인 경건주의자였다. 그녀의 좌우명은 "기도하고 믿고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손짓하실 때 십자가도 고된 일도 피하지 말라"였다. 외조모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 진젠돌프는 신앙적 감화를 많이 받았다. 진젠도르프는 어릴 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그린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그 그림 밑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그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지배되었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야 된다는 소명감에 불타게 되었다.

 

10세 때 그는 할레에 있는 프랑케 문법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다른 다섯명의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인류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과 유트레히트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후 그의 할머니로부터 베르델스돌프의 사유지를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어릴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현실 앞에서 방황과 갈등을 하던 그에게 크리스천 데이비드라는 목수가 찾아와 보헤미아 형제들의 신앙의 도피처를 구한다. 그는 이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자신의 영지에 와 살도록 허가해 주게 된다. 그리하여 1727년에는 수백 명이 영지로 도피해 온다. 이들은 베텔스도르프 위쪽에 있는 후트 산기슭에 거주지를 건축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헤른후트(Herrnhut)의 시작이다. ‘주님의 보호란 이름의 이 주거지에 모라비안 신앙 외에 루터파를 비롯한 다른 신앙 경향을 가진 사람들도 모이게 되었다. 헤른후트 형제단은 여러 가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교회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동체로 정착해갔다. 예수의 보혈과 상처에 집착하며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고 내부적이며 외부적인 갈등과 대립도 있었지만, 이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루터파의 신앙고백 위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로 전하려는 평신도 사역으로 발전해갔다.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구체적인 형태는 교회사적으로 헤른후트 형제단에서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영국과 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한 세계 각처로 이 공동체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러 갔다. 특히 영국에서 헤른후트 형제단은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가 되는 존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730년대부터 계몽주의가 유럽의 정신과 사상계를 주도하면서 경건주의가 뒤로 밀려난 상황에서 진젠도르프의 공동체는 단순하고 겸손한 기독교적 삶을 이어갔다.

 

순수한 유유

 

그는 어린이들이 '회심'하는 것을 보려고 그의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설교했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는 그들의 구원문제에 관하여 한사람씩 그들과 이야기했다. 그에 의하면, 부모들은 자기들의 특유한 종교적 체험 형태가 자기 자녀들 속에서 동일하게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그는 어린이들을 극히 존중하였다. 그는 참으로 어린이들을 사랑하였다. 어린이들도 그를 사랑했다. 신학사상에 있어서, 그는 루터교 신학의 본질적인 것들을 고수했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율법과 복음의 구별, 이신칭의, 삶의 성화,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독특하게 강조한 것은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였다. 그는 체험적 신앙을 옹호했으나 완전주의를 거절했다.

 

그들이 많은 찬송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와 땀을 서술하는 가사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철저하였고, 진리에 대한 신념은 견고하였다. 진젠돌프는 22세 때 <순수한 유유>라고 부른 교리문답서를 만들었다. 그것은 78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으며, 자녀교육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성(head)이 가슴(heart)을 앞지르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 의하면, 외부로부터의 강제는 결코 신앙심을 갖게할 수 없다. 진젠돌프는 성경에서 매년 365구절을 주의깊게 선택했다. (때로는 이것들을 소책자로 인쇄했다). 매일 이 구절들 가운데 하나가 제비로 뽑혔다. 이 한 구절을 중심으로 독서하고 담화하고 노래했다. 그것은 그날 하루의 지침이요 주제요 중심이었다.

 

 

참고자료

 

Jhon Arndt, True Christianity, tras. and eds., A. W. Boehm and Charles F. Schaeffer(Philadelphia: Smith, English & Co., 1868), xxxi., 김영선, 경건주의 이해, 대한 기독교서회 

 

Erasmus Sarcerius, Von mitteln und wegen, die rechte und wahre Religion. zu befórdern und zu erhalten (1554). 필립 슈페너, 경건한 열망, 모수환 역, (경기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A. H. Francke, 이성덕 옮김, 니고데모: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관하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반응형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상황  (0) 2024.05.24
스위스의 종교개혁  (0) 2024.05.24
존 웨슬리의 종교개혁  (1) 2024.05.24
미국의 1,2차 대각성 운동  (0) 2024.05.24
세계교회협의회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  (1) 202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