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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존 웨슬리의 종교개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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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어린 시절

 

존 웨슬리는 1703628일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 웨슬리의 19명의 자녀 중 15번째 자녀로 엡웟(Epworth)에서 태어났다.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은 끼친 것은 수산나 웨슬리였다. 당시 대부분 가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슬리의 부모도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켰다. 수산나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산나는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아이들 한 명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하였다. 웨슬리가 5살이 되던 170929일 사제관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웨슬리는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붕이 무너지려는 순간에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하였다. 웨슬리가 구조되는 모습을 보고 수산나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산나는 스가랴 3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웨슬리의 옥스퍼드 재학 시절

 

1726년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컬리지에 입학하였다. 찰스는 형 존과 어머니 수산나의 조언과 격려로 매주일 성찬을 받으며 매일 규칙적으로 개인 기도를 하면서 경건생활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두 명의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작은 모임을 만들었는데 성경 공부와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72911월 말 경에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왔고,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는 동시에 신앙생활의 증진을 돕게 되었다. 웨슬리도 찰스가 시작한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신성회(Holy Club)의 시작이었다.

 

신성회는 매일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기도하고, 시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읽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보았던 책은 주로 초대 교회와 중세기 성자들의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시대와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성공회에서 1년에 3번 정도 성찬을 받아도 된다고 권고한 것과 달리, 신성회 회원들은 말씀예전과 성찬예전이 균형을 이룬 초대교회 예전에 따라 매주일 성찬을 받았다. 17308월부터 신성회 회원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시작하였다. 윌리엄 모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일은 후에 신성회의 사역 중 중요한 일로 정착하였다. 당시 감옥은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건이 극도로 나빴으며, 신성회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는 한편 심지어 빚을 못 갚아 들어온 죄수들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석방시키기까지 했다.

 

1732년 웨슬리는 신성회 회원들이 사용할 매일 기도집을 썼는데, 이 기도집에는 주일부터 월요일까지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실려 있으며 "매일의 자기성찰 일람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성회는 웨슬리가 정한 규칙과 기도집을 엄격히 지켰다. 이렇게 신성회는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경건 생활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많은 질시와 조소를 당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바로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이름이었다. 웨슬리 에 따르면 이 호칭은 네로 황제 시절 로마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의사 집단에서 유래하였다. 그 당시 의사들은 규칙적인 식이 요법을 통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메도디스트란 바로 이 의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같은 옥스퍼드에서의 신성회 활동은 웨슬리가 회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감리교회 운동의 시초였다.

 

조지아 선교

 

웨슬리는 1735년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미국 조지아 서배너(Savannah)에 선교하기로 결정한다.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컬리지의 존 버튼 사제가 웨슬리에게 조지아로 선교를 권유하였다. 웨슬리는 고민하다가 고향 엡웟으로 가서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수산나 웨슬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내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다면 다 그렇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구나." 웨슬리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시몬즈(Simmonds) 호에 올랐다. 이때 같이 배에 탄 이들 중에는 독일 헤른후트 노동공동체에서 온 개신교 신도들인 모라비안 26명도 있었다. 장장 4개월 23일 간 계속된 항해에서 시몬즈 호는 몇 번이나 전복될 뻔하였다. 바닷물이 객실 창을 부수고 돛대까지 부러뜨릴 정도였다. 위기의 순간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였고, 침착한 모라비안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고, 이들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웨슬리가 조지아에 도착하였을 때 아직 전임인 사무엘 퀸시가 사제관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쓰는 막사에 함께 기거하였다. 웨슬리는 독일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였고, 덕분에 모라비아 교도들을 매일 보며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인 스팡겐베르크(August Spangenberg)와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팡겐베르크와 웨슬리가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당신 안에 증인을 갖고 있는가?",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는가?“ 웨슬리는 느닷없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었고, 웨슬리는 이 날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일기에 그저 "의미 없이 내뱉었다"라고 적었다. 웨슬리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스팡겐베르크와 모라비안들이 보였던 믿음의 확신에 감탄하였다.

 

서배너에서 시작한 웨슬리의 목회는 난항을 겪었다. 이유는 웨슬리의 보수적인 목회 스타일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비국교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세례 시에는 물에 세 번 잠기게 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웨슬리는 비국교도를 엄격히 차별하여 비국교도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 집례를 거부하였다. 또 웨슬리는 조지아로 떠나면서 인디언이야말로 죄에 때묻지 않은 창조 본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인디언 선교에 큰 꿈을 품었었지만 인디언 선교도 쉽지 않았다. 여기에 연애 사건도 큰 문제가 되었다. 독신이었던 웨슬리에게 조지아 주지사 오글소프는 치안장관 토마스 커스턴의 조카 소피아 홉키를 1736년에 소개시켜 준다. 소피아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지만 아름답고 신앙적으로 신실한 여자였다. 웨슬리와 소피아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경건생활과 사랑 사이에 갈등하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고민하는 사이 소피아는 결국 312일 윌리엄슨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피아가 결혼하자 웨슬리의 마음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웨슬리는 87일 성찬을 받으러 나온 소피아와 남편 윌리엄슨에게 성찬 분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공개적인 굴욕을 주었다. 소피아에게 성찬 분급을 거부한 일로 웨슬리는 10개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에 웨슬리는 서배너에서의 선교가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하고 122일 도망치듯이 조지아를 떠났다. 결국 19개월에 걸친 조지아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웨슬리는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때의 심경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올더스게이트 회심

 

웨슬리는 173821일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났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성경으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1738524, 이름 아침 존 웨슬리는 성경을 묵상하는 중에 성경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틀턴 코트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회에 참여하였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845,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깉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루터교 경건주의라 할 수 있는 모라비안과의 접촉이 웨슬리로 하여금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는 주제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에게 루터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 사건이었고 이를 기점으로 웨슬리는 루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후 약 한달 후 옥스포드의 마리아 교회(St. Mary)에서의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웨슬리는 루터를 만군의 여호와의 전사라는 말로 극찬할 정도였다.

 

루터를 비판한 웨슬리

 

루터를 향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옥외집회를 막 시작하던 173944일 저녁, 이전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날 저녁 웨슬리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5:16 참조)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정기 소그룹 모임을 계획하면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만일 야고보 서신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루터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지만 않는다면 그 누가 이 모임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총의 수단임을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웨슬리에게 엿보이기 시작한 이 같은 반 루터적 성향은 약 2년 후 1741615일자 일기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날 웨슬리는 런던을 향하던 중에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었는데, 이때 웨슬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진술하였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동안 그가 루터를 과대평가한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이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739년 후반부터 174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그 동안 웨슬리와 모라비안 사이에 지켜오던 밀월 관계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 온 시기이다. 1739년 웨슬리가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한 옥외집회에 전념할 무렵 런던의 페터레인에서의 모임(신도회)은 모라비안 목사 필립 묄터의 등장으로 정숙주의’(quietism)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웨슬리가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은 정숙주의이다. 웨슬리가 제기한 문제는 1. 신비주의 색채 2. 율법폐기론이다. 이 둘은 하나님께서 공통적으로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로 허락하신 은총의 수단을 무력화 시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주장이 루터에 기초해 있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모라비안의 가르침에 매우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피력한 설교 은총의 수단이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 비판을 쏟아낸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다.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보다 성숙한 판단은 이로부터 약 40년 후 웨슬리가 사망하기 약 4년 전쯤인 1787년 경에 작성한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해’(On God’s Vinyard)라는 설교에서 나타난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에 관해서라면 그 누가 마르틴 루터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화에 관해서 누가 그 사람만큼 무지하고 개념적 혼돈에 잘 빠져들 수 있겠는가?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고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그가 성화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발언을 통해 웨슬리의 루터 비판은 보다 체계화 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에는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모라비안의 정숙주의라는 거울로 들여다 봄으로써 갈라디아서 자체를 다소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루터의 문제가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웨슬리의 이런 관점은 루터를 넘어 종교개혁 전반에까지 확장되어 나간다.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가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1787년 같은 해에 기록된 설교 지난 시대’(Of Former Times)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진술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많은 나라에서 신앙관에 관한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다른 몇몇 나라에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 그 자신은 임종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이름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나는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부름받았기를 바랬다.) 자신들의 신앙관과 예배에 대한 개혁은 일구어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내적 성품과 삶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을 향해 믿음과 예배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제공했지만 이에 따른 합당한 삶의 열매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즉 올바른 믿음을 가르쳤지만 그에 따른 삶의 변화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왜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지를 루터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즉 그의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 때문에 이런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웨슬리의 루터를 향한 이 같은 비판은 루터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평가할 만하다. 루터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들은 일반적으로 칭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서 성화의 자리가 없다. 성화는 칭의라는 사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 당시의 개신교 교회들이 대다수 루터의 이 같은 견해에 젖어 있을 때 웨슬리가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또 한번 개혁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평가할 만하다.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단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천되었다. 초기에는 루터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난 직후 있었던 1738524일의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는 루터의 광팬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삶과 사상에 몰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741년에는 이런 태도가 돌변하여 비판하였다. 웨슬리의 말년에 해당하는 1787년 경에 기록된 웨슬리의 저작물들을 검토해 보면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이런 이분법적 질문을 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루터를 비판적으로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루터에게서 칭의에 함몰되어 성화라는 중요한 주제를 간과하는 문제를 발견했고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두 축을 복원했던 것이다.

 

이 같은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종교개혁과 관련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가? 그렇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 전통과 마찬가지로 이신칭의,’ 곧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공로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리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전통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다. 즉 웨슬리가 루터를 향한 이해를 성숙시켰듯이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을 개혁하는길로 나아갈 책무가 있다. 그 방향은 명백하다. 칭의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머물지 말고 성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삶이 배제된 믿음만이 아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칼빈주의를 신봉하였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규모 그룹을 조직하여 소그룹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성례전과 전례를 중요시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와 개인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로 남았고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인식하였으며,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성공회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웨슬리 사후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성결교, 오순절 운동, 구세군 등이 나타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17913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참고도서

 

김동환, 목사 웨슬리에게 목회를 묻다 (서울: KMC,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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