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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미국의 1,2차 대각성 운동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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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 1세대들의 뜨겁고 간절했던 신앙이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그들의 2-3 세대 청교도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들에 비하여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었다. 신앙의 순수성을 외치며 신대륙에 들어온 청교도들은 100년의 역사가 지나면서 교회가 혼탁해지고, 그 순수성을 잃어가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살리라는 말을 증명하고 있듯이 미국도 영적부흥운동인 ‘ 1·2차대각성운동을 통해 강대국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시작해서 중반까지 지속된 미국의 1차대각성운동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혼합된 공동체가 신앙공동체로 하나 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합중국을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1776년 독립선언을 한 신생국 미국을 통해 당신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오늘 이 한국 땅에도 부흥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미국의 1,2차 대각성 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1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은 데오돌 프렐링후이젠과 길버트 테넌트로부터 시작되어, 조난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에 의하여 일어난다. 1차 대각성 운동은 혼합된 공동체가 신앙공동체로 거듭나게 되고, 미국 건국의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게 되었다.

 

1) 1차 대각성운동의 전개 과정

 

미국 중부지역의 뉴저지주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부흥운동은 화란 개혁교회의 데오돌 프렐링후이젠(Theodore Frelinghuysen)과 장로교에 부흥의 물길을 트게 한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렐링후이젠은 회중들의 미온적인 신앙을 공격하며, 자주 회중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그의 직설적인 설교가 결실하면서 1726년경부터 능력의 설교자가 되어, 회개의 필요성, 헌신적인 생활, 그리고 평신도들의 활동을 강조하였고 이것이 효시가 되어 미국 전역에 부흥의 물결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테넌트는 Log College에서 다른 15명의 청년들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목회를 위한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테넌트 목사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어, 윤리 그리고 신학의 훈련을 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이 불붙은 복음주의자로서 보냄을 받도록 복음주의적 열정을 주입시켰다. “길버트 테넌트를 비롯한 Log College출신들은 모두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프렐링후이젠의 도움으로 복음적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특히 회심하지 않는 목사직의 위험성이란 설교를 통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2) 조난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뉴잉글랜드 지역에서의 부흥운동은 에드워즈에 의하여 일어난다. 예일 대학교에서 성경중심적인 하나님 주권사상을 배운 에드워즈는 잠시 목회와 교수생활을 거쳐 1727년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목회하던 매사추세츠 노스햄턴 교회에 동사목사로 부임한다. 1729년 외조부가 죽고 그가 담임목사가 된다. 에드워즈는 노스햄턴 교회 성도들이 신앙적인 일에 무감각하고 세상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특히 술집을 드나드는 청년들의 방탕함은 에드워즈의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청교도들은 한 가정 당 거의 10명 정도의 자녀를 가졌다. 인구가 급증하자 농작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결국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결혼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들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전통의 조부모와 부모를 가진 믿음의 후손들이었지만 빠르게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에드워즈는 17346월 노스햄턴 마을 한 청년의 장례식장에서 청년들에게 시편 905-6절 말씀을 인용해 일침을 놓는 설교를 했다. 마을 청년들에게 방탕함과 일시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비판하며 무덤을 가리켜 다음 주에는 과연 누가 이 자리에 누워 있을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에드워즈의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와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방탕했던 청년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늘 술집에 모이던 청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가정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으며, 기도하는 신앙의 교제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 청년들의 모임이 결국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청년들에게서 시작된 영적 부흥에 대한 열정은 부모 세대에게로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로 퍼졌다. 온 마을이 신앙의 열기와 토론으로 가득 찼다. 부흥운동은 노스햄턴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근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저주받은 엄청난 양의 물과 같습니다. 그 물의 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그 높이는 높아져만 갑니다. 언젠가 이 물살을 내어보낼 때가 되면 그 속도와 파괴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살은 지금 잠시 갇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저지르는 죄악들은 더 많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갇혀 있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수문을 밀어내는 엄청난 압력을 막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에드워즈의 대표적인 설교인데, 이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탄식과 울음을 터트리면서 자신의 죄를 소리쳐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즈의 죄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구원의 메시지는 회심과 커다란 영적 각성을 가져오는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3)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34~35년에 걸쳐 일어난 부흥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1741년에 다시 꽃피었다. 영국의 순회설교가 조지 휫필드의 미국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휫필드는 영국에서 요한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운동을 통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킨 부흥사였다. 당시 휫필드는 노스햄턴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조지 휫필드는 불우한 청년 시절을 보냈지만 옥스퍼드대학교에 다니면서 Holy Club활동에 참여하고, 요한 웨슬리와 함께 하나님 앞에 일생을 드리기로 결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지역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아니라 복음을 듣기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기로 결심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영국뿐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휫필드는 교파를 따지지 않고 어느 곳이든 자신을 초청하는 교회나 모임이 있으면 방문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야외설교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집회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몇 시간씩 말을 타고 달려와 참여하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였다. 그 집회에서는 어김없이 뜨거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영국 부흥운동의 창시자로 활약한 휫필드는 일곱 번이나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의 지역적 대각성운동을 하나로 연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가장 관대한 정신의 목사중 하나로 퀘이트교도, 침례교도, 루터교도, 모라비아파, 장로교도, 조합교회, 화란개혁파 등 모든 교파의 사람들에 설교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두 번째 방문인 17409월에는 뉴잉글랜드에서 6주간동안의 전도 여행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가장 일반적인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0여개의 종교 협회가 조직 되었고 교회마다 성도들로 가득 찼으며, 그 후 3년 동안 뉴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뉴욕, 뉴저지,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그리고 버지니아에 있는 150여 교회가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이를 단일한 운동으로 발전시킨 것은 휫필드의 전국 순회활동이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1차대각성운동 이었다.

 

4) 1차 대각성운동의 결과

 

1차대각성운동이 미국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고, 교회들이 성장했다. 1차 대각성운동은 미국 내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를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뉴잉글랜드 교회인데 “30만 인구의 뉴잉글랜드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해인 1730년대 말 2년 동안 약 25,000명이던 교인은 약 50,000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각성운동은 다시 선교 열정, 인류애, 교파간의 협력, 교육 기관의 설립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차 대각성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미국 독립의 정신적 기초를 놓았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미국인들은 유럽의 여러 지역,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대서양을 건너와 각기 다른 역사와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차대각성운동은 각기 다른 이민공동체가 함께 경험한 최초의 전국적인 사건이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대각성운동을 통해 공통된 기억과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를 체험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각성운동 기간에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국가적 공동체에게 특별한 섭리와 소명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확신이 국가적 언약 사상으로 발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1775~1783)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3. 2차 대각성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

 

18세기 초반 일어났던 1차대각성운동 이후 미국은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을 탄생시킨 영적부흥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과 서부개척 등으로 인해 세속적인 문제에 빠져들었다. 특히 계몽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기독교에도 합리주의가 들어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안 신앙과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를 부인하는 이신론(Deism)이 일어났다. 정통적인 기독교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정도로 생각되었다. 리먼 비처가 청교도 조상들에 의해 세워진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2차 대각성 운동이 미국 서부와 동부 지역에서 각기 다른 양태로 진행되었다. 동부의 각성운동은 대학을 중심으로, 서부의 각성운동은 개척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 동부 지역의 각성운동

 

1795년 예일대 학장에 취임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손자 디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불신앙이 성행하던 예일대학에 각성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는 세속적인 이신론 사상에 물들어 있던 학생들을 보고 성경에 기반한 논쟁을 이끌었다. 신앙의 본질을 알려주는 설교를 4년 주기로 계획해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학생들이었지만 점차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면서 1802년 부흥의 물결이 예일대 캠퍼스를 휩쓸었다.당시 225명의 재학생들 중에서 약 3분의 1 가량의 학생들이 회심을 체험했으며, 이들은 후에 부흥운동의 주역들로 사용되었다.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는 뉴저지대학(프린스턴 대학의 전신), 다트머스, 윌리암스대학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것은 19세기 복음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 유능한 인적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서부 지역의 각성운동

 

서부 지역의 각성운동은 제임스 맥그레디 목사가 시작했던 케인릿지 부흥이 대표적이다. 그는 교구민들과 함께 로건 카운티의 죄인들과 전 세계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 1년간 매월 셋째 토요일에 기도와 금식의 날을 가지면서 그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 되어 1805년까지 계속 되었다. 또한 바튼 스토운은 제임스 맥그레디 목사와 함께 켄터키에서 캠프 집회를 개최 하였는데, 18018월에 케인 리치에 열린 집회에 10,000명으로부터 시작되어 25,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여 하였는데, 이것은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성령이 가장 크게 쏟아 부어진 사건이라 할 정도였다.

 

당시 새로운 땅의 개척을 위해 외딴 지역에 흩어져 살던 개척민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이들은 집회에 참석해 사람들과 만나 교제할 일을 기뻐하며 포장마차를 타고 집회장소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먼저 야영할 캠프를 치고 중앙에 강단을 세우고 집회를 가졌다. 당시 부흥회는 개척민들에게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 교제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종의 축제요, 잔치였다. 이러한 캠프집회는 주중에 시작해 4~5일 동안 지속되었고 주일에는 축제 형식의 특별집회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켄터키에서 시작한 영적부흥이 테네시, 오하이오, 조지아, 남부 캐롤라이나로 확산된 것이다. 1797년에 복음 설교가인 제임스 맥그리디에 의해 시작된 부흥 운동이 테네시, 오하이오, 조지아, 남부 캐롤라이나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동부 해안을 따라 일어난 동부의 부흥의 불길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3)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2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은 찰스 피니었다. 뉴욕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습훈련을 받던 피니는 182110월 몇 시간에 걸친 깊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여 임재 하셨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해서 울부짖었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부르짖었다.”

이런 깊은 영적 체험을 한 다음날 아침 출근한 그에게 10시로 예정된 재판 소식을 전하자 피니가 답변하기를 집사님, 저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소송을 맡게 되었기에 집사님의 소송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처럼, 피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송사를 맡은 변호사가 되었음을 고백했던 것이다. 피니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어 뛰어난 부흥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력하고 도전적인 설교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

 

피니는 부흥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결과이지만 그렇다고 부흥사가 기도만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회심을 책임져야 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는 여러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흥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흥과 회심이 일도록 새로운 수단들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수단이 바로 구도자석’(anxious bench)이었다. 구도자석은 설교단을 마주보고 회중의 맨 앞자리에 구별된 좌석으로 죄 문제로 인해 구원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는 죄인과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구도자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이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예배시간 내내 설교에 집중하면서 말씀과 훈계를 직접 듣고, 회중들의 중보기도를 받으며, 영적 긴장을 유지시켜 회심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니는 도시에서 부흥 운동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으며 부흥 운동의 새로운 방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권위 있는 교회사가인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은 피니를 가리켜 현대 부흥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피니는 어떤 측정 표준에 의해서 보아도 미국 역사에 있어서 막대하게 중요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4) 2차 대각성운동의 결과

 

1차 대각성운동이 이민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면, 2차 대각성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의로운 제국’(Righteous Empire)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개인적 구원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산돼 기독교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피니는 진정한 회심이란 선행과 함께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 진정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 고아와 장애인, 정신문제를 가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여러 특별구호기관들을 적극적으로 설립했다. 182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1인당 음주량이 현재보다 4배나 높을 정도로 음주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영적부흥의 은혜를 체험한 기독교인들이 금주(禁酒)를 권장하면서 음주율(1830~1845)이 절반으로 감소했다.

 

당시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노예폐지론이었다. 노예제도 폐지는 신생국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이 따르는 문제였다. 하지만 피니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노예제도는 죄악이며 악습이기에 피 흘리는 노예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후 오벌린대학의 총장이 된 피니는 흑인들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의 주장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부흥회에서 회심한 자들이 함께 노예폐지론자들이 되었다. 이외에도 기독교인들은 많은 기독교 대학들과 신학교를 세웠다. 야만이나 무지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2세들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일꾼 양성에 매진했다.

 

선교활동도 활성화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 국가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했다. 선교의 최우선 대상은 개척을 위해 희생당했던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국내선교에 힘쓰는 이들이 배출됐다. 대표적인 이가 사무엘 밀즈다. 밀즈와 동료 대학생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건초더미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함께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했다. 이 기도운동이 확산되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고, 주요 선교기관들이 설립되게 되었다. 사무엘 밀즈가 시작한 건초더미기도회가 미국이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2차대각성운동은 미국이 진정한 기독교 국가로 거듭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울러 미국 내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면서 특히 감리교이 대단한 성장을 맞게 하였다. 미국의 감리교는 1776년 독립전쟁 이전까지는 교파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1784년 크리스마스 대회를 통한 미국 감리교회의 조직이 뿌리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감리교는 1820년에 침례교를 앞질렀고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큰 교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리교가 순회설교자 제도를 가지고 있어 수많은 감리교도들이 직접적으로 선교현장에 뛰어들어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4. 나가는 말

 

17세가 말엽 미국기독교는 낙관주의 사회상이나 인생관과 편승되면서 미국 내 청교도 전통은 조금씩 그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교회도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1차 대각성운동이 이민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면, 2차 대각성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의로운 제국’(Righteous Empire)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개인적 구원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산돼 기독교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감리교는 1776년 독립전쟁 이전까지는 교파를 형성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순회설교자 제도를 가지고 있어 직접적으로 선교현장에 뛰어들어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한 결과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은 오늘 한국 교회에 돌파구를 열어 줄 수 있다고 본다.

 

특별히 한국교회가 오늘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장의 소리에 둔감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한국 감리교회를 더 나아가 한국교회를 다양한 현장의 소리를 대변하여 한국인의 교회로 거듭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은 옹색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오늘의 교회 중심의 시스템을 가지고는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각성운동기에 보여 주었던 의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였던 그들의 모습과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던 감리교 순회설교자 제도는 오늘 이 문제에 응답할 수 있는 좋은 단초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참고 자료>

https://ericerinenoch.wordpress.com/2011/01/10/미국의-12-대각성운동에-대한-고찰

조현진, 1차대각성운동, 미국의 변화와 부흥의 시발점, 온누리 신문 1153(2017625).

http://news.onnuri.org/the-word-and-prayer/1차대각성운동, 미국의 변화와 부흥의 시발점

조현진, 2차대각성운동 이후 기독교 국가로 거듭나다. 온누리 신문 1154(201773).

http://news.onnuri.org/the-word-and-prayer/ 2차대각성운동 이후 기독교 국가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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