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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세기와 3세기 지도자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클레멘스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필요한 믿음에 관해 토론하다 - '신학논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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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E.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세 명의 초기 교부들사이에서 있을 법한 가상의 대화를 보며 작성한 글이다. 

 

. 들어가는 말

 

영예와 업적만을 쌓으면서, 오로지 정돈되고 안정적이며 편안하고 자신만만하게 살고 싶으나, 어려움과 속상함 불안함과 두려움, 욕구와 상실감은 우리를 습격하고 광야로 내 몰기 일쑤다.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삶의 정황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어떤 빛깔을 띠어야 하는가?

 

어거스틴은 "사람이 빵을 먹듯이 낮에는 물론 밤에도 복음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에라야 비로소 자신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흡수할 수 있다. 성경 안에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영혼의 건강, 참 평안과 기쁨을 위한 영양분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허락된 삶 속에서 존재의 목적대로 살기 위하여,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이번 장에서는 초대교회 기독론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 몸 되는 말

 

1. 초대교회 기독론 배경사

 

이은재교수는 192년 카이네 디아테케(kaine diatheke) 즉 신약성경이 묶여지고 정경화된 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해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 사건은 교회마다 기독교적으로 특별히 거룩하다는 성서를 부여해 준 사건이었고, 이 사건 이후에 이 책이 그 자체로 표준적 권위를 갖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의 말씀성경이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회는구체적으로는 예수 이야기와 원시 기독교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원역사와는 단절되고, 신앙의 표준을 결정하는 자료는 성경이 갖게 된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가 소란하거나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답을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은재교수는 2세기 후반에 이 시기가 기독교 신앙고백의 역사에 중요한 시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음을 밝힌다. 이때에 소위 사도신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사도신경은 신앙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진리들을 정형화시켜 열 개의 문장으로 모아 놓은 것으로서, 정형화하는 당시 시대의 풍조를 따라 이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원시 기독교와 비교해서 볼 때에는 새롭지만 전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앙고백은 원시 기독교 시대부터 명문화된 표현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이었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이미 신앙고백 문장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구속을 찬양하는 선언과 함께 믿음으로 인한 들림과 소망이 요약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은재교수는 새롭게 나타난 사도신경이 성경의 내용과 같은 맥에서 발전된 것이지만 목적 면에서는 분명히 달랐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사도신경에서는 문맥상으로 보아서 점차 확정된 내용을 중시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찬양과 신앙적 주장보다는, 당대의 신학적 논쟁과 이단 종파들의 주장에 맞서서 바른 신앙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 역시 세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부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에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옛날 내용의 반복이지만, 이제 이것은 "가르침"으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들이 두 번째 세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약의 정형화의 문제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160년에 동방 사람인 헤게집(Hegesipp)이 처음으로 로마 감독의 명단을 만들었다. 이것을 작성할 때의 생각은 교회가 영지주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 우월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소위 "계승"의 고리로, 즉 현재 교권 체제의 감독들이 교회의 시작 때부터, 즉 그리스도 자체까지 이어지는 체계로 설명함으로써 우월감을 증명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역사적 당위성을 지닌 불가피한 것이라 말할 수 도 있지만, 이것은 독단론과 왜곡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은 셈이기도 했다. 문제 해결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고 이은재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2. 초대교회 기독론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였다. 교회의 출발과 함께,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기초로 형성되고 확장되어갔다. 사도행전 1126절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상대를 멸시하고 비방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접미사를 지니고 있어 우리말 표현으로는 쟁이”, 예수쟁이라는 조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성도들은 기꺼이 받아드리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성도들의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도가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 신앙을 위한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한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고 후대에 전달한 사도들의 역할도 절대적이다. 초대교회부터 성도들의 신앙의 초석이 되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셨다. 즉 전통적인 기독론은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셨으며,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었지만 각각 구별되었다.

 

초대교회에 등장한 이단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럼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의 출현으로 인하여, 자연히 교부들은 신학적 고민과 함께 기독론 형성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고백위에 세워지게 된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진리를 수용하여야 하며, 그가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초대교회 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3. 다른 관점

 

기독교는 분열의 역사를 걸어왔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워진 곳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사상의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항상 다른 관점때문에 진통을 겪어왔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기독교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는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른 관점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이방인들의 구원과 연관된 신학논쟁이 생긴 것이다. 단순히 생각의 차이로 남아 있기에는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결국 교회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 문제를 두고 신중하게 논의하였다. 모임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의무가 없다는 것과 구원은 율법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외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예루살렘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에게 주어진 진리를 재발견함으로서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 모임을 통해 이방인 전도가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교회를 통하여 복음의 진보가 이뤄진 것이다. 진리에 관하여, 교회가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후대에 가르쳐 준 것이다. 진리로 하나 됨이 진정한 성도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지도자들이 325년 니케아Nicea)에서 종교회의가 열린다. 이는 교회 안에 기독론 논쟁즉 다른 관점이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이루신 복음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과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그의 정체성에 대한 다른 생각이 분열에 이른 것이다. 니케야 종교회의는 예루살렘공의회의 성격과 유사한 이유로 모였지만 매우 다른 점이 있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이 교회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소집하였다. 콘스탄틴의 동기가 어떠하였던지, 교회를 심하게 분열시키며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았던 '기독론 논쟁'이 니케아 회의 이후에 종식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에서 추방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다.

 

 

4. 논쟁의 포인트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서를 해석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가? 적어도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는 성서를 가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교(cult)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권리가 없으며 성서를 사용할 권리도 없다고 믿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서는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교리를 믿는 자들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이후, 신앙의 규범은 신조(creeds)라 불리게 되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조는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기록된 니케아 신조다. 니케아 신조의 최종 형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된다.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조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졌지만 니케아 신조의 요약판이다. 그리스도인이 "신조"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의미한다(때로는 그 신조를 기록했던 두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이름을 따서 이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도 부른다). 비공식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아무 신앙고백이나 교리 진술에 "신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르지 않다. 기독교 믿음에 경계선을 형성하기 위해 기독교에는 성서의 주요한 교리적 내용이 담긴 공식적 문서가 있어야만 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는, 그들의 신앙 규범이 수정에 열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 사도로부터 그들에게 전해졌다고 확신했다. 이에 대해 클레멘스는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가 기록하고 촉진시킨 닫히고 엄격한 신앙의 진술을 신중하게 다뤘다. 클레멘스가 신중했던 것은 그가 그들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서든 발견될지 모르는 진리의 빛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의 믿음을 영역의 보호가 아닌 여정으로 간주했다. 만일 교리가 성서와 이성에 비추어 결함이 있다고 판명된다면, 그는 교리를 언제든지 수정할 것이다. 그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권위의 위계질서에서 이성에 높은 자리를 부여한다.

 

근대의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근대적 발견에 근거해서 교리를 수정하는 것과 클레멘스처럼 생각하는 것에 종종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다. 종종 근대의 근본주의자는 올바른 교리에 관해 요지부동이며 근대성에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 논의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 이런 면은 이교주의와 이단에 반대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은 이레나이우스를 선호한다. 많은 개신교인 역시 그를 좋아한다. 이레나이우스는 성서에 기반을 둔 사변적 정신과 결합된 목회적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니케아 콘스탄티코플 신경> -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2013년)[편집]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같은 분으로, 낳음과 지음 받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 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묻히셨으나, 성서의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는 한 세례를 믿습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오고 있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 나가는 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 : 13, 15

 

나의 믿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시고 나와 함께하시며 언젠가는 나를 당신께로 돌아가게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의와 영광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요, 인생의 사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고 대속하섰고 부활하셨다.

 

3:22과 갈 3:22에 기록된 '믿음'πίστεως ησοΧριστο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Jesus Christ)으로 번역해 놓았다. 헬라어로 목적어적 소유격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어적 소유격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Jesus Christ)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혜이며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와 용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또다시 죄를 짓는 인간과 끊임없이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나를 하나님이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나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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