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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저명한 5세기 사상가인 키릴로스,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관해 토론하다 - '신학논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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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E.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 들어가는 말

 

만약 예수가 인간적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신성하다면, 그는 진정 우리 모두와 같은 인간인가? 아니면 예수는 우리가 그를 보고 관계하도록 우리에게 나타난 신적 존재인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실제로 고통을 당했으며 인간처럼 고민하고 기도하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충만한 신성과 전지전능함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었던 것인가? 키릴로스와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가상 토론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 정치적 배경

 

당시에는 지도력을 가진 교회가 5교회가 있었다.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다. 이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클레멘트, 오리겐, 아리우스,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등 무수한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래는 100여명의 감독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감독들만 아니라 수도사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는 부귀명예와 권력을 소유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세력을 얻기 전까지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막강한 힘을 소유했다.

 

그러나 5세기 전반부의 콘스탄티노플은 훨씬 축소된 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북쪽으로부터 온 야만족들은 제국의 서쪽 반을 침략해서 정복했는데, 거기에는 로마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감독주교처럼)가 누구였던 간에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다.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부와 힘을 부러워했고, 그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경쟁하고 다투었다.

 

3차 범종교회의는 어떻게 보면 알렉산드리아 감독과 콘스탄티노플 감독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된 존 크리소스톰은 수 년 동안 자신의 교구를 책임성 있게 목회하는 자였다. 열정을 가졌기에 많은 친구들을 가진 만큼 적들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과의 첫 번째 충돌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의 가혹한 통치에 희생을 당한 사람들을 존이 환영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물론 감정적 대립이었다. 존크리소스톰에게 도피한 자들 가운데 이단혐의가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며 데오필루스는 29명의 감독들과 함께 존을 정죄하고 파직하려 했다.

 

하지만 존 크리소스톰은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벗어나 있는 곳의 교구까지 권력을 나타내려는 것은 다른 교구의 일을 간섭하는 것이라 하여 데오필루스가 주도하는 오크 종교회의’(Synod of the Oak)를 거부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존 크리소스톰을 정죄하고 파직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존 크리소스톰은 제국 먼 곳으로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추방 생활에 지친 존 크리소스톰은 407년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데오필루스는 존에 반대한 운동이 승리를 거두자 환희에 넘쳤다. 하지만 미처 그는 잠재하고 있는 내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존 크리소스톰에 대한 처사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자는 서방교회에 있는 로마 감독이었다. 그는 데오필루스에 반대하여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존 크리소스톰을 인준하였다. 게다가 존크리소스톰을 대신하여 아티쿠스를 인준할 것을 요청했을 때 로마감독 켈레스틴(Celestine I, 422~431)은 그를 인정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의 관계를 끊을지라도 인준하지 않았다. 데오필루스가 412년 죽자 그의 조카 시릴이 감독직에 올랐다. 하지만 시릴은 데오필스와는 다른 입장을 가진 자로서 오랫동안 추방생활을 한 자였다. 또 존 크리소스톰을 추방시켰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범죄를 용서해달라는 의미에서 그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하면서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그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면서 용서를 빌었다. 더욱이 424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아티쿠스가 세상을 떠나자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 기독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기독론 논쟁은 흔히들 단성론논쟁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니신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하나로 보고자 하는 것과 둘로 보고자 하는 양성론이 등장한다. 단성론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분의 성육신과 관련을 맺는다. 결국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나온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삼위일체론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반하여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라오디게아 감독 아폴리나리우스(390 사망)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면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다. 경건하고 고전문학, 학문적 소질, 그리고 정통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인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단지 동일본질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즉 성육신에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몸, 동물적인 혼, 이성, 이 세 가지로 구성되있다고 본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런 3중적인 견해는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빌려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간의 이성을 로고스로 대체했으며, 로고스는 예수의 몸을 도구로 사용했다. 즉 그는 인성은 신성에 포함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구별되는 신인성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 결국 있다는 주장이었다. 육체 역시 신성화된 육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의 지성이나 누스(nous)가 아니라 로고스라고 했다. 우리 사람들은 이성이나 지성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은 로고스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격상된 육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혹이 들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상태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보다 신성한 육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견해이다. 아폴리나리우스처럼 니케아 정통신앙을 지니고 있다지만 신성화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단성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지역 종교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 견해를 정죄했다. 375년까지 아폴리나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고 추종자들을 만들어갔다. 377년과 378년 로마의 지역 종교회의에서와 381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폴리나리안들, 즉 아폴리나리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을 정죄했다. 388, 397, 그리고 428년 그들을 검거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이런 칙령이 내려지기 전, 390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잘못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쳤지만 완전한 인성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결국 정통 니케아 신앙에서 아리안 신앙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완전한 인성을 부인한 것이다.

 

 

2. 네스토리우스

 

단성론 논쟁은 아폴리나리우스에게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이 논쟁이 되어 4313차 범종교회의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안디옥의 수도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386~451) 때문이다. 그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직에 오른 후 과격하게 이단자들에 반대하는 행동을 수행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게 이단자들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을 낳은 자’(데오토코스)라는 용어 대신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 [크리스토토코스]를 선호했다. ‘데오토코스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된 데오토코스가 점점 마리아의 영예를 높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은 마리아론또는 마리아 숭배론’(Mariology)을 만들고 말았다. 결국 이것은 원죄 없는 잉태설’(Immaculate Conception)로 또 성모몽소승천’(Assumption)으로 발전해 나갔다.

 

단성론 논쟁, 즉 기독론 논쟁이 하나님의 낳은 자’, 데오토코스라는 말은 마리아로부터 영원한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다는 것, 즉 성육신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인성의 연합이라고 했다.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취해져서 그녀의 자궁에서 그리스도의 신인성이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마리아의 자궁에서 육체와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가 볼 때에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그키스토코코스 즉 그리스도를 낳은 자로 부르도록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모친이라 불리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모친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교도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모친이 있다고 주장할 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이 말하기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7:3)의 말씀을 어떻게 보는가?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지 않았습니다. 피조물들은 결코 창조되지 않은 창조주를 임신할 수 없습니다. 신격의 도구인 사람을 낳았을 뿐입니다. 성령은 결코 로고스를 잉태하지 않았고 단지 거할 수 있는 성전을 동정녀로부터 잉태했습니다(요한복음 2:21).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가 되신 그분을 소생시켰습니다. 마리아 자궁에서 형성된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인성을 입으신 그분을] 가정하셨고 그 가정으로 인해 그분을 하나님이라 불렀다.

 

그는 나사렛 예수님은 로고스가 거하는 성전이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본 것이다. 두 본성은 인격적 연합이 아니라 도덕적 연합, 즉 친밀한 교제 또는 결합이라는 것이다. 서로서로 기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로고스는 사람을 단순히 신적인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의 이중성(duality)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마리아는 단순히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 데오토코스라는 용어는 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마치 물이 관을 통과하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오토코스라는 용어 대신에 크리스토토코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저해했다는 것이고 마리아에게 영예를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도사들을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429년 지역 종교회의에서 정죄를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완고한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확고하게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교회의 회원들을 출교했다. 그를 반대하는 자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자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황제에게 이 일을 청원하고 로마감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431년 에베소 범종교회의가 열리게 된다.

 

 

3. 키릴로스

 

콘스탄티노플 네스토리우스 감독은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지만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예수의 인성이었지 신성이 아니므로 마리아를 데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자 신의 어머니)’라는 용어 대신에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 낳은 자)’가 더 적절하다고 크리스마스 설교(428)와 다음해 부활절 설교(429)에서 마리아를 그렇게 언급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네스토리우스 감독의 경쟁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키릴로스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것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412년에 감독이 되었고 444년 죽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의 데오토코스에 관한 비판을 들었을 때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과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경쟁이 치열할 당시에 안디옥의 영향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폴리나리우스가 수모를 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원로 키릴로스는 안디옥의 신학자요 신학적인 경쟁자며 경쟁적이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원로인) 네스토리우스에게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에게 공통되는 것은 니케아 신앙이다. 두 사람은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라는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대답에서 그들은 갈라졌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강조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두 개의 본성은 두 인격에 -그리스도는 신적인 인격이고 예수는 인간적인 인격- 부여되어 있다고 주장한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통일성(unity, 네스토리우스도 이 신앙을 주장하였다)을 파괴하였다는 알렉산드리아의 반대자들의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네스토리우스는 신의 본성은 신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전수될 수 없으며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신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네스토리우스가 아폴라나리아니즘에 강력하게 반대한 이유이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은 예수는 인간의 본성/인격을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의 본성/인격으로 근본적으로 두 개의 본성과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키릴로스의 기독론에서는 신인 아들이 인간인 사람에게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신인 아들이 인간인 사람이 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와 말씀이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였지만 키릴로스는 예수는 말씀이라고 믿었다.” 키릴로스는 화육은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으로 합일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키릴로스는 하나의 인격은 합일 이후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을 갖게 된다고 첨가하였다. 우리들이 보는바와 같이 이 논쟁은 또 다른 이단과 공의회의 논쟁으로 끝을 맺었다. 키릴로스는 그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가 실질적으로 거부하였던 기독론인 화육-“요한복음 114)을 확실하게 주장하였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인 말장난이 아니다(물론 그런 요소도 있지만)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은 다같이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가 걸려있다고 믿었다. 다음의 문장에서 키릴로스가 얼마나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는지를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주의 육체는 생명을 주는 것이며 이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적응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 그것은 그(그리스도)와 명예로만 합일되어 그 안에 신성이 거하시는 다른 인격(예수)에 속한 것인듯 가장한다면, 만약 어떤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 말씀의 육신이기 때문에 그의 육체가 생명을 준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Anathema 11 ).

 

바꾸어 말한다면 만약 네스토리우스가 옳다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분은 한 인간(예수)이지 하나님 (그리스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네스토리우스와 키릴간의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에베소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안디옥학파 동료들이 도착하기 전에 개회되었고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견해는 정죄 받았다. 몇일 후 안디옥학파들이 도착하여 그들의 교회회의를 열고 키릴을 정죄하였다. 몇 주 후에 보다 많은 감독들이 서방제국으로부터 몰려와서 첫번째 회의에 동조하여 네스토리안들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제거되었다.

 

그러나 초점은 화육 이후에 하나의 본성(알렉사드라 학파의 견해)을 가졌었느냐? 두 개의 본성((안디옥 학파의 견해)을 가졌었느냐? 하는 문제는 계속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4세기에 와서 네번째 교회회의인 칼세돈(Chalcedon)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4. 유티케스

 

유티케스(378~454)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로서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본성만 지니셨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이단성 있는 견해를 가리켜 유티키안주의’(Eutychianism)라 부른다. 유티케스는 신인성이 혼합되어서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육체가 인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신성화되었다고 가정한다. 이런 견해로 인해 유티케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의 지역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는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에 이어 감독직에 오른 디오스쿠루스는 유티케스의 정죄를 철회하기 원하였다. 그렇게 해야 동방교회의 지도력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오스쿠루스의 기독론 역시 아폴리나리우스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을 강조하였기에 유티케스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티케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자 디오스쿠루스는 로마교회가 이 정죄를 전복시키기를 원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늘 뜻을 같이하여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교회가 알렉산드리아에 등을 지고 콘스탄티노플과 뜻을 같이한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 역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함께 그 영향력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디오스쿠루스는 449년 에베소 종교회의에 운명을 걸었다. 그리하여 그 종교회의는 플라비안 견해를 정죄하고 유티케스를 정통으로 선포한다. 며칠 후 플라비안이 세상을 떠난다. 그 이유는 종교회의에서 받았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폭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 감독 레오 1세는 플라비안을 지지하고 양성론적 기독론을 지지하는 서신을 그 종교회의에 보냈지만 읽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 1세는 그 종교회의를 강도회의’(robber’s synod)라고 명한다.”

 

유티케스(378~454)는 콘스탄티노플 장로며 수도원장이었다. 3차 범종교회의에서 시릴을 후원하여 네스토리안들을 반대한다. 그들에 반대하여 유티케스는 신인성의 연합 후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본성만 있게 되었다고 확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성육신하신 말씀만 있다는 것이다. 그분의 인간 육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육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시릴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견해를 벗어나게 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거나 변질되었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448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플라비안이 주제하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한다. 만족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그를 파직시키고 출교시켰다. 다음 해 449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쿠루스가 이끄는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유티케스를 복직시키고 448년 종교회의를 주재했던 플라비안을 도리어 파직시킨다. 그리고 한 본성이라는 교리를 알렉산드리아 교리로 받아들인다. 이런 결정에 대해 로마 감독 레오 1세를 분노시켰습니다. 그는 켈레스틴을 이어 로마 감독이 되었고, 플라비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두 본성과 한 인격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그의 누나 풀체리아가 다시 남편 마르키안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면서 단성론을 반대하는 종교회의, 451년 칼케돈 범종교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449년에 개최된 에베소 종교회의를 강도회의라 칭하면서 그곳에서의 모든 결정을 무효화시켰다. 그에 따라 유티케스는 추방당해 죽게 된다. 그가 죽자 그를 평소에 지지하던 황후 유독시아의 후원 아래 그의 사상은 시리아로 퍼져 나간다. 6세기에 이르러 그를 따르는 자를 유티키안들 또는 단성론자들이라 부르고 그들이 세운 교회를 야코바이트 교회라 부르게 된다.

 

. 책 내용 요약

 

4세기 내내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로마 제국의 교회 전체에 걸쳐 들끓었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그 논쟁은 하나님 및 인간과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만일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라면, 그는 실제로 인간일 수 없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구세주에게 죄가 있을 수 있는가? 게다가 인간은 피조물이다. 어떻게 구세주가 피조물일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구세주는 완전히 신적일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예수는 우리 나머지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의 주된 임무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죄 없음은 필연적 결론이 아니라 인간의 성취여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하나님이라면 그의 죄 없음은 필연적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존재가 세 존재일 수 있는가? 어떻게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동등할 수 있는가?

 

4세기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화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자가 그의 신성을 성부에게서 영원히 받는다는 것만은 제외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성부의 완전한 동등성을 확증했다. 그리고 성령 역시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다고 확증했다. 두 공의회는 성자가 성부 및 우리와 동등하다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즉 성자가 성부 및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로마의 레오주교(400-461)는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아누스(449년에 죽음) 주교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정통 교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이 편지는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교회사에서 <레오의 책>(Leo’s Tome)으로 알려진 그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지닌 한 인격으로 설명한다.

 

칼케돈에 있는 주교들은 성육신의 핵심에 있는 신비를 인식했다. 그들은 정의를 내려 신비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어떤 용어가 이 신비를 설명할 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절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타협을 통해 용어를 결정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한 인격을 강조했고, 안디옥 학파는 두 본성을 강조했다. 한 인격이 어떻게 두 본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결코 설명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신비다. 이를 탐구하고 더 자세히 설명하는 일은 후대 신학자들의 몫이다!!!

 

. 나가는 말

 

예수는 구세주!!!”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예수가 필요한 존재이다. 이런 나에게 이번 주제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의 두 본성에 관한 문제는 구원에 대한 나의 이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신적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에 응답하며 삶을 꾸려가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문장이 들어왔다.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적 신비... 예수가 인간이 됨으로써 예수의 특성 즉 예수의 신성이 드러난 것...”

 

이제 더 나아가 이 신비 속에서 우리가 예수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진정한 운명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우리의 내세에 대한 질문과 아울러 이 세상과 역사,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이다!

 

 

 

“에베소 범종교회의, 정치적 배경”, 라은성, 크리스쳔투데이, 2006.12.26. 참고

기독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단성론-네스토리우스’, 라은성, 2006.11.15. 참고

“기독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칼케돈 범종교회의(1)”, 라은성, 크리스찬투데이, 2007.2.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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