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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중대한 변화의 정점에 있다...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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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인류는 과거의 일이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에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제껏 없던 일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앞으로 수많은 작은 변화들을 보게 될 것이다.

 

과거라는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면 그 안에서 나오라! 그 상자는 원하면 언제든 나올 수 있다. 그 상자는 말한다. "되지 않을 거야.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 때문에 할 수 없어."

 

그 ‘◯◯ 때문에’는 항상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다. 나의 의식이 변하게 하려면, 새로운 나를 보게 하려면, 불가능을 이야기하던 내가 치유되게 하려면, 옛날의 내가 아닌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려면, 과거의 경험 들이 나의 미래를 막지 않게 하려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경계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 과거의 나를 상자에 넣어 던져버리면 된다.

 

앞으로의 나는 과거의 나와 상관이 없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가 내게 시작되었다. 내가 규정하던 나, 즉 "난 이런 사람이고 뭘 잘하고 뭐가 두렵고 어디가 약하고 내 몸은 이렇고"... 나는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 나를 상자에 넣고 버리라! 새로운 나는 하얀 백지이다. 나의 강점은 계속 놔두고 재능도 그냥 가지고 있으면서 두려움과 질병은 날려버리라! 내가 내 몸의 대사를 관장한다. 새로운 나를 쓰라! 그게 나다! 내가 쓴 것이 나의 삶이 된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힘은 나의 내면에 있다. 내면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나는 우연이 아니다. 나의 삶과 몸, 나의 감정과 두려움을 통제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는 힘을 장착하여 그래서 새로운 나를 쓰는 힘을 발휘하라! 빛에 주목하고, 백지에 쓰기 시작하라! 자신이 누구인지...

 

시냅스 차원에서 말하자면 나는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의 총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경과학에 따르면 나는 단순히 뇌라는 장치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어떤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는지, 그에 대웅하는 신경망을 얼마나 반복적으로 활성화하는지, 의지를 가지고 어떤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지에 따라 신경학적 존재인 ‘내’가 결정된다.

 

마음은 살아 있는 뉴런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산물이다. 뇌와 마음은 멈춰 있지 않다. 마음과 뇌는 ‘나’의 조종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내가 어떤 회로를 사용할 것인가로 나 자신이 결정되는 것이다. 의지와 집중력, 좋아하는 기억, 실천에 옮긴 행동, 생각, 느낌, 기술, 이런 것들이 ‘나’를 결정하는 회로를 만든다. 뇌를 통해 내가 원하는 마음을 만들고 변 화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꿈으로써 의도적으로 신경망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도 가능할까? 그리고 그 신경망 역시 내가 만든 다른 습관적인 신경망처럼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과거의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현재를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본다, 개인의 환경에 따라 신경회로가 다르게 형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 을 지각하도록 신경회로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나’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대뇌신피질에 새겨진 어떤 독특한 신경회로의 조합이다. 평생 동안 기억으 로 축적된 정보는 서로 다른 신경회로로 조합되어 오늘의 ‘나’를 만든다. 우리는 여러 가지 조합을 이루는 다양한 신경망들을 활성화하여 독특한 생각과 개념, 기억, 행동, 의견, 사실, 성격, 성향, 판단, 호불호, 기술 등 모든 것을 처리한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회로를 활성화함으로써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을 강화하고 재확인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과 장소, 사물, 시간, 사건을 연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때 장소, 사물, 시간과 같은 각각의 요소들은 특정 신경망으로 저장된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반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정보들을 조합하여 자신을 기 억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재확인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우리는 자신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된 여러 신경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과거에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한다. 이러한 기억의 과정은 우리를 좀 더 습관적인 사람 으로 만들고, 다른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완벽주의나 낙천주의 같은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이론적으로 이들은 이 성향과 관련된 신경망이 좀 더 발달해 있을 것이다. 또한 특정 성향을 반복하여 이와 관련한 신경망을 계속 활성화시켰다면 이 신경망은 더욱 강 하게 연결돼 하나의 큰 길이 된다. 결국 더 쉽고,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길을 따라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성격의 상자’다.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수많은 신경회로 중에서 마음이 사용하는 가장 일상적인 시냅스 배열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마음의 틀이 이미 존재하는 신경망의 조합으로 우리의 생각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성격의 상자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익숙한 마음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고과정에서 가장 일상적인 신경패턴만을 습관적으로만 활성화한다. 우리는 자신이라는 존 재를 신경회로로 짜 넣는다. 이렇게 신경망의 조합이 일상적인 것이 되면 이것이 곧 자신의 철학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지식을 받아들이고, 기술을 실행하는 거정 자연스런 방법이 된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기’란 다른 조합과 배열로 시냅스를 활성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상습적인 신경회로 패턴을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뇌의 활동이라면 새로운 마음의 틀을 만드는 것은 뇌의 기존 신경회로를 다시 짜는 것을 의미한다.

 

‘상자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기존의 신경회로를 활성화한다. 그러므로 ‘상자 밖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을 기초로 하여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배열로 신경회로를 만들고, 이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뇌를 단련해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일같이 반복해 굳어진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신경망의 습관적인 활성화 패턴을 바꾸고 새로운 배열의 회로를 만들 수 있다. 신경가소성의 개념을 실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경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더 연구하여 효과적으로 신경망과 마음을 바꾸자! 그리하여 ‘나’ 스스로 채운 족쇄를 풀도록 하자!

 

 

 

중대한 변화의 정점에 있다...

 

ⅰ) cognization, ‘인식화’란 영어로 ‘어떤 믿음을 세운다’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중력이 있다고 굳게 믿고 모든 일을 그에 따라 한다. 중력을 인식한 것이다. 그 믿음은 어떤 요정 이야기를 믿는 것과 다르다. 어린 시절, 잠시 믿는 것과 다르다. 내가 인식한 중력은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나는 중력을 믿는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중력 은 변함없이 나를 지구에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에너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경험하는 모든 새 에너지를 새로운 일상으로 인식할 것이다. 상승은 시작되었다. 이 상승은 역동적이어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다. 마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다. 새로운 페이지를 넘겨서 새로운 에너지를 경험하라! 내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그것을 인식하고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내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로 인해 그동안 내게 부정적인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ⅱ) 변화를 허용하라! 나 자신을 단일한 개체로서,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단일한 목표와 생각을 했었다면, 더 나은 것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난 성장을 혀용한다!"

 

"난 내면의 의식 변화를 허용하여 내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도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변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는 것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변화를 허용하라! 온전한 믿음, 허용, 변화의 허용! 오랜 습관을 깨뜨리라! 그것들은 그저 습관일 뿐이다.

 

ⅲ) 연민 어린 행동을 하라! 지금부터 모든 행동을 연민의 지점에서 시작할 것이다. 나를 바보로 만들고 나를 두 렵게 만들고 나를 죄책감 들게 만들고 나를 주눅들게 만드는 일들이 펼쳐질 때, 그 일에 영향 받지 말자! 왜냐하면 나는 연민의 사람이기 때문에, 분노와 좌절의 버튼이 끊어져서, 나에게 드는 생각은 오로지 ‘저 사람이 안 좋은 일이 있나 보다.’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속상해 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이다 억울해하지 말고 보복할 것도 없다. 소리 질러 대꾸하지도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연민에서 나와서, 예전 같았으면 상처 받았을 상황의 일도 다 용납이 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또 그들이 뭔가 하지 않아서 아니면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갖는 실망감, 이것은 그저 인간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사람이므로 연민으로 반응할 수 있다. 연민의 길에서는 아무도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순간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연민어린 행동은 연민어린 가슴에서 나온다. 모든 상황에서 말이다. 그것이 능력이다. 연민어린 행동은 나약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연민이 넘쳐흐르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약하지 않으셨다. 연민에 대해 어떻게 배웠든 연민에 대한 관념을 재설정해야 한다. 연민은 힘이다. 연민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이다. 균형 잡힌 인간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균형을 이룬 인간은 동시성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운’이라고 한다. 동시성은 바로 그 때,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일이 일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연민과 동시성은 아름다운 한 세트이다. 연민어린 행동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 연민어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변화 시킨다. 연민어린 사람에겐 부정적인 것이 없다. 연민은 위대한 힘의 지점이며, 사람들은 연민의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 연민어린 사람이 지구를 변화시킨다. 그의 삶을 통해서!!!

 

ⅳ) 영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 영적 통찰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 하나님이 편재(遍在)해 계신 것을 안다.

 

렘 24:24 "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어디든 존재하시고 모든 곳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아신다. 어떤 물리학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양자적'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현실 밖에, 하나님은 '양자적으로'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며, 우리 안에도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거룩한 사랑의 속성을 가지시고, 영원성과 편재성,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을 '양자적'이라고 표현한 물리학자들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웨슬리신학을 공부한 신학도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련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다. 거룩은 분리(separation), 즉 섞이지 않는 것이다. 거룩은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무관계성이다. 하지만 ‘사랑’은 관계요, 타인을 향한 지향성이다. 사실 거룩과 사랑은 어울릴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거룩’과 ‘사랑’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 인간과 관계를 맺으셔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관계를 맺으시고, ‘거룩’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웨슬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양인 하나님 안에서 영원부터 존재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의 영역에 행복한 영광을 비추는, 하나님의 애정이 넘치는 통치의 속성”이라고 했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애착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추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완전함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사랑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함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 1:17)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의롭게 하시는 ‘의’라는 것을 깨닫고 루터는 회심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독특한 존재를 위해 어떤 다른 존재나 실체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하나님 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계시고, 우주가 하나님 안에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더 크신 분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한한 공간을 거쳐 존재하신다.

 

렘 24:24 "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어디든 존재하시고 모든 곳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내부로부터 우주를 관통하여 우주에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동시에 우주의 운명에 관여하며 우주의 과정과 고난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우주를 관통하고(through) 넘어선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존재의 구조와 과정을 당신의 무한성 안에 다 끌어안으신다.

 

초월자 하나님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내재하시는 것이다. 초월해 계시면서 세상에 계시고, 세상에 계시면서 초월해 계시는 것이다.

어디든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 과거건, 미래건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영원한 지금’이기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아신다.

 

어디든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 과거건, 미래건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영원한 지금’이기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그의 현존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한계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팔과 강한 손과 높은 오른손’을 갖고 계신다.

 

종합해 보면, 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ⅱ) 하나님은 편재(遍在, 널리 퍼져 있음)

ⅲ) 하나님은 전지(全知, ▸사물과 현상의 모든 것을 다 앎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하신 분이다.

ⅳ) 하나님은 전능(全能, ▸어떤 일에나 못함이 없이 능함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 성)하신 분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런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배우고 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 창조주의 신성한 속성을 우리 안에 넣으셨다. 이것은 사랑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족... 화학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 연민, 자비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하러 가는 현실과 하나님을 모시는 현실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와 함께 계시다. 매순간 매시간!!!

 

영적 통찰은 연민을 작동시킨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민과 결합된 영적 통찰은 사람들의 부족함을 볼 때나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나와 같은 창조물이 아직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 통찰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영적 통찰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100% 이렇게 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래서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바로 내 안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옛 습관들이 나를 돌이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하며 단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다져지기 위해서,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실제적인 자기 단련을 통해, 인식하고 믿어야 한다.

 

변화의 허용은 기도와 자기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전의 나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연 민이 충분히 생기지 않아 화가 나고 속상하더라도 계속적인 훈련을 하라!

 

영적 통찰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빛이 될 수 있다. 내가 보는 모 든 이는 창조주의 삶을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인간이다. 이런 시각으로 사람들을 볼 때, 사랑스럽고 하나 됨을 느끼게 된다. 서로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 나약함이 아니라 힘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 님을 보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나무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나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시스템의 일부이며, 또 시스 템이 나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넘칠 수 있게 된다,

 

ⅴ) 인내가 필요하다. 인간은 모든 것을 바로 지금 원한다. 매순간 성취해야 할 것이 있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빨리 해야 한다고 재촉한다. 인간은 빨리 갖기를 원한다, 즉각적인 행동이 일어나길 바란다. 하지만 쉬는 법, 동시성을 배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인 인내는 ‘황금’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중요한 만큼 어렵다.

 

위의 다섯 가지 개념은 타고 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이 힘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룰 수 있다. 다른 이와 비교하지 말고,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모든 것을 균일화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항목들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자, 이것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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