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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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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

 

마르틴 루터는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 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1483년 11월 10일 출생하였다. 루터의 부모는 모두 엄격한 가톨릭 신앙의 소유자였고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루터는 마그데부르그(Magdeburg)와 아이젠나하(Eisennach)에서 공부하면서 중세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의 영성과 프랜시스 교단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이 곳에서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터는 1505년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 Stotternheim)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을 맞게 되고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나?”라는 영적인 유혹(Anfechtung)문제를 풀기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결과였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고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 성서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석 강의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던 중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계단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였다. 루터도 당시의 전통에 따라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던 중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생각났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루터는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즉 대가없는 용서의 복음-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로마서 1장 17절의 성경말씀에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사상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 Iustitia dei)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가장 미워했던 로마서 1:17절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되었고 바로 천국의 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루터의 서재가 비텐베르그 대학교 탑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경험을 루터는 ‘탑의 경험’ 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구원의 진리를 발견함을 통해서 당시 로마교회를 바라보면서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성경말씀과 너무나 괴리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어거스틴 신학에 입각하여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의지의 노예신세를 강조하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과 신학의 발견은 그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이 다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교 성곽예배당 정문에 계시된 95개조 항의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95개 조항이 엄청난 파장을 일어나자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하게 된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르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그의 영주이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게 된다.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3가지의 저서였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은 독일어로 씌여져 독일전역에 퍼졌다. 이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뜨렸다.

 

두 달 후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예배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것이기에 그럼으로 신앙이 필요할 뿐이라 지적한다. 약속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약이며 떡과 포도주는 성례라는 것을 지적한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에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낸다.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 손자 챨스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는 1521년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는데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기 위하여 황제와 의회 앞에 루터를 출두하게 한다. 루터는 그 곳에서 자신의 책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는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받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마르틴 루터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 챨스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추방되었고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보낸다.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서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출발이었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서’에 만 주어질 뿐이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게 되었다. 이 후 종교개혁운동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 루터의 경건이해

 

종교개혁 이전, 중세 시절의 경건의 중요한 한 특징은 ‘두려움’이었다. 그런 확신은 ‘수도원 안에서는 결코 웃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정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려움에 기초한 중세적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항상 선포된 복음의 귀한 축복, 곧 ‘은혜와 평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는 바른 믿음에서 떠나, 구원이 사람의 공로에 좌우된다고 생각의 결과,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도 바르게 알지 못하였고 그 은혜가 주는 ‘평강’도 누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로마 계단성당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깨달음을 통해 경건의 기초를 놓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루터는 탁상담화라는 책에서 시 119편에 근거하여 신앙 성장의 비결을 다음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한다.

 

첫째로, 기도(Oratio)로 성령 하나님의 주권을 명심하라. 루터는 성경의 참된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묵상(Meditatio)으로 말씀을 읽고 그 메시지를 마음속에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라.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반드시 ‘시험’(Tentatio, temptation: ‘유혹’)을 통하여 성장한다.

 

성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지식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마귀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런 자는 사탄에게 별로 큰 위협이 못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시작할 때 - 곧 기도(oratio)와 묵상(meditatio)의 자세 – 사탄은 곧 성령을 의지하는 그 사람을 곧 유혹(tentatio)한다. 그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일으킨다. 오해와 모순과 대립과 박해가 일어난다. 성도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멈추게 하려고, 사탄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해 책동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성도들의 무수한 탄식은 바로 이런 사탄의 공격(유혹, 시험) 아래 있던 신실한 성도들이 신앙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흘린 눈물이라 말한다.

 

 

3. 루터의 예배와 성례전

 

루터의 예배 개혁에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루터의 예배개혁들은 학문적인 계획들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교구 생활의 현실들에게 나온 것이라는 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한 마디로 루터의 예배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목회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루터는 새로운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신학은 단순히 예배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와 세상에서의 생활과 경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중세기는 엄격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계급 조직 시대로서 성직자를 최정상에 두고, 평신도들은 최하위에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든지 간에 서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 신학은 성직자의 위엄을 낮추지 않으면서 평신도를 성직과 종교직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위치로 상승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인하여 세례가 새로운 존엄성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옷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세례의 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미 성별된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라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에 의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 되고, 교회와 사회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루터는 신학적으로 만인 제사장설을 중심하면서 신부를 중재자로 한 예배의 구조에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예배의 결과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참여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교회관과 예배에 대한 견해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루터는 예배가 온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집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어로 집례할 수 있는 예식서를 발간하고, 독일 찬송가를 쓰고 작곡했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루터는 모든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던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년)를 통하여 그의 성만찬 신학에 대한 입장을 피력한 바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리스도와 함께(with)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의 친교(fellowship)로 이해했으며, 그는 성찬 성례전을 설교와 함께 예배의 중심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1520년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만찬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매일 집례 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국어로 예배 드려야 할 것과, 화체설에 대한 반대, 그리고 모든 예배에 성만찬이 있어야 할 것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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