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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요한의 종말론, 신학대학원 과제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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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종말론'은 만물의 마지막 때(종말, eschaton) 세계에 미칠, 아니 특히 인간에게 일어날 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은, 창조와 구속을 거쳐 만물이 하나님께 귀속되는 완결의 신비를 다루며, 사람의 운명,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우주의 완결과 하나님의 승리를 고찰하는 교회 신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 관계에 있다. 구원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마지막 때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시간 안의 여느 시점(point)에서 구원의 역사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며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문제로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것은, 지금이나 요한 공동체의 시대나 동일한 것이라 사료(思料)된다. 유대교와의 심각한 갈등과 예루살렘 사도공동체와의 마찰, 재림 지연의 문제 등 공동체 안팎으로 산재(散在)해 있는 문제들을 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믿어야 할지를 설파(說破)해야만 했던 요한...

 

그는 풀어야 할 문제를 안고 어려움, 고난, 힘듦, 긴장, 불안, 될까 안 될까 하는 전전긍긍함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기대를 가장 급진적으로 재정립한다. 공동체 신앙의 위기를 통해,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안다는 종말론의 견해를 표출한 것이다. 우리는 본 발제를 통해, 종말의 시간적인 두 차원 중에서 이미’, 즉 종말의 현재성을 신약성서 중에 가장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종말론과 그러한 종말론을 강조하게 된 요한공동체의 상황에 대해, 또한 요한의 시간관과 요한공동체가 말하는 종말론의 윤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몸 되는 글

 

요한복음은 실현된 종말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가진다(3:15-18)는 표현 속에, 영원한 생명이 지금 시작되고 있으므로 그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생명을 얻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도 살 것이라는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반면, 오직 미래에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미래 종말론에 대한 표식(標式)은 요한복음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은 미래적인 종말론보다 현재적인 종말론을 현저하게 강조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종말론을 강조하게 된 공동체의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 요한 공동체 이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 50년이 지난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통치 시대로, A.D. 80년에서 90년을 넘어가던 때에 서(西)아나톨리아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는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다. 이들 교회는 사도 요한의 목회적 지도 아래 있었기에 이들을 요한 교회들이라 부른다. 요한은 A.D. 80, 그의 나이 70후반이 될 때까지 그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가, A.D. 80년 이후 그의 노년의 때에 거룩한 글들을 남긴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요한 문헌을 제외하고 신약의 모든 부분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요한은 여러 복음서를 살펴 본 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그가 체험하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충하여 기록할 필요와 사명을 느끼고, 후대의 교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요한 공동체를 둘러싼 안팎의 문제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의 위협이, 바로 유대교와의 갈등과 재림 지연의 문제이다.

 

1. 유대교와 심각한 갈등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5년간의 로마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혈당원, 헤롯당의 분파 가운데 바리새파를 제외한 그룹들은 파멸한다. 전쟁 이후의 위기를 바리새파의 힐렐 계열은 유대 회당 중심으로 재무장하였다. 새로운 유대주의 정신으로 무장된 이들이 각 지역에서 강력한 유대교 운동을 일으킬 때, 적대적인 그룹으로 삼았던 것이 당시 급속히 퍼져나가던 기독교였다. 따라서 유대교 회당과 기독교회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부딪힘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여기에 유대교의 강력하고 든든한 후원자 그룹이었던 하나님 경외자’(God-fearers, phoboumenos ton theon) 그룹, 즉 유대교에 우호적이었던 비할례 이방인 신자들이 대거 기독교회로 몰려가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유대교는 이들 그룹을 기독교회에 빼앗겼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 회당이 기독교회와 대립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마음과 증오심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지역 기관에 고발하여 처벌 받게 하곤 했던 것이 1세기 말의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들에 대한 핍박은 90년 얌니아 회의(유대교 정경 확립)를 거치며 더욱 심해진다. 이로 인해,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회당 내에서 축출된다. 이들의 축출은 90년경 랍비 가말리엘 2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바리새파 유대교와 관련이 있다. 랍비 가말리엘 2세는 유대교 회당에 내린 칙령 중 12번째 기도문 이단자들에 대한 축복문(Birkat ha minim)’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한다.

 

"배교한 자들에게 희망이 없게 하소서 오만함의 다스림이 우리의 시대 안에 곧 사라지게 하소서. 나사렛 사람들(nosrim)과 이단자들(minim)이 한 순간에 멸하게 하소서..."

 

이 기도문을 통해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사회적으로 증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단자들에 대한 축복문(Birkat ha-minim)’과 같은 회당 축출에 관한 언급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요한 공동체는 예수 이름을 고백하는 것 때문에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9:22,12:42, 16:2). 그런데 회당 축출은 유대사회에서의 매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친지 가족들과의 유대 관계가 상실되는 것이요, 이런 관계의 상실은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요한 공동체는 유대 사회로부터 소외감과 세상을 향한 적대감이 깊어졌을 것이다.

 

한편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은 1세기 중반까지 유대교에서 파생된 하나의 종파’(sect)라고 말할 수 있다. 종파는 사회 구조적인 면에서 종교 전통을 포함한 주류 사회와 긴장을 유지하는 반사회적 혹은 반문화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념적으로는 종말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한 공동체는 회당 축출을 실제로 경험한 공동체로서 유대인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공동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내부적으로 재림 지연의 문제

 

요한 공동체는 외부적인 박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지연이라는 내부의 위기도 있었다. 그리하여 내적으로는 종말론의 수정을 통하여 공동체의 생존과 보존을 위한 새로운 종말 사상을 강조해야만 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강력한 사랑의 윤리를 통해 신앙의 돈독함과 유대감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강력한 사랑의 계명이다(13:31-35, 15:12-17). 이 새로운 계명이란, 요한 공동체가 서로 사랑할 때 예수의 제자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사랑 안에도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15:10). 더 나아가 예수를 사랑하면 하나님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의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단언한다(14:21).

 

한편, 요한 계열의 전승은 공동체가 '재림'(παρουσία)지연을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그들의 신앙을 형성시켰을 것이라고 리처드 헤이스는 말한다. 요한복음이 이 상황을 대처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과 대면하실 때 심판이 이미 일어났다는 확신과 보혜사 성령이 신앙공동체 내에 활발하게 임재해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요한의 종말론이 심판에 대해 비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헤이스는 지적한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는 대신에, 예수님이 세상 속에 오신 결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이미 있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신자들은 더 이상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현현(顯現)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은 종말 때에 '저 밖에 있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판은 현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발생하며.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심판 아래 놓이거나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의 종말론적 비전이다.

 

유대교 묵시 사상의 토양에서 태동하여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공동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예수 재림의 지연에 대해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 종말의 지연과 종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종말을 먼 미래에 갖다놓거나 현재로 끌어들임으로써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감을 희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헤이스는 요한의 독특한 보혜사 교리 또한 '재림(παρουσία)'의 지연과 첫 세대 증인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필요에 답을 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보혜사의 기능은 공동체를 가르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세상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는 일이다(15:26, 16:7-11). 간단히 말해서, 보혜사는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계속적인 계시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급진적 종말론의 지연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여 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또한 실용적인 이유에서, 장래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죽음, 갈등 그리고 분열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창조와 구속을 같이 추구하는 어떤 공동체라도 구원을 완전히 현재 차원으로만 붕괴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조차 영적으로 실현된 종말론과 더불어 우리는 전통적인 초기 기독교의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을 다시 확인하는 몇몇 본문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는 부차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존재는 요한복음서가 영지주의의 가장자리를 넘어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게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하지만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요한은 심판하시고 생명을 부여하는 현재의 하나님 말씀의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현재의 영생경험이 기대하는 부활이라는 미래의 소망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중대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요한은 현재의 영광으로 미래의 소망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현재 믿는 이들에게 제공하시는 생명의 충만함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요한 공동체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참되게 현현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이해한 요한의 시간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신약성서의 시간을 '구속사적으로 전개되는 선()'으로 본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이론을 참고할 것이다.

 

 

. 요한의 시간관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특별한 시점 카이로스’(καιρός)

 

카이로스는 인격적인 행위와 관계된 시간으로, 어떤 목적에 연결되는 시간이다. 요한 시간관의 독특성은 카이로스의 시간에 나타나 있다. 요한은 인간의 구원을 장소, 즉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보지 않는다. 영생은 현재에 예수의 표적과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신앙으로 반응하면 벌써 현재에 종말의 축복이 임하게 되고, 불신앙으로 반응하면 미래의 심판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선후(先後)가 중요하다기 보다, 그 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현재와 미래는 구분되지만 미래가 현재화되고, 또 현재의 삶이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종말에 대한 두 모습이다.

 

미래적 종말론 요소(요한문헌에는 이 내용이 많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첫째, 요한복음의 예수는 신자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이것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나타나심’(요일 2:28)에 관계된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한다(6:39-40, 44).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12:48)

 

실현된 종말론 요소( 요한복음에는 이 내용이 압도적이다!)

 

믿는 자는 현재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1:12, 11:52), 영생을 이미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17:3). , 예수와 함께 구원의 시간에 완전히 도달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여기에서 지금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는 자에게 자신이 꿈꾸고 열망했던 모든 것이 즉시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요소는 요한복음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실현된 종말론적 요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는 구절에 이 요소가 많이 나타나 있다.

) 요한은, 복음을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요약하면서(3:13-21),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고 한다. 여기서 심판을 받다(κέκριται)라는 동사가 완료형으로 쓰여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요한은 예수의 복음을 요약하며,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여 믿음의 결과가 현재에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둘째, 요한복음의 예수는 생명과 심판의 부활을 말하면서(5:20-31) 그것이 현재 이루어졌다고 천명한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에 사용된 동사 '옮겼느니라'(μεταβέβηκεν)가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이미 이루어진 실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6:39-40, 50-51)이라고 말하면서, 이 떡을 먹으면 곧바로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를 먹으면 영생하리라...” 예수를 먹으면 즉, 예수와 합일이 되면 다른 표현으로 신자는 예수를 믿고 예수는 신자의 주님이 되면 영생이 지금 주어지는 것이라는 거다.

 

넷째, 영생은 신자에게 이미 실제가 된 그 무엇이다. 예수의 양은 '생명'을 이미 얻었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이며(10:10),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17:3)인데, 요한복음에서 아는 것이란 다름 아닌 믿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 벌써 현재 실제가 된 것이다.

 

다섯째,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는 종말이 현재화된 것이 여러 측면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γώ εμι를 통한 자기 계시 구절(6:35,48,8:12,10:7,9,10:11,14,11:25,14:6, 15:1)에는 이미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종말의 현재화의 측면을 볼 수 있다. 종말에 신자가 부활할 것만을 아는 마르다에게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하여 종말의 부활은 현재 부활 자체이신 예수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부활은 미래의 일일뿐 만 아니라 현재 예수 안에서 경험되는 그 무엇인 것이다. 또한 예수는 현재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 된다. 이 예수를 현재 경험함으로 후에 생명의 부활이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생은 예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과 교제 속에서 사는 신자의 편재적 경험인 것이다.

 

2. 구속사적 시간이 아닌, 종말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χρόνος)

 

보통 크로노스의 시간 하면, 어떤 사건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또는 비인격적으로 똑딱 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을 뜻한다. 하지만 요한은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예수의 존재 시점을 태초에’[Ἐν ρχῇ](1:1)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는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시간으로 시작된다. ‘처음(ρχ)은 로고스(Λόγος)인 그리스도 존재의 근원적 시간을 말한다. 요한은 예수의 선재성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현재의 시간에서 영원 전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3. 예수 생애의 특정한 시점을 의미하는 ’(시간, ρα)

 

ρα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 개념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종말론적인 사건의 때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오심이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의 는 예수의 첫 번째 오심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금(νν)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ὥρα)가 오나니 곧 이 때(νν)." (4:2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ὥρα)가 오나니 곧 이 때(νν)라 듣는 자는 살아나느니라." (5:25)

아버지께 예배할 때’, ‘죽은 자 의 깨어남의 때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론적인 시간이다.

 

나의 때

 

요한의 예수는 그의 삶 가운데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나의 때로 표현한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2:4).

 

예수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죽음은 곧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13:1)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descent) 예수는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가야 함(ascent)을 강조한다(7:33, 8:21). 그 때는 곧 인자가 아버지께로 가는 떠남의 때이고 (3:13, 6:62), ‘들리움’(exaltation)의 때이기도 하다 (3:14, 8:28) 이 사건은 물론 지금일어난다.

 

더 나아가 예수의 때는 죽음의 때임과 동시에 또한 영광의 때이기도 하다(12:23, 17:1).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임을 깨닫고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의 기도,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소서"(12:28)는 예수의 삶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삶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의 죽음의 시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때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의 시간을 감지한 지금’(νν)이 곧 영광의 때이다(13:31).

 

심판과 부활의 때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서에서 종말론적 용어로 쓰이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용어가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심판과 부활같은 주제가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특징 지어준다. 이 용어들은 모두 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묵시 사상적이며 종말론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심판의 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전통적인 심판의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라는 묵시 사상적인 미래의 심판에 관해서 언급한다(5:29, 12:48, 15:2).

 

요한복음에서 심판의 때는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yet)의 긴장 가운데 있다. 미래의 심판을 배척하지도 현재의 심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미래의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요한 공동체는 현재의 심판을 체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심판의 기준이 믿음과 말씀이라면 그것은 이미 현재 믿음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보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3:18, 5:24).

 

심판의 때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때도 현재와 미래의 두 영역 안에서 언급된다. 전통적인 부활의 사상처럼 죽은 자의 부활과 그들에게 부여되는 영생이 미래의 사건으로서 강조된다(6:39-40, 44, 54, 11:24). 묵시사상적인 마지막 날에 있을 미래의 심판도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5:28-29). 또한 요한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때를 예수의 생존 시기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로써 설명하는 것과 같이, 부활과 영생을 역사적 예수 안에 소급(遡及)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부활과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현재적 선물로 언급된다(5:21, 24 ; 17:3). 예수는 생명을 소유한 자이며(1:4), 그를 믿는 자는 미래에 얻을 생명이 아니라 현재에 누리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3:36, 5:24). 부활의 생명은 첫 번째 오신 예수가 살아 있는 지금일어나고 있는 것이다(5:25)

 

이제 우리는, 요한이 현재적인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아야 하는 믿음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그가 제시한 종말론적인 사랑의 윤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요한의 종말론적인 사랑의 윤리

 

요한의 윤리를 한마디로 사랑의 윤리”(the love ethics)라고 부른다. 공관복음에서도 사랑 계명인 원수를 사랑하라”(5:44, 6:35),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12:30-32, 22:37-39, 10:27-28)는 사랑의 구절이 나타나지만, 이는 주류 사회를 향한 사회적 동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할 원수의 대상 로마가 될 수 있고, 믿음의 공동체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의 사랑 윤리는 철저하게 공동체 내부에 제한되어 있다. 이는 요한 공동체의 관심이 사랑 계명의 성서적 전승을 지켜나가는 것보다, 공동체의 현실적인 생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의 사랑의 계명은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새 계명으로 변화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랑-명령(the love commandment)은 두 곳에서 나타난다(13:31~38,15:2~17). 요한복음 사랑의 윤리는 예수의 "떠남"의 때를 주제로 하는 "고별 담론"(13~17)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2번의 사랑-명령이 모두 예수의 종말론적인 언급과 연결되어 있다.

 

13:34의 사랑 명령은 예수가 지금(νν) 자기 자신의 때 곧 죽음의 때를 인식하고(13:1), 종말론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의 때가 성취된다(13:31f.). 그 때가 바로 자신이 아버지께로 떠남의 때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첫 번째 사랑-명령이 배반자 유다의 떠남과(13:31)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언급(13:38) 사이에 주어졌다는 점에서 2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사랑-명령의 긴급성, 다른 하나는 중요성이다. 이 긴급성과 중요성은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지상에서 마지막 삶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준 사랑-명령은 지금 이루어 져야 할 일이이게 매우 현재적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 공동체는 예수와 제자들의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을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사랑-명령을 현재 이루어 가는 삶이 결국 제자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13:35). 세족식(13:1~17)"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랑-명령을 잘 드러내는 모델이 된다. 예수가 베드로의 발을 씻김으로 본을 보인 것처럼 예수의 사랑-명령,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양자적(dyadic)이고, 상호 교환적(reciprocal)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서 일어나는 양자관계는 모든 제자들에게 확대된다는 것이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b). 예수의 세족식은 요한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강하게 형성하여 나아가게 하는 상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사랑의 윤리는 강한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요구하고 증가시킨다.

 

15:12-17에 있는 예수의 사랑-명령은 13:31-38의 반복이다. 15장의 사랑-명령은 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15:1-11)와 세상과의 관계(15:18-16:4)를 설명한다. 요한 공동체는 현재 예수와의 관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박해 가운데도 있다. 그럼으로 예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미움에 맞서 믿음의 공동체를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사랑-명령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제자들을 위한 친구로서의 죽음과 연결시킨다(15:12-13). 사랑-명령은 예수의 죽음을 암시하는 종말론적인 표현과 함께(15:13), 현재적으로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15:6)을 함께 다루고 있다. 즉 현재적 심판이 전제된 종말론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사랑을 가진 우정’ (philia; friendship)을 주제로 제자들을 초대하고 있다(15:13-15). 13장의 세족식이 사랑-명령의 모델이 된 것처럼 여기서는 포도나무의 비유(15:1-11)를 통하여 사랑-명령을 더욱 분명하여 나타낸다. 예수와 함께하는 우정의 상징적인 표현은 가지로서 포도나무에 거함(abiding)의 주제와(15:4), 열매를 맺는 (15:2,5,6)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강한 양자적인 관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 관계가 요한 공동체의 특징이라 말 할 수 있다. 예수와의 친구의 관계는 예수와의 동등성을 의미하는가? 아버지를 안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15:15,10:34-35 참조). 이러한 사고 역시 요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현재적인 삶에 가치를 두는 실현된 종말론, 종파적인 성격, 유대교와 세상과의 갈등 등 복잡한 요인들이 요한의 사랑 계명의 범위를 좁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의 사랑 계명은 새 계명으로 변화된 것이다. 특별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된 사명이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과 섬김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맺는 말

 

요한은 달랐다!!!

 

2편의 논문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공관복음이 기록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말 사상이 묵시 종말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에서 온 미래적 종말 사상이었다면, 요한은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며, 이 땅에 있으면서도 위의 것을 소유하여 누릴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종말 사상은 미래에 다가올 종말이 오늘 우리에게 실현되어짐을 말해주고 있다. 즉 현재에 살면서도 미래의 것을 소유하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파루시아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실망 속에 있는 자들에게 요한은 역사적 예수의 종말 사상을 오늘에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버거운 현실의 삶 속에서 머뭇거리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지금 여기에서결단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이미존재하는 과거의 시간이다. 실현되었다. 바로 지금은 신앙으로 그것을 받느냐 아니냐를 결단하는 현재라는 것이다. 또 박해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파루시아가 이뤄졌다고 말하고 있다. 보혜사 성령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이러한 재해석 작업은 미래의 종말이 불확실성에서 더욱 확실한 현재 속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참고로 알아두기

 

18~19세기 예수 세미나와 슈바이처 종말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최초의 문제 제기는 18세기 말에 시작 되어 20세기 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시기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성서를 이성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이들은 성서를 교회의 경전이 아닌 학문의 연구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여타의 서양 고전 문헌을 연구하는 방식대로 역사적문학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 이야기가 신학적 해석이 가미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비평적 연구를 동원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778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이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의 유고집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목적을 출판함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라이마루스는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가 다르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에 관한 그들 자신의 견해를 쓰고 있을 뿐, 실제 예수를 보도하고 있지 않다고는 것이다. 라이마루스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지, 새로운 종교를 창안하거나 유대교의 율법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후,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내 예수의 부활을 조작한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바이스(Johnanes Weiss 1963~1914)의 연구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 당시 연구가들이 예수를 윤리적 개혁가나 도덕 교사로 이해한 것과는 달리, 예수를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대망했던 유대의 종말론적 예언가로 규정한다. 바이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 나라를 주목하는데, 이러한 바이스의 주장을 계승한 사람이 바로 알버트 슈바이처다.

 

슈바이처가 1906년에 출간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계몽주의 시대에 전개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오래된 질문'Old Quest들을 마감하는 데에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슈바이처는 1778년에서 1901년 사이에 출판된 예수의 생애에 관한 대표적인 저작 600권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지난 시기의 연구들이 묘사한 도덕 교사로서의 예수상은, 이성을 만물의 판단 척도로 맹신했던 자유주의의 부산물이라고 비판한다. 합리주의적 이성으로 무장한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대 의식을 예수에게 투영함으로써 예수를 도덕 교사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도덕 교사가 아니라, 종말론적 대망에 사로잡힌 1세기의 유대인 예언자다. 그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의도적으로 비밀에 붙이려 했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으로 비밀이 폭로되었다. 예수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할 것을 확신했지만, 그렇지 못하자 인자 (Son of man)를 세상에 체현시키려고 스스로 고난을 택했다. 예수는 세계의 종말이 임했음을 감지했고, 자신의 고난을 통해 종말을 도래시키려 했다.

 

즉 예수는 종말론적 비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산상수훈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종말이 올 때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윤리 지침이라고 주장한다. 슈바이처는 바이스의 주장을 계승하여, 역사적 예수를 유대의 종말론적 세계관에 기초해 파악했다. 즉 역사적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불러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유대의 묵시 사상적 예언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처에게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슈바이처에게 유의미한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영적인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가 누구였는가라는 역사적 질문은 우리의 신앙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주장은 객관적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슈바이처의 연구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시기를 질문 부재의 시대’(No Quest Period)라고 부른다.

 

 

김동수의 논문 <요한의 시간관> 서두에 잠간 언급된, ‘철저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Johannes Weiss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유대묵시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했으며, 천국을 미래적으로 해석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10:7; 10:9, 11)는 말씀을 천국은 아직 여기 있지 않고(not yet) 심히 가까이 있다(extremely near)라고 이해하여 임박한 미래적 종말론을 견지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조차도 천국을 가지고 오거나 건설할 수 없으며 하나님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Weiss의 종말개념을 일반화시킨 사람이 Albert Schweitzer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유대종말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확신하고서 철저적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종말론에 적용했다. 즉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임박한 종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마 10:16-2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예루살렘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을 확신했으며, 인자의 강림 전에 핍박이 일어날 것이고, 마지막 때까지 참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날을 바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고 본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는 제자들의 일상생활에 유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림 시까지만 유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주신 임시적인 윤리로 본다.

 

하지만 WeissSchweitzer는 유대 묵시 문학에서 말하는 종말론과 예수님의 종말론을 혼동하고 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 이미 임한 천국을 소개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간과하고 말았다. 반면에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C.H. Dodd에 의하면 복음서에 나타나는 미래 종말론적 구절들은 초대 교회가 만들어 첨가한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불특정 미래에 있을 가시적인 주님의 재림조차도 거부하는 이단적 입장을 보인다. 그는 부활을 중생으로,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성령의 오심으로 재해석한다. 아직까지 복음서의 종말론을 논할 때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도를 대체할 만한 것은 없다.

 

함께 생각해 보기

 

1. 요한복음에서는 종말의 미래보다 현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종말의 미래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성도들이 내가 죽은 뒤에 종말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종말과 많이 상충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종말의 미래현재성의 간극을 어떻게 메꿀 수 있는가?

 

2. 요한 공동체는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인해, ‘사랑의 윤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무엇일까? 발제자가 생각하기에 오늘 한국 교회는 요한 공동체가 경험하였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위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이 보다 더 큰 위협이라 할 수 있는 세속화의 문제와 교회에 대한 불신이 큰 문제라고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서신연구> 세미나를 듣는 우리들이 어떤 사랑의 윤리를 만들 수 있을까?

 

3. 요한공동체는 버거운 현실의 삶 속에서 머뭇거리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지금 여기에서결단하도록 촉구한다. 박해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재림이 이뤄졌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성령론은 매우 실천 지향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요한의 성령론은 한국 사회에 있어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 변혁을 이루는 선교 전략으로 재해석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점에 있어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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