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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상황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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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목회자의 돕는 배필로서 현 한국교회 위상이 얼마나 추락하고 있는지 몇 년 동안 깊이 체험하던 중에, 이덕주교수님의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책을 접하게 되어 무척이나 감명 깊게 읽었다. 과제를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상황들을 짚어나가는 요 며칠 동안,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에 삽입된 '무너지는 교회, 세워지는 교회' 부분이 새삼 가슴을 쳤다. 인간의 탐욕으로 세워진 바벨탑은 무너지고, 순종하는 노아의 손에 건설된 방주가 산 위에 세워졌던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무너지는 교회'에 대하여 연연해하거나 절망하지 말자"라는 저자의 말을 마음으로 받으며, 목회현장에서 많은 가슴앓이를 한 사모가, 새로운 한국 교회의 탄생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안고 종교개혁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종교개혁의 사회적 배경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 무엇이었을까?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종교 부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구조적 여러 조건들과 맞물려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상이었다. 당시 몇 가지 위기로 치닫는 현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적인 현상

 

먼저 교황의 세계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특별히 서방교회의 분열로 인하여 2~3명의 교황이 난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속 군주가 교황권에 도전할 만큼의 대등한 세력을 확보하는데 당시의 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12-13세기에 발전한 화폐경제는 중세 말 상황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화폐경제의 활성화는 부르주아계급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부르주아계급은 귀족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해 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군주 역시 대군을 일으키기 위해 자금의 지원이 가능한 부르주아와 결탁한다. 중앙집권화의 의도를 가진 군주와 성장하는 부르주아계급 간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근대 국가를 발전시키는 길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국가주의의 대두는 점차 성장해 가는 왕권을 바탕으로 통일국가들을 탄생시켰으며 대표적으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의 나라가 부상하면서 교황의 지배권이 더욱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 이후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당시 독일은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유출되었다고 한다.

 

2) 경제적인 요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은 인구 감소현상을 보였다.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등과 같은 전쟁으로 인해,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독일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심각하였다. 1500년대 유럽인구가 1300년대와 비슷할 정도로 노동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종교개혁 당시 경제 구조는 '대토지 소유제'였다. 이것은 힘없는 농민이 힘 있는 군주를 찾아가서 주종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는 재산과 생명을 지켜달라는 계약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것이 중세 봉건문화 사회였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하여 노동력이 풍부해지자, 영주들은 농지에 대한 임대료를 인상하여 농민들을 억압하였고 그로 인하여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하게 되었고, 신대륙의 발견과 무역의 발달로 현물경제에서부터 화폐경제로 점차 전환되기 시작하였으며 대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자연히 물가는 상승하게 되고, 사회 발전에 따라갈 수 없었던 농민들과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되었다.

 

3) 문예부흥

 

인쇄술의 발명과 교육 및 성서 지식이 확대됨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마르코 폴로에 의한 동방견문록이 출판되면서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고, 동서양이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동양문화가 서양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종이, 화약, 나침판, 인쇄술이 유럽에 소개됨으로 서양의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인쇄술의 발달은 그리스의 고전의 재출간, 초대교부의 글 & 경건 서적 및 성경의 보급을 활성화시켰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배경으로 문예부흥을 꼽을 수 있는데, 문예부흥은 그리스 고전에 영향을 받은 많은 인문학자들의 탄생으로 말미암는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어 인문학자들이 서유럽으로 대거 유입하였다. 이로 인해 서유럽에 그리스로 돌아가는 르네상스 열풍이 일게 된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로마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문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칼빈, 츠빙글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리고 루터가 로마 가톨릭에 항의하여 발표한 95개 논제가 단 몇 주 만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갈 정도로 인쇄술의 발달은 서구 사회를 변화시켜 놓았다.

 

4) 농민전쟁

 

13세기 이래 유럽의 봉건사회는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면서 지배 계층의 수탈과 억압이 절정에 달했고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영국을 필두로 해서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들의 사회적 정치적 불만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통치자들이나 지방 영주들이 토지와 산림 그리고 하천 등을 독점하고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지대와 사용료를 요구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통치자들과 영주들은 농민들에 대해서 매우 가혹했고 농민들은 삶의 한계선상에서 신음하였다. 다른 한편 세속적 영주들 못지않게 엄청난 토지 그리고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교회의 주교들이나 수도원장들이었다. 이들 역시 농민들에게 가혹하기는 세속적 통치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5세기 들어가면서 농민들의 저항운동과 봉기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525년 독일 남서부 지역인 슈바벤(Schwaben)에서 시작되었던 농민들의 봉기는 가장 큰 규모였고 종교개혁의 자극과 영감을 받아서 일어났다. 농민들은 종교개혁이 그들이 요구하는 사회개혁까지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토마스 뮌처와 발타자르 휘버마이어 등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개혁은 당시 중세적 봉건사회와 결합된 제도적 교회를 철폐하고 새로운 교회 즉 복음에 기초한 사도적 청빈의 교회를 창설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3. 종교개혁의 종교적 배경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 사회는 사치 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해갈을 위하여 현실 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백성 사이에 생겨진 괴리에 새로운 개혁의 가교는 누군가에 의하여 놓여져야만 했다. 얀 후스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등 선각자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전통적 교회는 이를 탄압하려고만 하여 더 이상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1) 교회의 세속화

 

교회의 세속화 현상은 이미 13세기에 시작되었다. 피터 왈도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설교하였다. 이때 로마 교황청은 1229년 발레시아 교회 회의에서 왈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따르는 많은 성도를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 같은 이유로 평신도들은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무지와 미신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단절되었고, 불교인들이 현세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사용하던 묵주가 교회에 소개 되어 성도들은 묵주를 굴리며 소원을 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단절되어 버리자 성자 숭배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마리아 숭배사상도 급증하게 된다.

 

2) 교회의 정교유착

 

중세 말 교회의 폐단은 교회의 지나친 물질 추구와 성직 자체가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범죄는 성직매매와 면죄부 팬매였다. 성직 자체가 돈으로 매매되는 현상은 관례처럼 여겨졌으며, 특히 귀족들에 의한 성직매매와 친인척을 성직에 등용하는 것은 큰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라고 해도 성직을 돈으로 매매하는 풍토는 심각한 모순이었고, 돈으로 매매된 성직은 다시 부를 축적하는데 이용되어 악순환을 초래하였다. 추기경이면서, 대주교를 겸하고, 수도원 원장 직까지 겸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세속정부에서 정치적 용도로서 교회의 성직을 하사하였는데, 정치 권력자가 성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인 용도로 하사된 성직이 올바르게 쓰여 질 수 없는 실정이었고, 교회의 부정과 부패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4세기 중반 제도화된 면죄부 제도가 15세기 초에는 더욱 크게 장려되었다.

 

4. 나가는 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미 중세기 안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종교, 정치, 사회의 이유들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무너짐 현상을 보면서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오늘 그대로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책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에서 '한국교회 희망의 근거'라는 대목을 보면,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습관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아니요" 할 수 있는 '젊은 루터'들이 나올 때인데, 밖을 향하여 개혁과 혁신을 외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 가실 수 있도록 철저하게 나를 허물자는 제안에 다시 한 번 공감하며 아프지만 다시 예수님이 세워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자리에 서기를 다짐해 본다.

 

 

참고도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신앙과지성사, 이덕주

중세교회사, 은성, 후스토 L. 곤잘레스

마르틴 루터의 신학사상과 윤리, 대한기독교서회, 손태규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한스 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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