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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약성경의 서간문학'과 '바울의 연대기'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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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M. Div. 1학기 때, 열심히 공부한 책이다...

 

1.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서울남연회의 한 지방에서 서로의 교회를 섬기고 있던 목회자 부부들이, 바울의 선교지를 따라 순례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의 마음에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바울이 걸어 다니기도 하고 때론 머물렀다고 성경에 기록된 장소들이, 그 자리에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연하자면, 내가 믿고 사모하는 성경의 내용들이, 허구(fiction)가 아닌 nonfiction이라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서간문학과 바울의 연대기'를 읽으며 그 때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인즉, '나는 나, 너는 너'라고 철저하게 객관화시킬 수 있었던 바울 서신들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感知해 왔던 모호한 점들이, '신약성경의 서간문학과 바울의 연대기'를 읽으며 명쾌하게 풀렸다.

 

2. 신약성경의 서간문학

 

참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분별력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분별해야 할 때 우리는 의외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한다.

 

고대 서간들에 대한 내용을 읽다가,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기도 하는 서간에는 여러 형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독서 목록에는 비문학적 서간이나 외교적 서간은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수사학 연습이나 철학적 교훈 서간들은 몇 차례 대할 기회가 있었다. 다양한 문체와 다양한 서술 양식이 사용되는 서간문은 연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대화라는 성격을 견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 서신의 중요성은 신약성경 자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27권의 신약성경 가운데 13권의 편지들이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물론 그 13개의 편지들 자체 안에는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 모두를 바울이 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당시의 우편제도가 오직 국가 우편물들만을 처리했기 때문에 개인의 편지들이 편지 심부름꾼들에 의해 전달되었고, 그에 따른 자연 발생적 사건이 편지의 유실 or 편지 전달의 지연이었다는 것을 읽으면서, 고린도후서의 본문을 분석할 때 가졌던 생각이 떠올랐다. 편지 심부름꾼의 역할을 하게 된 디도 손에 고린도전서를 들려 보내고 나서, 디도의 돌아옴이 늦어졌을 때 바울이 얼마나 안절부절 했을까...

 

서간에 대한 앎이 늘어갈수록, 신약성경 27개 문서 가운데 절대 다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수(21)를 서간문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는 서간이 특정한 실제 상황을 겨냥하여 말할 수 있고, 공동체 삶의 구체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방식을 갖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문학적 형태와 비교해 볼 때, 편지(서간)들과 매우 다름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바울에 관한 유일한 이야기이다. 또한 서간과 연설을 비교할 필요를 느끼며, 분할 가설과 차명(익명 or 위명) 서간들까지를 살펴보면서,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는 많은 성도들에게 어떤 설명으로 다가가야 하나?'를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 고민의 와중에, 바울과 편집자들이 공동체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울 서신이 자기 주변 세계 안에서 막 형성되어 가던 작은 가정교회들에게 자의식을 심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도, 이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고전적인 수사학의 기법을 이용하여 유대적인 철학과 종교적 사상을 헬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설명 방식을 사용하여 마침내 청중들을 한 단계 이끌어 나갔음을 보게 되었다.

 

조금 쌩뚱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분할 가설이든지, 차명 서신의 문제이든지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삶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무리 설교자가 수사학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설교를 잘 한다 할지라도 설교자의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한다면 공동체에 영향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말의 화려함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과의 치열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라 사료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수사학자가 되기에 앞서 진실한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고린도 공동체와 바울의 관계가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음이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고린도 공동체가 바울의 서신에서 나타난 모습과 삶의 진정성에 대하여 오해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설교자의 삶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저자가 차명 서신에서 지적한 바울의 전통이 계속 상기, 전승, 숙고 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권위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서신문학을 읽으며 오늘 강단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바로 설교자들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보다는 유창한 연설에 관심을 두었던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역으로 신약성경의 헬레니즘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유대주의 문화와,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헬레니즘화 시킨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 제기이다. 물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수사학을 사용하여 권위 있게 설교하였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바울에 의하여 헬레니즘화 된 기독교를 다시 히브리 종교와 문화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3. 바울 연대기

 

1) 절대적 연대기

 

바울의 삶을 세계사에 편입시켜 연구하는 절대적 연대기를 찾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특별히 바울의삶의 3사건이 세계사에 편입, 정렬이 가능함을 보았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 다마스커스 탈출 공동체 창설을 위한 고린도 체류 유다 총독 벨릭스의 해임 등이다.

 

먼저 그리스 델피(Delpoi)에서 발견된 갈리오 비문(철학자 세네카의 형인 갈리오(JuniusAnnaeus Gallio)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재임한 때 제작된)을 보면 그 제작 연대를 글라우디오가 26번째 황제 칭송을 받을 때로 기술한다. 글라우디오 황제에 대한 27번째 칭송이 5281일에 있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으로 26번째 칭송이 글라디우스 호민관 통치 12년 즉 52125일에 시작되었음으로, 정확하게는 52125일과 5281일 사이에 비문이 작성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가야 지방의 총독 재임 날이 71일이기에 이론상으로 5171일 이나 혹은 5271일 이다. 그러나 갈리오의 보고와 황제의 답서가 한 달 안에 모두 이루어 졌다고는 볼 수 없기에 갈리오의 임기는 5171일부터 52630일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고발당하기 전에 고린도에 이미 16개월 동안 체류하였고, 고발 이후에도 즉시 떠나지 않았다면 바울의 고린도 체류시기는 대략 50년 말부터 52년 초 중반까지가 된다. 아울러 49년 글라디우스의 칙령에 의해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였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와 바울의 만남을 50년으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 11:32-33에서 자기가 광주리에 담겨 성벽 아래로 내려져야만 했다고 이야기 하고, 이는 아레다 왕이 자신을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레다 왕의 재위 기간이 기원전 9년부터 기원후 40년까지 재위하였기에 바울의 다메섹 탈출이 40년 이전이 된다.

 

바울의 선교활동 끝 무렵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로 압송된다. 사도행전 24:27절을 보면 로마 총독이 벨릭스로부터 베스도(25:1)로 바뀐다. 새 총독 벨릭스는 재판을 재개하였고, 그해 가을 바울을 로마로 압송한다. 베스도 총독이 부임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필경이 56년에 시작되었기에 바울이 2년간 구금을 당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베스도 부임 연도를 58년으로 본다. 그렇다면 바울의 로마 이송은 58/59년 가을과 겨울에 이루어지고, 로마 도착은 59년 봄이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바울의 삶을 세계사에 편입하여 바울의 연대기를 복원할 수 있는 기준점인 절대적 연대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에 허전함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환진 교수의 저서, '구약성서 속에서 노닐다'(p178)를 보게 되면 텔 단이라는 지역에서 1993년과 1994년 사이에 아람어 새김글이 새겨 있는 기원전 8세기 경의 유물 돌멩이를 발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보면 다윗 집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쓴 것이 아니기에 다윗 왕가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의 절대적 연대기 연구를 통하여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임기를 5171일부터 52630일까지 특정 짓는 것을 보고 감동을 넘어 희열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서의 기록만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뒷맛이 남았기 때문이다.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이었다.

 

2) 상대적 연대기

 

앞에서 얻은 절대적 연대기를 기준점으로 삼아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하기 전후의 상대적 연대기를 복원하면 바울의 전체 연대기를 재건할 수 있었다. 먼저 바울의 자기 이해에 결정적 소명 체험을 한 장소가 다메섹이라는 것을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 1:17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한 연대는 절대적 연대기 40년으로 잡을 수 있고, 하한 연대를 예수님의 사망 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럼으로 바울의 소명 시간은 33/34년으로 보아도 다음 기준점이 고린도 체류기간을 채우는데 필요한 모든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별 무리 없이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212:1에 따르면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13년 동안 선교활동을 펼친다. 그러고 나서 갈라디아서 2:1에서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연결된다. 바울은 1:18,2:1에서 두 기간(314)을 잇따라 제시하고, 부사 다시를 통해 예루살렘과의 관련성을 명시(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기)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삶의 이 단락을 1차 선교여행으로 기술한다.

 

예루살렘 회합은 48/49년에 열렸다. 이 때 바울은 2번째 예루살렘을 여행한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율법의 올바른 적용 문제를 둘러싼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갈라디아서 2:11-14에 따르면 예루살렘 회합 이후에 안디옥에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주로 유대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선교하고, 바나바와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선교하기로 하였다(2:9b). 바울은 이 합의대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복음 선포가 제안 없이 인정받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충돌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음식의 문제였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교 음식 규정들로부터 원칙적인 자유를 전제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예루살렘 합의를 달리 해석 (합의는 할례에 국한 된 것이고, 음식 규정은 유효하다)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위선으로 여기고 바울은 바나바와 안디옥을 떠나 스스로 선교활동을 한다. 이 때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공동체가 설립되고 사도행전은 이 기간을 2차 선교여행의 과정으로 서술한다.

 

바울이 로마 이후의 전승은 2가지가 있다. 첫째 전승은 클레멘스 15:7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바울이 서쪽 끝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아마도 스페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암시는 롬 15:28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 전 고린도에서 복음을 선포하러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의중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클레멘스의 언급은 사실적 가치가 떨어진다. 둘째 전승은 디모데후서 1:84:6,16에서 바울의 새로운 옥살이에 관해 말하면서 재판이 좋게 끝날 전망의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이로서 바울이 로마에서 사망했으리라는 것에 신빙성을 얻는다. 아마도 네로 치하 64년경 로마의 그리스도인의 박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 회합이후 안디옥에서 충돌 이후 독자 노선을 걷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본다면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4. 나가는 말

 

바로 지난 주, 발제 팀을 향한 질문을 준비하려고 빌레몬서를 읽는 중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바울은 오네시모를 어디서 언제 만난 걸까? 그런데 바울의 일대기를 읽다가 그 의문이 풀렸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일 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으면서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오네시모도 그 때 찾아와 바울에게 복음에 대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부할수록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와 가슴이 설렌다!

 

바울의 일대기를 볼 때, 어떤 순간에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바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울은 다마스커스 회심 이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信仰은 어떤 것일까? 나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완벽함일까?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로 점철되어야 할 것이다, 온 맘 다해 全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바울처럼 나 역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focus를 두기보다, '하나님의 나를 위하여 준비해 좋으신 것을 받아들이기'에 집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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