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지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기독교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프란체스코를 함께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신나고 영광스럽다!
Ⅱ. 스콜라철학의 시대
1. 중세 스콜라 철학
중세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몇몇 요소들이 이제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외부에서의 자극은 십자군운동을 계기로 작용한다. 신과 교회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 운동은 중세 기독교 문화가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 보존, 연구되어온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만나도록 해주었다. 발달한 이슬람의 자연과학의 유입 등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된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물질세계에 대한 극도의 부정을 전체로 한 플라톤적인 요소로는 자연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나 생산력의 증진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지게 된다.
내부에서의 자극은 기독교의 민중적인 확산과 연관이 있다. 기독교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대중화를 동반하게 된다. 처음에는 소수의 교부들에 의해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위계체제에 의존하여 기독교에 복종시키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기독교의 승리가 현실화될수록 교리에 대한 대중적 공감과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평신도 운동은 이에 대한 대응이었다. 평신도 운동의 확산됨으로써 과거와 같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교리 전달만으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대중적 공감과 복종을 이끌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대중적인 공감을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적인 인식에 접목된 신학이 전제되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의 물질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플라톤에 기초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는 인반 대중의 상식을 넘어선다는 한계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신학은 두 가지 방향으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세사회의 생산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의 변화,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공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합리화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궁정학교를 Scholar라고 부른데서 부터 생겨났다. 유럽 각지의 수도원에 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의 부흥이 일어난다. 스콜라철학은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발생하여 13세기경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때 이들 학원의 일부는 대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후 14~15세기의 쇠퇴기를 거치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제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철학적 무기를 제공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방법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라는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제공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 내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은 플라톤에 의해 극단적으로 관념화된 소크라테스를 현실로 끌어내려 체계화,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 역할이 중세사회에서 다시 요구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리스토텔레스는 부활의 길로 들어선다.
9-12세기 중엽까지 보편논쟁을 통해 스콜라철학 형성에 크게 작용을 한다. 보편논쟁이라 불리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사상적 대립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요구하게 된다. 이 논쟁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보편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유명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형상이 질료와 결합해 있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관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보편은 개별적인 사물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실재한다고 규정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립된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유명론적 입장을 견지하며 비판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각각 셋인 것이며, 셋이 하나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셋이 하나라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의 연장선에 서있다. 보편적인 관념은 인간의 감각세계를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각에 나타나는 개체로서의 사물은 이러한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1세기 후반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대표적 인물인데, 보편은 개별적 물체에 앞서 실재하며 개체는 근원적인 보편자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담화에서 신은 “그 이상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만큼 완전하기 때문에 관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보편논쟁은 기독교 교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논쟁이었다. 유명론은 정통 기독교 교리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중세 신학의 출발점이었던 원죄설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논리였다. 유명론에 따르면 원죄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념상의 것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과거 유대교와 구별정립을 가능케 한 삼위일체론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서는 교부철학에 의해 형성된, 신이 이 세상에 관여하고 또한 인간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교회 자체, 즉 보편적인 교회라는 개념이 부정될 수 있었다.
유명론에 따르면 다만 수천 개의 개별적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교회라는 생각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보편논쟁은 논리와 철학이 어떻게 신앙과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대립된 우주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들 스콜라철학자들이 전혀 다른 출발점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관심은 이성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을 더 진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나타난다.
아퀴나스 이전의 가장 중요한 스콜라철학자로 손꼽히는 안셀무스 역시 이성과 신앙의 일치를 강조했다. 신앙은 지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신앙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2. 보편성 논쟁
스콜라 철학에는 2가지 핵심 논쟁이 있었다. 스콜라 철학의 핵심 과제는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지켜가면서도, 교황청의 정통 교리를 사수하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이후 중세 전 기간을 걸쳐 2가지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을 벌이게 된다.
첫 번째 논쟁은 바로 과연 “신이 존재한는가,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와 이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라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문제였다.
두 번째 큰 논쟁은 보편논쟁으로 핵심은 ‘보편적인 개념’ 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전자를 실제론, 후자를 유명론이라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시조라고 불린 사람으로서, 최초로 보편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은 유명한 철학자 보에티우스이다. 보에티우스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 ‘철학의 위안’ 이라는 긴 대화체의 저서를 발간한다. 내용은 과연 신,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의 문제였다. 원래, 보편논쟁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저서 ‘범주론’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포르피리오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학 입문론’ 이라는 책으로 다시 해석해 놓았는데, 보에티우스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보편논쟁은 시작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사물의 유(類)나 종(種)이라는 것이 과연 그 자체로 실제할까? 이 책에서 묻는다. 그리고 그는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개념은 우리 머리속에서 감각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 뿐, 진정한 사물의 실체는 알 수 없는 것일까? 우리 감각과 사물의 실체는 일치하는 것일까? 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3. 자유의지
철학의 위안에서 보에티우스가 고민한 것은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 라는 명제였다. 이 명제는 중세 내내 ‘신앙과 이성’ 중에 어느 것이 우위인가를 따지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중 다음의 이론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행운이, 또는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신의 섭리’와 어떻게 일치될까를 고민한다. 신은 완전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일관된 ‘신의 섭리’와는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인간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모두 신의 섭리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게 되며, 모든 인간은 신에 종속당한다. 이것은 곧 ‘신앙과 이성’의 관계 설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보에티우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강조한다. 왜냐면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이 행한 모든 악한 행동은 모두 ‘신이 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예정한 잘못을 인간이 했는데, 인간이 벌을 받아야할 이유도 없고, 인간의 잘못은 사실 모두 신의 잘못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에티우스는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인간은 분명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정리했는데, 그럼 인간과 신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논리는 바로, 인간에 자유의지의 한계라는 논리이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가진 의지이다. 반면 신의 의지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지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의 관찰안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여 신은 어떤 사실을 미리 예정하였고 그 예정된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수 있지만, 인간은 어떤 사실을 예정하지 못하고 그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절대적 능력이 없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고, 그 자유의지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준 것이다. 이 논리 속에서 보에티우스는 인간과 신, 그리고 각종 자연의 관계를 낮은 순에서 높은 순으로 체계화 시킨다.
➀ 감각 : 하등동물도 있는 가장 낮은 인식의 도구 - 아메바도 촉수가 있다는 정도
➁ 표상 : 고등 동물의 종들이 느끼는 인식의 도구 - 개나 말, 소 등이 스스로 행동하는 정도
➂ 이성 : 인간에게만 있는 인식의 도구 -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나, 절대성은 없는 것
➃ 직관 : 신에게 있는 것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는 것
즉, 신이란 존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도 없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려는 의지도 없는 완전무결한 관찰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과 함께 인간에 대하여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고 훗날에는 인간에 대하여 용서하시거나 심판하실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에티우스가 알고 있는 지상의 나라는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묵묵히 관찰되고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악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악에 대하여 최대한 용서하려고 하신다. 이것이 곧 보에티우스의 신학 체계이다. 이것은 게르만족들에게 ‘용서와 교화’ 라는 체계적 원리로 나타나게 된다. 중세 유럽 사회의 종교적 큰 틀이 완성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이성 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음으로서 훗날 ‘신앙과 이성’의 우위 문제를 유발시켰다. 또, 그가 제기한 보편은 개별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 라는 보편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Ⅲ. 아퀴나스
중세 신학의 체계화, 합리화 과제를 집중적으로 수행한 인물이 바로 ‘스콜라 철학의 왕’이라 불리는 아퀴나스(Aquinas, 1225~1274)였다. 그는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기독교화시켰듯,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하는 데 몰두했는데, ‘신학대전’은 그 성과의 집대성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신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다룬 21권으로 된 방대한 저작이다.
신학의 합리화를 통한 대중화는 ‘신학대전’ 머리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는,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기성 신자들뿐만 아리나 신앙 입문자들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고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이와 같은 여러분들에게 간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관한 모든 것을 신앙 입문자 교육에 가장 알맞도록 진술하자는 것이다.”
1. 신의 존재증명과 형상 - 질료 관계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존재론의 기본적인 특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아무 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 운동의 원인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들어가면 어떤 경우에는 미묘하게, 또 다른 경우에는 좀 더 분명하게 철학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중세 철학의 특징이 신학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리에서 그의 인식론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범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개된다. 아퀴나스는 구체적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 합성체이며 물질적 세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한다. 그는 존재란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으로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본질은 이러한 존재와 합성하여 구체적 존재자이게 한다. 즉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활용하여 존재가 현실태라면 본질은 가능태에 해당한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의 존재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존재자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존재는 움직임을 갖는데, 움직임을 갖는 모든 것은 어떤 것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인과관계의 최초 작용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현실에는 수많은 우연적 존재가 있는데, 우연은 오직 필연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필연적 존재자가 없다면 어떤 우연적인 존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적 존재자 역시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은 신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신의 당위성이 설명된다. 모든 존재와 변화 원인으로서 신의 존재를 필수적인 것으로 증명한다. 신은 제 1원인이며, 신은 순수한 활동이며, 가장 참되고 완전한 존재이며, 절대적인 본질이며, 그리고 만물의 근원이요 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분히 아퀴나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하나로부터 유출되듯이 다른 모든 것들이 생성되었다는 점, 이를 논리적인 필연성을 통해 증명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와 연결된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보편적인 원인에서 전 존재가 흘러나오는 것, 바로 이 유출이 창조이다" 라고 규정한다. 이 때 유출된 것을 원형에 비하자면 모상(模像)에 해당한다.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를 상징하는 플로티노스의 ‘근원적 일자’ 개념이나 유출설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증명 과정에서 현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 현실태와 가능태를 활용하여 존재와 본질을 규명하는 점 등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과 현실적 존재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에 있어서도 신플라톤주의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존재자들은 관여를 함으로써, 즉 신의 질서에 참여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신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신이 일차적이고 근원적이라는 점이야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일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신의 질서가 현실적 존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신의 질서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 존재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신이 현실적 존재 외부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플라톤의 이데아 실재론을 넘어서 형상과 질료의 결합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은 아퀴나스의 논리 가운데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인간 존재를 규정함에 있어서도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아퀴나스는 생명의 탄생을 논하면서 생명의 시발점이 자궁 내의 피라고 규정한다. 자궁의 피에 신, 하늘의 영혼들, 천체, 아버지와 그 정액 등의 요소들이 작용을 함으로써 생명이 탄생된다고 설명한다. 오직 비물질적인 근원적 일자, 신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창조된 것으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수용은 아퀴나스의 영혼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플라톤으로부터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을 영적 실체로 이해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자 능동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영혼이 신체와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의 결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영혼론은 형상의 질료의 결합을 통한 실재를 분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육체의 형상으로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이 역시 영혼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극히 자연적인 실체에 다름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신학이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영혼이 소멸할 수 있는 질료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교리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하던 영혼불멸설이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학의 입장에서는 영혼이 육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해야 영혼을 통해 죽음 이후에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영혼은 육체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육체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지성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퀴나스는 각각의 인간은 영혼 안에 자신의 고유한 지성을 소유하며, 그 영혼은 파괴되거나 소멸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감각과 이성 그리고 인식
인간의 영혼이 신체와 결합된 것이라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인간의 지식에 대해서도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신비적이거나 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인간의 지성을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능동지성은 감각을 이용한 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적 관념들을 추상해내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 수동지성은 능동지성을 통해 추상했던 보편적 관념들의 저장소이자 그 관념들을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가 보기에 능동지성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인 힘으로서 영혼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결합된 형상이기에 인식은 감각기관을 통해 형성된다. 결국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료적인 사물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감각, 또한 이와 연관된 지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照明說)과 대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빛이 비추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듯이 신에게서 계시가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이데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식의 출발이 초월적인 계시에 있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식은 감각과 무관한 직접적 직관을 통해 물질적 세계로의 인식으로 내려오는 하향적 관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감각의 역할은 부정되고, 이성 역시도 부차적인 역할로 한정되었다. 그런 점에서 신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식의 출발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인식은 보편적인 존재인 신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개별 사물들에서 출발한다. 우리들은 돌의 본질은 항상 개별적인 돌에서, 말(馬)의 본성은 개별적인 말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관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가 된다."고 한다. "신은 모든 것을 똑같이 창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존재의 단계를 갖고 있지 않은 우주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존재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의 본질에 나가 설 수 없게 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적인 관념론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퀴나스가 감각의 종합이 곧 인식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는 자연 대상에 관한 지각은 그 물질과 결합되어 있는 형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수용한다. 물질적 대상에 대한 감각의 작용은 아직 질료성이나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감각에서 출발하되 질료성과 개별성을 넘어서 형상과 보편성으로 추상화하는 과정이 별도로 필요하게 되는데, 이 능력이 바로 능동지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 역시 경험론자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조명설처럼 영혼이 신체나 감각과는 무관하게 질료와 분리된 형상, 계시된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퀴나스는 만약에 영혼이 이미 질료로부터 분리된 형상만을 받아들이고, 감각은 배제되는 것이라면 영혼과 신체가 결합해있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플라톤을 반박한다. 만약 플라톤의 주장이 참이라면 선천적인 시각 장애자도 빨간 색이 어떤 색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감각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지성의 활동 과정에 대해서도 분석을 한다. 지성에 대해서는 <신학대전> 1부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지성의 첫 번째 활동으로 “우리들에게 개별적인 것의 인식은 보편적인 것의 인식에 선행한다. 이것은 감각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에 선행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감각에서나 이성에서 보다 일반적인 대상이 덜 일반적인 대상의 인식보다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지성의 활동 과정 혹은 순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인 개념에 이르고, 이러한 보편화된 이성을 통해 다시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에서 보편으로 그리고 다시 개별로, 그러한 의미에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그리고 다시 구체로 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지성의 두 번째 활동은 “인간의 지성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과정에 놓여있는 탓에, 한 번에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그래서 추상 활동을 통해서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다음에 속성과 우유성, 존재 방식, 상황 등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지성이 요소간의 결합-분리와 긍정-부정적 판단을 하고 다른 판단으로 추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에 대한 지성의 판단활동을 다루고 있다. 종합과 구분, 긍정과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을 판단 결과와 실재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가 <신학대전>에서 진리에 대해 다루면서 “진리란 지성에 있는 질서를 가리킨다.”, “사물이 그 조물주의 관념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진리는 사물 속에 있다. 그리고 지성이 사물에 일치할 때 진리는 인식하는 지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이다.”라고 강조했듯이 판단 결과와 실재의 일치가 진리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영혼이 물질에 해당하는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까닭에 비물질적 실체에 대한 인식은 매우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학대전> ‘영혼은 어떻게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을 인식하는가’에서 “이승에서의 인간 지성은 감각으로 묶여 있고 따라서 직접 물질적 사물들에로 향한다. 감각으로부터 그에게 제공된 것들을 자시 자신의 추상 작용을 통해 비물질화시켜 인식한다. 비물질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직접 인식하지 못하고 그 결과들로부터 오직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비물질적 실체들은 다른 본성에 속하므로 그것들을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물질적 실체의 대표적인 것으로 신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우리 지성이 창조된 비물질적 실체들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다면, 더 더욱 창조되지 않은 비물질적 실체 즉 신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랑이나 신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운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인 영혼은, 비질료적인 순수 형상은 아니므로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비물질적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물질적 실체에 대한 접근은 최고의 비물질적 실체인 신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완전한 인식은 아니고 비물질적 실체의 일부분만 인식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신의 협력’이라고 규정한 점이다. ‘신의 협력’이라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발상법을 지니고 있다. 조명은 일방적으로 한 족에서 다른 쪽을 비추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협력’에서는 신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이 인식의 주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아퀴나스에 이르러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퀴나스 역시 신학자로서 신에 의한 세계와 인간의 창조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아직 인간 정신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데에 이르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신학과 대비해 볼 때 인간 정신의 상대적인 독립성 혹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3. 신학과 철학의 관계
아퀴나스는 어떻게 하면 신학의 본질이나 본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철학을 신앙에 도입할 것인가에 몰두하였다. 이성과 철학을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먼저 그는 신학을 학문으로 규정한다. <신학대전>을 ‘계시된 거룩한 학문’으로 시작하면서 “신학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들로부터 흘러나온 이론 체계일 뿐 아니라 신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확실한 원리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한다. 기하학이라는 학문이 그러하듯이 신학도 부정될 수 없는 확고한 원리에 기초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신학은 인간 활동들을 성찰함으로써 신에 관한 사정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학문이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학과 철학 사이에 일종의 역할 분담을 시도한다.
철학이 이성의 힘으로 자연 질서를 연구한다면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타난 대로 초자연적 질서를 밝히는 학문으로 구분한다. 그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과 인간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당위성이 이성의 한계에서 도출되고 있다.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초자연적 목적으로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초자연적 목적으로 향하게 하려면 신의 계시, 즉 신학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학문의 대상이 계시된 것이므로 계시된 것에 의하여 연역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철학은 자신의 원리를 이성에 의해서만 이해하고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고찰하는 학문으로 규정한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이 둘이 관계이다. 당연히 신학자로서 그는 모든 학문에 대한 신학의 독보적인 우위성을 인정한다. 그는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성의 논술 방식도 채택한다.”라고 주장한다. 본질상 사변적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실천적 성격을 포함하는 철학에 앞서는 것이며 신학이 이성의 논술 방식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신학이 철학을 규정하는 관계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철학을 검토할 때는 그 철학이 제기되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면 철학의 흐름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큰 흐름을 잊고 오독을 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이고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첫 장을 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서 필요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계시된 거룩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별도로 필요한가로 시작했는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당위성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나 철학의 진리는 신학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가 아닌 방법의 차이이며 양자의 목적은 동일하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만 보더라도 이성을 통한 철학의 비중에 대해 상당한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신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신학의 절대적인 자립성을, 철학은 상대적인 자립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제한적, 부차적으로만 인정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지식을 신앙과 계시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신앙주의와 모든 초자연적인 신앙의 진리들을 이성 진리에 귀속시키려고 하는 이성주의를 모두 경계하고자 했다.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를 고려할 때 아퀴나스의 견해는 중요한 발상의 전환에 해당한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은총과 자연의 관계로 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성하기 때문에 자연이성은 신앙에 조력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의지의 자연적 경향이 사랑에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지 은총이 우위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연 존재와 자연이성에 대한 관심이다. 이어서 “은총은 자연을 전제할 뿐 아니라 보존하고 존중하며 완성하고 고양시킨다. 그러면서도 은총은 자연을 초월한다.”고 강조한다.
신의 은총이 자연에 대하여 하는 역할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 피조물인 인간이 자연을 전제하고 존중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이성을, 신학이 철학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이성과 철학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비중감각을 살펴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아 저울추를 이성 쪽으로 좀 더 옮겨놓은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보편논쟁을 통해 흔들리고 있던 신학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특히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요구되던 신학의 상식적인 합리화를 위해서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수정이 불가피했었다.
Ⅳ.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 운동의 확산으로 인해 교회 안에만 머물고 세속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신을 바라봄과 동시에 세상의 일도 중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뜬구름 잡듯이 막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플라톤적 관념론에서 일정하게 벗어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신학으로의 재정립을 요구받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체스코(St. Francesco, 1181~ 1226)였다.
그는 지금까지 성자로, 기독교 역사 상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하나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사치와 방탕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다가 기도 중에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복음)는 말을 듣고 사망할 때까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신의 계시를 받고 기도와 빈곤, 그리고 자비의 삶을 택한 것이었다. 이후 가난한 민중 속에서의 대중적 선교 활동이 유럽 전역에서 활성화된다.
1. 생애 - 좌절된 기사의 꿈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생애는 1182년 옷감 장수인 피에뜨로 베르나르도네와 프랑스인 아내 레이디 피카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는 청년기를 비교적 사치와 호사와 음악 속에서 동년배들의 탐나는 지도자 노릇으로 보낸다. 그는 매력적이고 위트가 있으며 친절하고 유머를 잘 구사하는 젊은이이며 재산을 펑펑 쓰는 호방하면서도 응석받이 아들이다. 그리고 그의 불타는 야망은 그의 영웅들 즉 아더왕의 원탁의 전설적인 기사들과 샤를르마뉴 대제의 용사들처럼 기사가 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20세 되는 때에 아씨시와 그 이웃 마을인 페루지아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말에서 떨어진다. 아씨시의 시민들은 참패하고 프란체스코는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있는 한 조그만 마을인 폰테 산 지오반니에 포로가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부나 지위 때문에 일반 시민이 아닌 귀족들과 함께 수감된다. 그러한 구분과 격리는 젊은 프란체스코를 붙어 다니며 괴롭히기 시작한다. 귀족들의 좀 더 나은 숙소라 해도 축축하고 지저분한 감옥의 상태는 프란체스코의 민감한 체질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여 피에뜨로 베르나르도네는 병을 이유로 그의 아들을 몸값을 치르고 석방시킬 수 있게 한다.
마침내 석방되어 고향 아씨시로 돌아오자, 프란체스코는 1204년 한해를 병석에서 보내는데,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투옥이며 또 다른 시험의 해이다. 그리고 마침내 병상에서 일어나고 그는 아씨시의 언덕들을 수심에 차 거니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그 화려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빛은 프란체스코 안에서 사라졌다. 즉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밝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할 음성을 듣고 비전들을 보기 시작한 것은 그의 이러한 외로움의 사막에서이다.
첫 번째 음성은 스폴레또시에서 꾼 꿈에서 오는데, 프란체스코는 기사로 전쟁에 나가 우울함을 없애려는 또 다른 쓸데없는 시도를 하면서 거기에서 야영한다. 그는 벽들이 방패로 덮여진 한 성의 커다란 방을 보는데, 어떤 음성이 그것들은 프란체스코와 그의 추종자들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꿈을 기사직에 관한 예언과 영광으로 잘못 이해하는데, 그때 또 다른 음성이 들려온다:
“프란체스코여, 주님께 봉사하는 것이 더 나으냐, 아니면 하인에게 봉사하는 것이 더 나으냐?”
“오, 물론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너의 주님을 하인으로 바꾸려 하느냐?”
그리고 사무엘 예언자처럼, 프란체스코는 그에게 말하고 있는 음성을 알아본다.
“주님, 당신께선 제가 무얼 하길 바라십니까?”
“아씨시로 돌아가라. 그 곳에서 네가 무얼 해야 할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 비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체스코는 전쟁터에서 영광을 구하는 자신의 조급한 갈망 대신에 하느님께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씨시로 긴 내면의 여행을 시작한다. 홀로 아씨시로 돌아올 때 프란체스코의 수치심은 얼마나 컸을까! 기사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험은 용기이다. 그런데 그는 전투에서의 죽음보다 전투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프란체스코는 전투지에서 이탈한 고독한 기사가 되어 집으로 온다.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그의 확신에 대한 이러한 용기는 프란체스코의 인격의 보증이 되는데, 그래서 죽을 때까지 어떤 행위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스폴레또에서 돌아온 후로 그해 내내 프란체스코는 아씨시의 외곽에 있는 한 동굴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분이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도록 허용한다. 그 모든 투쟁 속에서, 꿈속에서 보았던 비전과 숙고를 거듭하며 프란체스코는 그의 기사적인 이상들의 기본 바탕을 매우 섬세하고 고귀하지만 동시에 어리석고 역설들로 가득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현자의 돌을 발견한다. 즉, 기사가 군마에서 내려와 궁정의 어릿광대와 가수가 되는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보통의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중세사회라는 축소된 세계의 모든 이들의 삶들에 지혜를 갖고 영향을 끼치는 궁정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이다. 그는 듣는 사람이 되는데, 그 바보스러움이 현자들의 지혜보다 더 현명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인간의 삶에도 신비가 너무나 많은 것처럼 그에게 변화를 가져다주는 순간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란체스코에게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의 결과인데, 그 누적된 영향은 그에게 더 깊은 마음의 움직임과, 그가 내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자각하고 있었다면 이 모든 것을 알았을 터였다. 그의 체험들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그는 주변의 목소리들, 자신의 환경의 목소리들과 그것들이 나타내는 가치들보다 더 진실한 내면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
2. 나의 집을 수리하거라
그를 향한 내면의 음성은 그가 어느 날 무너져가는 작은 경당인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듣게 된 바로 그 음성이다. 즉 “프란체스코, 가서 네가 보듯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거라.” 실제로 산 다미아노 경당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작은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했기 때문에 주님의 더 큰집인 교회 자체를 재건하는데 까지 가게 된다. 아씨시의 가장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그가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상점에 있는 옷감 꾸러미를 훔쳐 말을 타고 이웃마을인 폴리뇨로 쏜살같이 달린다. 그곳에서 그는 옷감과 말을 팔고는 산 다미아노 교회로 걸어서 들어온다.
그는 그 돈을 자신을 알아보는 한 놀란 사제에게 주는데, 사제는 이 아낌없이 주는 행위가 프란체스코의 아버지가 모르거나 찬성하지 않은 채 일어난 것은 아닌지 당연히 의심했기 때문에 그 돈을 받기를 거절한다. 실망한 프란체스코는 창문턱 위에 그 돈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돌들을 구하러 아씨시로 떠난다.
프란체스코의 삶의 또 다른 전환기: 하느님의 집을 돈으로가 아니라 당신자신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구걸을 함으로써 얻어진 돌들로 재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지에게 주는 돌들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주의를 끄는 일이 없이 거지처럼 입고 돌들과 석재를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의 주의는 자연히 비웃음과 경멸로 바뀐다. 그래서 어느 날 프란체스코가 아씨시의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을 때 군중은 그를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아버지가 시끄러운 소리들을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상점의 문가로 간다. 그는 크게 경악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아들이 거리를 지나며 조롱당하는 것을 본다. 피에뜨로는 가족의 명예에 대한 이런 모욕을 몹시 화내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에 프란체스코가 옷감과 말을 팔았을 때 피에뜨로는 그를 집으로 끌고와서 창고 방에 감금시켰었다. 그러나 피에뜨로가 사업차 여행을 떠나야 했을 때 레이디피까는 남편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프란체스코를 풀어 주었으며, 그때 프란체스코는 즉시 산 다미아노 경당의 가난한 사제와 함께 살기 위하여 떠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 그것은 피에뜨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거리로 뛰어나가 아들을 아씨시의 주교 앞에 끌어다 놓고는, 프란체스코가 옷감과 말에 대한 돈을 자기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데 어찌 되었던가: 프란체스코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전례행위를 재현하듯 옷을 조용히 벗는다. 그리고 주교관 마당에 모여 있는 군중 앞에서 아버지의 발 앞에 옷을 벗어 놓으며 그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말로 강변한다: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피에뜨로 베르나르도네를 내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나는 그의 돈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받은 모든 옷들도 돌려줍니다! 지금부터 나는 ‘피에뜨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주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 걸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거절하는 이 극적인 에피소드에서 프란체스코는 공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그가 행한 행위의 증인으로 초대한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공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떠나간다. 그리고 나머지 삶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행위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은 여전히 마음속에선 기사이다; 그는 명예와 고결함을 지닌 종교적인 삶을 입을 것이다. 그 외 규약은 복음의 기사도와 성실함이 될 것이며 그는 그의 서약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한다. 그리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인 여행들 중 하나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프란체스코의 여정인 것이다.
프란체스코에게 있어서 하늘의 아버지는 예수께서 계시하신 아버지이며, 그분께로 가는 여정은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그 길인 것이다.
3. 복음을 문자 그대로 살기- "네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프란체스코는 즉시 본격적으로 복음을 문자 그대로 살기 시작하였고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의 삶의 올바름은 다른 이들을 당기기 시작한다. 프란체스코를 추종한 많은 이들 중 첫 사람은 퀸타 발레의 베르나르드란 아씨시의 한 부유한 상인이다. 프란체스코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를 본 그는 그의 집으로 프란체스코를 초대한다. 저녁식사 후에 두 사람은 잠을 자러 가고 프란체스코는 곧 잠이 든 척 한다. 그러자 베르나르드도 잠이 든 척 하며 코를 골기 시작한다. 베르나르드의 코고는 소리를 듣자 프란체스코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이시여”를 밤새도록 계속해서 반복하며 마루에 무릎을 꿇는다. 깜짝 놀란 베르나르드는 깊은 감동을 받고 아침에 하느님의 종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프란체스코에게 묻는다.
이러한 프란체스코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그의 모든 태도에 한 열쇠가 된다. 그는 베르나르드에게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거행되는 아침 미사에 함께 가자고 요청한다. 미사 후에 프란체스코는 세 번이나 복음서를 펴 달라고 사제에게 요청한다. 이것이 그 구절들의 내용이다: “만일 네가 완전해 지려 거든, 가서 모든 네 소유물을 팔아라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지팡이나 식량 자루나 신발이나 돈도 지니지 말아라”
“누구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 (마태 19,21; 루가 9,3; 마태 16,24)
그리고 그것이 베르나르드가 행한 것이고 성 프란체스코 제3회가 될 남자 여자들의 한 운동의 시작이 된다. 프란체스코가 사제에게 복음서들을 펴달라고 요청한 것은 커다란 의미를 내포한다. 바로 시작부터 아씨시의 조그마한 가난한 사람은 교회의 사람이 되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께로 가는 그의 개인적인 여정을 낭만화 시키면서 쉽사리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이다.
프란체스코는 참으로 본질적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서 본질적이다. 그는 언제나 그와 그의 추종자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회로 돌아간다. 그는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이렇게 쓴다, “주님은 나에게 지금도 여전히 그러시지만, 거룩한 로마 교회의 법에 따라 살고 있는 사제들에 대한 너무도 위대한 신뢰를 나에게 주셨으며, 그래서 그들이 나를 박해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에게로 계속 돌아가고 있다.”
사제직분에 대한 존경이 너무 컸기에 그는 자신을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낮게 여겼고 결코 스스로는 서품을 받지 않는다. 그는 교회의 서품된 부제이지만 결코 사제는 아니며 자신의 수도회가 비성직 수도회가 되도록 한다.
초기 프란체스코 전승의 이야기들은 줄줄이 영혼의 열정적인 힘들과 그것들의 정화를 다룬다. 프란체스코가 나병환자들을 껴안음으로써 자신의 결벽증과 마음의 비좁음을 극복한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구비오의 늑대를 길들일 때 그는 그 자신의 어두운 측면, 폭력적인 그림자 자아를 포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폭력에 대한 자신의 잠재성을 끌어안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바라보는 모습을 주님께서 구원하시도록 허용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폭력과 대면하는 개인의 풍자적인 이야기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길에 대한 최후의 마무리와 승인은 그가 죽기 2년전 아씨시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북쪽에 있는 한 적막한 산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이다. 그 산은 라 베르나라고 불리는데 프란체스코는 성 미카엘 대천사의 축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1224년 9월초에 거기서 칩거한다. 라 베르나에서 올린 프란체스코의 기도는 그가 누구이며 역사에 왜 그런 충격을 주었는지에 대한 열쇠가 된다. “오 주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주소서-당신의 극심한 수난의 고통을 모두 가능한 한 온전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체험케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도록 움직인 그와 똑같은 사랑을 당신을 위하여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오직 사랑하는 이만이 이러한 말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기사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러한 말들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라 베르나에서 기사인 프란체스코와 사랑하는 사람인 프란체스코는 이러한 최후의 “어리석은” 요구 안으로 함께 몰입하게 된다. 오직 프란체스코의 삶의 겸허함과 진실함만이 돈키호테와 같은 허세로부터 이 기도를 구해준다. 그의 전 삶은 이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전혀 자아를 의식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며, 눈은 예수님께 고정하고 누가 보고 있는지 주위를 전혀 살피지 않고 만들어진 기도임을 증명한다.
밤새도록 퀸타빌레의 베르나르드가 들은, 밤새도록 프란체스코가 했던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이시여” 기도처럼 라베르나에서의 프란체스코의 요청은 사랑하는 이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한 연인의 탄원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예”가 너무도 완전한 포옹이기에 프란체스코의 옆구리와 손과 발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표시인 그분의 육체에 있는 사랑의 상처들의 징표를 받게 된다. 프란체스코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육화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를 입양한 아버지인 성부가 입양에 만족하지 않고 프란체스코를 그의 유일한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의 고유한 표지들로 봉인함으로써 육체적으로 당신 아들로 만드신 것과 같다.
프란체스코는 라베르나에서 갈바리 수난이 그의 몸과 영혼에 연장된 오상을 받은 뒤 2년을 더 산다. 그 신비의 산에서 떠날 때, 수년간 앓았던 결막염이 악화되어 프란체스코는 산 다미아노로 자신을 데려다달라고 청한다. 성 글라라 수도원 옆에 있는 한 조그마한 오두막집에서 그는 육체적, 영적 어두움 속에서 50일을 보낸다. 그 낮과 밤들 동안 예수는 라 베르나에서 그의 몸을 가진 것처럼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껴안는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예수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십자가상에서 울부짖을 때 느꼈던 것을 체험한다.
4. 그러면, 행복하거라
프란체스코는 라 베르나산에서 온통 느꼈던 사랑하는 하느님의 포옹으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다고 느낀다. 그들의 사랑은 궁정의 사랑의 법칙에 따라 숙녀와 기사의 사랑처럼 단지 실망과 두려움만 느끼는 절정에 달한 것일까?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의심과 하느님의 상처를 유일한 동반자로 가진 프란체스코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한 음성을 듣는다.
“프란체스코야, 만일 이 모든 재앙들과 바꾸어서 전 지구가 금으로 변하는 너무도 큰 보물을 네가 받는다면, 그것말고는 네가 만족하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가 전혀 없게 될 것이냐?”
“그렇습니다. 주님”
“그러면, 행복하거라, 왜냐하면 나는 네가 진정으로 하늘왕국을 즐기게 될 그날을 네게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이미 그것을 소유한 것처럼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돌은 프란체스코의 마음으로부터 굴러 나오고 그는 영원히 자신의 동굴에서 일어난다. 그가 젊은이었을 때 동굴에서 찾으려했던 보물은 마침내 그의 것이 된다. 그리고 무아지경 속에서 프란체스코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시이자, 성부께 드리는 감사의 찬미가인 「태양 형제의 찬가」를 노래한다. 이 찬가 속에서 프란체스코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아지경 속에서 그의 영혼의 깊이를 보여주는데, 그곳에서는 반대되는 것들의 심오한 화해가 일어난다. 그는 땅, 물, 공기 그리고 불의 네 가지 중개적인 요소들을 취하여 이원성의 조합 속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한다.
오상(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 즉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의 두 손과 두 발의 상처와,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을 받은 후 최후의 2년간 프란체스코는 위대한 왕의 사자로서 설교와 증언을 계속한다. 그리고 1226년 10월 3일 그가 죽을 때, 한 빛이 수바시오 산 위로 보이는데, 그 빛은 산 위에 여전히 있으면서, 경사를 따라 아씨시속으로 스며 들어온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씨시에서 그 빛을 느끼고 뼛속 깊숙이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임종시에 한 프란체스코의 말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 울린다; “나는 해야 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프란체스코는 모든 인식은 신적인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듯이 신이 우리 인식의 맨 처음이라고 보는 입장에 가까웠다.
Ⅴ. 나가는 말
중세 초기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기독교화시켰듯,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시키는 작업을 한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면서,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듣고 부르던 송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의 저자의 생애를 보면서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의 정점에서 이런 기도문을 썼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내가 간구하오니 당신에게 기뻐함이 되는 것을 열렬히 갈망하도록, 슬기롭게 탐구하도록, 참되게 인지하도록, 완전하게 당신의 이름의 찬양을 위하여 완수하도록 내게 허락하여 주소서.“
나 역시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학을 슬기롭고 참되게 하여, 여름 가뭄의 시원한 냉수처럼 하나님을 시원케 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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