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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근본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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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근본주의'(Fundamentalismus)민큼 널리 사용되고, 또 그 때문에 매우 모호한 개념도 없다. 이 낱말은 개신교뿐 아니라 이슬람교와 유대교에서도, 아니 모든 종교에서 특정한 보수적 경향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도 특정 조류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현실'(realos)을 거부하는 '바탕'(fundis) 고수, 이것은 보수적인 당파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적색' 혹은 '녹색' 당파에도 있는 현상이다. 아무튼 이 개념을 적절히 사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의미를 명확히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로 말미암아 교회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슐라이어마허 안에서 새로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근대로의 신학적 패러다임 전환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그야말로 구체적인 모습을 취했다.

 

 

2. 근본주의 신학

 

1) 근본주의 신학의 기원

 

'근본주의'19세기말 미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875년 제임스 브룩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성경공부모임은 예언 사경회로 발전했다. 이 예언사경회는 1878년 브룩스의 지도 아래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나이아가라 신조'라고 불리웠다. 그 내용은 성경 영감, 삼위일체, 아담의 타락과 전적 부패, 원죄와 사람의 전적 부패성, 중생(重生)의 절대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책(罪責)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구원의 확신은 모든 신자의 특권,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심 되심,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들로 구성됨, 성령은 우리들의 영속적 위로자이심, 성령을 따라 삶, 신자와 불신자의 죽은 후 상태와 최종적 부활, 심판의 때가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등이었다.

 

그 후,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의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 이 선언은, 19세기 후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근본주의가 1910년대,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던 기간(1910- 1915)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들] 출판 이후,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2) '근본주의'라는 말

 

'근본주의'라는 말은 1920년 침례교기관지 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인 커티스 리 로우즈(Curtis Lee Laws 1868~1946)가 북침례교 총회안의 반현대주의자들을 가리켜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이 용어는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문화의 세속화 양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총체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첫째로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 둘째는 반현대주의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전통적, 초자연적, 성경적인 기독교의 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는 반현대주의자나 혹은 세속화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상의 반현대주의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혹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막연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근본주의가 호전적인 반현대주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특징이 있다면 스타일에서는 부흥사이고, 교리면에서는 근본주의이며, 윤리면에 있어서는 반현대주의에 속한다.

 

3) 근본주의 신학의 성쇠

 

근본주의의 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룬 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원인은 두 가지 정리된다.

 

첫째,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원숭이 재판은 근본주의의 대중적인 기반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테네시주 데이턴의 고등학교 교사 스콥스(John Scopes)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테네시주의 법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국방상을 역임한 유명한 변호사요 교회 장로인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이 근본주의 입장을 변호한 반면, 무명의 신문 기자 대로는 스콥스를 변호했다. 이 재판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이었다. 스콥스는 진화론을 가르친 것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반면, 언론과 여론은 근본주의를 비난, 정죄했으며, 현대 과학에 대한 브라이언의 무지가 폭로되었다. 이 재판의 여파로 근본주의자들은 몽매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으며, 일반 대중들로부터 무식하다는 불신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교권투쟁에서도 패배하여 교단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둘째, 근본주의 운동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다. 근본주의로부터 신 복음주의와 전투적 근본주의가 분열되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논쟁 지향적이며 반 지성주의적 경향과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 반기를 드는 신 복음주의 운동그룹이 일어났다. 그들은 1941년에 미국 복음주의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옥켄가(Harold Ockenga), 헨리(Carl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의 지도하에 크게 성장했다. 또한 근본주의는 전투적 근본주의와 온건한 근본주의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자유주의를 관용하는 교단으로부터 분리를 강조하며, 그런 교단에 속한 근본주의자와의 교제도 거부한다. 밥 죤스대학교의 설립자 밥 죤스가 이를 대변한다. 한편, 후자는 엄격한 분리주의를 주장하지 않는 그룹이다. 무디성서학원, 달라스신학교, 탈보트신학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약화되었음에도,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새로운 교회와 교단 창립을 통해 신 근본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929년 매첸(J. Gresham Machen)은 프린스톤신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1936년에는 점차적으로 자유주의화되는 북장로교에 대항하여 정통주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매킨타이어(Carl McIntire)의 주도로 반 현대주의적인 미국 교회 협의회(the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그리고 1948년에는 반 W.C.C.적인 국제 기독교 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창립되었다. 1950년에는 근본주의의 교리를 근본신조로 하는 성서 침례회(the Bible Baptist Fellowship)가 창립되었다. 성서침례회는 급 성장하여 미 대륙에서 가장 큰 근본주의의 교단이 되었으며 현재 약 4000개의 지 교회를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영역이 문화, 사회, 정치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인 문제에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1970 -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근본주의는 팔웰(Jerry Falwell)의 주도로 정치적 행동 그룹인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를 창설하여 정치인을 위한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4) 근본주의 과제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근본주의의 역사적 의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려 한 것과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각성하게 한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실히 보존하려 한 것이 그 공헌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보존하려는 열심과 순수성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지성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반지성주의의 새로운 원인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종교문제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이성과 학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보수하고 반복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재 진술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소홀히 했다.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려는 노력에 부정적이었다. 또한 근본주의는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비젼을 지닌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3. 자유주의 신학

 

1) 자유주의 신학의 배경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모든 사상 즉 종교를 비롯한 과학, 철학, 경제, 정치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 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거나 재진술함으로써 기독교를 변호하려한 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개신교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며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주 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 (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에 대한 개신교의 응답인 동시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개신교는 18세기에 여러 측면으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전쟁, 영국 시민 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과 같은 수많은 갈등과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출현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사회 계급이 발생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2)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화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 초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였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그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종교론 (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은 이론의 여지없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었으며 하룻밤 사이에 슐라이에르마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된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몇 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것은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응답이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재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둘째,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기와 관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인간 감정에 나타난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변적인 철학으로부터 신학을 독립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셋째,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슐라이어마허는 흔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창건자로 불리어진다. 그러나 후대 신학이 인간 중심적이 되거나 인간화된 것은 슐라이어마허의 방법론적 오류에 기인된 바 적지 않다. 그가 신학을 계시의 연구가 아닌 인간의 자기의식 또는 종교성의 연구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와 특징

 

유럽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 공항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에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하나님 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 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 신학이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슐라이어마허, 헤겔, 코러리지 채닝 등 19세기 초의 학자들은 종교의 본질과 신학의 과제를 신학적 토의의 주제로 삼았다.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토대에 기초하여 쉬트라우스 바우어 등 19세기 중엽의 학자들은 그리스도론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떻게 역사적 인물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9세기 말 경에는 기독교와 문화 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신학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와 사회 복음의 신학이 이를 입증해 준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성경의 무오성 부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그릇된 출발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계시종교로 부터 윤리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틸리히가 유럽에서 개신교는 죽었다. 개신교 신학의 마지막 200년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리츨에서 보듯이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점으로 삼아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히려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 단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4. 나오는 말

 

근본 바탕을 고수하는 것이 곧장 근본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종교의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들 성서를 축자적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바탕을 온전히 보전하거나 다시 찾아 얻었다. 근본주의는 '위협받고 겁먹고 동요된, 그래서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정체성'을 체현한다. 종교적 확신은 모험과 회의를 기피하는 보험(保險)사고 방식이나 보루(堡壘) 심성, 요새(要塞) 전략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나 큰 태연함에 터한 삶을 뜻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우악스런 도움 없이도 스스로를 관철하리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는 가운데.

 

한편, 슐라이어마허는 유례없는 신학적 사유작업을 통해, 명백히 시대제약적인 고대교회의 두 본성 교의 뿐 아니라, 계몽주의의 초라한 예수론도 넘어서는 근대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구원에 관한 우리의 체험이 예수의 이야기에 의해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영감을 얻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판 수정되는 대신, 오히려 우리의 체험이 예수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 처리해 버릴 수 있눈 위험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또한, 종교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전반적으로 철학적 신학적 상론과, 그리스도론이 인간학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론에 어떠한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를 미리 결정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다 진지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소외와 자기 분열, 고통, 죄책, 좌절 글고 역사의 모순과 재앙 이 모든 것이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 하나님의 구원 결의 안으로 통합 지양(止揚)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확고한 하나님 의식 역시 슐라이어마허는 요한복음서에 터해 이상주의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비밀과 예수의(하나님 안에서의) 유혹도 매우 에둘러 혹은 두루뭉술 뜻없이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청명함과 순전함을 지닌 이상적 인물이 육신적 현존으로부터 영적 현존으로 단절 없이 옮겨감으로 이해했다. 이 모든 것이 근대적 신학을 끝내 모호하게 만드는 문제점들이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근대의 시대정신에 영합한 근대의 신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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