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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역사 흐름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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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017 127일 저녁 745, 목회신학대학원 <교회사> 수업에서 조별끼리의 식탁 코이노니아를 마친 후, 이덕주교수님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할 때마다 새롭게 하려는 영적 movement가 계속 있어 왔다. 경건주의 운동, 1,2차 각성운동, 한국 교회에 있었던 하디 부흥운동... 교회는 영적 존재다. 영적 존재로서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상실해 갈 때 그걸 회복해가려는 운동이 그분(하나님)의 간섭으로 일어난다. 교회가 그분의 것이기에!!! 그의 영을 쐰 사람이 촛불을 켠다. 지금 그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리더십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 교회의 영적 운동... 이것이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덕주교수님의 말씀을 한 마다라도 놓칠 새라 온 맘을 다해 강의를 듣다가, 불현듯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미션라이프 페이스 북에서 펼쳐지고 있는 '작은 루터로 살기 운동'이 생각났다.

 

국민일보와 CBS가 주최한 '나부터 캠페인'은 한국교회가 다시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 실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행사이다. 개혁은 삶의 변화가 원칙이다.

 

성경의 본질로 회귀하는 교회개혁이 이루어진지도 어언 500년이 지난 21세기, 서구교회는 세속화되어 스러져 갔고 한국교회도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듯하다. 속수무책으로 스러짐을 바라볼 수 없다. 사명감을 가지고 개혁자들을 본받아 다시 한 번 개혁의 횃불을 높이 올려야 할 때이다.

 

오늘 한국사회의 변동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요동치는 한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교회와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 순종과 같은 경건의 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경건한 삶을 요구 받고 있다. 내가 먼저 변화되면 가정과 직장, 교회와 공동체는 더불어 변하는 것이다. 성경적 기준이 우리 삶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삶의 기초를 세우고 다양한 사회적 노력들로 이어져서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영성을 되찾는 한국교회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한국 교회의 탄생을 기다리며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흐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역사 흐름

 

1) 종교개혁의 흐름

 

1517,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서며 시작됐던 종교개혁은 먼저 교회 안에서는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적 전통과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보다 단순해졌으며, 성만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에 초점이 맞춰졌다.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은 단지 종교뿐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의회를 통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종교적으로도 더욱 넓은 관용을 갖게 됐으며, 계급 구조적 사회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특히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따라 일반 성도와 사제 사이에는 어떤 위계적이며 신분적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평신도와 세속 군주와 주교들 사이 어떤 위계적 차이가 없다는 루터의 발상 자체는 유럽에서 민주사회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중세시대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에 대한 의식이 더욱 확고해졌다. 만인제사장설은 신앙적인 평등을 넘어 계급 타파와 평등사상의 혁명적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루터는 1524~1526년 발생한 농민전쟁에 대하여 독일 제후들에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폭동을 진압할 것을 허락한다. 이후 1524년 귀족들의 군대는 10만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되었다. 루터는 농민전쟁을 겪으며 영주의 편에 서게 되면서 상당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한편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개인의 신앙 자유를 허락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다. ‘성속이원론 철폐로 근대 자본주의 발달 불러와 종교개혁운동은 당시 유럽 전역에 자리 잡아 가고 있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종교개혁의 역사가 유럽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기초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에서는 16~17세기 종교개혁의 윤리관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는지 분석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본축적으로 인한 부의 유혹은 각종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부의 축적을 애써 숨겨온 자본가들과 영주, 제후들이 앞장서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교회는 자본주의 대안사회가 되지 못하고 국가 자본주의에 그대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욕적 신앙은 부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이것이 금욕적 신앙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 2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는 경건주의의 흐름

 

경건주의가 발생한 작은 배경을 든다면 종교개혁에서 정통주의를 거쳐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경건주의는 이 가운데에서 정통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볼 때 경건주의는 이른바 죽은 정통주의를 반대하면서 일어났다. 경건주의자들이 보기에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100여 년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는 화산처럼 폭발한 종교개혁이 정착하면서 제도화되고, 이론적으로 정리되면서 신학화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자연히 종교개혁의 중요관점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멀어지면서 이론적 영역에만 머물게도 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교개혁 후 기독교 안에 형성된 종파 사이의 교리 논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1600년 즈음에 신앙적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상황 곧 경건성의 위기가 생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경건성의 위기 현상은 이 시기에 유럽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경건성의 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경건주의의 발생은 이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형성되는 객관적인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에게 주관적 확신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신앙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다. 이즈음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문제의식과 정통주의 시대의 교리 논쟁을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런 위기 가운데서 이것을 넘어서고자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다. 정통주의는 바른 교리 또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는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교리에서 삶으로 강조점을 옮긴 것이다.

 

3) 루터를 비판한 웨슬리의 흐름

 

웨슬리는 1738524일의 올더스게잇 체험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난 직후 루터의 광팬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삶과 사상에 몰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1741615일자 일기에서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었는데, 이때 웨슬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진술하였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동안 그가 루터를 과대평가한 사실 때문이었다. 웨슬리가 루터에 대하여 제기한 문제는 1. 신비주의 색채 2. 율법폐기론이다. 이 둘은 하나님께서 공통적으로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로 허락하신 은총의 수단을 무력화 시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1787년경에 작성한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해’(On God’s Vinyard)라는 설교에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에 관해서라면 그 누가 마르틴 루터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화에 관해서 누가 그 사람만큼 무지하고 개념적 혼돈에 잘 빠져들 수 있겠는가?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고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그가 성화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발언을 통해 웨슬리의 루터 비판은 보다 체계화 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에는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모라비안의 정숙주의라는 거울로 들여다봄으로써 갈라디아서 자체를 다소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루터의 문제가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1787년 같은 해에 기록된 설교 지난 시대’(Of Former Times)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진술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많은 나라에서 신앙관에 관한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다른 몇몇 나라에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 그 자신은 임종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이름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나는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부름받았기를 바랬다.) 자신들의 신앙관과 예배에 대한 개혁은 일구어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내적 성품과 삶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을 향해 믿음과 예배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제공했지만 이에 따른 합당한 삶의 열매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즉 올바른 믿음을 가르쳤지만 그에 따른 삶의 변화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왜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지를 루터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즉 그의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 때문에 이런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웨슬리의 루터를 향한 이 같은 비판은 루터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평가할 만하다. 루터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들은 일반적으로 칭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서 성화의 자리가 없다. 성화는 칭의라는 사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루터에게서 칭의에 함몰되어 성화라는 중요한 주제를 간과하는 문제를 발견했고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두 축을 복원했던 것이다.

 

4)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화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 초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즉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그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방향을 제시하자 하였던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주 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 (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에 대한 개신교의 응답인 동시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개신교는 18세기에 여러 측면으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 전쟁, 영국 시민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과 같은 수많은 갈등과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출현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사회 계급이 발생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5) 근본주의의 흐름

 

'근본주의'19세기말 미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의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 이 선언은, 19세기 후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상의 반현대주의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혹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막연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근본주의가 호전적인 반현대주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특징이 있다면 스타일에서는 부흥사이고, 교리면에서는 근본주의이며, 윤리면에 있어서는 반현대주의에 속한다.

 

근본주의는 지성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반지성주의의 새로운 원인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종교문제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이성과 학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보수하고 반복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재 진술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소홀히 했다.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려는 노력에 부정적이었다. 또한 근본주의는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비전을 지닌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역사적 의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려 한 것과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각성하게 한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실히 보존하려 한 것이 그 공헌이다. 한편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영역이 문화, 사회, 정치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인 문제에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6) 대각성 운동의 흐름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미국인들은 유럽의 여러 지역,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대서양을 건너와 각기 다른 역사와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차대각성운동은 각기 다른 이민공동체가 함께 경험한 최초의 전국적인 사건이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대각성운동을 통해 공통된 기억과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를 체험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각성운동 기간에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국가적 공동체에게 특별한 섭리와 소명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확신이 국가적 언약 사상으로 발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1775~1783)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차대각성운동은 선교 열정, 인류애, 교파간의 협력, 교육 기관의 설립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1차 대각성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미국 독립의 기초를 놓았다.

 

2차 대각성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의로운 제국’(Righteous Empire)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개인적 구원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산돼 기독교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피니는 진정한 회심이란 선행과 함께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 진정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 고아와 장애인, 정신문제를 가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여러 특별구호기관들을 적극적으로 설립했다. 또한 당시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노예폐지론이었다. 노예제도 폐지는 신생국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이 따르는 문제였다. 하지만 피니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노예제도는 죄악이며 악습이기에 피 흘리는 노예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감리교는 1776년 독립전쟁 이전까지는 교파를 형성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순회설교자 제도를 가지고 있어 직접적으로 선교현장에 뛰어들어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한 결과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3.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믿음은 좋은데 생활은 엉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수적 세력은 큰데 거기에 걸 맞는 삶의 실천이 부족하다. 한국 교회에는 한 세대 전과 비교할 때 신학적 수준은 발전했고 신학적 지식과 저작은 풍성해졌다. 그러나 오늘 문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말처럼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의 문제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한국교회 현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1990년대 이전까지 성장 일변도로 달려왔다. 1970~80년대의 성장· 발전은 세계교회사상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계 경제계뿐만 아니라 교계에도 물신 숭배사상이 휩쓸게 되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산업화의 기치 속에서 교인들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받아 잘 살게 된다는 것이 교회의 주 흐름이 되었다. 1970년대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시작된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도시화로 인해서 다수의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 특히 서울로 이주해 옴으로써 도시교회들의 급성장이 있었으나 농촌교회는 피폐화되고, 1970년대 말 산업화로 인한 세속화로 그 성장세가 점차 둔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교회는 전통적 목회방식으로는 유럽의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쇠퇴와 몰락의 길을 면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목회에도 자본주의적 경영논리와 방법을 도입기 시작한다.

 

물질 만능주의

 

먼저 경제력이 영력의 수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가 헌금으로 낸 돈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불문하고 액수를 많이 한 교인을 신앙이 좋은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대다수의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를 선택할 때 신앙보다 헌금의 과다와 사회적 신분 지위를 더욱 고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사례를 많이 받는 목회자가 유능한 교역자로 대우받는 실정이 되었다. 따라서 무리한 헌금강요, 교회재정의 파행 운용, 목회자의 개인축재 등등 갖가지 오류가 파생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단 총회장 선출 과정에서 또는 목사를 임직시키는 과정에서 직책수여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돈과 향응과 선물이 오가고 있다는 점이다. 곧 교권매매 또는 성직매매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소위 국가조찬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교회연합활동을 위해 교계 지도자들이 교회당을 외면하고 굳이 호텔에서 모이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기 어렵다. 최근 성행하는 해외 선교지 현지방문 여행에서도 단기선교란 명의로 선교관광을 즐긴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기적 개교회 주의

 

또한 교회의 문어발식 지교회 경영도 주요 비판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생각의 부재가 개교회들의 세력 확장 경쟁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교회주의가 개교회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경쟁 관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대교회를 만들려는 개교회들의 경쟁은 물량주의로 흐르면서 교회 자체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복음마저 훼손시키는 결과를 남았다. 헌금자의 명단을 주보에 싣거나 헌금자를 일일이 광고하여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헌금의 본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역사의식의 부재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보수주의 계열에서 일제시대 이래 내세주의에 몰두하여 반역사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리고 경건지상주의에 치우쳐 현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지 못하였다는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한편 오늘날 신문을 장식할 만한 크고 작은 모든 비리에 기독교인들이 연류되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기독교의 이상을 실현할 만한 영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자본주의 병폐를 견제할 영적인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목회자 세습

 

물량주의 정신은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교권주의를 만들어 놓았다. 그 한 사례가 목회 후계자를 세습시키는 것이다. 도시의 초대형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직계후손에게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영화와 권세를 세습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세습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떻게 담임목사의 교권이 가능한 일로 허용되는 것인가? 그 답은 아마도 담임목사직을 소득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다른 극단적인 예는, 극히 일부의 일이긴 하지만, 목사가 교회를 팔아-건물 매매가에 교인수를 헤아린 금액을 권리금으로 얹어 팔아서-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이 모든 비정상적인 현상은 교권의식이 물량주의와 얼마나 넓고 깊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2) 한국 교회 쇠락의 원인

 

한국교회의 쇠락의 원인을 이덕주교수님은 압축성장의 결과요 후유증이라 말한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이 있다면 압축 고도성장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짧은 기간 경제부흥을 이룩하듯이 한국교회도 짧은 130년 역사에서 서구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압축 경험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특징을 단어로 열거하면 물질만능주의, 세속주의, 상업주의, 개교회주의 등 성장 만능주의 라는 지극히 부정적인 단어들로 한국교회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교회의 특징이 있다면 성직매매와 면죄부 판매 등 돈과 관련된 범죄행위였다. 오늘 한국교회도 성직매매, 대형교회의 사유화, 변칙적 교회 세습, 돈 봉투로 얼룩진 교단장 선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돈과 관련된 문제들이 많은 것 같다.

 

오늘날 교회에서 종교개혁의 가장 큰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은혜혹은 믿음이라는 대의는 한국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이러한 자본주의적 업적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결과들은 한마디로 해서 은혜가 상실된 세상이다. “믿음이 상실된 세상이다. 은혜와 믿음이 없는 맘몬이라고 하는 거대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맘몬의 숭배요, 그것은 다름 아닌 무한경쟁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무너져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덕주 교수는 이분을 한국교회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라 라고 일갈하고 있다.

 

3) 어디서부터 한국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가?

 

이덕주교수님은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는 다시 등장하였다고 주장하셨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물질적 풍요와 성공을 빌어주는 번영의 신학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라면 자발적 청빈과 순결, 고난과 희생을 실천하는 십자가 신학이 교회를 다시 세우는 길이라 주장한다. 루터가 종탑에서 씨름하듯 기도하며 마침내 예수님의 은총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먼저 주님 앞에 나의 욕망들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리에 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우리는 종교 개혁 이후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들이 고민하였던 문제들을 다시 끄집어내어야 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적 전통과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을 추구하였던 종교 개혁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신앙적인 평등을 넘어 계급 타파와 평등사상의 혁명적 진전을 가져왔던 만인 사제설과 같은 시대정신이 다시 꽃을 피워야 한다.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의 삶을 옥죄는 상황에서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는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아 교리에서 구체적인 성도의 삶으로 그 자리를 옮겼던 제2의 종교개혁 운동이 필요하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을 향해 믿음과 예배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제공했지만 이에 따른 합당한 삶의 열매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종교개혁이 칭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루터에게서 칭의에 함몰되어 성화라는 중요한 주제를 간과하는 문제를 발견했고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두 축을 복원함으로 삶의 열매를 강조한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계몽주의 시대에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자유주의 신학은 수용자인 인간 중심적인 신학의 발전에 토대를 이루었던 것처럼, 물론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의 재변증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근본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실히 보존하려 한 것같이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적인 세계 속에서 복음을 지키려는 신앙의 지조를 새로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 할 것이다.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으로 흩어진 이민자의 나라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정치적으로는 미국독립의 기초를 놓았던 것처럼, 또한 2차 대각성운동을 통하여 미국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의로운 제국’(Righteous Empire)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던 것처럼, 오늘 교회로 하여금 개인적 구원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국가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기초를 놓을 수 있는 눈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에 기독교 흐름 속에 나타난 변혁의 시도들이 한국교회와 나를 다시 새롭게 세워는 종교개혁의 진앙지가 되기를 기도한다.

 

4. 나가는 말

 

교회사를 다시 한 번 촘촘하게 훑어보며, 이덕주교수님 강의 노트 필기를 면밀히 살펴보며, 두 가지를 생각하고 다짐했다.

 

첫째는 영적 대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성은 과거가 아니라, 깨어서 오늘의 세계를 보게 한다. 전통적인, 위로하는 기독교는 실패했다. 그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영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번영을 위한 가능성을 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식별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별하는 것은 자아,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 로 인도한다. 깨어나야 한다!!!, 식별해야 한다!!!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리고 행해야 한다!!! 미래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며, 우리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는 사랑 과 충분히 소통하는 신앙에 대한 각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의 기독교에서 '가슴'의 기독교로 가야 할 것이다. 세계 기독교 지형이 변하고 있다. 서구 교회가 몰락하면서 기독교의 중심은 지구의 남반구로 옮겨지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삶이 중요한 세계가 되었다. 다시금 새로운 성령 운동이 있어야할 것이다.

 

성령운동의 뿌리는 복음주의이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하여 이후 미국에서 꽃을 피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뜨거운 신앙운동인 복음주의... 복음주의 교리의 특징은 성서의 절대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의 필요성은 물론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17세기 청교도주의는 영국 개신교 정신에 이러한 신앙을 확고하게 심어 주었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회심과 경건주의 갱신을 주도한 것이 복음주의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성령운동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으나, 공통점은 성령세례와 카리스마 수행을 강조한다. 특별히 성령운동은 20세기 후반 제3세계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치유를,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슬픈 사람에게 위안을, 외로운 사람에게 소속감을, 자신감을 잃은 사람에게 정체성을, 방황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인 운동이 어디에 있겠는가!

 

둘째는 이덕주교수님의 말씀처럼, 시대정신을 가지고 봉건의 잔재, 식민 잔재, 분단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가야할까? 교수님은 교회사를 generation으로 보셨다. 시대정신, 때를 분간하라는 얘기는 그 때를 사는 하나님의 섭리,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의 시대정신이 뭔가? 거기에 맞춰서 살아야 할 것이다. 교수님이 좋아하는 통일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언제 되어졌는지 모르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제 되는지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통일 됐네. 이게 한반도에 합당한 통일론이라고 하셨다. 좀 더디 가더라도 남북이 서로 교류하면서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덕주교수님은 이미 4세대는 시작되었다고 하셨다. 이건 통일 이후가 되는데, 통일된 다음 한반도 민족공동체가 풀어가야 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있다고 하셨다.

 

자주와 독립, 화해와 평화!!! 이것이 성경과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다. 이걸 구현해나가는 제 4세대가 온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memory and vision이다.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어떤 미래를 내다보는가? 교회사와 지나온 130년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청산해야할 부정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4세대에는 구현해 나가야 한다.

 

2000~2010, 안일한 태도의 교회, 내부의 긴장, 외적 추문, 지도자의 위선이 경제적 위기와 겹쳐 마침내 기독교가 엉망이 되어버린 끔찍한 10년이 되었다. "영성"을 말하는 것은 동시에 종교 제도에 대한 불만, 그리고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새롭고 다르고 보다 깊은 관계성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관계성, 경제적 평등, 민주주의, 창조, 그리고 영성을 향한 인간 문화를 다시금 지향하려는 대전환이 일어야 한다. 각성은 새로운 깨달음, 내면의 변형, 마음과 생각의 변화, 그리고 우선순위, 헌신, 행위의 재배열을 의미한다. 대전환에 있어 '영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섭리의 역사를 보면서, 깨달음을 얻은 우리들이 바른 영성을 추구할 때, 기독교는 아름답게 변형되고 갱신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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