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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조직신학’ 예수 그리스도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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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M.Div. 1학기 과정을 밟을 때, 조직신학 강의를 들으며 작성한 글이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정경적 심정적 접근

 

18세기 라이마루스에 의한 역사적 예수님 연구의 첫 학문적 시도역사적 예수님의 원래의 교훈과 삶이 사도들에 의해 조작된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크게 다름을 주장 (1탐구)슈바이처는 실제 예수님은 유대교 묵시문학적 배경 속에서 활동한 인물로 자신이 메시야라는 자의식과 함께 종말을 기대했던 사람으로 결론 내림.

 

19세기 여러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한 역사적 예수님 연구는 도덕적 이상을 지닌 휴머니스트로 그려냄.

 

마르틴 캘러는 역사적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재구성이 불가능하며 오직 신앙의 그리스도가 진정한 예수님이라고 주장함.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님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다시 다리 놓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역사적 예수님 연구의 제 2차 시도임예수 세미나에 의해 재등장한 새 탐구(2탐구)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일관되게 예수님을 진리의 교사로, 최근의 역사적 예수님 연구가들은 지혜로운 현자(sage)로 주장하는 배경이다.

 

정경적 심정적 그리스도론의 학문적 과제는,

 

그리스도론은 공관복음서에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자기 이해 안에 반영된 참 하나님의 인간성 / 곧 어버이 심정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론은 사도들의 서신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는 그리스도의 참 사람됨의 하나님 자녀된 심정 / 곧 하나님 성품에 참여함을 연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론은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주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을 위한 교본임을 탐구해야 한다.

 

1.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에 대한 이해

 

genesis(족보&탄생 의미의 기원구약 창세기와 관련) :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하나님 심중에 세상을 품으심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 심정의 신학에서 볼 때, 성령이 능력장이 마리아 주변에 형성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새 창조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 심정의 능력장 안에 마리아가 품어져 새 사람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이시고 하나님 아들이시기에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이 가능했다. 몰트만은 마리아를 성령의 능력으로 덮으심을 성령의 거하심 곧 쉐히나로 설명한다. 쉐히나는 더 첨예하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침춤(zimzum)으로, 자기축소와 자기비움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출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인간성,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의 계시, 하나님 심정의 계시를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 복음의 판소리 한 마당

 

오리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우토바실레이아(몸소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신다는 말이다.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소제 3의 탐구, 예수 세미나는 복음서들의 예수님의 배후에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 자신이 가르친 것으로 보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을 '예수님에 관한 복음' 혹은 '그리스도 신화'로 폄하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는 최초로 예수님의 어록 자료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과 십자가의 수난 그리고 포괄하는 설화 자료를 하나의 복음서의 틀(frame)로 제시한 것이다. 마가복음서는 어록 자료와 설화 자료를 단순히 결합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편집한 것이다. 마가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문서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판소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복음서 양식의 목적은 개인이 단순히 눈으로 읽는 데 있지 않고 공동체가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판소리 마당에 동참하는 데 있었다. 판소리는 제국의 주변부 민중의 희노애락을 제국의 언어와 문화를 슬기롭게 활용하여 대변하는 민중 예술이다. 제국의 도식과 상생하면서도 그것을 상극하는, 이른바 생극적 넘어섬의 경지가 판소리다. 복음서 읽기를 하나님 나라 복음의 판소리 한 마당이라는 frame으로 바라보는 것은 역사적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3. 하나님 나라 복음의 판소리의 기승전결

 

조직신학의 그리스도론은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판소리에 의해 온전하게 재구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은 예수와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 세례와 시험, 하나님 나라 사역,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현재적 통치(우주적 그리스도 이해), 재림을 모두 포괄한다.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변하신 하나님의 심정은 재림하실 분이 대변하실 하나님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리스도론의 핵심 주장이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 :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의 소망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에 반영된 하나님의 심정이란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의 영원부터 영원까지 품으시는 소원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지으시고 저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다. 교제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심정의 해석학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심정은 타자의 심정을 온전히 공감할 때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심정은 주체의 대상을 향한 적극적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주체로서의 대상에 대한 체험과 느낌을 수용하는 통로다. 성경은 불쌍히여김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에만 관심할 뿐 민중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불트만의 케리그마(선포) 신학에 반해, 몰트만은 "연대성을 통하여 치유하며 사귐을 통하여 그의 자유와 치유의 능력을 전한다."고 하는 민중과 예수님의 연대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심정의 장 안에서 예수님의 종말론적 인격, 신학적 인격, 사회적 인격의 세 차원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로 작용한다. 하나님 심정의 장이 형성되면 그 안에서 민중은 혼연일체가 되어 不二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의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기적이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정경적 심정적 접근은 신약성경과 복음서에 대한 또 하나의 학문적 해석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바 '제국' 또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비판적 통찰과 대안적 사회에 대한 교회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조직신학적 연구

 

. 기독교 영성의 신학적 정의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인간 존재의 잠재력 실현이 아닌,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의 바람의 실현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믿음, 사랑, 소망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배우는 것, 성령충만을 받는 것과 성령의 겸비하심을 함께 이루는 것이다.

 

1. 기독교 영성의 인식론적 근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상호내재(perichoresis)의 미쁘신 사랑은 영원히 반복되는 신비이다. 미쁘신 사라으이 하나님의 바람은 자기 밖의 타자인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영원한 예정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성부하나님이 전유하시는(appropriating) 창조사역, 성자하나님이 전유하시는 화해사역, 성령하나님이 전유하시는 새 창조사역이라는 하나님의 경륜(oikonomia)이 펼쳐지게 된다.

 

뤼크 존슨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성령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나와 예수님 사이의 상호주관적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를 대할 때 그것이 역사인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 곧 전설인가라는 두 가지 선택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진리란 전설이 아니라 역사라고 주장한다. 박종천교수님이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역사적 예수의 제 3탐구는,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문자적 종말론보다는 시공간의 우주 내에서의 일련의 파국적 사건들에 대한 적절한 은유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절정을 의미하는 종말론을 주장한다.

 

2. 예수님 영성의 신학적 구조

 

예수님은 하나님 '아빠'의 유일한 효자로서 하나님과 누린 교제에 근거한 하나님의 심정을 땅의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였다. 하나님 '아빠'의 유일한 효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가장 잘 헤아리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시기는 하나님의 무제한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의 바람인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셨다.

 

. 예수님의 성령세례에 나타난 영성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공통적으로 삼는 시점은 예수님의 성령세례와 광야시험이다. 두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시어 예수님의 소명과 정체성을 분명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 요단강에 침수한 것이 죽음의 예표라면 하늘의 열림은 부활의 예표하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전개이며 새 사람의 출현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이 본문은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위로부터 임하심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와 땅위의 예수님 사이에 성령의 역장(field of force)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위격적 두 초점이 현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의 장이 형성되면서 하나님 음성의 울림이 예수님의 음성과 공명하고 예수님의 음성은 다시 그리스도인의 심령과 공명하게 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선한 목자와 그의 양들의 소통이 음성의 공명으로 이뤄지는 곳은 삼위일체 내부의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가 하나님 심정의 울림과 공명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야 신비는 아우토바실레이아, '몸소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며,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아우토바실레이아이신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다. 아우토바실레이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예수님의 인격 안에 있다.

성경적으로 적절한 그리스도론은 구약성경의 영의 메시야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이다. 그런데 성령 또는 메시야적 영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영을 보내시는 미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나타난 영성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핵심은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 신명기에 나오는 최고 계명)의 성취에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것은 광야 회복을 막으려는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대결을 위한 것이었다.

 

1. 경제적 시험 : 물질의 유혹

 

빵과 말씀이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사십년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 심정의 계획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광야의 식탁에 올려진 떡과 고기가 예수님의 보혈과 살을 가리킴을 시78:20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신령한 음료요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눈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심정으러부터 흐르는 눈물을 마시고 하나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음으로 살아야 한다.

 

2. 종교적 시험 : 명예의 유혹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마귀는 人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넘어뜨리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 여겼다. 마귀가 예수님더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려던 것은, 하나님 같이 높아지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낮아지심의 길, 십자가의 길을 택하시므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을 자신이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인자답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다.

 

3. 정치적 시험 : 권력의 유혹

 

다니엘 7장의 '인자'와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은 모두 한 개인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고 대리한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로서 혈과 육에 속한 자들을 위협한다. 그러기에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혈과 육을 지니시고 오셔서 스스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는 길이 필수 불가결했다.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고, 죄가 없으시므로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의 세력을 대적하여 하나님 주권을 회복하실 수 있다.

 

느낌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바리보시고 품으셨던 불쌍히 여기심(스프랑흐니조마이)! 이 헬라어의 어근이 창자를 뜻하는 '스프랑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다. 우리말에도 너무나 마음이 아플 때, 또는 감정이 극도에 달했을 때 '애타다 애끊다 애간장이 녹는다' 등의 표현을 하지 않는가!!! 여기서 ''는 창자의 옛말이다.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은 창자와 간장이 녹는다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동서양의 고대인들은 모두 창자를 감정의 기관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의 심정은 역시 하나님의 심정으로 무리의 고난을 체휼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우토바실레이아(몸소 하나님 나라)인 것은 하나님 심정으로 체휼(몸소 하나님 나라)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마음 깊이 와 닿아 한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또한 한나가 불임으로 기도할 때 한나의 그 심정이, 영적 불임 시대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원통해 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하게 되었다는 표현에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예수님의 '아빠' 호칭과 '아빠' 기도는 성령 때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는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것, 즉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신 것이 큰 기쁨과 소망이 된다.

 

또한 광야의 식탁에 올려진 떡과 고기(78:20)가 예수님의 보혈과 살을 가리킨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보혈을 하나님의 눈물과 연결시킨 내용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심정으러부터 흐르는 눈물을 마시고 하나님 입으로부터 니오는 말씀을 먹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자연스레 연관 지어진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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