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으로서의 나’를 깨닫기
영적 의식의 발달은 우리가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통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사물들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적 깨달음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신성한 것, 영원한 불멸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겉모습이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깨달음의 빛은 더욱더 밝아지게 된다.
영적 진보는 참된 실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인간의 현실은 잘못된 인식을 통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전도망상이게 때문에, 영원한 실재를 깨달은 사람은 물질의 허상을 도울 생각을 더 이상 내지 않게 되고, 치유하고, 바로잡고, 변화시킨다는 어떠한 생각도 내지 않게 된다.
영적 깨달음은 진리 탐구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가 선이나 진리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깨달음의 빛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더욱 더 나아가도록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어주기 시작한다.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증가될 때마다 더 많은 빛이 나타나서 감각 세계의 어둠을 추방시킨다. 이러한 밝음의 유입은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달을 때까지 계속된다. 밝은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힘과 더불어 씨름하고 고투하게 된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애쓰고, 자리를 보존하려고 애쓴다.
깨달음은 무엇보다 먼저 평화를 가져다주고, 다음으로는 자신감과 확신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세상의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우리를 쉬게 하주고, 모든 좋은 것들이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게 해준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얻기 위해서나 성취를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은총에 의해서 살아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신의 선물이다. 우리는 선한 것들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것들을 이미 다 기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다.”(눅 15:31)
세상의 즐거움과 성공은 영적인 자각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지는 기쁨과 보물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실상의 빛 안에서 보면, 세상의 가장 큰 행복과 승리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의 보물은, 감각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영광 자체이다.
인간은 내면에 신성의 빛을 지니고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노래 부를 수 있다. 깨달음의 빛이 동틀 무렵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여전히 가시지 않을 수 있다. 영적으로 밝아지게 되면 어떠한 좋은 것도 오거나 가지 않는다. 영의 활동은 언제나 스스로 충만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활짝 밝은 깨달음이 만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주기 때문에, ‘영혼’에, ‘신-의식(God - conciousness)에, 영적인 평화와 고요함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그림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걱정을 하게 되는데, 겉모양은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개성을 지닌 자아로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무한한 영적 의식이 구현하고 있는 모든 선을 다 지각할 수가 없다.
영적 깨달음은 존재의 조화를 드러내고, 물질적 감각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깨달았다고 해서 우주의 그 무엇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곳은 신의 자녀들로 가득 찬 영적 우주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우주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어준다.
이것은 깨달음이라는 광대한 주제의 시작일 뿐이다. 깨달음의 길 위에서는, 가능한 한 오감의 세계로부터 비롯되는 생각들에서 떠나, 영적 실재에 대한 의식적인 깨달음에 닻을 내린 상태를 유지하려고 마음을 써야 한다.
악은 실재하지 않으며 신은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신성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어 왔다. 인도의 붓다, 중국의 노자, 나사렛 예수 등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달했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이들 ‘빛’을 메신저로서만, 한 개인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는’ 빛을 가리켜보인다고 잘못 생각했다. 그들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실상의 빛을 가리켜보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를 숭배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예수께 헌신하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를 통해 선을 구함으로써,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의식 안에 계시는 전능하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다.
어떤 경우이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메신저는 개인의 의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인 것이며, 그렇게 이해될 때, 개인의 오감과 개인의 한계로부터 자유를 쟁취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여러분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를 구원자로서, 중재자로서, 인도자로서만 바라보고는, 그런 개인적인 인식을 떠날 수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의식 안에서 ‘큰 빛’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영적인 깨달음은 한 개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초개아적인 그리스도, 우주적 ‘실상’의 활짝 밝아진 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깨어난 의식은 병과 늙음, 실패 등 문제 많은 자아 관념을 초월하게 해준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한계 없고, 조화롭고 자유로운 ‘스스로 있는’ 참자아를 드러내어 준다. 이러한 참자아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 안으로 물러나, ‘듣고’ 지켜보는 법을 배우는 가운데 더욱더 분명해진다. 그날의 일이나 미레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영혼’으로 하여금 우리보다 앞서서 길을 예비하게 할 수 있다. 오감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걸음걸음마다, 신성이 우리의 안전한 지킴이가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도록 기꺼이 허용하도록 하라!
깨어난 의식은 모든 행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모든 생각을 축복하는 무한의 전능한 존재가 지금 여기에 계심을 항상 알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인생이라는 이 고속도로 위에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은혜를 티 내지 않고 ‘흔적 없이’ 베풀어준다.
의식이 진실과 사랑으로 불타오를 때, 두려움, 의심, 증오, 시기, 질병 및 불화의 모든 감각은 저절로 사라지고 만다. 순수 의식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의 짐을 가볍게 해준다. ‘세상의 빛’이 어찌 주변 사람들의 어둠을 물리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선은, 그것이 다른 개인들에게서 오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당신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것임을 깨달으라.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조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고,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허상이 사라지고, 실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깨어난 의식만이 사악한 겉모습을 보고도 거기에서 신성의 실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깨달은 의식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만이, 겉으로 보이는 진짜 같은 가짜들에서 ‘가시’를 제거할 수가 있다.
우리는 순수한 영적 존재, 신성한 의식이며, 자기충족적인 생명이고, 만물을 두루 포용하는 마음이다. 이 빛으로 인해 개인적인 오감으로 인한 환상은 저절로 스러진다.
깨달음은 모든 물질적 속박을 해소하고, 영적인 이해의 황금사슬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깨달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도만을 따르고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의 성소를 언제나 밝히고 있는 내면의 ‘불꽃’이 아닌 다른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나 됨 안에서는 영적인 형제애가 저절로 흐르게 된다. 영적인 형제들이 유념하고 애써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의 훈련뿐이다.
깨달은 자들은 은혜에 의해,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인생길을 걸어간다.
우리가 이미 신의 성취임을, 신이 우리를 통하여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영적 깨어남이란 모든 개인이 신의 임재라는 사실, 즉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신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제한된 개념일 뿐이며, 이는 결코 영적인 실재가 아니다. 이것이 영적인 지각이다.
‘그리스도-의식’은 개인의 오감이라는 안개 속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빛나는 신을 본다. 그리스도-의식 안에는 변해야 할 죄인도 없고, 치유되어야 할 병자도 없으며, 부요해져야 할 가난뱅이도 없다. 영적인 깨달음은 유한한 오감의 이미지와 개념들의 거짓됨을 추방하고, 모든 존재를 신의 나타남으로 보게 해 준다.
개인의 의식 안에 있는 빛은 신의 창조 세계, 실재의 우주, 신의 자녀들을 드러내어 준다. 이 빛 속에서, 죽어질 인생의 장면들, ‘이 세상’이라는 개념의 세계는 ‘나의 왕국’, 곧 만물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실제의 세계에 자리를 내어준다.
마찬가지로, 내적 동료라는 감각이 언제나 품어지게 된다. 우리는 내면의 따뜻함과 생생한 존재감, 신성한 확신을 느낀다. 때로 우리는 강한 손길을 느끼거나 우리의 어깨 위에서 미소 짓고 있는 누군가를 느낀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다. 이 감미로운 존재는 우리에게 내면의 휴식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긴장에서 벗어나 평화의 기쁨 속에 잠기게 해준다. 사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모든 문제나 긴장에도 ‘고요하게 존재하도록 해주는 평화’ 자체이다. 우리의 내면은 그로 인해 치유의 결과를 향유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이 내면의 ‘존재’는 ‘실상’(Truth)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현존하는 신으로서, 파워로서, 동료로서, 빛으로서, 평화로서, 치유하는 힘으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이러한 내적 현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깨달음의 결과이고, 영적 의식을 배양한 결과이다. 이 실상이 바로 우리의 병을 치유해 주는 신이고, ‘그것’은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의 풍요로운 공급자로서 나타나는 부요함이다. 큰 사랑이 현존하는 이 의식 안에서 살아갈 때,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우리의 수입이나 부를 덜어 낼 수 없게 된다.
이 실상이 당신의 내면에 터를 닦게 하라!!! 그것이 당신의 참존재가 되게 하라!!!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젊음도 없고 늙음도 없다. 건강도 없고 질병도 없다. 오직 조화로운 존재의 영원성만이 있다. 이 실상 속에서 살아갈 때는 오감이 가져다주는 온갖 허상들이 스러져 버리고, 당신이라는 존재의 무한한 조화가 꽃을 피운다. 죽어질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당신은 불멸의 존재다. 영원한 생명수를, 실상의 영적 양식을 섭취하려면, 이러한 신성의 현존, 실상 자체에서 벗어난 생각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자아가 저지르는 잘못 – 자기 의지, 거짓된 욕망, 야망, 탐욕 등- 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다이아몬드가 스스로 빛을 내뿜듯이, ‘실상’이 스스로 빛을 발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BC 500년 경, 이런 이야기가 쓰여졌다.
“어떤 사람이 목욕을 하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던 중, 밧줄을 발로 밟게 되었다. 그는 밧줄을 뱀이라고 생각하고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독사에 물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뱀이 아니라 밧줄인 줄 알게 된다면, 이 사람은 얼마나 안도할 수 있겠는가! 그가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그의 실수였고, 그의 무지함과 환상 때문이었다. 그것이 밧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는 즉각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기쁘고 행복한 상태로 금세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든 고통과 번민과 걱정과 허무함이 신기루 같고 그림자 같고 끔 같은 것임을 알아차린 사람의 마음 상태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뱀으로 나타난 것 – 죄, 질병, 불화, 죽음 등 – 이 유한한 감각에 의해 잘못 인식된 현실이라는 것을 밝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부조화는 두려워하거나 후회하거나 분개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영적 인식을 통해 밧줄, 곧 현실의 본질을 분별해야 하고, 그로 인해 삶을 재해석해야 한다. 뱀, 즉 질명이나 부조화는 마음의 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그에 상응하는 외부적 실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환상도 바깥으로 실체화되지 않으며,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깨달음은 완전한 현존 의식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눈에 보이는 그림을 실상 세계에서의 의미로 계속적으로 번역해가는 가운데, 획득될 수 있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협화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영의 언어인 ‘새로운 언어’로 즉각 번역되어야 한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우리의 영적 이해력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고, 이러한 영적인 기능의 활용은 더 큰 영적 인식으로 이어지며, 그리하여 점점 더 ‘실상’, 곧 진리의 빛이 밝아지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면 그대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그림들과 사건들을 새로운 언어로, 영의 언어로 번역하기를 멈추지 말라.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별다른 의도를 내지 않고도 번역이 저절로 이루어질 정도로 의식이 확장될 것이다. 거의 습관적으로 번역이 이루어져서, 늘 ‘실상’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혜 속에서만, 우리는 의식적인 생각을 내지 않고도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삶을 조화롭게 펼쳐 나아가게 된다. 뭔가 특별한 깨달음의 순간이 이따금씩 나타나는 정도가 아니라, 온갖 선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기쁘게 펼쳐지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선한 일을 하려는 반복적인 애씀 대신에, 우리의 모든 선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의식적인 노력 없이,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펼쳐지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의존하지 않게 되고, 개인적인 노력에조차 의존하지 않게 된다. 영적인 깨달음은 우리의 개인적인 애씀조차 멈추게 쉬게 하며, 점점 더 신성에 의지하게 하여, 그것 자체가 우리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펼쳐 보이도록 허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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