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의 새로운 지도
우리의 참모습은 영으로서 존재한다. 우리가 영으로서의 참존재를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그 안에서만, 우리는 물질로서의 삶에 대한 거짓된 감각을 떠날 수 있다. 그때에야 인간, 동물, 식물의 유기체적인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에 대한 거짓된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위 물질생활의 필요성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불필요하다는 것 또한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아름다움들은 모두가 다 신의 창조를 암시해주긴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영적인 창조나 완전한 창조가 아니다. 병들고 나이 들고 죽어가는 모습들은 결코 삶의 실상이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식 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는 물질적인 조건이나 필멸의 생각들에 의해서는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영적 존재를 얼핏이나마 엿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세상에서 방향을 돌이킴에 따라, 우리는 영감 넘치는 비전들을 보게 되고, 신이 창조하신 땅을 만나게 된다.
치유 사역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보는 우주의 구조를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고치거나, 바꾸거나, 수정하거나, 구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이 삶에 대한 거짓된 감각으로서만, 환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유리한 의식의 지점에서, 우리는 영적인 감각을 통해 “손ㅇ,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집”을 보게 된다(고후 5:1 참조).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 훌륭한 생산자, 돈벌이가 좋은 사람, 탁월한 세일즈맨, 능력 있는 치유자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식 상태가 치유를 하고, 갱신시키고, 페인트를 칠하고, 글을 쓰고, 작곡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의식 상태가 우리에게 한 사람으로서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장면 장면들은, 신에 대해서나 인간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개념 때문에 벌어진 사태들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려 놓은 그림에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하고 괴로워할 때가 많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의식의 자질을 부여해 놓고는, 그가 그 자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고 괴로워한다.
성서에는 모세, 이사야, 예수, 바울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모세는 리더의 자질을 가진 의식 상태를 대표하고, 이사야는 예언자의 자질을 보여준다. 예수는 메시아 의식, 곧 구원과 치유의 은혜를 보여준다. 바울은 메신저, 설교자, 교사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의식이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여 특정한 의식 상태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특정한 사람들로서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조지 워싱턴은 국가 개념이 순수하고 투철한 의식을 대표하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개인의 진실성이 극대화된 자질을 대표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소위 인간으로서의 자질들을 나타내고 있을 뿐임을 잊지 말고 의식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의식이, 우리와 우리가 애쓰고 있는 것들을 유지하고 번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신’이나 ‘생명’, ‘신적인 지성’, ‘신적인 자질’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믿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신, 곧 ‘의식’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질들을 영원토록 표현하고 있다. ‘의식’, ‘생명’, ‘영’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긴장을 풀고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에고는 개인적,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통해 무언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려고 하고,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해내려고 한다.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은 머리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지 말고, 신의 생각이 우리의 의식을 채우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화된 ‘영 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성취하고 자신의 사명을 다할 것임을 언제나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이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성취하는 활약상을 지켜보는 관중이고 증인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관중이 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생명’과 ‘생명’이 펼치는 조화를 지켜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날이 펼쳐져서 매시간 새로운 기쁨과 승리를 드러내는 모습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계시, ‘의식’의 무한한 표현들, ‘영’의 활동과 그 장대한 나타남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신께서 우리 자신의 뒤쪽에 서서 활동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사랑’이 우리가 하는 일들 위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신께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밤마다 우리의 휴식으로 인해 우리를 위한 신의 활동 또한 멈추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잠자는 중에도 ‘사랑’은 날개를 펼쳐 우리를 보호해 주고, ‘의식’은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나누어주고, ‘신성한 섭리’는 밤 동안 내내 우리를 지켜준다. 바깥의 어떤 것도 ‘의식’으로 들어와서 더럽힐 수가 없다. ‘신’은 우리의 정신의 출입구에 서서, 오직 실재와 실재가 펼치는 조화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지켜보는 사람이 되라! 증인이 되라! 당신의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활약하시는 것을 목격하라!
영과 육 사이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 전쟁은 우리가 육신의 감각을 기꺼이 환영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물질적 개념들 위에 ‘영’과 ‘영’의 법칙을 적용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이 전쟁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우주에 대한 구조적 감각과 인간에 대한 육적 감각이 극복되었을 때만이 평화가 찾아온다.
형이상학적 진리를 인간의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영적 조화를 성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물질적 존재감을 지속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 찾기 게임의 초기에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해주는 일이나 가난한 사람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일, 죄를 짓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반듯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매달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영적 의식의 교사가 되려고 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어느 정도는 성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물질적 개념을 다스리기 위해 ‘진실’을, ‘하나님’을 ‘활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적 탐구와 명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내적 갈등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산을 오르내리는 것 같은 체험을 즐기게 된다. 넘어져서 불확실성의 계곡에서 헤매기도 하고,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고, 실패의 쓴맛을 경험하기도 한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영성과 죽어질 운명, 건강과 질병 사이를 오고 간다. 영과 육의 싸움에서는 이런 내적 갈등이 분명히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싸움은, 우리가 죽어질 육의 감각을 떠나서 영적 존재로서의 의식을 획득할 때만이 끝날 수 있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더 높고 새로운 의식의 구축을 위한 토대가 된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떠나려는 의지와 능력, 그리고 신이 창조하시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더 많은 돈벌이가 영적 풍요로움은 아니다. 더 많이 쌓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기 않는다. 육시느이 건강이 반드시 영원한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인간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믿음을 이용하고 강화하려고 들기 일쑤다.
배움이 많이 진척된 사람은, 영적 존재로서의 진실이 자신의 의식 안에 펼쳐지도록 하기 위해 인간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나 믿음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점차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영으로서의 자신을 살아가는 것은, 진실로 존재의 영원한 조화를 뜻하는 건강의 원천이다. 그것은 한계가 없는 공급의 의식이며, 생각을 내지 않고도 얻어지는 경지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우리는 건강과 공급에 대한 인간적인 의미를 갖고 하나님이나 영과 다시 이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영적 건강과 공급의 의식으로 들어서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적인 문제에서 더 많은 조화를 구현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애써 왔다. 천상의 존재로서의 의식이 인간의 삶에 더 많은 조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하늘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결과로 따로는 ‘더해진 것들’일 뿐이다. 하늘나라의 의는 선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지고한 선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 55:8).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인간의 생각을 더 낫게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인간의 길을 더 평탄하게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진실로 신의 생각, 신의 길을 배우려고 할 뿐이다.
펼쳐짐의 이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과 우리 자신의 복지에 대한 모든 걱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개인의 복지에 대한 걱정은 모래 위에 지은 건물인 반면, ‘실상’을 찾기 위해 헌신하는 삶은 영원한 생명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바위 위에 기초를 닦는 일이다. 지속적인 행복과 번영은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나 법칙을 우리가 가질 때에 비로소 찾아질 수 있다.우리가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내려놓을수록, 우리는 신적인 ‘자아’의 계시와 펼쳐짐을 위한 공간을 더욱더 마련하게 된다. 참자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완전성과 우리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께서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진화시키셨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보는 것은 그 세계 자체가 아니라, 신이 창조하시는 세계에 대한 유한의 거짓된 개념이다. 의식의 상승으로, 우리는 영적 우주와 그 목적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내면의 자아를 찾은 사람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모두에게 두루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진리의 보편성은 모든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큰 축복입니다. ...베푸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받되, 꾹꾹 눌러 담아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되어주는 분량대로, 그렇게 여러분은되돌려 받을 것입니다.”(눅 6:38)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하나 됨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욱 사랑에 넘치고, 온화하고, 참을성 있고, 이해심이 많게 된다.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성취할 수 있게 되고,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왕국을,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전을, 다시 말해 신께서 창조하시는 사람과 우주를 엿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영적인 사람, 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다.
경건이나 신성에 관한 신비를 제외하면 내면의 삶에 대한 신비는 아무것도 없다. 사상가들은 모두 자신의 안녕,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 자신의 나라, 심지어는 세상 전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경험을 해가다 보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묻혀 사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권력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다. 절대 다수가 자신의 이익에만 매달려 있고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야심 찬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많은 성취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상은 진정성과 사랑이 결핍된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곤 한다. 정치가들도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어서, 헛된 그림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인류가 하나 되는 날이 밝아오기를 갈망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의 마음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조롱에 시달리곤 한다. 성공은 대체로 권력에 취한 사람이나 돈에 목마른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가곤 한다. 고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작동하는 악의 세력을 극복하기가 너무나 힘겹다는 절망감과 인류의 진보에 대한 그들의 희망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같은 질문이 계속해서 제기된다. 이 악의 통치를 멈추고, 전쟁을 중단시키고, 기근과 역병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정녕 없는 것인가?
인간 경험의 시련과 환난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결국 신을 찾는 일이며, 의식의 어느 자리에 있든 바로 그 자리에서 각자 참자아를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를 배경으로 종교적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적 예배 속에서, 신조나 도그마 속에서, 혹은 특정한 형태의 예배 속에서 ‘파워’를 구할 수 있다. 지식인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철학의 영역이나 철학적‧종교적 가르침 중에서 ‘파워’를 구할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탐구가 인문학적 가르침이나 요가 수행으로 나타나곤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단계에서 신의 ‘파워’를 구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세상적인 것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구도자에게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의식이 확장되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뭔가 따뜻한 흐름이 느껴진다. 전에는 알려진 적이 없는 신적인 존재가 실재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곧잘 스쳐 지나가버리곤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현실보다는 꿈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다가 그 일이 다시 일어날 때에는 예전보다 다 명확해지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신적인 존재가 항상 현존한다는 깨달음이 의식 속에 점차 밝아져 온다. 이러한 신적 존재는 의식의 배경에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시시때때로 그것은 순간의 장면이나 경험을 지배하는 매우 압도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제 악은 점점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간다. 병은 그다지 심각한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재정적 스트레스나 결핍감도 존재의 충만감에 자리를 비켜준다. 별다른 생각이나 계획을 하지 않는데도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모든 필요가 충족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거리도 사라진다.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사람들이나 힘은 이제 시야에서 사라져서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삶 속에 나타나더라도 예전과는 달리 그들이 무력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무뎌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려움들도 증발해 버리고 없다. 확신, 자신감, 깨어 있음, 섬세함 - 이런 자질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나서 교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확실하게 보이게 된다.
내면의 신적 존재가 이제는 내면의 ‘파워’로 차츰 자리를 잡아간다. 가끔씩 그것은 지속적인 깨어 있음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외적 경험 속에 나타나는 고통과 쾌락의 힘은 위축되고 희미해져 가고, 외적 삶을 조화롭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는 내적 파워들에 대해서는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외부 세계의 악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외부 세계가 가져다주는 더 행복한 것들에 대한 강한 끌림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의 쾌락을 누리고 즐길 수도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일도 없고, 그럴 형편이 되지 않더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내면의 기쁨으로 인해 굳이 외부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내면의 빛은 신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신성의 발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신은 내면의 신성한 기운이나 영향력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내적 참자아를 발견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런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 사람의 건강과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면의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에게서는 태양에서 태양빛이 방사되는 것처럼 빛이 방사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참 생명을 찾은 사람은 평화, 기쁨, 조화, 안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세상적으로 실패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멸의 존재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오감의 육체적 감각에 의해 제한 받지 않고, 영적 감각 곧 그리스도 의식을 어느 정도 달성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나 ‘저기’, ‘지금’이나 ‘이후’에 제한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나 공간을 의식하지 않고 들고 나는 가운데, 측정할 수 없는 펼쳐짐이, 목적 없는 깨달음이 일어난다.
이 의식 속에서는, 제한된 감각이 사라져서 경계 없는 비전이 펼쳐지게 된다. 인생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형상과 한계 없는 아름다움으로 보여지고 이해된다. 모든 세대의 지혜가 한 순간에 두루 파악되기도 한다. 죽음이 사라지고, 소위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우리 자신과 분리된 과거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친교는 심령술을 통한 죽은 자와의 교신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가로막힐 수 없는 영원한 삶에 대한 인식이다. 불멸의 실재가 보여지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삶에 대한 비전이다. 실재가 빛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의식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장벽은 없다. 비전은 우주를 두루 포괄한다. 그것은 시간과 영원을 이어준다. 그것은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한다.
이 빛 속에서, 우리는 눈이 없이 본다. 귀가 없이 듣는다.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이해한다. 우리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시다. 왜냐하면 더 이상 분리나 분열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보상도 없고, 처벌도 없다. 조화가 있다. 삶은 인과의 법칙이나 과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엿볼 수 있고, 죽어질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영적 감각은 인간의 선에 관여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의 인간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들 안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에 이용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와 조화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열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여러분이 요청하기도 전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눅 12:22-32 /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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