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의 신
개성을 가진 ‘나’는 얻고, 성취하고, 욕망하고, 축적하기에 너무나 바쁘다. 반면, 우리의 참자아는 아무런 애씀 없이 주고, 나누고, 기부하고, 축복하는 일에 열중한다. 이 참자아가 개인화 되어 인간 경험으로서 펼쳐지게 되면, 대부분은 제한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자아는 무한한 영적 이데아들의 펼쳐짐이고 아무런 한계나 제한 없이 스스로를 영원히 표현하는 활동이다.
‘작은 나’는 주로 개인적인 문제와 일에 관심을 갖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범위를 넓혀나간다. 개인으로서 자선사업이나 공동체의 복지로 경계를 넓혀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 동기는 대개 자기 자신의 심리적인 만족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참자아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 이타적인 마음으로, 인정받으려는 바람을 품지 않고, 보상이나 자기 위상의 확립을 바라지도 않으며, 만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상태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실속 없이 물러터진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는 바닥걸레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물든 사람들로서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체를 결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비례하여, 물질세계의 어둠, 곧 병, 죄, 한계, 두려움, 불안, 무지와 같은 것들에 시달리면서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개성의 탈을 벗고 ‘영혼’의 자질을 갖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개인적으로나 보편적으로 널리 표현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명상을 통해서나 하나 됨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펼쳐지는 ‘실상’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기도하고 부른다. 우리의 기도는 소위 환자들과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사실 하나의 과정이 아니다. 말이나 생각의 조합으로 기도가 이루어져서도 안 되고, 선언이나 확언, 부인하는 진술 같은 것으로 엮어져서도 안 된다. 기도는 조화와 온전함, 신, 기쁨, 평화, 주권의 실현을 경험하는 일종의 의식 상태이다. 기도, 곧 하나 됨의 친교는 개인에게 특정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도 하고, 이는 자신의 참된 존재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열매 맺기도 한다.
모든 개인의 재능, 능력, 교육 및 경험은 사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개성에 담아 표현하는 것으로, 성공적인 예술가, 음악가, 세일즈맨, 사업가, 배우를 낳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신을 표현하는 ‘의식’은 기회를 노리지도 않고, 인정을 받고 싶어 애타하지도 않으며, 환대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니 인정받지 못하는 재능도 없고, 표현되지 아니한 재능이나 능력도 있을 수 없으며, 기록되지 않은 애씀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애씀과 활동은 ‘의식’이 자기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 곧 참된 실상에 깨어 있는 상태는, 실업 상태의 환상이나 보상이나 감사의 결핍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명심하라. 느낌이 없이 이런 말들만을 암송하는 것은 ‘비가 되어 내리지 않는 구름’처럼 공염불이 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오직 한 ‘생명’이 있을 뿐이므로, 이 ‘하나’는 질병이나 사고나 죽음의 위험 상태에 빠질 수가 없다는 것이 계시되어 왔다. 이 ‘생명’은 곧 개인의 삶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한 치유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언제나 깨어 있어서 오직 하나의 ‘생명’, 오직 하나의 ‘법’, 오직 하나의 ‘영혼’ 이외의 다른 존재나 힘, 활동이 있다는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조화와 선의 의식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병든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오감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임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진리를 선포하거나 지속적으로 확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의식하는 일은 치유와 개혁, 갱신, 심지어는 부활로 나타날 수 있다.
의식이라는 것은 휴식이나 멈춤이 없이 계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펼쳐 나간다.
진실로, 의식이 자신을 펼쳐 나가는 데에는 멈춤이라는 것이 없다. 만일 음악가가 음악적이고 예술가적인 재능을 잃을 수가 없는 것처럼, 의식 또한 자기 자신의 몸체를 잃는 법이 없다.
의식은 끝없는 근원으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무한성으로부터 그 무한한 다양성과 형태, 표현에 이르기까지를, 계속적으로 펼쳐나간다.
죽음이란, 의식이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린다는 믿음이다. 불멸이란, 의식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 자기의 몸, 형태, 표현을 영원히 자각한다는 실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의식’은 지금 여기에서 획득되는 불멸성으로서, ‘의식’은 자기 자신의 무한한 존재와 영원한 몸체를 인식한다. 의식이 개인적인 창조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영원히 펼쳐내고 있다는 자각은 지금 여기에서 시현(示顯)되고 있는 불멸성인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나 자신’이다.
영적 의식은 조화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각으로 인해 개인적인 애씀에서 풀려나게 된다. 개인적인 애씀이 없어짐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 안에 현존하는 실재로서의 ‘영’을 발견함으로써 ‘영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성취한다. ‘영’은 개인의 의식 안에서 활동하는 ‘실상’이다. ‘실상’이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선포함에 따라, 우리는 진리를 선포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우리가 내면 고요함 안에 머물게 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선포하는 ‘실상’에 점점 더 열려 있게 된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실상’의 활동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신의 임재 그것이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환영 받는‘실상’은 우리의 인생사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조화의 법칙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를 이끌어가고, 다스리고, 지원한다. 언제나 없는 곳 없이 존재하는 이 ‘실상’은 병이나 결핍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치유자가 되어주고 공급자가 되어준다. 그것이 곧 우리의 건강이요, 우리의 공급원이다.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대체로 신비한 용어, 미지의 실체, 알려지지 않는 존재, 거의 경험하지 못한 무엇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우리들 내면의 신성한 존재, 신성한 힘으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구적이고 지속적으로 베풀어지는 시혜로서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면에서 활동하는 ‘실상’에 깨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머지않아 내적 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식 안에서의 ‘실상’의 활동이며, 그리스도의 성취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할 것인지를 명백하게 밝혀준다. 기도의 사전적 정의는, 어딘가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일정한 격식을 갖춰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우리가 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면 그 기도는 응답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않은 기도는 하늘나라의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마땅하다. 3~4세대 전의 조상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들의 죄를 후손이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참다운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우리에게 오는 좋은 것들은, 어떤 것이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실상’을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펼쳐진다. 신께 어떻게 얼마나 기도를 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도록 우리가 허용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것이 더 높은 차원의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낮이나 밤이나 명상을 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나누고, 경청하는 가운데 성취된다. 고요함 가운데, 신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느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느낌이나 인식이 곧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의 활동이고, ‘실상’의 나타남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요, 우리 자신의 ‘실상’이다.
우리는 보통 감각의 세계 속에서, 감각의 대상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럼으로써 선과 악, 고통과 쾌락을 경험한다. 우리가 자기 탐구와 명상을 통해서 정신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더 고상한 생각을 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정신적 자질이 더욱 다듬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인내심을 갖게 되고, 더 친절하고 자비로워지며, 더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인 경험들은 이러한 자질들을 얼마나 발휘했느냐를 고스란히 되비추어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몸과 마음의 차원보다 높은 곳에 ‘영혼’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 존재의 본질, 우리의 신적인 본성을 발견한다. 몸과 마음은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우리들 존재가 겉거죽의 활동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혼’의 영역에서, 우리는 온전한 평온, 절대의 평화, 조화, 그리고 진정한 주권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고통도 쾌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의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인 감각이 깨어난 사람은 더 이상 오감의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아도 ‘있는 그대로’, ‘실상’의 나타남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주를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사람과 장소와 사물 안에서, 행복과 주권을 찾고 추구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영적인 감각, ‘영혼-감각’(Soul-sense)을 통해, 전 세계가 우리에게 선물들을 가져다준다. 사람들과 사물들을 향한 욕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매체로 삼아서, 물질적인 감각으로 보면, 사람과 사물은 우리의 대상이고,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영혼-감각’으로 보면, 우리의 선은 우리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자신을 펼쳐나간다. 사람으로나 개선된 환경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할지라도, ‘영혼-감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서 친구와 가족을, 인간 경험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앗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아름답고 더 영원한 구차원의 의식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로 그런 것들을 더욱더 확실하게 데려다준다.
여러 세기 동안,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왔으며, 그동안 삶의 영적인 의미는 빛과 어둠의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으로 치달아 왔다. 16세기의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지만,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그들 역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 안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말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신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 예수가 행한 것을 그들 역시 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뿐만 아니라 많은 영적 선견자와 선지자들이 많은 부분 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살았다는 것을 깊은 사랑과 기쁨으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실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실현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습니다. 밖에서 그것을 찾는 사람은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구하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가 이미 그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만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의식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그대는 여전히 필멸의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을 영으로서, 신의 현존이자 성취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 어느 날엔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 모든 애씀을 내려놓고, ‘주는 자(the Giver)로서의 우리 자신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돌아올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5천 명의 사람들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영성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믿음 안에서가 아니고는, 어떠한 결핍감도 자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필멸의 존재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환상이며, 무(無)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필멸의 존재나 물질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허상에 지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실은 단순하다. 심오한 형이상학이나 신비한 진실은 없다. ‘진실’이거나 ‘진실 아님’이 있을 뿐이다. 심오한 진실이면서 동시에 얕은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의 정도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진실은 언제 어디에서나 절대적인 진실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무한한 힘을 개인화하는 진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난, 우리와 동떨어진 바깥의 힘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비례하여, 우리는 무한한 힘을 개인화한다.
하나님이신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다. 하나의 ‘생명’만이 있으며, 이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이고, 모든 개인의 ‘생명’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개인화한다. 한 사람 안의 신이 다른 사람 안의 신보다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병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러한 참된 의식은 우리의 내면에서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오직 하나의 ‘의식’,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이 ‘의식’의 개인화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존재하는 우리의 도우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존재’를 향해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접속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대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성한 ‘의식’이 곧 우리의 의식임을 깨닫고,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진실에 대한 앎은 ‘생명’, ‘진실’, ‘신’의 현존 의식 안에 우리를 터 잡게 해준다. ‘의식’의 하나 됨에 대한 우리의 이해, 우리의 삶으로서 펼쳐져 나가는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영원한 ‘진실’의 펼쳐져 나감이다.
펼쳐짐의 다음 단계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의식을 개인화하여 우리의 몸, 우리의 비즈니스, 우리의 가정을 구현한다는 깨달음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속해 있는 의식의 아이디어들임을 알 때만이, 우리는 날씨, 기후, 소득, 건강 및 신체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증거 할 수 있다. 가정, 직업, 몸은 우리 내부의 아이디어들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으로서, 우리의 이해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게 되고, 이러한 진실을 알아야 우리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주권을 행사하는 일은 인간성을 높이는 일도 아니요,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인간성을 쓸어버리고, 우리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가 물리적인 면들을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펼쳐짐의 단계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나 동물 또는 식물이 갖고 있는 유기체적인 생명이 하나의 ‘생명’,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참 ‘생명’의 제한된 개념화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물리적 우주를 치유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고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의식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식은 모든 생명을 하나님으로 인지한다. 시각과 소리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것은 그 생명 자체가 아니라, 단지 환상이나 존재의 거짓된 감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영으로서의 우리 의식을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를 분별한다.
문제의 차원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의 차원에서는 겉모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겉모습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 오감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사물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겉모습을 무시하고, 오감으로 나타나는 그림에서 떠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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