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성경 뒤에서'〕
◆ 여는 글
지금 내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역사 현장 속에서, 구약성서는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성서가 기록되지 않았다면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어떤 이의 말처럼, 인류문명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구약성서 속에서 노닐다』의 제1부를 읽으며,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우리말 성경이 어떻게 나에게까지 다다르게 되었는가?‘에서 출발하여,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 본문의 전달을 위해 사활(死活)을 걸고 히브리어성경을 공부하고 베낀 쿰란 사람들의 전투적일 만큼 경건한 삶, 히브리어성경의 탄생 배경인 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 문화, 시리아 문화권을 대표하는 우가릿 문학, 북서방 셈어 문학까지 구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 비평 방식을 통한 성서 읽기‘를 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구약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어나가면서, 성경에 대한 역사적 궁금증이 많이 해소된 내용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 몸 되는 글
제1부 '성경 뒤에서’
‣우리말 성경이 우리 손에 다다르기까지의 경로 <최초의 한글 신약, 『예수셩교젼셔』(1887)> ⟶ <최초의 한글 완역 성경, 『구역』(1911)> ⟶ 『개역』(1938) ⟶ 『개역 한글판』(1961) ⟶ 『개역 개정판』(2004) : 외국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가들이 함께 낸 것 ‣『공동번역』(1977) & 『새번역』(2004) : 해방 이후 한국인 번역가들이 펴낸 우리말 성경 ‣한글성경에 영향 미친 한문성경 : 『대표본』(1854)과 『쉐레쉐브스키』(1902) ‣한국 가톨릭교회 : 『공동번역』(1977) ⟶ 『성경』이라고도 불리는 『가톨릭 성경』(2005) ‣한국 개신교회의 개인역 한글성경: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1991), 『쉬운 성경』(2005), 『우리말 성경』(2007),『새즈문 성경』(2007) ⇨ (『구약 공부』(1893) ⟶ 『시편 촬요』(1898) ⟶ 『게일-이원모역』(1898)의 전통을 잇는 개인 번역 성경) ‣구약의 원어(히브리어) 본문 : '원 마소라 본문 군', '원 칠십인역 본문 군', '원 사마리아 오경 본문 군', '쿰란 공동체 본문 군’ ‣쿰란 공동체가 남긴 가장 완벽하고 긴 두루마리 성경 : '성 마가 수도원 이사야 두루마리'(1QIs) ‣히브리어성경의 탄생 배경 : 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 문화권 ∙ 시리아 문화권을 대표하는 우가릿 문학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알> ⟶ 성경전체의 모티브인 '신들의 싸움(theomachy)' 주제가 이 신화의 특징 ∙ 메소포타미아 문학으로 대표적인 것 : <아트라하시스>와 <에누마 엘리쉬> 같은 창조 신화,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길가메쉬>와 <내려가는 이쉬타르> ∙ 이집트 문학 : 『피라미드 본문』, 『석관 본문』, 『망자 서』 ∙ 북서방 셈어(히브리어와 매우 가까운 언어로서, 아람어〮 페니키아어〮 데이르 알라어〮 같은 언어) 문학 : - 단 새김글(아람어로 되어 있음) ⟶ '다윗 가문'이라는 표현으로 다윗 왕가의 역사적 실제성 증명 - 쿤틸렛 아주르드 새김글(히브리어로 기록) ⟶ '야훼와 그의 아세라'라는 표현으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뿐 아니라 여신 아세라도 함께 섬긴 사실 증언 - 케테프 힌놈 새김글(히브리어로 기록) ⟶ 최초의 성경 본문이 들어 있는 새김글 - 데이르 알라 새김글(길르앗어로 기록) ⟶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표현으로, 발람이 당시 유명한 이방 예언자임을 알게 됨 - 엘레판틴 파피루스(아람어로 되어 있음) ⟶ 잠언과 내용이 비슷한 『아히카르 이야기』가 들어 있음 |
1. 한글성경
1) 『예수셩교젼셔』(1887)
• 우리말로 된 첫 한글 신약 성경
• 중국 만주에서 나온 것임(영국 스코틀랜드 연합장로 교회소속 중국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 목사의 노력으로!)
• 순 한글로 인쇄한 성경, 평안도 말이 많이 들어 있는 성경임(주기도문에 아버지'를 '아바님'으 로, '날마다'를 날마당'으로, '하늘'을 '하날'로 '이름'을 '일흠'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를 '쓰는 바 음식을 주시며'로, '거룩하게 하시며'를 '성하시며'로 기록됨)
• 우리말에 맞게 옮김 (예)바늘 눈(희랍어 원문 성경)을 바늘 귀로, 금식을 목욕재계로 옮김
• 『예수셩교젼셔』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비롯됨(존 로스목사님이 설명한 '한글 신약성경 '(Corean New Testament, 1883)이라는 글에 설명)
‣ '하늘'(조선인들이 숭배해 온 대상) + '님' ⟶ '하날'(당시 평안도 말) + '님' ⟶ '하날님'(부르기가 불편) ⟶ '하나님' ‣ 한국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함께 펴낸 『공동번역』(1977) 성경은 우리가 섬기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표기 ⟶ ※ '하나님' = '하느님' : 소리의 차이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늘'(天)에 '님'자를 붙인 것이라는 설명을, '구약 개정에 대한 노트'(Notes on Old Testament Revision, 1940)에 피터스목사님이 명시함 ※ 초기 우리말 성경, 『개역』(1938)에 '하나님'으로 적은 것 이유 : '하늘'이라는 개념을 높인 것 |
2) 『구역』(1900, 1911)
최초의 한글 완역 성경, 『구역』(1911)의 역사 를 보면,
• 먼저 신약 출간(1900) : 오래 전부터 여러 선교사들(레널즈[리눌서목사], 스크랜튼[시란돈목사], 게일[기일목사], 아펜젤러[아편설라])이 한국인 번역가들(최병헌, 조성규, 이창직, 정동명, 송덕조, 김명준, 홍준, 송순용, 김정삼, 이승두 등)과 함께 작업
• 『구역』의 1898년에 나온 마태복음의 기도문과 시편 23편을 보면 지금 우리가 읽는 『개역』성경과 무척 닮음
• 『구역』은 1906년, 1908년, 1910년에 새로 고쳐 나옴
• 『구역』의 글자체 : 탁사 최병헌목사님의 글씨를 활자로 떠서 인쇄한 것
• 『구역』성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구신약성경전서
한국인 번역가들 – 주로 한문성경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을 번역
외국인 선교사들 – 주로 영어성경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을 참조
• 대한성서공회에서 『신약전서 구역 한글판』(1979)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을 펴냄
• 『셩경젼셔』 - 『구역』의 신약 표기법 그대로 펴낸 영인본
3) 『개역』(1938)
• 알렉산더 피터스[피득]목사님과 이원모장로님이 짝을 이루고, 레이놀즈목사님과 이영태선생님이 짝을 이루어 『개역』 작업을 마무리 하심
• 『개역』의 구약 책임 번역가인 피터스목사님은 유태계 러시아 분으로서 언어에 능통, 목사가 되기 전인 1890년대에 조선에 성경권서로 파송 받아 몇 년간 일하면서 성경을 번역(『시편 촬요』(1898)하기도 함
• 『개역』은 홍길동전과 똑같은 문체로 옮긴 성경이지만, 수동태 문장이 많고 한자말이 많아 어렵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독자들이 히브리어 원문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피터스목사님의 마음에서 연유(緣由)한 것임
예) '사람들이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 '사람들이 싫어하며', '신후사'(身後事) - '죽은 뒤의 일'
•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맞춘 『개역 한글판』(1961)과 번역을 약간 바꾼 『개역 개정판』(2004)이 나왔으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다 있음
4) 『공동번역』(1977)
• 『공동번역』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함께 작업한 성경 – 구약은 늦봄 문익환목사님과 선종완신부님이 히브리어에서 직접 옮긴 성경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나온 구교와 신교의 공역성경
• 『공동번역』 창세기는 '한 처음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함
• 『공동번역』이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로 하게 된 이유 설명 : 민영진박사님의 모친의 질문으로 인해, 야웨 하느님은 하나님이 야외(밖)에 계신 분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ㅎ'을 집어넣어 '야훼'하느님으로 표기했다는 것
• 『공동번역』의 획기적인 점 :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호칭
※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
하느님 ⇨ 하나님(예수셩교젼셔) ⇨ 하ᄂᆞ님(구역) ⇨ 하나님(개역) ⇨ 하느님(공동번역)
☞ 처음 ‘하느님’으로 적은 성경은 『예수셩교젼셔 누가복음』(1883) ⇛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으로 호칭, 가톨릭교회에서는 1700년대 말부터 200여 년 동안 불렀던 ‘천주님’을 1977년 이후‘하느님’으로 호칭 ⇛ 현재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2005)을 사용
• 『공동번역』은 한국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성경이자, 통일성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1982년과 1984년에 나온 북한성경(=’공동번역 평양교정본‘)이 『공동번역』을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로 바꾸어 번역한 성경이기 때문임. 북한 그리스도인들인 남한에서 나온 『공동번역』을 대본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펴낸 것임
5) 『구약촬요』(1899)와 『조만민광』(1892)
•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던 ‘상주’라는 호칭을 끝까지 보존하고 지켜온 신앙 공동체가 바로 한국 성공회인데, 성공회가 1899년 [구약촬요]라는 성경을 번역함(창세기만을 실음)
• 하느님을 ‘텬쥬’(천주), 성령을 ‘셩신’(성신)으로 표기
• 『조만민광』(1892)은 신약 4복음서를 중심으로 펴낸 전도용 책(한문, 한글이 나란히 실림)
6) 『구약공부』(1893)
•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우리나라 개신교회 최초의 구약임(여호수아 일부와 룻기(1장), 사무엘상 일부가 실림)
• 『구약공부』는 『구역』(1911)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 개역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는 『구약공부』에서 비롯
• 『구약공부』를 번역한 분⟹ 감리교 선교사이신 조지 존스(G. H. Jones 우리말로 조원시) 목사
7) 『시편촬요』(1898)
• 『시편촬요』(1898)는 시편 가운데에서 62편을 골라 옮긴 것임
•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옮긴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의 작품(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시편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우리가 영혼만은 가지고 신앙생활 하도록 했다는 부정적인 점도 있음)
☞ נֶ֣פֶשׁ는 '숨 ⟶ 목숨 ⟶ 생명 ⟶ 삶이라는 의미'와 '목구멍 ⟶ 먹는 일 ⟶ 식욕 ⟶ 탐욕 ⟶ 죽음(사망) ⟶ 시체/주검'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적 인간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모두 영혼으로 일괄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신앙생활을 영혼으로만 하는 것으로 잘못된 신앙관을 심어 주었다.
• 하느님을 ‘여호와’라고 부름
8) 한문성경 『대표본』(1854)
• 『대표본』( 'Delegates Version', 1854)은 우리나라 성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한문성경
• 중국 선교사 대표들이 모여서 번역한 경서체 한문 서경
•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하려고 원문을 자유롭게 읽은 성경
• 제임스 렉(James Legge)이라는 당대 최고의 영국인 한문학자가 중심되며 아름다운 한문으로 옮긴 성경
• 『대표본』은 상제판(上帝版)과 신판(神版), 두 종류가 있음
• 『대표본』(1854)은 우리말 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경
☞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각 책 이름이, 이 성경에서 비롯됨
안식년, 희년, 번제, 이런 이름도, 이 성경에서 비롯됨
십자가의 도, 은총 같은 말도, 이 성경에서 비롯됨
9) 한문성경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시주교역, 1902)
• 쉐레쉐브스키(S. I. J. Schereschewsky)는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미국성공회 소속 중국 선교사
• 쉐레쉐브시키가 번역한 두 종류의 성경
① 『쉐레쉐브스키 북경관화역』(1875) ⟶지금 중국인들이 보는 『화합본』(和合本, 1919)의 전신
②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시주교역, 1902) ⟶ 우리말 성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침
• 『대표본』(1854)과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시주교역, 1902) ⟶ 우리말 성경 『개역』의 어머니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음
10) 유성준과 최병헌의 국한문성경(1906, 1925)
• 한자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한자말로 바꾸어 번역한 성경이 국한문 성경임
• 유성준 장로의 『국한문 신약전서』(1906)
⟶ 훌륭한 식자층용 성경(조선시대 양반계층의 말투)임. 『구역』을 한문 투로 옮긴 것
• 최병헌목사의 『창세기 선한문』(1925)
⟶ 『개역』을 한문 투로 옮긴 것,『선한문 창세기』의 한자 표현은 대부분 『대표본』(1854)과 『시주교역』(1902)의 용어임
11) 『게일-이원모역』(1925)
• 『개역』성경 번역위원에서 나온 게일목사와 이원모장로가, 여러 성경을 참조하여 옮긴 성경
• 간결하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무척 애쓴 성경
예) 시 119 : 18 "내 눈을 여심이여 律法의 奧妙를 보게 하소서"
12) 『새번역』(2004)
• 일본 강점기가 끝나고 복음 동지회 모임이 결성, 신약 희랍어 원문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말 성 경을 처음으로 펴냄 ⟶ 『새번역 신약』(1967)
• 구약까지 함께 번역하자는 의견 모아 『공동번역』 발간
⟶ 『공동번역』 신약 1971년 발간(예수님이 존댓말을 쓰심)
⟶ 『공동번역』 성경전서 1977년 발간, 한국 가톨릭교회 학자들과 개신교회 학자들이 함께 원문성경에서 번역한 성경, 구역번역 책임: 문익환 목사, 신약 번역 책임: 박창완 교수
• 원문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원문을 읽는 사람이나 번역문을 읽는 사람이나 번역 문을 읽는 사람이나 같은 반응을 이끌어야 한다는 ‘기능의 동등성’, ‘톱니 바퀴의 이론’ 존중하여, 순수 한국인 번역가들이 약 15년 간 걸쳐 번역하여 펴낸 2성경, 『공동번역』과 『새번역』이 있다.
• 『새번역』은 원문 연구 결과를 충실하게 가장 잘 반영함
(책임자: 민영진 박사, 본문 비평 방식으로 번역됨)
• 『새번역』에 그림을 집어 넣어 교회학교 어린이들부터 청년들까지 성경을 시각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
• 『새번역』은 1993년에 『표준 새번역』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개정판을 내면서 『표준 새번역 개정판』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너무 길어 『새번역』(2004)으로 이름을 바꿈
• 『새번역』은 구약의 야훼를 모두 ‘주’로 바꿈(‘주’ 성경이라고도 함)
• 『새번역』은 끊어 읽기 쉽게 일일이 쉼표를 찍음(박창해교수님의 이론) ⟶ 번역 성격은 『개역 한글판』과 『공동번역』(1977) 중간 ⟶ 『새번역』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원문대조 이환진교수님
13) 『가톨릭 성경』(2005)
• 『성경』이, 그 이름이다. 히브리어와 희랍어 원어 성경을 직접 옮긴 것이 특징임
• 한국 가톨릭 교회가 직접 성경을 번역하여 낸 처음 한글 성경임
• 대체로 『공동번역』과 비슷함
* * * 지금까지 알아본 것은 교회연합기관인 성서공회에서 펴낸 공인번역 성경
* * * 『게일-이원모역』(1925)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번역 성경전서
* * * 일본 강점기가 끝나고 개인번역이 많이 등장
⟶ 1980-90년대는 개인출판사가 성경을 펴내기 시작 ⟶ 생명의 말씀사에서 『현대인의 성경』을, 성서원 에서 『현대어성경』을 펴냄(둘 다 영어성경과 독일어성경을 대본으로 나온 성경)
14) 『현대어 성경』(1991)
• 『현대어 성경』은 이환진교수님이 구약의 절반(신명기,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와 애가)을 번역(히브리어 성경을 옮겼는데 영어 『복음성경』(Good News Bible)의 본문 결정을 많이 따름)
• 구약의 다른 부분은 이양구목사께서 주로 독일어 『복음성서』(DGN)을 참조하여 번역
• 신약은 정용섭목사님이 영어 『생활성경』(Living Bible)을 따름(이환진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으로 대조 작업)
• 모압 여인 룻을 모압댁으로 부르는 등, 친근한 우리말로 옮겨짐
• '한글 타르굼'이라고 부를 만큼 '긴 풀이역'의 특징
15) 『쉬운 성경』(2005), 『우리말 성경』(2007), 『새즈믄 성경』(2007)
•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인번역 성경이 많이 등장(아가페 출판사의 『쉬운 성경』(2005), 두란노 서원의 『우리말 성경』(2007), 유진 피터슨목사의 『메시지』(The Message, 2009), 『새즈믄 성경』 (2007) 등)
• 『새즈믄 성경』(2007)은 최의원교수님이 번역한 우리말 구약정경(책 순서는 히브리어성경을 따 라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 순서로 됨 ⟶ 우리나라 최초의 구약성경 ⟶ 주님을 '당신님'이라고 부름(수려한 우리말로 번역한 훌륭한 구약 번역 성경)
※ 『시편 풀님』(2005)의 시편 번역 : 이환진교수님이 번역 주를 길게 붙이고 쿰란공동체가 남긴 9개의 시를 번역하여 부록에 실은 것이다 ⟶ 『성경직해』(1897), 『사사성경』(1910)과 같은 성경 에 들어 있는 설명 부분의 제목인 '풀님'에서 따온 이름
※ 2천 년대에 나온 이들 개인 번역의 특징 : 주로 보수적인 신앙배경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번 역( ⟶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되어 있음 & 1980-90년대의 번역과는 다르게 원문성경에서 직접 번역한 성경임
2. 쿰란사람들이 남긴 성경
1947년, 키르벳 쿰란 지역에서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함. 베두인 목동, 무하메드 에드 디브와 줌아 무하메드 칼릴 두 소년이 쿰란 지역 동굴에서 기다란 단지 속에 든 가죽 두루마리를 찾아냄(모두가 7개). 이 가죽 두루마리를 칼릴 이스간디 샤힌(시리아 정교회 성 마가 정교회 교인)이라는 고물상 상인에게 넘김. 성 마가 수도원의 책임자 마르 아타나시우스 사무엘 대주교가 칸도에게 24파운드를 주고 이 두루마리를 구입(칸도은 소년들에게 16파운드를 줌). 이 두루마리는 예수님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으로, ‘이사야 두루마리(a)' 와 ‘하박국 주속’, ‘공동체 규정’과 ‘창세기 외경’, 1955년, 유대인 학자 이가엘 야딘이 15만 달러에 이들 세 두루마리 구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엘르아자르 수케닉 교수(유대인 무덤 새김 연구 전문가)가 이 두루마리를 기원전 2-1세기 임을 알아봄. ‘이사야 두루마리(b)', '감사 찬송’ 두루마리, ‘전쟁 두루마리’ 구입. 수케닉 교수의 아들인 이가엘 야딘 박사(동 예루살렘을 탈환한 장군)가, 칸도 중개인이 갖고 있던 ‘성전 두루마리’를 입수하여, 책을 펴냄. 수케닉 교수와 이가엘 야딘 박사는 사해 두루마리 연구에 혁혁한 공로자 부자학자임. 야딘 박사는 ‘전쟁 두루마리’를 책으로 펴냄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의 싸움).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7개 두루마리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책의 전당’ 박물관에 보관 |
1) 쿰란 제 1 동굴
베두인 목동 소년들이 처음 발견한 두루마리(모두 7개)
• 이사야 두루마리(a) - 가장 완벽한 형태, 길이는 약 9m, 이사야 전체를 다 담고 있다. 성 마가 수도원 이사야 두루마리로 부른다.
• 이사야 두루마리(b) - 이사야서 일부포함. 히브리 대학 이사야 두루마리로 부름
• ‘전쟁 두루마리’ - 쿰란 사람들이 가장 늦게 쓴 작품(기원전 1세기 중반 추정) 내용은 민수기와 비슷 (전쟁 대형을 자세히 그림) 이 두루마리를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의 싸움’ 이라고 부름(로마 제국과 싸우기 위한 전략 지침서로 추정)
• ‘감사 찬송’두루마리 - 쿰란 사람들의 스승 작품 (초기 작품으로, 시편과 비슷) ‘호다욧’ 이라고 부르기도 함(공동체를 시작하면서 힘들었던 것을 시 형식으로 표현)
• ‘하박국 주석’ - 쿰란 사람의 스승(바른 스승)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멜기 레샤'라고 부름. 나쁜 스승) ⟶ 두 그룹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두루마리
• ‘공동체 규정’ - 쿰란 지역 공동체들의 내부 규정(매우 철저함)
• ‘창세기 외경’ - 일명 ‘라멕의 책’ (창세기 이야기를 주제로 쓴 두루마리로, 아람어로 쓰여짐) ⟶ '틈 메우기' 기법(gapping)이라고 하는 유대인 전통 성경 읽기 방식 사용
※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히브리어로 썼는데, '창세기 외경' 두루마리만 아람어로 썼음
* '창세기 외경’, 이사야 두루마리(a), 이사야 두루마리(b) - 외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
* 1957년까지 모두 11개 동굴에서 약 850 종류의 사본이 발견됨
2) 쿰란 사람들의 성경
쿰란 사람들의 성경 사랑(자신들을 ‘말씀의 전’ 이라고 부름)
• 모두 205~6개의 성경 사본을 두루마리로 남김(쿰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것임)
• 정방형 히브리어 글자체로 된 두루마리도 있고 고(古) 히브리어 글자체 두루마리도 있다.
(고(古)히브리어 글자체 두루마리 수는 레위기가 가장 많다.)
• 희랍어로 기록된 성경 두루마리도 있어서, 정확한 숫자 파악이 어렵다.
• 에스더서는 아직껏 미발견
※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하나임.
• 제 4동굴에서 나온 성경 두루마리가 가장 많다. (약 70%정도 ⟶ 137개 두루마리)
•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모든 문헌의 숫자 약 850
(그 가운데 약 1/4이 성경 두루마리 ⟶ 외부에서도 두루마리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도 큼)
• 쿰란 사람들이 좋아하던 성경 - 시편(36개), 신명기(31개), 이사야(21개) 창세기(19개), 출애굽기(17)개 ⟶ 이 다섯 권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유대인이 가장 많이 읽었던 구약책임. 시편은 기도이기 때문에,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신명기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자신들과 동일시해서, 출애굽기는 출애굽이라는 고난의 경험등, 역사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좋아했다. 레위기도 쿰란 동굴에서 많이 발견됨 (정결법에 많은 관심)
3) 쿰란 사람들은?
• 대략 기원전 150년경부터 쿰란 공동체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함
• 쿰란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한 여러 의견 있음
⇓
① 기원 후 1세기에 활동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등장한 에세네 사람들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음
② ‘할라카 편지’(MMT) 문헌에, 예루살렘 제사장 그룹과 쿰란 공동체가 갈라선 이유가 나옴. 예루살렘 제사장 그룹도, 쿰란 사람들도 모두 사두개인임.
③ 하스몬 왕가의 종교정책(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 노릇까지 하는)에 반기를 들고 갈라선 그룹이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음
④ ‘하박국 주석’ 문헌에는, 쿰란 사람들이 지도자를 ‘바른 스승’ 이라고 부르고, 예루살렘 대제사장을 ‘나쁜 사제’라 부르면서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시는 때를 기다림.
서열이 바른 두 메시아 (왕 같은 메시아, 제사장 같은 메시아)를 기다림. 우리는 이 두 성향(히브리서 7장)의 메시아를 예수님이라고 고백함
⑤ 실제로 쿰란 사람들은 ‘멜기세덱’ 문헌을 남김 ⟶ 히브리서의 멜기세덱 이야기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예수님께 적용한 것임을 알게 함
⑥ 별점에 관한 두루마리 ⟶ 하늘에 메시아별이 있다고 믿음
⑦ '회중 규정'이라는 문헌 ⟶ 쿰란 사람들은, 제사장 같은 메시아와 왕 같은 메시아의 서열이 다른 두 메시아를 고대함
⑧ 쿰란 사람들은 말씀을 사랑하며, 베끼고 공부하고 지키며 살아가려고 무척 애를 썼음
‘성 마가 수도원 이사야 두루마리 : 이들이 베낀 성경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
⑨ 쿰란 사람들의 말씀 공부 : ‘하박국 주석’, ‘이사야 주석’, ‘시편 주석’, ‘나훔 주석’, ‘스바냐 주석’(모두 두루마리 단편이어서 모든 내용을 다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 :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구약을 읽음('토라'를 사랑하여) 구구절절 해석하고 베끼고 공부함
⑩ ‘공동체 규정’ ⟶ 두루마리로 쿰란 공동체 일원의 생활규정이 기록됨 ⟶ 전문 용어로 ‘할라카’: 걸어야 할 길의(공동체 내규)의 의미함
※ 할라카 : 본디 기원후 8세기의 탈무드에 들어있는 규정을 가리키는 말. 지금은 쿰란 사람들의 여러 규정도 할라카라고 함
⑪ ‘사독 단편’ 또는 ‘다메섹 문헌’(CD)이라고 부르는 두루마리 ⟶ 공동체 밖에서 살던 재가 회원들이 지켜야 할 규정이 기록됨(여성들도 회원이 가능: 성차별이 없는 공동체 이룩하려는 노력함). ⑫ 메시아를 기다림 ⟶ 암울한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몸부림 침(메시아 운동이 무장투쟁 하려는 흔적으로 나타남: 제1동굴에서 나온 ‘전쟁 두루마리‘ 참고!) ⟶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빛의 자녀', 로마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
※ 로마 군인들이 쿰란 공동체의 본거지(쿰란 제 4동굴)로 쳐들어와 모두 죽이려 함. 쿰란 사람들 일부가 미리 알고 성경 두루마리를 들고 마싸다(Masada)라는 요새지로 도망침 ⟶ 기원후 68년 쿰란 지역에 쳐들어온 로마 군대는 마싸다 전투를 벌여서 쿰란공동체를 없앤 후. 70년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점령하고 성전을 허물었음 ⟶ 마싸다로 내려가 3년 동안 대치하다가 결국 73년에 천 여명의 마지막 유대 항정군을 죽임.
⑬ ‘안식일 노래’ 두루마리 ⟶ 하늘 성전에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기록 ⟶ 이런 생각은 천년이 지나 유대인들 가운데 카발라 전통으로 생겨남
※ 카발라 전통: 하느님과 직접 만나고 또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고자 하는 전통 - 깨우침과 앎을 중시하는 지혜와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이 보이시는 드러내 보이시는 앞일(묵시)를 중시함
4) 쿰란 사람들이 남긴 두루마리
성경 두루마리가 약 사분의 일, 그리고 나머지의 절반이 각각 외경과 위경, 그리고 쿰란 사람들이 직접 쓴 작품임. 외경, 위경 두루마리는 쿰란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한 두루마리임. ‘에녹’ 두루마리와 ‘희년서’ 두루마리가 특히 더 중요시 된다.
• ‘에녹서’(에녹 두루마리) - 몸의 부활을 말함(‘파수꾼 책’ 부분에서) ⟶ 아람어로 기록됨 (쿰란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님) 현재, 콥트어로 번역한 에티오피아정교회의 에녹서가 가장 길고 완벽한 문헌으로 알려짐.
• ‘희년서’ - 위경으로 우리가 분류함. 창세기를 희년으로, 50년 단위로 나누어 이야기함. 유대인들이 음력을 지켰음에 반해서, 이들은 양력을 지켰음을 알게 해줌 ⟶ 쿰란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온 문헌임
※ 에티오피아정교회가 지금도 복음서 다음으로 중요하게 꼽는 정경 : '에녹서'와 '희년서'
• ‘집회서’ - 외경 또는 제 2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루마리 ⟶ ‘벤시라’ 또는 ‘시락서’ 라고도 부름 ⟶ 히브리어로 기록됨(현재 모두 8개의 사본이 남음! 그중에서 3개를 쿰란 사람들이 남김, 지혜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면서, 시편 두루마리 속에든 벤시라도 있음
• ‘성전 두루마리’ - 쿰란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중에서 가장 긴 것임 (9미터) 이 두루마리에 묘사된 성전의 크기는 에스겔(40~48장)에 묘사된 성전보다 3배가 더 큼 ⟶ 구약의 정결법이나 신약의 정결 규정 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함
• ‘멜기세덱’문헌 - 제 11동굴에서 나옴 ⟶ 외부에서 들여온 문헌이라고 짐작 ⟶ 레위기와 신명기, 시편과 이사야, 다니엘을 인용하면서 희년과 때를 강조함
• 쿰란 사람들이 남긴 약 850여 두루마리 - 절반정도는 외경까지 포함하여, 성경 두루마리, 나머지 절반은 쿰란 사람들이 남긴 문헌 ⟶ 이것을 통해 치열한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초기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음 ⟶ 구약 성경의 정착 전 단계를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
5) 다양한 성경본문
• 쿰란 사람들이 남긴 200여개의 성경 두루마리 : 5종류
① ‘원 칠십인역 본문’ -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칠십인역의 대본
② ‘원 사마리아오경 본문’ -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마리아 오경의 본디 히브리어 성경 ⟶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경만을 성경으로 알고 보존 ⟶ 이 성경은 지금 우리가 히브리어 글자체와 많이 다름
③ ‘원 마소라 본문’ - 지금 우리가 많이 읽고 있는 마소라 본문의 원(原) 히브리어 성경 ⟶ 본디 모음부호가 붙어 있지 않은 히브리어 성경 ⟶ 쿰란 지역의 11 동굴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성경 두루마리를 살펴보면 원 마소라 본문 전통이 무려 90% 이상을 차지
※ 마소라 학자들이 기원 후 , 800~100년 사이에 지금 형태로, 모음 부호를 만들어 붙여서, 고정 시킨 본문이, 마소라 본문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의 마소라 본문 형태가 점점 우세해짐
④ 쿰란 사람들의 고유한 본문 전통 ⟶ 쿰란사람들이 남긴 성경 두루마리의 약 40% 정도를 차지
⑤ 본문의 성격상 분류가 되지 않는 것들 - 쿰란 동굴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성경 두루마리 단편 모두 23개 ⟶ 대부분 마소라 본문과 가까움 ⟶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의 마소라 본문 형태가 점점 우세해짐
ⅰ) 사해 사본, 쿰란 동굴에서 나온 두루마리
ⅱ) 칠십인역, 희랍어로 번역한 구약
ⅲ) 시리아역, 시리아어로 번역한 페쉬타역
ⅳ) 쿰란 사람들이 남긴 두루마리 가운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보다 가장 차이가 나는 책 ‘예레미야’(마소라 본문 예레미야가 칠십인역 예레미야보다 1/7 더 길다)
ⅴ) 집회서(외경)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칠십인역 집회서와 쿰란 사람들이 시편 두루마리 속에 집어넣은 집회 서와 차이가 많이 남 ⟶ 페쉬타역 속의 집회서와도 무척 다름
* 카톨릭 교회에서는 칠십인역 집회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임
☞ 성경본문이 서로 다른 것을 통해, 성경 속에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이 손길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성경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고 수많은 신앙인들과 신앙공동체의 작품 ⟶ 칠십인역은 우리 그리스도 교회가 성경으로 받아들여 인용하고 보존하여 우리 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음 ⟶ 성경의 다양한 모습을 잘 증언 ⟶ 우리는 여러 전통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여 지금 우리의 성경으로 삼고 읽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 쿰란 사람들이 남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점
①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인 마소라 본문은 벌써 2천년이 넘게 가장 권이 있는 성경 본문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 예수님이 오시기 300여 년 전부터 벌써 지금의 성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것
②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존된 성경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 ‘성 마가 수도원 이사야 두루마리’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소라 본문 이사야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해, 성경을 안심하고 열심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③ 우리 교회가 지금껏 보존해온 칠십인역 성경이 얼마나 소중한 유산이라는 것
④ 성경 두루마리의 다양한 모습 또한 우리가 껴안아야할 다양한 전통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함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해야 할 귀중한 신앙 유산임)
3. 고대어 번역 성경
* 번역이란 단순한 말바꿈이 아닌 새로운 창조라 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에 벌써 구약성경의 일부 (토라, 예언서, 성문서)가 희랍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 고대어 번역 성경 ① 희랍어 칠십인역(기원전 3세기) ② 시리아어 페쉬타역(기원후 1세기) ③ 라틴어 불가타역(기원후 5세기) ④ 아람어 타르굼(기원후 8세기) |
1) 구약성경의 배열
•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72일 동안 번역
•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온 희랍어 번역 성경은 모세 오경만을 가리킴
(그리스어로 ‘노모스’[νομος], 히브리어로 ‘토라'[תּוֹרָה])
•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는 구약의 대부분 ⟶ 바로, 칠십인역 성경임
(칠십인역 희랍어 : 코이네 희랍어[쉬운, 일상어 희랍어])
• 기원후 4세기경의 칠십인역 가운데, 바티칸(Codex Baticanus) 사본 ⟶ 우리의 성경과 배열 동일
(역사서와 지혜서와 예언서의 순서로 되어 있음)
※ 본디 히브리어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의 순서임
* 칠십인역 바티칸 사본에는 9권의 책이 더 들어 있음(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베오상⸱하)
⇓ ↼ 이 9권의 책을,
* 한글 성경 『공동번역 개정판』(1999)에는 본디 바티칸 사본에 있는 순서대로 각 책을 여기저기에 집어넣음. but, 한글 성경 『공동번역』(1977)에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제2경전이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었음. 또한, 『공동번역』(1977)에는 출애굽기를 ‘탈출기’로, 사사기를 ‘판관기’로, 학개를 ‘하깨’라고 부름. ‘전도서는’ 코헬렛’으로 되어 있음
2) 그리스어 칠십인역(기원전 3세기-1세기)
• 칠십인역 희랍어와 신약 원어 성경 희랍어는 같은 희랍어임
• 칠십인역 성경은 우리 말 성경에 지대한 영향 미침
(번역은 유대인들이 했지만, 지금 형태로의 정착은 그리스도인들이 함)
• 칠십인역 성경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경우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음
☞ 칠십인역이 히브리어 성경과 가장 다른 부분 ⟶ 예레미야 (히브리어 성경 예레미야는 칠십인역 예레미야보다 약 1/7이 더 길다.
• 지금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마소라 본문)은 여러 히브리어 본문 전통 가운데 하나. ‘마소라’는 ‘전통’이라는 뜻(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보존한 성경을 마소라 본문이라 함 기원후 500년경~1000년경까지 마소라 학자들이 활동하여, 지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서관에 7~8벌의 성경이 있음 (히브리어 전통에 따라 창세기가 처음 책, 역대하가 마지막 책) 마소라 본문을 ‘레닌그라드 코덱스’라고 부름
• 쿰란 지역 공동체(기원전 150년경~기원후 6년까지 사해 서북쪽 쿰란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성경을 베끼고 공부하며 신앙 생활하던 사람)도 예레미야 본문을 보존해옴 ⟶ 칠십인역의 예레미야가 더 짧고 순서도 다름 ⟶ 각 책마다 전승과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옛날에는 모든 성경을 다 가지고 있지 않고, 각 두루마리가 따로따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
• 칠십인역 성경은 쿰란 사람들이 남긴 여러 성경 사본을 보면 본디 서로 다른 히브리어 본 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확산하는 증거가 된다. 즉, 여러 전통 가운데 하나를 잘 보존하고 있는 성경이 칠십인역이고, 신약의 규약 인용이 바로 칠십인역 성경이므로, 무척 소중한 성경 전통임
3) 시리아어 페쉬타역(기원후 1세기-3세기)
• 시리아어 :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 시리아어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다 들어 있음
• 시라아 교회의 기원설
① 예수께서 직접 시리아 지역에 가서 전도하신 것이 이 교회의 시작이라는 설.
② 예수님의 칠십인 제자 가운데 아다이라고 부르는 제자 다대오가 처음 교회를 시작했다는 설.
③ 예수님 당시 시리아의 에뎃사라는 지역을 관할한 아브가르라는 왕이 이 교회를 시작했다는 설.
• 시리아 교회가 보존해 왔지만, 잠언 같은 책은 유대인이 번역,
다른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번역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것)
• 시리아 교회의 한 전통은 5편시를 더 가지고 있어, 시편 연구에 소중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음
(쿰란 사람들의 [시편 두루마리]는 이 5편의 시편 히브리어 원문을 보존하고 있음)
4) 아람어 타르굼(기원후 8세기)
• 타르굼은 아람어로 ‘번역’이라는 뜻
• 쿰란 사람들은 욥기를 아람어로 번역한 두루마리를 보존하고 있음.
(욥 타르굼) ⟶ 기원후 8세기에 바빌론에서 나온 타르굼이라는 책과 성격이 많이 다름
• 쿰란사람들이 보존한 타르굼: 히브리어 문장을 아람어 문장으로 거의 그대로 바꾼 것
• 타르굼이라고 부르는 책 : 설명을 많이 집어넣은 번역임.
• 타르굼은 성경 전체가 남아 있지 않음
• 오경 : 타르굼 옹켈로스
• 예언서 : 타르굼 요나단
• 시편, 다섯 두루마리: 따로따로 보존되어 전해짐
(유대인들이 각 절기 때마다 읽던 전도서, 아가, 애가, 룻기 요나서)
• 메시아 시편(110편) - 사도행전 (2:33~35), 오순절 베드로가 말하는 주님은 바로 시편 110편에 나오는 주님이시다.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면서 읽고 있는 것임)
• 타르굼은 신약의 읽기와 비슷함. 신약은 모든 관심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쏠려있음
•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관심을 기울여 시편을 읽었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강조한 것이 다름(그러나 일기 방식은 같음)
4. 구약과 고대 중동 문학
행 1:7-11을 보면, 예수께서 구름에 휩싸여 올라가셨던 것처럼, 그렇게 구름에 휩싸여 다시 오신다고 말한다(단 7:13에도 나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고백이다. 시 18:9-13과 삼하 22:8-12은 똑같은 시로, 또 다른 시편 97:1~6에도 하느님이 구름과 바람과 불꽃을 몰고 오신다고 했다. 즉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인 구름과 바람과 불꽃을 몰고 오신다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중동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
1) 우가릿 문학
라스 샤므라(시리아 지역)라는 곳에서 1929년 토판 발견하였다. 이곳은 우가릿 문학의 산실이었던 곳임. 이곳은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에 우가릿왕국이 있었던 곳! 당시 시리아를 통치하던 프랑스 고고학 발굴단이 여러 유물을 찾아냄. 히브리어와 아주 가깝고 유사한 쐐기 문자를 기록된 언어가 우가릿어임!
(1) 바알
‘바알과 아낫’: 많은 토판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긴 문학(신화)
이 책을 보통 “바알 사이클”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함. 처음에 바알을 아낫이라고 착각을 하였지만, 나중에 바알이 남신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됨. 얌은 바다 신, 나하르: 강의 신, 바알: 바람의 신(생명의 신), 모트: 죽음의 신이다. 아낫은 여신(바알의 짝신), 엘: 최고의 신, 엘의 짝신: 아세르(아티라투). 이 신화는 모두 6개의 토판으로 되어있고,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음
①‘얌과 나하르’(앞의 두 토판)의 이야기
②‘바알의 궁전’(셋째와 넷째 토판)이야기
③‘바알과 모트’이야기(다섯째와 여섯째 토판)
ⅰ) 엘은 생명의 시 바알도, 죽음의 신 모트도,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부른다. 엘은 생명과 죽음을 아우르는 신이다. “자애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분”, “해(年)의 아버지”으로 불린다.
ⅱ) 일을 결정할 때 꼭 엘의 허락을 받는다.
ⅲ) 엘이 사는 곳을 이들 토판은, ‘강들의 샘이 있는 곳, 깊음의 샘이 있는 곳’이라고 함: (욥 28:11, 38:16, 시 46:4에서 하느님의 마을에 생명강이 흐른다고 함. 즉, 생명수 이미지는 우가릿들의 생각 속에서 비롯된 것임)
☀ ‘얌과 나하르’의 이야기
얌과 나하르는 서로 다른 두 신이지만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이것 때문에 얌-나하르라고 불렸다. 얌-나하르는 자신들의 힘을 뽐내면서, 바알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로 인해 신들이 바알편과 얌-나하르 편으로 나뉘어 써로 싸웠다. 최종적으로 바알이 승리하였다. 우가릿 신들은 바알이 임금이라고 말하고, 성경속의 시인들은 야훼님이 왕이라고 선언함. 우가릿인들의 문학을 빗대어 성경 속의 시인들이 고백한 것이다.
☀ ‘바알의 궁전’이야기
바알이 임금이 되어, 궁전을 지음. 백향목으로 지으라는 말은 솔로몬 성전의 백향목을 생각나게 함. 궁전 짓는 자재는 창세기, 욥기,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보석 자재와 같은 것임. 바알은, 궁전에 창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예레미야(9:20~21)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가릿인들은 창문을 타고 죽음이 넘어 온다고 믿었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엘의 잔치” 시 속에서 우가릿인들은 엘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술에 잔즉 취한 최고신 엘이 “죽은 사람”, “땅으로 내려간 이”처럼 쓰러지고 넘어진다. “땅으로 내려간 이”는 “아래세상으로 내려간 이” 즉 “죽은 이”와같은 표현으로 쓰인다. 그러나 성경은 엘의 인간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 ‘바알과 모트’ 이야기
바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장면 나옴. 이사야 27:1에서 “그날이 오면 주께서 좁고 예리한 큰 칼로 벌하시리라. 매끄러운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처치할 거이다.”라고 나옴. 여기서 리워야단은 우가릿 신화 로탄과 같은 말이다. 죽음의 신 모트의 식욕은 아무리 먹어도 양이 차지 않는 것으로 유명함. 이사야 5:14에서도 “스올이 입맛을 다시며 그 입을 한없이 벌린다.”고 했다. 죽음은 무엇이든 삼켜버린다고 하여, 바알은 죽음의 신 앞에서 벌벌 떤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바알은 죽음의 신 모트로 인해 죽은 신이 된다. 이 신화에서 구름과 바람과 번개와 비는 바알을 상징한다. 우가릿인들은 이슬과 소낙비와 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도 야훼 하느님과 바람,구름, 번개 비를 꼭 연관시켰다. 바알이 생명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야훼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예언자와 시인은 과감하게 선언한다. 비, 바람, 번개와 함께 죽음의 땅으로 내려간 바알은, 짝신 아낫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아낫은 평화의 신이요 전쟁의 신이다. 여신 아낫을 칭송하는 이야기에서, 아낫에겐 밥이 평화라고 말한다. 밥을 나누어 먹어야 평화가 땅위에 넘친다고 한다. 생명을 노래하는 아낫이, 바알이 모트에게 끌려가자 애곡을 한다. 아낫은 돌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다. (이 행위는 죽은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상징적 행위다.) 이 애곡 의식 장면은 우가릿 최고의 신, 엘의 애곡 의식과 똑같다. 다른 점은, 아낫이 아래세상으로 내려가 바알의 시신을 메고 신성시 했던 자폰산(이사야에 나오는 북방산)으로 그의 시신을 모신다는 것이다. 바알은 죽음의 땅에서 죽음의 신 모트와 사투를 벌인다. 서로 이겼다, 졌다를 반복! 생명과 죽음의 끝없는 씨름을, 인생살이라고 묘사한다. 이 이야기 속 바알을, 우가릿 왕국의 임금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마크 스미드가)가 있다.
(2) 우가릿 왕실 망자 제의문
기원전 12세기에 우가릿 왕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들 왕실은 우가릿왕국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예문을 읽었다. 이 예배문에 나오는 “아무라피”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쓴 바빌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 나온다. 우가릿인들은 아래 세상에 있는 조상, 죽은 왕들에게 우가릿 임금이 제사를 드린다. 아래세상으로 내려가라고 태양신 아프슈에게 청함. 태양신은 고대 중동인들에게는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다 아우르는 정의의 신이다. 동쪽에서 떠으로는 태양은 낮 동안 온 세상을 환히 비추고 정의가 실현되는지 살피고, 저녁이 되어서는 저 세상 문턱인 서쪽으로 내려가 아래세상에서 죽은 이들을 보살핀다. 태양신이 고대 중동 문학 항상 등장한다. 성경에도 태양에 대한 흔적을 시편 8편, 139편에 찾아볼 수 있다. 우가릿 왕들은 아래세상이 있다. 아래세상으로 내려간 바알의 모습이기도 함.
스미드 학자는 바알이 바로 우가릿 왕조를 상징하는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바알은 죽음을 이기고, 예문 마지막에 평화라는 말이 나온다. 히브리어와 같이 우가릿어로도 비슷하게 “샬롬”이라고 한다. 욥기에서도, 하느님이 아래 세상까지 내려가신다는 흔치 않는 이야기를 한다. 구약에서 드물게 하느님이 아래세상으로 내려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서 38:19에 나오는 기도는 죽음의 문턱에서 드리는 기도인데, 죽음의 영역은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된 영역이라는 생각이 구약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죽음의 영역을 인정하여, 죽은 이들을 신으로 인정하면 성경의 오직 야훼 한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라시는 고백은 성립될 수 없어서, 민수기는 망자 예배를 금지한다. 우가릿 왕조의 표상은 바알인데, 구약은 바알의 모습 속에서 야훼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훼 하느님을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분이라고 역사 경험을 통해 고백을 한다.
2) 메소포타미아 문학
메소포타미아는 희랍어로 “두강 사이라는 뜻임. 기원전 5천년부터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에 수메르인들이 살았음. 수메르인들은 눈이 크고 머리가 검었음.
(1) 고대 중동인들의 세계관
수메르인들은 온 세상이 하늘, 땅, 바다로 나누어 졌다고 생각함.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은 다 수메르인들에게서 물려받음. 창세기(1:1, 2:4), 시편(135:6)에 세상이 하늘, 땅, 바다로 되어 있다고 생각함
① 『에누마 엘리쉬』
바벨론 창조 이야기가 나옴. “압수”는 강(江)의 신이고 “티아맛”은 바다신이다. 두강(압수)과 바다(티아맛)이 서로 만남. 수메르인들은 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함.
② 『아시리아 바빌론 신 목록』
기원전 14세기 문헌임. 수메르어 아누(Anu), 안(An)은 하늘을 뜻함. 이 목록은 땅과 하늘이 온누리의 근원이라고 말함 ⟶함무라비 법전에 온누리는 하늘과 땅 또는 땅과 하늘 둘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함. 이 법전 머릿돌에 바벨론의 수도 니푸르가 우주의 통로라고 말함. 성경도 땅과 하늘로 두조각 되어있는 온누리를 하나님의 솜씨라고 고백함. 헷(히타이트)사람, 고대 중동, 그리스인들까지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음
(2) 아트라하시스
성경에 흙으로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듯이, 메소포타미아 문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아트라하시스는 램버트와 밀라드라는 학자가 재구성하였다. 바빌론 사람들은 “보름날”을 “샤파투”라고 불렀다. 성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샤바트”라고 부름. 바빌론의 보름날은 숫자로 14이고, 이스라엘은 7이라고 불렀다.
성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초하루, 보름 거기에 더하여 이렛날(안식일)에도 예배를 드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음.
이사야(41:23)에도 하느님을 “진흙으로 도기를 빚는 도예가라고 부름. 창세기에도 하느님이 인간을 “흙”을 빚으셨다고 말함. 성경은 『아트라하시스』와 다르게 하느님이 인간의 코에 직접 숨을 불어넣으셨음. 코헬렛(12:7)에서 인간이 숨을 멈추면 그 숨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말함. 아트라하시스에 “닌투”라는 여신이 등장함. 이 여신은 우리나라 엄마와 비슷한 “맘미”(인간의 여창조주) 나 “마마”(아기를 낳는 여신)라고도 부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함. 이사야(49:10, 49:15)에서는 “아기집 사랑으로 생사를 넘나들며 사랑하는 이” 라고 부름. 고대 중동인들은 공통적으로 온 세상이 땅과 하늘로 되어 있고, 죽은 다음에 아래세상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한다.
(3) 길가메쉬
“길가메쉬”는 수메르의 왕임. 수메르어로는 “빌가메쉬”라고 부름. 길가메쉬는 “영원한 젊음”이라는 뜻임. 길가메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다룸. 길가메쉬에게 엔키두라는 친구가 있음. 처음에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친구가 아니었음. 엔키두는 문명의 세계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길가메쉬와 만나게 됨. 처음에는 서로 싸우다가 다정한 친구가 됨. 어느날 엔키두가 나무를 베다 병이 들어 갑자기 죽게 됨. 친구의 죽음으로 길가메쉬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됨.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해 온세상의 끝 서쪽까지 감. 온갖 풍파를 겪고 한 여관으로 찾아가 쉬두리라는 여관 주인을 만났음. 쉬두리는 길가메쉬에게 영생은 없다고 충고를 함. “밤마다 날마다 재미있게 사세요, 날이면 날마다 즐겁게 사세요.”라고 말함.
코헬렛에도 이 표현을 약간 바꾸어 말함. 전도자는 죽음을 늘 의식하고 살라고 충고를 함. 기원전 1400년 “인테푸”라는 이집트 왕의 무덤에 비슷한 이야기를 함. 고대 중동인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함
(4) 내려가는 이쉬타르
내려가는 아난나 (바빌론은 내려가는 이쉬타르라고도 부름) 통해 수메르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음. 아난나(이쉬타르)는 기원전 3000년대 유명한 수메르 여신임. 그 뒤를 이어 2000 ~ 1000년에는 바빌론에서 “이쉬타르”라고도 부르고,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 로마인들은 비너스라고 부름. 이쉬타르가 아래세상( 쿠르니기아(Kurnugia))으로 내려감. 수메르인들이 쿠르니기아를 돌아오지 못하는 땅이라고 부름. 이곳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다시는 윗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고, 어둠 밖에 없음(욥 10:20-21에서 어둠에 대해 말함). 아래세상은 어둠의 땅이고, 또한 집이라고 부르기도 함. 아래세상은 죽은 이들이 머무는 집이라고 하기도 함.
성경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에 이러한 생각은 반복됨. 『내려가는 이쉬타르』에 아래세상에 있던 이쉬타르가 윗세상으로 다시 돌아옴. 이쉬타르가 아래세상으로 내려가 땅위의 생명들이 시들해 지자, 신들이 이쉬타르의 몸값을 지부하고 윗 세상으로 다시 데려옴. “남타르”라는 심부름꾼이 아래세상으로 내려가 여신 이쉬타르를 살려냄. 남타르는 죽음의 땅을 들어갈 때 일곱문을 통과함. 남타르는 매문마다 몸치장 장식품을 벗어주지만, 매문마다 장식품을 돌려주고 몸값(목숨값)을 요구함. 남타르는 이쉬타르의 목숨값을 자신의 짝신 티무즈(성경에는 담무즈, 수메르어는 두무지라고 부름)를 아래세상에 대신 두고 옴. 죽음은 몸 값없이는 대신 속량할 수 없음.
욥기(33:22)에 구덩이(죽음의 땅)에 내려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함. 여기서 죽음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몸값을 지불해야지만 살 수 있다고 말함.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몸값을 대신 갚으러 오신 분이라 고백함.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됨. 이러한 생각은 고대 중동 사람들의 생각과 맞물림.
(5) 에누마 엘리쉬
에누마 엘리쉬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이야기임. 아카드어는 기원전 3000년대 지금의 쿠웨이트에 있던 아카드라는 도시에 사용된 언어임. 히브리어와 같은 셈어임. 에누마 엘리쉬는 “위로는 할 때”라는 뜻임. 이 신화에서 강의신 압수와 바다의 신 티아맛이 자신들의 몸을 섞고, 신들을 창조함.
『에누마 엘리쉬』는 7판으로 기록 되어있음. 바빌론 사람들이 아키투라는 신년 축제 때 낭독한 이야기임. 2000년 후반 작품이기도함. 이 신화 속에 “마르둑”(“폭풍의 아들”, “태양의 아들”)이라는 신이 등장함. 땅의 신 에아와 딤키나는 그의 아버지, 어머니임. 마르둑은 그의 어머니와 다른 여신들의 젖을 먹으며 자람. 그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뛰어나 넷씩 있다고 표현함(고대 세계에서 4는 완전수임) 마르둑은 영웅으로 등장하고, 벨루(주인)이라고도 불림. 신들은 마르둑을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고, 마르둑이 티아맛과 싸우도록 부추김. 결국 티아맛과 마르둑은 서로 싸움.
“그대는 우리의 챔피온이다.”라는 말은 성경 시편 “야훼님이 우리의 임금이시다.” 라는 선언과 비슷함. 시편 93,97,99편은 히브리어 아도니아 말랔이라는 말로 시작함. 아도니아 말랔은 “야훼께서 왕이시다.”, “야훼께서 다스리신다.”, “야훼께서 통치하신다.” “야훼께서 왕위에 오르신다.” 라는 뜻임. 시편 시인들은 그 어떤 왕도 하느님을 대시 할 수 없다고 선언함.
에누마 엘리쉬에서 싸움터에 가는 마르둑의 모습을 묘사함. 마르둑 앞에 번개와 4~7바람이 앞뒤에 호위하고 폭풍의 전차를 탐. 사방에서 불어는 바람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함. 시편 시인들은 마르둑처럼 하느님의 거동을 똑같이 묘사함. 하느님을 호위하는 경호 부대는 바람과 불꽃이고, 또다른 신들은 사랑과 진실이 하느님의 호위꾼이라 고백함. 여호와가 거동하자 땅이 곡식을 냄. 바름과 평화가 하느님의 모습임. 마르둑은 티아맛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티아맛을 죽임. 마르둑은 티아맛의 몸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함.
본문 “자세히 들여다본다····자로잰다····조정한다···조정한다···세운다.”는 말은 성소를 세운다는 말, 세상을 창조하는 말과 똑같다. 티아맛의 주검을 둘로 나누어 반쪽으로 하늘을, 주검의 가죽을 시간을 창조함. 땅에 세운 성소는 하늘 성소의 복제품이다. 에아는 땅과 지혜의 신이다. 이 신들을 위해 성소를 세운다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라 같음. 고대 중동 사람들은 온 세상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생각함.
잠언(8:30)에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았다고 함.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읽었고, 이 자세히 탐구한 지혜를 성경(토라)이라고 말함. 성경은 기원전 11세기 작품 에누마 엘리쉬를 최대한 활용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고백함
3) 이집트 문학
이집트 문학은 셈어와 다르게 그림 문자를 사용함. 이집트인들은 고대세계에 뛰어난 지혜(과학적 지식)과 많은 유물(피라미드)들을 남김. 이집트 종교는 죽음을 중시여긴다. 피라미드 본문 (BC 4000), 석관 본문(BC 3000), 망자의 서(BC 2000)은 이집트의 유명한 기도문임. 『망자의 서』 125번 째 글에 저세상으로 들어가는 영혼을 볼 수 있음.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영혼은 무게를 재야하는데, 깃털보다 무거우면 저승에 갈 수 없음. 영혼이 수십 가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진실 된 것으로 판명되면 저세상으로 갈 수 있음.
시편도 망자의 서와 많이 닮음. 시편(15:2-5, 24:4) 거룩한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의 조건을 말함. 영원한 문들(시편 24:7~10)은 “아래세상 문들”이라고 읽을 수 있음. 독일어로 (Die Türen in der Welt)라고 함. 시편촬요(알렉산더 피터스)에서는 지계문이라고 번역함. 망자의 서 112번 째 주문에 하느님이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옴. “아래 세상 신들아 머리를 들라.” 이러한 명령은 시편 24:7)시인의 명령과 똑같음.
잠언 22~24장에 서른 가지 교훈이 한 묶음으로 있는데, 이 교훈들은 『아메네오페』라는 이집트 문학을 히브리어로 각색한 것임. 카르낙 신전에 있는 이집트 제 22왕조 어느 사제 상에 “태양 빛을 보는 그 순간이 아래세상의 주인으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값지다“라고 적음.
전도서 (9:4)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 하더라도 살아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훨씬 났다“라고 말함.
4) 북방 셈어 문학
북방 셈어 문학은 우가릿 문학, 아람어 문학, 페니키아어 문학, 데이르 알라어 문학, 히브리어 문학을 가리킴. 여기서 새김글(Inscription)이라고 부름. 새김글은 비문에 새겨진 문헌 뿐 만 아니라 동전, 그릇에 새겨져 있는 글귀까지 다 포함함.
(1) 단 새김글
1993~1994년 텔 단에서 돌에 새겨져 있는 아람어 새김글 세 개를 발견함. 이 새김글은 건물 벽돌로 만들어졌고, BC 8세기경 유물로 추정됨. 이 새김글에 “다윗의 집안”이라는 표현이 있음. 성경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지 않은 새김글임. 이글을 쓴 이는 열왕기하 (8:7~15)에 나오는 다메섹의 하자엘이나 오므리 왕으로 추정됨. 이 새김글은 다윗 왕가의 역사성을 증명해준다.
(2) 쿤틸렛 아주르드 새김글
1970년 쿤틸렛 아주르드에 중요한 새김글 여러개 발견함. 이 새김글들에 “사마리아 야훼님과 그분의 아세라님”,“데만의 야훼님과 그분의 아세라님”,과“사마리아의 야훼님” 이라는 표현을 함.이 새김글을 통해 BC 9세기 사마리아와 데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 새김글에 “그분의 아세라”라는 표현이 있음. 어떤 학자들은 이 아세라를 여신이 아니고 성물(예배 기구)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BC 5세기에 이집트 엘레판틴에 살았던 유대인 공동체는 “야후”라 불리는 하나님과 아세라를 함께 섬겼음.
신명기 (16:21)에 제단 옆에 나무 즉 아세라를 세우지 말라는 규정이 있음. 쿤틸렛 아주르드 새김글에 생명수(생명나무)그림도 함께 발견됨. 고대세계에서 생명수는 이콘과 같이 보편적인 이미지임. 하솔에 있는 솔로몬 여름 별장에 생명수 이미지가 있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뿐만 아니라 여신 아세라를 섬김.
(3) 케테프 힌놈 새김글
케테프 힌놈은 예루살렘 외곽 지역에 있는 땅임. 1980년 10대 후반 소녀의 유물을 발견함. 이 소녀의 목이 성경 구절(민 6:24~26)이 있는 은으로 만든 목걸이가 있음. 이 성경구절은 사제 축복이라 불리고 히브리어로 “비르캇 하 코하힘”이라 부름. 이 새김글이 발견되기 이전 십계명이 들어있는 니쉬 파피루스(BC 2)가 가장 오래됨
(4) 데이르 알라 새김글
1967년 얍복강 부근 데이르 알라 곳에 두 개의 토판을 발견함, 이 토판에 “브올의 아들 발람”이 등장함. 데이르 알라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와 가까운 언어임. 이 토판은 내용상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님.
성경에 “야훼”의 이름이 “샤다이”, “엘”, 그리고 “엘르욘”(지극히 높이신 분)으로 표현됨. 이 토판에는 “샤다이 신들”이라는 이름이 나옴. 엘 샤다이는 데이르 알라 새김글에 나오는 신명기와 같은 이름임. “환상으로 뵙고” 라는 말도 “선견자”라는 새김글의 표현의 같은 “보다”와 같은 뿌리 말임. 성경의 발람과 새김글의 발람은 같은 사람이고 같은 신을 섬기는 선지자임
첫째 글에는 “샤가르-이쉬타르”라는 신이 등장하고, 둘째 글에는 “엘”이라는 신이 등장함
둘째 토판의 새김글은 민수기, 욥기, 신명기 닮았음. 신명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문학을 “엘” 문학이라고 함. “엘 문학”속에 시편 42, 49편이 들어감
엘 문학에는 엘신이 등장하고, 첫 번째 토판에는 “샤다이”라는 신이 등장함 “샤다이”는 칠십인역 해석으로 “전능하신 분”이라 읽음. 샤다이와 비슷한 단어 “샤두”(아카드어)로 “산”이나 “들판”으로 해석하기도 함. “샤다인”이라는 집단 신으로 해석하기도 함. 샤가르 이쉬타르는, “샤가르”라는 신과 “이쉬타르”라는 신의 이름을 합친 것임. 중동문학에서는 두신의 속성을 함께 아우름. 성경의 엘샤다이는 “엘”과 “샤다이”라는 별개의 신을 합친 것임. 샤가르 이쉬타르는 성경에 일반명사로 표현됨.
신명기 28장에 “태의 열매와 땅의 열매 그리고 집 짐승의 번식 곧 가축 떼의 불어남과 작은 가축떼의 새끼침” 라는 표현이 거듭 나옴. “샤가르 이쉬타르”는 “큰 가축떼의 불어남과 작은 가축 떼의 새끼침”라고 번역함. “샤가르”는 “불어남”이고, 이쉬타르는 “새끼침”을 뜻함. 성경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김. 신명기의 주제 인과응보 신학은 엘 문학에 속함.
엘 문학은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함. 둘째 토판에 엘이 아래 세상에 집을 집는 내용이 나옴. 아래세상은 “영원한 집”, “아래세상의 집”으로 표현되기도 함.
(5) 엘레판틴 파피루스
기원전 5세기 이집트 룩소르 부근 예브에 유대인 공동체가 거주하였음. 이들은 이집트를 위해 싸우는 유대인 공동체다. 이들이 남긴 아랍어 문헌은 에스라-느혜미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서이고, 절기를 어떻게 지켰는지 알 수 있음.
이 문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히카르 이야기”임. 이 글은 욥기처럼 액자소설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음. “현자”라 불리는 아히카르는 바빌론 왕실의 고문으로 일함. 아들이 없어 양자를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다. 이 내용은 잠언과 똑같다. 이 부분을 『아히카르의 잠언』이라고 부르기도 함.
외경인 “토빗서”에 아히카르 양자인 나답이 자신의 양아버지를 죽이려는 장면이 나옴. 『아히카르 이야기』의 뒷부분은 깨진 곳이 많아 토빗서로 추정함. 아히카르의 이야기 자녀에 대한 격언은 집회서(6:23~24), 잠언(23:13~14)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아히카르 이야기 내용 중 지혜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옴. 이 지혜는 잠언에 나오는“지혜”와 같은 말이고, 슬기라고도 읽음. 이 지혜는 여신이다. “샤마쉬”라는 태양신과 사람들이 다 “지혜”를 기뻐하고 칭찬을 함. 하늘의 신 “샤마인”과 “거룩한 주님”도 지혜를 칭송함.
잠언에 보면 하나님은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초청함. 사도바울은 주님을 “하느님의 지혜”(고전 12:4)라고 함. 이 [아히카르의 격언]을 통해 성경 시대에 지혜에 대한 격언이 어떻게 널리 퍼져 알 수 있음. 또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학이기도 함.
5) 성경과 신화소
성경은 신화가 아니다. 성경 속에는 신화가 없다. 말이나 표현 속에 '신화 알갱이(神話素, mytheme)'가 들어 있는데, 이는 고대 중동 사람들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을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즉 신으로 믿었던 모든 자연을 하느님이 지으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의 신 관념은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오직 야훼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 맺는 글
참 신나는 여행을 한 기분이다! '성경 뒤에서'를 읽는 내내,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글을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써내려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옆에서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듯한 포근함과 오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여정(旅程) 가운데 있는 나로서, 『구약성서 속에서 노닐다』를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서를 통해, 기적의 빛이 열려있는 길로 언제나 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경 뒤에서'를 읽으며 구약의 배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성경 번역 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을 때에, 이환진교수님께로부터 성경이 더 친근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을 받은 듯 했다. 내가 쉽게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었기에 가능한 일인데, 한글 성경의 용어에 많은 영향을 미친 『대표본』과 『쉐레쉐브스키 쉬운 문리역』에 대한 설명을 보며, 제임스 렉을 비롯한 영국 선교사들과 쉐레쉐브스키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울러, 구약성경을 베끼고 보존했던 쿰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들을 살펴보면서, 쿰란공동체의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쿰란공동체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며, 본문의 다양성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본문이 서로 다른 것을 통해, 성경 속에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이 손길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성경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고 수많은 신앙인들과 신앙공동체의 작품이란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 그리스도 교회가 성경으로 받아들여 인용하고 보존하여 우리 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칠십인역뿐 아니라, 우리는 여러 전통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여 지금 우리의 성경으로 삼고 읽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성경 두루마리의 다양한 모습은 우리가 껴안아야할 다양한 전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 것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해야 할 귀중한 신앙 유산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고대 중동 문학을 읽으면서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우선 고대 중동 문학의 여러 문헌들이 구약성서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별히 구약이, 바알의 모습 속에서 야훼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느님을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분이라고 역사 경험을 통해 고백했다는 점에 내 생각의 방점이 찍히게 되는 것을 느꼈다.
성경속의 시인들이 “야훼는 왕이시다!”라고 선언한 것이, 우가릿인들의 문학을 빗대어 고백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갑자기 평면으로만 알던 성경이 역사와 지리를 넘나드는 익사이팅(exciting)한 탐험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근동역사와 지리, 고고학까지를 깊이 연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내 안에 밀려들었다.
또한 기원전 11세기 작품 『에누마 엘리쉬』를 최대한 활용하여 성경은, 하느님의 창조를 고백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1929년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되기 시작하여 지금도 발견하면서 연구하고 있다는 우가릿 문학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우가릿 문학이 언어 면에서 구약성서와 많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대표적인 신화인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 『내려가는 이쉬타르』『에누마 엘리쉬』를 읽으면서 그들의 세계관과 성서 신앙인들의 세계관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내려가는 이쉬타르』의 내용을 보면서는, 구덩이(죽음의 땅)에 내려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 욥기(33:22)의 말씀과 죽음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몸값을 지불해야지만 살 수 있다고 한 것이 오버랩(overlap)되어졌다. 예수님이 우리의 몸값을 대신 갚으러 오신 분이라 고백하게 한 신약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우리의 고백이, 고대 중동 사람들의 생각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신화의 의미가 여기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2015년 1월 헬라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그리스 ⸳ 로마신화를 헬라어로 배우면서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걸친 양상들을 보면 그들의 사유 형태의 내재적 논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신화가 미치는 영향은 어느 만큼인지 알고 싶다!!!’
그 때 내가 읽어보았던 책이 있었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었다.
‘신화의 기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참 인상 깊었었다.
“주어진 자연환경에 그대로 적응하지 않고 환경을 자기에게 적응시키려고 하는 인간은, 환경과 자기에 대한 관계에 체계적으로 설명을 부여하고 거기에 비추어 자기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인간에게는 인과율(因果律)을 토대로 합리적 사고를 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도구, 기술, 과학 등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세계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신화를 통해서 체계적인 설명을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 문화를 구축해왔다.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항은 신화가 취급하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신화의 핵심은 인간존재의 근본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설명을 부여하는 것은 영원히 합리적인 사고와 그 산물인 과학의 테두리 밖에 있다.
인간의 문화에서는 합리적 사고의 발달로 신화가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 관계는 합리적 사고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고, 전통적 설화의 형태인 신화가 생명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문화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다...“
예전에,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신화적 요소로 바라본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 신화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야... 인간의 이성(理性)과 합리적인 사고(思考)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하늘의 사건, 하나님의 사건을 일컫는 것이지...“
이제 다시 가던 발걸음을 재촉하며, 저자가 책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으로 가려고 한다.
“성경은 신화가 아니다. 성경 속에는 신화가 없다. 말이나 표현 속에 '신화 알갱이(神話素, mytheme)'가 들어 있는데, 이는 고대 중동 사람들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을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즉 신으로 믿었던 모든 자연을 하느님이 지으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의 신 관념은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오직 야훼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과 신화소’에서 저자가 주장한 내용을 보며, 다음과 같은 것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다.
☞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준 것이다. 신학이란, 우리가 믿는바(신앙)를 합리적 이성을 통해 이해를 시도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이성적 반성이 신학이다!
신학의 장점과 한계성이 있다. 신앙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신학이 없는 신앙은 미신이 되는 것이고 신앙이 없는 신학은 영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신학과 신앙은 상호 비판적, 견제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은 각각 위치가 다른 것이다. 학문적 반성이 없는 신앙으로 나가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무속신앙으로 바뀐다. ☜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 말씀의 구약 배경을 이해하면서, 그 말씀을 따르려는 열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구약성경의 배경 지식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는 말씀이 눈앞에서 4차원적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과제를 하며 스펙터클(spectacle)하고 박진감 넘치는 입체의 장으로 초대된 듯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맞닥뜨리고 있는 온갖 사건들과 동일한 것들이 빼곡이 담겨 있는 구약성서는 생명의 역사서인 동시에 참된 빛을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글(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다시,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구약성서를 읽어 보려 한다. 그러기 전에 문예비평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치신 저자의 글을 손에 들어본다. 『구약성서 속에서 노닐다』의 제3부 '성경 앞에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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