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제 42회 한국독립교회 선교단체연합회 목사고시 조직신학 문제

by tat tvam asi 2024. 5. 24.
반응형

 

각 문제에 대해 A42쪽 정도의 양으로 답안을 준비, 두 문제가 출제, 응시자는 그 중 한 문제에 답하기!

 

1.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무로부터 창조 교리의 중요성을 성서적 근거를 통해 밝히세요.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구약성경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창세기 1-2, 욥기 381- 426절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가장 폭넓은 이해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창조자와 세상을 지탱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

 

또한 장엄한 몇몇 시편(ex: 시편 8, 104, 136편 등)은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창세기와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무로부터(ex nihilo)’ 세계를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세계의 한 부분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에 세계는 존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이것은 범신론(pantheism, 세계가 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믿음) 또는 범재신론(pan-en-theism, 세계가 신 안에있거나 신의 한 부분이라는 믿음)과는 대조적인, ‘유신론(theism, 신이 세계와 구별되는 객관적 존재라는 전통적인 믿음)’의 기본 진술 중 하나다. 유신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인격적이고 활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고, 계속 세계를 지원하고 유지시키며, 세계 안에서 활동한다는 말이다. 유신론은 세계 역사를 통한 무로부터의 관점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에 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피조물에 내재하신다. 즉 피조물에 아주 근접해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우선(태초에)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세계는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의존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은 창세기 1장이 처음으로 기록된 후 적어도 800년이 지난 기원 후 2세기까지는 명확하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연관성이 있는 창조 개념이 초기 교회 신학자인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의 글에서 등장하는데, 이들은 회의적인 그리스 문화적 상황에 직면해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 유대적 근거를 변론했다. 대체로 다신론적인 그리스 세계관은 플라톤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 세계관에 따르면, 신은 세상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다. 그와는 달리 신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다 질서를 부여한 건축자로 생각되었다. 물질은 이미 우주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될 필요가 없었다. 물질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형태와 구조를 얻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은 이처럼 선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조성하는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한 대화편(티마이오스)에서 세상은 앞서 존재하는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그 물질에서 현재의 모양을 지닌 세상이 조성되었다는 개념을 주장했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저술가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일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 영지주의자들을 따랐다. 이들은 선재하는 물질이 있으며 그 물질이 창조 행위를 통해 세상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믿었다. 달리 말해, 창조는 무로부터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는 눈으로 이글루를 짓거나 돌로 집을 세우듯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재료를 사용해 건설하는 행위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처치 곤란함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사용할 재료들이 품질이 열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악이나 결점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세상을 짓는데 사용한 재료의 결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영지주의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이런 개념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선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을 거부하게 된 이유는 우선 그 개념이 영지주의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점차 깊이 이해하면서 그 개념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세기와 3세기의 몇몇 중요한 사상가들은 플라톤주의 세계관에 맞서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선재하는 물질은 없으며 따라서 모든 것이 무로부터 창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레니우스는 기독교 창조론에 의하면 피조물은 본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본 영지주의 견해와는 분명 달랐다.

 

3세기에 활동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세상을 창조하기로 한 하나님의 결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은 물질의 본성에 깃든 어떤 본래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와 선함에 기인한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의존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특별한 구조는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분명하게 대비된다. 히포의 아우그스티누스도 그의 저술을 통해 무로부터의창조 이론을 옹호하고 그 다양한 의미를 탐구하였다.

 

<창조론에 담긴 의미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피조물은 신성하지 않다.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요,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창조자와 구분된다.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창조된 질서는 우연히 존재한다. 창조자와 피조물을 융합하려는 유혹에 맞서 싸우는 일이 일찍부터 기독교 신학에서 다루어 온 중요한 주제였다. 이 주제는 바울의 로마서에도 분명하게 나오는데, 그 첫 장에서는 하나님을 세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 창조신학의 핵심과제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동시에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권위가 있음을 함축한다.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사실이 창조자는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물의 한 부분을 이루고, 그 안에서 특별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창조론에서는 피조물을 돌보는 인간의 청지기직이라는 개념을 가르치며, 이 개념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이라는 세속적 개념과 대비된다. 피조물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며,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그것을 맡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돌보는 청지기로 부름 받았으며 그 청지기직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통찰은 생태계 및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데, 지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논하는 이론적 근거를 이 통찰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창조자 하나님 교리는 피조물이 본래부터 선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10, 18, 21, 25, 31)는 주장을 만난다. 기독교 신학에는 세상이 처음부터 악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나 이원론적 사고가 파고들 틈이 없다. 세상은 비록 죄로 인해 타락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며 구속 받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피조물이 현재 완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 실존의 죄와 악과 죽음은 창조된 질서가 그 정해진 원형에서 어떻게 이탈했는가를 보여주는 표지다. 성경에서 일관되게 피조물의 선함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죄의 세력이 하나님이 의도하거나 허용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창세기에 거듭 언급되는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말씀을 걸어주신 인간이며 하나님께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다른 사람 및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살아감에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동역자’(partner)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 서로 함께 말하며 듣고 살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운동이다. 인간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삶이 충만히 성취되기까지는 쉼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역동적이며, 앞을 향하여 나아간다. 인간은 찾으며 탐구하며 기대하는 존재이다.

 

 

2. 성경의 권위에 대해 논하시오.

 

성경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하며 우리의 삶을 변혁하는 목적을 위하여 봉사한다.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를 자유보다는 강제와 동일시하려 하며, 기쁨보다는 공포와 연결시키려 한다. 오늘날 신학의 주요한 과제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해방적인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성경의 참된 권위는 성서문자주의(biblicism)의 죽이는 문자, 역사주의의 무비판적인 전제,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편협함, 미학주의(aestheticism)의 비참여적 자세 등을 넘어서서 신앙공동체의 삶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증언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예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 및 모든 피조물과 연결하게 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다.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논하는 것은 곧 성경의 능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데, 성경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및 타자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양육하는 것을 돕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와 (무엇보다도) 예수의 삶, 죽음, 부활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언이다. 증거자로서 성경은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다. 참된 증거자는 그가 증거하는 그 실제(reality)에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파생적인(derivative)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성경의 증언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자체적으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에권위를 가지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창조하기에 권위를 가지는데, 이 관계는 우리를 자유케 하며 새롭게 한다.

 

성경의 증언은 단성적인 방식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기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성경의 신앙 진술들은 몹시도 풍성하다. 폴 리꾀르가 주장하였듯이, 성서적 증언의 문학적 형식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묘사될 때, 이야기의 형식(narrative form)이 요구된다. 성경의 다양한 문학적 형식들은 대체될 수 없는 계시의 매개체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면서도 수정해준다.

 

성경의 증언은 대단히 풍성하며 다양하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에 이르는 연대기적인 전체적 흐름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큰 단위의 이야기 형식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다른 자료들을 위한 맥락을 제공하여 그 자료들이 계속되는 이야기 가운데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비유, 찬양, 기도, 요약, 신학적 설명 등과 같은 다른 자료들은 여러 다른 방식들을 통하여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파악하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는다.

 

성서적 증언을 통하여,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롭고 해방적인 활동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드러나며, 우리는 하나님 및 타자들과의 교제 안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인도된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라는 유일한 사람의 삶, 죽음, 부활에서 절정에 달하는 성서적 이야기의 커다란 유형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삶에 있어서 성경의 필요불가결성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증거자이며,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자유케 하는 은혜를 증거한다. 성서적 이야기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크신 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할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한다. 성경은 영원히 풍성한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시며 권력을 기자고 높이 있는 자를 심판하심을 선포한다. 이러한 것이 성경의 증거인데, 이것은 우리를 동요케 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행위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해방과 변화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다다른다. 성경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선포하는데 이 가운데서는 정의가 불의를 대치하고, 우정이 적대감을 물리치며, 서로 섬김이 지배와 억압을 폐지하고 생명이 죽음을 이겨낸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해방하고 화해하는 사랑에 필요불가결한 증언을 하는 점에서 성경의 권위가 이해된다면,

 

성경은 문헌적이고 역사적 비평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독특한 증언은 문헌비평이 성경을 경건한 소설로 축소시키거나 역사비평이 성경을 과거에 가두는 것을 거부한다.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성경의 해석은 그저 과거에 대한 관심이나 미적인 관심에 의하여 시작될 수 없다. 신앙인들이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해방과 구원의 약속을 붙들기 위함이다.

 

역사비평과 문헌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잘 듣는 것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위의 특정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 구체적 장소와 시간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우리가 계시의 역사적 구체성을 존중하는 한 방편이 된다. 성경은 구체적 장소, 사건, 사람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해방의 행위를 선포한다.

 

또한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역사적 구체성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성서 가지들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알려준다. 성령께서는 성서기자들의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자유를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함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의 동역자로 만들어간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러한 과거의 사건 속에 담겨진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고 선취하는(anticipate)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해방은 모든 피조물이 자유케 될 그 최종적인 해방(:8:21)을 지시하고 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해방의 이야기를 더 넓혀서 우리의 시대를 보며, 또 우리의 시대를 넘어서까지 보는 안목을 가지고 읽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과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경이 어떠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며, 성경이 어떠한 미래를 향하여 기도하기와 일하기를 원하는가를 또한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지유의 모든 의미가 초대교회에서 이미 다 실현되었다고 가장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 것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동시에 성경이 제시하는 앞으로의 방향에 민감한 가운데 읽는 것이지 신약성서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서해석은 신뢰의 해석학과 의심의 해석학을 동시에 수용해야 하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자유의 원천으로서 성경 자체를 억압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멍에와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미는 성경 속의 해방의 이야기 안에서 철저하게 재규정되어야 한다. 성경의 무대에서 주연배우는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재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증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으나, 그 중심적 주제는 죄와 비참함에 억눌린 피조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하여 신실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들려진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창조자, 해방자, 화해자이시다.

 

한편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일원론적이지는 않다. 성경이 증언하는 증언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이며, 온 세상을 위하여 중재자가 되신 성자 하나님이며,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주시는 성령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에 응답하여 사람들은 이 세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의 사역에서 동역자가 되도록 부름 받으며 능력을 받는다.

 

성경은 그 맥락(context)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 맥락은 모든 피조물이 정의, 자유, 평화를 향하여 열망하는 것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열려져야 하며, 그 열망을 포함해야 한다. 포로 됨, 불안, 죄의식, 좌절, 소외, 고독, 절망, 자유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 같은 개인적인 필요를 포함하여, 신앙공동체와 함께 성경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성경의 읽기와 해석에 있어서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더 큰 신앙공동체의 교훈과 통찰력에 자신을 열어 둘 것이다. 교회의 신조나 신앙고백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조나 신앙고백은 종종 성경에 대한 모범적 해석을 제공해 준다. 성서해석의 필수적인 맥락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사랑, 희망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가난한 자들과 연대한 가운데, 정의를 향하여 현신하는 가운데, 그리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애타는 열망에 새로운 민감성을 회복하려는 노력 가운데서 비강제적인 성서적 증언의 권위는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순종의 자세를 발견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