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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오십에 읽는 주역(周易)』

by tat tvam asi 202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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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기진  /  유노북스  -

 

 

참 재미있게 읽고 있다.

 

내용의 일부를 필사하듯(^^) 읽는 중이다. 

 

* 팔자, 운세, 인생을 바꾸는 3,000년의 지혜

 

* 과거를 바꿔야 미래가 바뀐다! / 오십 이후 대운을 부르는 최고의 경전 25

 

 

우리는 인생을 바꾼다고 할 때, 바꾸는 것이 미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이 정말 바꿔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다. 사람은 여태까지 살아온 자기 과거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오늘 먹은 나의 마음이 내 인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가 바뀐다.

 

과거와 미래를 바꾸는 것은 현재 나의 마음이다.

 

하늘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 역시 사람이 잘 보지 못하도록 감추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자기 과거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시 돌아본다면 지난 과거가 다각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각도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자신의 과거인지 사람은 잘 보지 못한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오십이라는 나이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늘 나의 마음이 바뀌면 나의 행동이 바뀌고,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바뀐다는 것이다.

 

삶과 세상에 대한 하늘의 계시를 전하는 주역은 사람의 나이 오십에 대해 인생의 황금기이자 이제 비로소 나의 삶을 살 시간이라고 말한다.

 

돌아보면 이십 대는 미숙했고 삼사십 대의 삶은 너무 치열했다. 그런데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은 휘몰아친 세월에 휩쓸려서 엉겁결에 살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치 있는 일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십 대와 삼사십 대를 거친 오십에게는 그동안 축적한 인생이 있다. 오십에 이른 이는 이제 자기 인생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자신의 기질을 넘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오십 대는 황금기이다.

 

사서삼경이라고 할 때 삼경이 바로 <시경>,  <서경>,  <역경>인데, 역경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전으로 대우 받는다.

 

역경은 ()에 대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역() 세상 만물의 전개 법칙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갑골점을 통해 하늘이 계시한 세상 만물의 전개 법칙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역경의 문장은 점인들이 쓴 것이 아니라, 점을 통해 내려 받은 하늘의 계시를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하다 보니 현재와 같은 문장으로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점인들 중 누구도 현재와 같은 문장이 나올 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경은 인간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닌, 진정한 하늘의 계시라고들 한다.

 

그래서 세상 만물의 전개 법칙(존재 법칙)을 담고 있다고 하는 이 역경이 단지 점치는 책에 머물지 않고 유교와 도교의 최고 경전이 된 것이다.

 

공자는 길을 떠날 때도 항상 역경을 지니고 다녔고, 밤에는 머리맡에 두었다가 잠들기 전 언제나 역경을 읽었다고 한다.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역경을 읽고 또 읽어서, ‘위편삼절(韋編三絕)’이라는 고사를 남긴 것이다.

 

 참고

 

태극사상연구소 홈페이지 : www.hansasang.org

이메일 : info@hansasang.org

 

 

 

 목차

 

1장 하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_오십의 운명

 

운이란 좋고 나쁨이 없다 / 

 

하늘의 도가 운을 행하여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이다. ()은 착(갈 착)과 군( 군사 군)이 합쳐진 구조이다.  군대가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군대가 군사 작전에 다라 이동할 때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이다. 두 부대가 합쳐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한 부대가 정해진 시간보다 늦는다면 전투에서 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운이란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글자에 담고 있다. ()이 들어간 단어를 보면 해운업, 운수업, 운행 등이 있다.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움직이는 것들이다.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 사람은 운이 강한 존재다. 충분히 준비 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막중한 책임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 일의 역할을 그럭저럭 해내기 때문이다. 힘에 부쳐 허덕일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해낸다. 돌아보면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힘이다.

 

1,000년 사는 나무와 100년 사는 사람이 치르는 대가

 

경기도 용문사 앞에 있는, 높이가 42미터에 이른 은행나무는 천 년을 넘게 살았다. 그토록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스트레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에, 이루고자 하는 일을 예정대로 달성해 내는 강한 운은 부여 받은 인간은,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기에 고작 100년을 산다는 것이다. 특히 오십에 이른 많은 사람이 심리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있다고 말하며, 이토록 스트레스의 극단에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운이 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운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대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운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자 하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운의 비용 이자 대가다.

 

천 년을 넘게 살지만 대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는 나무와 다르게,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은 진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유정한 사람, 섬세한 사람일수록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욱 진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운보다 강한 운도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바로 사람을 낳은 대우주, 곧 하늘의 운이다.

 

하늘은 운을 행해서 만물을 낳아 기르고 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말이다.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을 말한다고 했는데, 하늘은 만물을 낳아 기른다는 목적을 언제나 예정대로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언제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때에 맞추어 사계절을 운행하고 만물을 낳고 있다. 만물을 낳아 기르려는 목적을 언제나 예정대로 달성하고 있다.

 

또한 대우주인 하늘은 자신의 뜻을 이어받을 소우주를 옥동자로 낳았으니 그것이 곧 사람이다. 사람에게 부여된 운은 이미 충분히 강하다.

 

하늘은 언제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하늘은 자신의 옥동자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운을 부여했다. 이미 충분한 것이다.

 

길흉을 만나야 대업을 이룬다 / 길흉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는다. 사상이 팔괘를 낳으니, 팔괘가 길흉을 정하며, 길흉이 대업을 낳는다.” - <계사상전> 11 -

 

하늘의 계시를 기록한 역경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의 결과를 ()  ()  ()  ()  네 가지로 평가한다.

 

() : 바라는 것을 얻은 경우

 

() :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 경우

 

() : 바라는 것을 얻긴 얻었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미련, 아쉬움, 회한 등)이 남는 경우

 

() : 바라는 결과를 얻긴 했지만 그 주어진 결과가 좀 인색한 경우

 

 

역경은 주인공인 군자가 인생의 여행길을 답파해 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늘이 창조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항상 원만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업을 낳기 위함이라고 전한다. 여기서 대업이란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 즉 천지창조를 가리킨다. 앞서 말한 <계사상전> 11장의 취지는 하늘이 천지창조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길흉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천지 창조 삼라만상,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계사상전> 11장의 내용을 그림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우주를 낳은 근원적 일자(一者)’로부터 우주의 삼라만상이 펼쳐져 나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자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비롯한 근원을 지칭하는 철학 분야의 용어다.

 

역에는 태극이 있다에서 역() 세상 만물의 전개 법칙이고, 태극은 커다란 궁극이라는 뜻이다. 태극은 우리 우주에 넘쳐흐르는 온갖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궁극을 가리킨다. 우리 우주가 처음 빅뱅을 일으켰을 때 빅뱅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태극이 궁극의 일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에는 태극이 있다라고 했으니, 역이 일단 작용을 일으키고 나서 태극이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이러한 역의 작용을 일으킨 초월적 하늘이 또 존재하는 것이다. 이 하늘이 태극보다 상위에 있는 지고의 존재이며 궁극의 일자에 해당한다.

 

하늘, 태극, 팔괘, 64괘의 천지창조

 

이러한 지고의 존재를 은나라 사람들은 하늘이라 부른 것이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 북방 지대에 폭넓게 걸쳐 살았던 이족(夷族) 모두에 공통된 현상이었으니, 그에 따라 우리 한국인 역시지고의 존재를 하늘이라 부르는 것이다.

 

태극이 양의를 낳는다에서 양의(兩儀)는 음과 양의 대대(待對) 구조를 말한다. 대대란 서로 의지하는() 동시에 서로 대립하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이는 우리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러한 대대의 상호 분리를 통해 생겨나고 존재하게 되는 원리를 뜻한다. 위의 그림이 바로 이러한 원리를 통해 현상계에서 삼라만상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태극이 음과 양이라는 대대의 상호 분리를 낳음으로써 천지 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은 은나라 점인들이 계시 받은 천지 창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노벨물리학상 수장자인 닐스 보어는 물리적 세계에서 모든 성질은 상보적으로 쌍을 이룬 켤레로서만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이후로 오늘날 물리학이서는 우주의 기본 구도가 대칭을 이룬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통해 점인들이 상고 시대에 내려 받은 계시가 틀림없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극이 음과 양을 낳은 후, 음과 양이 각각 다시 음과 양으로 분화하여 사상을 이루고, 사상이 다시 팔괘를 이룬다. 이후 팔괘를 겹쳐서 64괘에 이르면 천지 창조의 큰 틀이 일단락된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은나라 점인들이 계시 받은 천지 창조의 원형이며, 우리가 속한 우주의 모습이다. 여기서 세상 만물은 64괘로 표상된다.

 

그런데 하늘과 태극이 둥근 원 모양임에 비해, 땅 위의 만물인 64괘가 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띤다. 이에 대해 역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끼리 모이고 만물이 무리로 구분되니 길흉이 생겨난다.”

<계사상전> 1

 

여기서 모가 나 있다는 한자로 (모 방)인데, 이는 방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끼리 모인다는 것은 방향성이 같은 동류끼리 모인다는 말이다.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구하며,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간다.”

<문언전>

 

이 역시 천지만물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동류끼리 서로 애착하는 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하늘과 태극을 떠나 천지만물이 생기고 나면 모난 모습에 따라 동류끼리 모이고 무리로 구분되며, 이후 동류끼리 서로 애착하고 미워하는 경향이 생기니 결국 길흉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경이 파악한 이 우주의 모습이다.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과연 천지 창조 이래 이 세상은 서로 애착하고 미워하는 경향에 의해 혼란의 덩어리가 되고 있다.

 

사과는 서리를 견뎌야 맛이 들고 쇠는 불질을 견뎌야 단단해지듯

 

역경에서는 이 세상에 길흉이 존재하는 이유를 정()한 사람이 이기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하다는 것은 역경이 볼 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 곧다, 지조가 굳다, 마음이 곧바르다 ; 점치다의 뜻을 가진 글자다. (점치다 복)은 은나라의 점인들이 갑골점을 칠 때 하늘의 계시가 갑골등에 갈라진 금의 형태로 나타나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조개 패)는 하늘의 계시를 내려 받던 신성한 제기(祭器) (솥 정)의 생략형이다.

 

결국 두 글자가 합쳐진 은 신성한 제기에 하늘의 계시를 내려 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며, 이를 통해 하늘의 계시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곧다, 지조가 굳다, 마음이 곧바르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 것이다.

 

은나라의 점인들이 보기에 이 세상에 길흉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한 사람이 이기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좋은 것은 그 무엇이든 시련을 통한 단련을 거친다. 찬 서리를 여러 번 견디고서야 사과에 깊고 오묘한 맛이 들 듯, 이 세상에서 모든 진선미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일 없이 꽃을 피우는 법이 없다.

 

하늘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길운과 흉운을 70 30의 비율로 섞어 놓음으로써 깊은 맛을 지닌 진선미가 꽃을 피우도록 했고, 그에 따라 천지창조라는 대업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가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야 하늘도 돕는다 / 운명

 

운명이란 길흉의 질곡을 뚫고 자신에게 부여된 명을 향해 운전해 가는 것이다. 운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예정대로 달성하는 힘이다. 하늘이 내린 명을 이루라고 부여된 힘이 운인 것이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말고 즐기되 우려하지 마라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내실 때 나에게 바라는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고, 성스러운 의무다. 하늘이 내린 명은 나의 존재 목적이다.

 

 

운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 운명을 끌고 다닐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지나온 삶인 과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인 것이다.

 

자신의 명을 정립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날의 의미를 명확히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

 

모두가 각자 인생의 일등이다 / 팔자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법이라 사람에게도 완전무결한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하늘이 내게 부여한 靈性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의 심연에 자리한 두 가지

 

하늘이 명한 것을 ()’이라 이른다. <중용> 1 1

 

() (마음 심) (날 생)을 합친 것으로 내가 처음 태어날 대부터 나에게 이미 있었던 최초의 마음을 뜻하는 글자다.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직 나에게 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니,  은 의식 이전의 것으로 하늘이 내게 부여한 것이다. 성은 내 마음의 씨앗이자 핵으로, 이후 나의 성질(性質), 성격(性格), 특성(特性), 가능성(可能性) 등이 모두 이 에서 비롯한다.

 

내 마음의 심연

 

원래의 은 하늘이 부여한 신령한 성이라는 의미에서 영성으로 부르고 있다.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한 그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위의 그림 과 같인 완전무결한 원을 이룬다. 이는 이간의 영성이 완전무결하다는 사실, 순수의 결정체 그대로이며 설혹 사람이 어떤 과오를 범한다 해도 인간의 영성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심층 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영의 바깥 층위에 와 같이 모남이 있는 혼백(魂魄)이 자리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심학자들이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불렀고, 서양의 신비주의 사상에서는 아스트랄체라고 부르며 주목해 온 내면의 영역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의 구조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가장 바깥 층위에 가서야 비로소, 즉 가장 표층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평상시 마음 속 심연에 잠겨 있는  의 심층 구조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눈을 감고 명상이나 삼매에 드는 이유가 바로 마음의 심연으로 깊이 내려가서 의 혼백을 넘어 순수의 결정체인 의 영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의 혼백이 완전무결한 둥근 원인 영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크게 튀어나온 부분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어서 모가 나 있다는 사실이다. 카를 융이 인간의 내면에서 관찰해 낸 불균형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은 왜 존재할까? 우선 이는 완전무결한 영성이 유한한 물리 공간인 인간 육체의 형질에 담기면서 그 제약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혼백을 한 단어로 썼지만, 사실 이는 혼()과 백()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합쳐져서 생겼다. 여기서 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부분(영성의 반영)’이고 백은 땅에서 연유한 부분(형질의 반영)’이다. 이 때문에 별도로 혼을 신령한 혼이라는 의미에서 영혼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심층 구조에서 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처럼 각기 하늘과 땅에서 연유한 이원성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 특성이다.

 

대승 불교의 심학자들은 아리야식이 불생불멸의 요소와 생멸의 요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다고 해서 화합식(和合識)로 칭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아리야식에서 각()과 불각(不覺)이 겨루게 된다고 했다. 서양의 신비주의 사상에서는 아스트랄체(또는 아스트랄계)에서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운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내 마음의 심층 구조에서 에 해당하는 부분은 하늘과 땅에서 연유한 이원성이 합쳐서 생긴 것이다 보니 모난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를 보면 같이 둥근 영성에 그대로 머문다면 아무런 운동력이 없기 때문에 로 옮겨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의 상태로는 아무런 창조가 일어나지 못한다. 반면 같이 한 방향으로 모가 나면 그 방향으로 흐르는 방향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운동에너지가 생긴다. 이때 사람은 그 방향성으로 인해 자기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경이 말한 모남[]이 있어서 자기 할 일을 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예술혼을 불태운다’. ‘투혼을 불사른다’, ‘혼을 다 바친다 등의 표현을 쓰는데, 사람이 의 완전무결하게 둥근 영성의 상태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 혼백같이 모남이 있어서 자기 할 일을 알 때 비로소 예술혼을 불태우고, 투혼을 불사르며, 혼을 다 바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온갖 삼라만상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의도를 알면 팔자의 방향이 보인다

 

사람의 팔자는 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는 사람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위의 그림, 마음의 구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 방향성은 우리 마음의 구조에서 표층의 의식보다 깊은 곳에 놓인 심층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라는 생각)는 표층에 놓인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내 돈’, ‘내 집’, ‘내 사랑이라고 를 고집하는 마음으로 흔히 에고(ego)’로도 불린다. 이 자아가 주동이 되어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만, 나의 마음 전체에서 보면 이 자아는 아주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의 방향성은 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왜 이러지?’하고 당황하는 순간이 있고,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나중에 돌아봐도 의아한 순간들이 있는데, 이럴 때가 바로 의 심충적인 힘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이처럼 사람은 의 심층적인 힘이 자신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기에 아이고, 내 팔자아하고 팔자 탓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특정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힘(이것이 사람의 팔자라고 할 수 있는데)이 사람의 내면에 담겨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그림이 그 대답이 될 수 있다.

 

공동체

 

이 그림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를 보면 우선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심긴 지향성의 방향대로 나아갈 때 모두가 1등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자에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 옆에서 달리는 사람은 함께 뛰며 서로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이지, 나의 경쟁자가 아니다. 목적지가 서로 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모두가 각자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사람이 모인 공동체는 전체로서 보다 큰 원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공동체의 집단 지성이 인간 개체의 한계를 넘어 더 커짐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 인류의 성공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이룬 여럿 중에는 보다 더 용기가 있는 이, 보다 더 절제를 잘하는 이, 보다 더 공감을 잘하는 이 등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배우며 전체로서 보다 더 용기 있고, 절제하고, 공감을 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그림을 통해 하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사람의 내면에 특정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힘(팔자)이 담겨 있는 이유는 각 개인도 행복하고 공동체 전체로도 조화롭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게 새겨진 팔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운이 좋아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이 원하는 방향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천명 역시 자신에게 부여된 팔자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위의 그림 같이 공동체 전체가 조화로운 원을 이루는 데 기여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늘의 천지 창조 대업에 기여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도망치기 때문에 팔자가 꼬인다 / 기인

 

신비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기인(基人)에게 달려 있다.

묵묵한 가운데 이루고 말 없는 가운데 믿는 것은 덕행에 달려 있다.”

<계사상전> 12

 

나의 팔자는 하늘이 원하는 방향이기에, 내 팔자를 그대로 실현할 때 가장 뿌듯한 충일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팔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팔자 탓을 하게 되는 이유 역시 존재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서 아래 그림의   방향과 자꾸 마주치기 때문이다.

 

내면의 심층 구조

 

먼저  방향의 움푹 패인 곳은 나에게 결핍된 부분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이처럼 자기 내면에 20%쯤 움푹 패인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반대 방향으로 도드라진 장점이 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 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동그란 원의 크기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므로, 무언가 특정 방향으로 솟아나온 장점이 있기 위해서는 그 반대쪽에 움푹 꺼진 단점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결점과 단점으로 인해 사람이 불안감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에게 결핍된 부분이 있음을 느낄 때 사람은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움푹 패인 부분이 있어서 결점이 있고 열등감이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니 남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방향의 경우는 나의 도드라진 장점인데, 이 역시 모난 부분으로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남들로부터 너는 왜 유별나게 구느냐’, ‘너는 왜 비싸게 구느냐는 말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남들의 비난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할 경우  지점 역시 문제가 된다. ‘왜 나는 남들처럼 적당히 넘어가지 못할까’, ‘나는 비뚤어지고 못된 사람인가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고통이 살아 있게 만든다

 

일찍이 카를 융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에 크게 주목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자가 몫의 십자가 고통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생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융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몫의 십자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불균형, 부조화, 결핍, 결점, 상처 등등. 아무리 떼 내고 싶어도
떼 낼 수 없는 지긋지긋한 그것, 그것이 초래하는 고통 등등이 각자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결국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이러한 불균형이 초래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 삶을 기꺼이 부둥켜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이고 직시하는 것, 이에 대해 눈감고 외면하지 않으며 기꺼이 짊어진 채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살아내는 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무의식 중에 이러한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위의 그림  에 집착할 경우 스스로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에 눈감고 외면하면서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또는 자기 팔자가 지시하는 삶을 살아낼 자신감을 잃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팔자가 꼬이기 시작한다. 팔자가 꼬이는 것은 스스로 팔자로부터 도망치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혼이 영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내면의 결핍을 채워 완전한 영에 이루고자 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 욕구가 사람의 영혼이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인간 내면의 결핍에는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이를 느끼는 인간 정신의 감수성이 사람을 깨어 있게 만들고, 사람을 살아 있는 영혼으로 만들어서, 이 세상에 신비가 존재함을 밝히는 기인(基人)’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나의 길은 나만 걸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신비의 존재를 밝히는 것인 기인(基人)’에게 달려 있다에서 신비란 하늘의 뜻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 세상 돌아가는 일 중에 인간의 동물적 욕구(물질적 욕구)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신비에 해당한다.

 

기인(基人)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만 에는 합당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바로 그거야, 그거라고 말할 때의 ’, 또는 우리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야라고 말할 대의 . 그러므로 역경이 언급한 기인은 하늘이 기다려 온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한다.

 

묵묵한 가운데 이룬다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말 없는 가운데 믿는다 하늘의 뜻이 존재함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명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묵묵한 가운데 이루고, 말 없는 가운데 믿는 것은 그 사람의 덕행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하늘은 영혼의 감수성이 풍부한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결핍을 느끼는 감수성이 지나칠 때는 도리어 문제가 될 수 있다. 자기 팔자가 가리키는 삶을 살아 낼 자신감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팔자를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려 들게 된다. 이럴 경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는 하늘의 천지창조라는 대업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 받고, 그에 합당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하늘이 기다려 온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나 이외에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의 80억 인구(지금은 81) 중에 이 길을 나 대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놓인 것이다. 태초 이래로 오로지 지금의 나를 위해 예비 된 길인 것이다. 하늘은 빅뱅을 일으킨 이래 138억 년 동안 나를 예비하고 기다려 왔다. 지금의 이 길을 걸어달라고. 그러므로 마음먹고 걸으면 나는 이 길을 아주 잘 걸을 수 있다. 하늘의 도움 역시 음으로 양으로 따를 것이다. ‘지금 이 길이 나의 운명이라면 내가 걷겠다, 내가 감당하겠다 마음먹고 기꺼운 마음으로 걷는다면 하늘이 지켜보며 기뻐할 것이다.

 

이처럼 나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천명을 부여 받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팔자는 대체 불가능한 신성한 것이다. 나는 나를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일은 내가 나를 몰라주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알아줄 때라야 자신의 과거를 바로 세울 수 있다.

 

결국 자기 생긴 대로 사는 법이다 / 기질

 

태소음양인의 식견과 재능은 각각 장점이 있으니...

온갖 행동이 각각 같지 않아서 다 그 오묘함을 달리한다.”

<동의수세보원 사상인변증론>

 

기질은 혼백(魂魄)에서 백()이 초래하는 측면이다. 완전무결한 성()이 유한한 인간 육체의 형질(形質)에 담기면서 성질(性質)을 이룬다. 그러므로 원래는 성질로 써야 맞는데, 오늘날 성질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달라지면서 지금은 흔히 기질로 부르고 있다.

 

이 기질에는 장점과 단점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기질은 반드시 마음의 아픔을 초래한다. 이 사실은 사상의학을 정립한 동무 이제마가 밝힌 것이다. 동무 이제마는 평생 역경이 제시한 성()이 인간에게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천착했다. 그 결과 역경의 사상(四象)에 대응하는 사상 체질 의학을 정립했다.

 

동무 이제마가 정리한 기질과 마음 건강

 

네 가지 체질인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에 대한 언급은 고대의 <황제내경>에 이미 나타나므로 그 유래가 오랜 것이다. 하지만 <황제내경> 단계이서는 아직 연구가 정밀하지 못하여 태소음양인에 대해 대략 외형만 말할 뿐 오장의 이치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동무의 사상의학에 일러 오장인 간, , , , 신의 강약에 따른 기질의 차이를 바탕으로 사상 체질 의학이 정립되었다.

 

특히 동무가 남긴 위대한 업적은 우리 마음의 문제를 풀었다는 것이다. 동무는 우리의 마음이 몸의 주재자이며 이 세계의 주재자임을 밝혔다. 종래의 의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음과 몸을 별개로 다루었다. 그러나 동무는 사상 의학은 통해 마음이 치우쳐 고착한 것이 몸의 병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상의학에서는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먼저 마음 건강을 회복할 것을 가르친다. 마음이 건강할 때 천수를 온전히 누려 장수할 수 있고, 원기를 보전하여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무의 저서 <수세보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동무는 우리가 지닌 마음의 괴로움을 관찰하고서 그 괴로움이 사상 체질별로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기에 더해 동무는 그러한 마음의 괴로움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혔고, 그 괴로움을 관리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동무는 사람이 보다 많은 체질로 나뉨을 알았다. 실제로 질병에 대한 처방은 여덟 가지 체질(‘팔체질’)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사상으로 나누었으며 전제 의학의 체계 역시 사상 체질에 집중하고 있다.

 

동무의 사상 체질을 각각 넷으로 나누면 MBTI 16성격이 되고,  16성격을 다시 각각 넷으로 나누면 64괘가 된다. 결국 사람의 성격 유형은 총 64가지라는 것이다.

 

체질(기질)은 사람에게 새겨진 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만물에는 각자 독특한 결이 새겨져 있으니, 이는 만물이 각자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사람에게 새겨진 결도 마찬가지다. 하늘은 사람이 천명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므로, 사람이 각자 천명의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그에 맞는 결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에게 새겨진 결(기질)을 받아들이고 걸어 나가면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내가 이 길을 걸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자신이 없어도 일단 받아들이고 걸어 나가면 능히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은 내가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이미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다. 그것이 나의 기질이고 체질이다. 그러므로 그 길을 걸을 때 일이 잘 풀리고 운이 좋아질 것임은 당연하다.

 

나를 모르면 길을 잃고 나를 알면 제 길을 간다

 

기질과 체질은 모두 앞서 그림에서 보인 것처럼, 모난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사람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늘이 사람에게 이처럼 독특한 결을 부여한 이유를, ‘모남이 있어 할 일을 아는 것이라는 역경의 통찰로 설명할 수 있다.

 

모남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기질이 만족하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자신의 기질대로 행하고 만다. 이에 대해 사람이 모가 났다는 비판이 따르기도 하고, 스스로도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하고 괴로워하지만, 달리 보면 이것이 바로 하늘의 의도한 바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은 각 사람이 자신의 체질, 기질대로 고집을 부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타협적으로 자신에게 새겨진 결의 방향대로 나아가 하늘의 뜻을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신비가 존재함을 밝히는 그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뜻이 바로 인간 내면의 저 아래 심층 구조에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의식,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내가 왜 이러지?’하면서도 결국 자기 기질대로 하지 않으면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만다. 이는 사람이 하늘의 도구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끝내 여기서 도망치지 못한다. 자기 팔자가 싫어서 회피했던 사람도 나중에 돌아보면 결국 팔자대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애초에 하늘이 둥근 원을 이룬 상태로 홀로 남아 있으면 천지창조를 일으키지 못한다. 천지창조를 일으켜야 이 세상에는 온갖 참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진선미)들이 피어난다. 그러므로 하늘은 천지창조를 이루기 위한 대리인으로 사람을 낳는 것이며, 사람 각자가 자신의 팔자의 길로 나아가도록 그에 합당한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기질대로, 자기 고집대로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좌충우돌 모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천지창조의 진선미가 만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의도를 달성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좌충우돌하며 많은 곡절을 겪어야 한다. 이는 사람의 의식, 의지로 어쩔 수 없는 힘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기질에 치이곤 한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생의 전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럴 때 사람은 스스로 당황한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그랬을까?’ 또는 왜 나는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나?’, ‘왜 나는...?’하고 자신의 모난 모습에 괴로워한다.

 

한국인으로서 수학 분야의 노벨상인 필즈상 수상해 유명해진 허준이 교수는, 사람의 인생이 우연 의지 기질이라는 세 요소에 의해 좌우되며, 이 삼자가 기막히게 정렬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을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우연과 기질에 크게 치이는 경험을 할 때에,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고도 하였다.

 

자기가 자기를 몰라주는 서러운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길 잃음의 연속으로 힘든 상황을 겼을 지라도, 자기 삶 속에 펼쳐지는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되어 크기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자신의 팔자, 자신의 운명에 하늘의 큰 뜻이 담겨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에게 모질게 굴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모남이 있어서 비로소 자신의 할 일을 아는 것이다.

 

성실하게 궁리하되 집착하지 마라 / 낙천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겸허한 것을 이롭게 하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허한 쪽으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하고 겸허한 것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허한 것을 좋아한다.”

<단전 ()>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고 한다. 그런 면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경이 기록한 하늘의 계시는 반대일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간절히 바라면 바랄수록 온 우주가 방해한다.

 

사실 간절한 염원을 가진 사람이 역경의 주인공이다. 간절한 염원(가고자 하는 바)이 있기에 이를 실현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이 군자다. 그 노력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역경은 군자를 위한 조언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조언은 간절한 염원이 잘못 흘러갈 경우 도리어 반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하니 유의할 일이다.

 

서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경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가득 차는 것이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싫어하고 미워하며, 귀신까지도 해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온 우주가 나서서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싶은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삶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의 시 <혼자 웃다>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기록한 것이다.

 

양식 있는 집은 먹을 식구가 없고

자식 많은 집은 굶주림이 걱정이네.

 

높은 벼슬아치는 영락없이 바보이고

재능 있는 사람은 발휘할 자리가 없네.

 

모든 복을 두루 갖춘 집은 드물고

지극한 도리는 언제나 능멸당하누나.

 

아비가 아끼면 자식 놈이 매번 탕진하고

아내가 슬기로우면 남편은 어리석네.

 

달이 차면 번번이 구름에 가리우고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망쳐 버리네.

 

세상 만물이 끝내는 이와 같으니

혼자 웃음에 까닭을 아는 이 없네.“

 

<혼자 웃다>, 정약용

 

다산은 천지만물, 세상만사가 끝내는 가득 참에 이르지 못하는 현상을 관찰하고서 인상이 깊어 시로 남긴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두 무의식 중에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울 때 모두 내가 약자라고 자처한다. ‘아이고, 나 죽네. 힘 있는 놈이 힘없는 사람을 팬다고 호소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어 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비우고자 하면 끊임없이 채워질 것이다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갈까? 이러한 대목이 바로 뻣뻣한 인간의 무릎을 꺾어 겸손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신비인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이러한 신비의 작용이 없다면, 이 세상은 계산 잘하는 사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차지하고 말 것이다.

 

운명의 작용은 끝내 오만한 자의 무릎을 꺾어 놓는다. 하늘은 약한 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이치로 인해 이 세상은 늘 돌고 돈다. “시초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다라는 의미이다. 결국 하늘의 뜻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비를 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간절한 염원이 있는 사람은 그 염원이 잘못 흘러 가득 찬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걸 이루지 못하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태도는 아주 위험하다. 바로 간절히 바라는 그 염원 하나로 가득 찬 것이다. 이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 가득 찬 것이다. 온통 집착하는 것이 과연 이루어질까? 온 우주가 미워하고 방해한다는 것이 역경의 조언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낙천(樂天)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언가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에는 나의 이해를 넘어선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하늘의 뜻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아닌 하늘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하늘의 뜻을 반영한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보다 기쁜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하늘을 즐기고, 하늘을 낙으로 삼는 낙천이다.

 

이 같은 낙천은 소극적인 조언이 아니다. 나를 비우면 뜻을 이루는 시기가 빨라질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면 이제 온 우주가 그것을 채워 주려 하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겸허한 것(비어 있는 것)을 좋아해서 유익을 주며, 귀신까지도 복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이러한 낙천의 태도는 인생의 여행길에서 더없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아래의 그림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의 괘(나에게 새겨진 결)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 여행을 나서게 된다.

 

군자의 인생 여행

 

길을 가는 동안 사람은 다른 괘라는 연()을 만나게 된다. 흔히 인연이라 말하는데 연이 맞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른 괘는 사람이자 그를 연으로 해서 펼쳐지는 사건이다.

 

사람이 인생길을 가는 동안 다른 괘를 만난다는 것은 신비한 수수께끼와 마주치는 것이다. 스핑크스는 자기 앞을 지나가려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 질문에 보다 우월한 지혜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우월한 지혜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했을 때 사람은 해당 괘로 상징되는 새로운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때 사람은 그동안 자신을 가두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보다 높은 존재 질서를 허가 받아 살게 된다. ‘도를 깨친다는 것’, ‘도통했다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펼치려면 계속해서 부딪혀야 한다

 

삶의 비밀 중의 하나를 말해 보려고 한다.

 

삶에서 모든 좋은 것은 길을 가는 도중에 발생한다. 가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군자는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삶의 의미가 펼쳐진다. 가고자 하는 바에서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좋은 길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이라는 뜻의 라 말하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군자가 인생 여행을 하는 동안 마주치는 괘 하나하나가 도요, 길이다. 그 길을 걸어서 답파할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도를 터득할 수 있다. 인생의 여행길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길에는 64가지가 있고, 터득해야 하는 도에도 64가지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팔자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와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 이 둘을 합친 것이 사람의 창자를 이룬다. 위의 그림에서 사람마다 출발점으로 부여된 괘가 다르고, 길을 가는 동안 서로 다른 연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기 다른 팔자가 펼쳐진다.

 

이처럼 인생길에서 연으로 마주치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결을 지녔기 때문에 신비로운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그 역시 하늘의 대리자이므로 마냥 내 뜻에 따라 움직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사람은 나와 다른 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지 못하면, 기존의 자기 한계에 갇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지조차 못한다. 사람이 이러한 자기 한계를 넘어 성장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끌어 주는 것이 타인과의 연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이치를 궁구해서 성()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르는 것이다.” <설괘전> 1

 

여기서 성을 다한다는 하늘이 내개 부여한 에서 비롯하는 나의 성질(性質, 기질), 특성, 가능성 등을 다 펼치는 것을 말한다. 역경은 이처럼 각자에게 부여된 성질, 특성, 가능성을 다 펼침으로써 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특성과 가능성을 다 펼치기 위해서는 이치를 궁구하는 궁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은 열심히 궁리를 해야 자신에게 부여된 가능성을 다 펼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때 궁리의 대상은 인생 여행 과정에서 마주치는 연을 통해 나에게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이다. 달리 말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휘둘러 대는 변덕스러운 우연들, 즉 흉운이다. 결국 역경은 우리가 삶을 통해 맞추지는 흉운을 달리 볼 것을 촉구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인생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 사건들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이들은 마냥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궁리를 하게 된다. 하늘이 나에게 신비의 수수께끼를 풀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도를 하나씩 깨치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세상의 신비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며,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무엇이 가능한지 나의 특성과 가능성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놀라운 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위 그림의 둘레길을 일주하여 64가지 도를 모두 터득하면 이 세상과 자기의 신비를 다 알게 된다. 내 안에 우주가 다 담겨 있기 때문에 나를 온전히 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천명이 무엇인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자기의 특성과 가능성이 지닌 잠재력을 실현하라는 것 또한 천명이다. 굽어 있는 자기[] 잠재력을 제대로 펼쳐 나가는 것이 자기실현이며, 그렇게 굽어 있는 자기를 펼쳐 일으켜 멋진 작품을 완성해 보라는 것이 내게 부여된 천명이다.

 

그 과정에서 연을 통해 나에게 일어나는 우연적인 사건들은 나에게 궁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실우리의 삶 자체가 이치를 궁구하는 궁리의 과정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연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 실습하는 기회를 나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치를 깨쳤다면, 나 자신이 그 진리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쌓아야 한다. 이렇게 수련을 쌓는 것까지가 이치를 궁구하는 궁리에 포함된다.

 

결국 이 세상은 나의 성장을 위한 공부와 수련의 장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나는 기존 한계를 넘어 성장함으로써 나의 모든 가능성을 제대로 펼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은 또한 나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니, 나는 공부와 수련을 쌓은 결과보다 멋진 창조를 이루어 하늘의 대업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과우주의 중심이다. 우리 모두, ‘라는 존재는 우주의 중심이다. 동서남북, 오른쪽 왼쪽이 모두 중심축인 를 기준으로 결정되고 있다. 우주는 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우주는 중심인 나와 내가 관계를 맺은 연(사람, 사건, 사물)으로 구성된다. 내가 연을 맺은 타인은 나를 찾아와 나의 우주를 이루어 준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나의 우주는 삭막했을 것이다.

 

천명은 무엇인가? 나의 우주를 이루어준 나의 연들을 통해 하늘이 내게 비친 뜻이 나의 천명이다. 나의 천명은 나의 연들을 통해 내게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매일 새로운 사건과 마주한다. 그에 따라 나의 천명도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 인생에서 무엇도 잘못되지 않는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에 합당한 새로운 천명이 나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귀천하는 날까지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나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맺은 연들은 각기 하늘의 대리자이므로 내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낙천해야 하고, 또 낙천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무언가 나의 이해를 넘어선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언가 하늘이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낙천의 지혜를 깨칠 때 비로소 비상할 수 있다. 날아야 할 용이 하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오십은 용이 비로소 하늘에 오를 때다 / 오십

 

양 기운이 다섯에 이르니, 날아야 할 용이 비로소 하늘에 오른 상이로다.

대인을 만나야 이로우리라.“ <()> 5효사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는 역경은 나이 오십을 직접 거론하는 계시 역시 담고 있다. 서두의 <건괘> 5효사가 그것인데, 여기서 양 기운이 다섯에 이르렀다는 말이 바로 사람이 오십 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나이 오십을 날아야 할 용이 비로소 하늘에 오른 상이라 규정한다. 이는 우선 사람을 이라 말하고 있다. 그것도 마땅히 날아올라야 할 용이다. 사람이 나이 오십이 되었을 대 비로소 용이 하늘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오십 이전은 아직 용이 땅 위를 기어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고, 오십 이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진정한 용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오십 이전은 아직 용의 온전한 삶이 아니라고 한다. 어째서 그럴까?

 

기어다니는 삶에서 날아다니는 삶으로

 

역경은 이십 대를 배움의 시기로 규정한다.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남에게 배워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삼십 대와 사십 대는 세파에 맞서 자신의 인생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기다. 64갈래 384굽이 미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시기이므로 세상 전체를 조망하지는 못한다.

 

결국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사람은 미로와 같은 이 세상을 아직 잘 모른다. 이십 대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삼십 대는 다른 사람을 아직 잘 모른다. 사십 대에 이르면 세상 보는 눈이 조금 트이지만 아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젊은 시절에 자꾸 운과 자기 기질에 치이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서 있고는 한다. 그러다가 그 젊은 날의 열병이 여러 겹의 나이테를 남기고 지나갔을 때 비로소 오십이라는 원숙기에 이르는 것이다.

 

오십에 이른 이는 이제 자기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오십이 하늘에 올랐다는 말이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땅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에 따라 자신의 기질을 넘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이상 운에 치이지도 않는다. 변덕스러운 우연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고삐를 틀어쥐고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오십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날아야 할 용이 비로소 하늘에 올랐다는 것은 이를 뜻하는 말이다.

 

오십에게 이와 같은 안목이 생기는 이유는 우선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쌓은 인생의 축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지식과는 다른 것이기에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십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기 인생을 조망할 수 있다.

 

역경이 나이 오십에 이르러 비로소 하늘에 오른 상이라는 것은 오십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이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하늘의 일을 하고자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라야 사람은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진정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행하고자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해낸 일을 해낼 수 있다. 성인이 큰일을 해낸 비결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진실로 하늘이 바라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같이 도모하고 귀신이 같이 도모해 준다. 귀신이 해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다. 그리하여 갑자기 무언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나를 돕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진정 천명의 길로 나아간다면,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마치 태초부터 나를 돕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려 온 듯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황금기이자 절정기의 오십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렇게 오십에 이르러 하늘에 오른 사람은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역경이 바라보는 사람의 나이 오십은 인생의 절정기이자 황금기인 것이다. 하지만 오십 대치고 불안과 고민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이는 대자연의 이치 때문에 그러하다. 식물을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초목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황금기는 동시에 전환기이며 불안의 시기이기도 하다. 초목에 힘이 빠지는 시기에 초목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절정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사람의 오십 대 역시 이와 유사하게 불안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절정기라는 복합 성격을 띤다. 그 불안이 어서 결실을 맺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안기와 절정기가 함께 찾아오는 것이 대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무릇 배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 많이 하려 드는 것을 덜어내어[], (, 비어 있음)로써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면 능히 널리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도는 완성되면 필히 변하는 것이니, 무릇 가득 참을 직접 지니면서 오래 간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 그 차고 빔을 조절하여 자기 스스로 가득 채우려 하지 않아야 능히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절정에 이른 오십에게 불안이 찾아오는 이유 중 하나는 그로 인해 겸허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쉽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천지의 오묘한 조화다. 역경이 서두에서 오십에게 대인을 만나야 이로울 것이라 조언하는 취지도 같은 것이다. 진정 큰일을 하려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낙천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은 기꺼이 비어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낙천하는 사람은 가고자 하는 바가 있지만 그 염원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염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무언가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집착하지 않는 그의 태도, 하늘을 즐기는 태도가 도리어 능히 큰일을 이루어낸다.

 

낙천의 경지는 예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골프에 대해 힘 빼는 데 3, 힘주는 데 3 걸린다고 한다. 모든 구기 종목이 다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다.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도리어 일이 되지를 않는 것이다.

 

골프의 경우는 힘 빼는 데 3, 힘주는 데 3년인데, 인생의 일에서는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오십은 되어야 그러한 경지에 오르는 것 같으며, 그래서 오십이 인생의 절정기요, 황금기인 듯하다.

 

☆ 이제, 이 책의 2장 ~ 4장에서 나에게 와 닿는 문장을 담아보기로 한다.

 

▶ '나는 무엇 하러 여기 왔나?' 하는 질문을 '근본 질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이 근본 질문인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근본 지식'이라 불린다.

오십은 이러한 근본 지식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다.

'나는 무엇 하러 여기 왔나?'

 

▶ 오늘 먹은 나의 마음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바꾼다.

'그냥 이대로 살지 뭐'와 같은 태도를 취한 채 치러 내야 할 통과 의례를 치러 내지 못하면 후반생을 계속 시름시름 앓게 된다.

모처럼의 소중한 인생의 결실을 맺으려면,

역경이 말하는 '장(章)'을 내려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장이란 무엇인가?

章은 '문장(文章), 구별, 표지, 밝히다, 나타내다, 드러내다' 등의 여러 뜻이 나온다.

그 어원은 辛(매울 신, 글자를 새기는 조각칼)과 曰이 합쳐진 글자인데,

글자를 새기는 조각칼로 무언가[曰]를 새기는 모습이다. 이는 청동기에 글을 새겨 넣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은나라에서는 선조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선조의 일생을 요약해서 명문으로 새겨 넣은 청동기를 제사상에 올렸다.

청동기에 많은 글자를 새겨 넣을 수는 없으므로 그 일생의 요체를 짧게 새겨 넣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章의 원형적 의미는,

'타인과 구별되는 그 사람만의 일생의 핵심을 짧게 밝힌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문장(文章), 구별, 표지, 밝히다,나타내다, 드러내다' 등의 여러 뜻이 파생된 것이다.

표지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남과 다른 자신만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章이란 결국 '나의 인생을 무엇이라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오십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인생을 무엇이라 할지 규정을 내려야 하고 입에 머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당황하게 될 것이며,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인생을 완성할 치열함을 갖추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가 된다.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실제로 지어내고 지탱한다는 말이다.

成性存存 하자!

즉, 

하늘이 부여한 性을 이루고, 

하늘의 몸인 이 세상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무엇)이 눈에 띈다면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이룬 것[成性]은 하늘의 몸인 이 세상에 저장되며[存存],

그만큼 하늘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장이며, 

'사람이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간다'는 귀천의 참뜻이다.

이렇게 하늘의 몸을 자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하늘이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영혼의 노력을 이 세상에 덧붙여 보존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몸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꼭 거창한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명이란,

자기에게 일어난 변덕스러운 우연을 모두 관통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인생의 후반생은 정신 세계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반생 동안 정신의 힘으로 과거(전반생)의 사실들을 합당하게 바꾸어 내야 한다. 전반생을 사는 동안 자신에게 닥쳤던 온갖 변덕스러운 우연을 관통하여 의미를 부여해 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라야 사람은 비로소 자기 과거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흘러가 버린 과거를, 자기의 인생을 바꾸어 내는 데에 삶의 의미가 있다.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나의 과거는 가변적인 것이다.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나의 전반생은 나를 단련시키는 과정이었다.

전반생을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지금의 나'이다!

오늘 먹은 나의 마음이,

오늘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바꾼다. 나의 마음은 이토록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인간 정신의 힘이다!

오십에 이른 사람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 내기 위한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내면을 상승시키기 위한 치열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章을 머금는 것이며,

그때라야 정(貞)한 힘으로 제2의 질풍노도기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라야 균형잡힌 후반생을 살 수 있고 소중한 인생의 결실을 맺게 된다!

 

 과거와 타인에서 벗어나 나의 길을 나아가야 할 때가 바로 오십이다.

 

역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자루를 틀어 묶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이 하라.” <곤괘> 4효사

 

역경에서는 오십에게 장()을 머금어야 한다고 조언한 후, ‘자루를 틀어 묶으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슨 나의 인생을 무엇이라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 결단을 내렸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일체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 이때 허물은 없어야 한다”. ‘허물이 없다는 말에 대해 역경은 다음과 같은 풀이를 제시한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잘 보수했다는 말이다. <계사상전> 3

 

이는 자신이 저지른 어떤 과오로 인해 일단 상처가 나긴 했지만, 상처를 잘 치유했기 때문에 흉터(허물)가 남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과오를 고치기 위한 후속적인 노력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과오가 사람들의 기억에 계속 불명예로 남게 되지는 않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역경이 후반생을 사는 오십에게 허물이 없도록 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바로 과거의 사실들을 바꾸어 내라는 의미가 된다.

 

사람이 나이 오십에 자신의 을 정립했다면 이후 과거(전반생)의 사실들을 장에 합당하도록 바꾸어 내야 한다. 자신의 장을 통해 전반생에 겪었던 모든 변덕스러운 우연을 관통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차분하게 성찰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을 통해 지나온 삶에서 어떤 과오가 발견된다면 이를 잘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그 과오가 허물로 계속 남지 않는 것이다.

 

, 이러한 성찰과 치유의 과정 앞에 자루를 틀어 묶으라는 조언이 선행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성찰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에 좌우되는 성찰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성찰이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립한 자신의 장을 성찰의 기초로 삼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명예도 없이 해야 한다”. 우선 명예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명예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예도 없이 하라는 것은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 구애되는 행동을 하지 말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곤괘> 4효사가 제시하는 역경의 조언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나의 인생을 무엇이라 규정할지 일단 결단을 내렸다면 자신의 결단에 대해 자루를 틀어 묶으라. 그리고 그 기준에 비추어 과거의 전반생 동안 저지른 과오를 잘 치유해서 그 과오가 허물로 계속 남지 않도록 기울일 것이지만, 그러한 노력 외에 추가로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일체 하지 말라.’

 

어째서 이러한 조언을 하는 것일까? 사람이 인생에서 어떤 보람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의 상당수가 이 때문이라서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보람이 아닌 타인의 것을 위해 소중한 나의 시간과 기운을 낭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오십이므로 나의 시간과 기운을 잘 헤아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위해 나의 시간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젊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경계를 둘러치고 중심을 잡으면 강해진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한계를 둘러칠 필요가 있다. 무한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한계를 둘러칠 때라야 자기 존재가 분명해진다. 나는 무엇 하러 여기 왔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때라야 사람은 강해질 수 있고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치밀해질 수 있다. 그 결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 자기 인생에서 무언가 결실을 거두려면 반드시 자루를 틀어 묶어야 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 치고 장구 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것이다.

 

나의 장단이 나에게 부여된 결이며 괘이고, 나의 천명이다. 이러한 나의 장단이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다. 나의 천명은 나의 장단을 완성하는 것이고, 나의 장단이 울려 퍼지는 나의 우주를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자신 있게 나의 장단으로 북을 치고 장구를 치다 보면 나의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춤을 추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우주가 완성된다. 이렇게 나의 우주를 자신 있게 완성하는 것이 나의 천명이다. 이렇게 나의 장단이 울려 퍼지는 나의 우주가 완성되면 전체 우주의 다채로움을 위해 기여하게 된다. 이것이 또한 귀장이다.

 

이러한 나의 우주를 완성하기 위해 장을 머금어야 하고 자루를 틀어 묶어야 하는 것이다. 장을 머금음으로써 나의 우주가 돌아가는 중심축을 세우는 것이고, 자루를 틀어 묶음으로써 중심축을 튼튼히 굳히는 것이다.

 

이때 명예라는 형태의 유혹이 방해의 올가미로 나타난다. 사람이 남한테 장단을 맞추고 싶어지는 것은 타인을 만족시킴으로써 주어지는 칭찬과 명예에 눈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오십이라면 이제는 자기의 천명을 이루는 노력 외에 타인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은 곤란하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러므로 오십은 스스로 자루를 틀어 묶어 자기 천명[()]의 경계를 둘러쳐야 하고, 경계 밖의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이것이 또한 낙천이다. 물론 자신의 성찰이 먼저 있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역경의 허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역경이 명예도 없이 하라는 것은 명예가 없어도 된다는 말로, 하늘이 오십에 허용한 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제가 허용되는 이유는 천명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을 위해, 자루를 틀어 묶어 내 천명의 경계를 둘러침으로써 강해지도록 하자! 그리하여 내 우주의 중심을 굳건히 세움으로써 내 우주를 완성해 내자! 이때 나는 내 우주의 왕이 될 수 있다.

 

황색 치마를 입은 상이로다. 으뜸으로 길하리라.” <곤괘> 5효사

 

여기서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고대에 황색 치마는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즉 자기 우주의 왕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우주의 중심을 굳건히 세움으로써 나의 우주를 완성하고, 내가 그 중심에 왕으로서 우뚝 섰을 때, 나의 장단이 울려 퍼지는 우주에서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춤을 추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우주(인생)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나의 천명이다.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에 현명하게 처신하라.

 

기미를 아는 것, 그것은 신묘하도다. ... 기미라는 것은 미세한 움직임으로 길한 결과를 먼저 드러내는 것이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서 지으니 날이 저물어 버리도록 기다리기만 하는 일이 없다.” <계사하전> 5

 

역경은 일의 결과가 길할 것이다, 흉할 것이다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데, 만약 그와 같은 미래의 길흉이 확고하게 결정된 것이어서 사람은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의미가 반감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역경이 더 의미 있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역경에서 매 단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구절에는 ‘-하면 길할 것이다’, ‘-하면 흉할 것이다라고 나온다. 이처럼 역경은 길흉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것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길흉회린은 행동에서 생겨나는 것”(<계사하전> 1장이라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행동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기미를 포착할 줄 알아야 한다.

 

역경을 읽을 때 그냥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기미를 관찰하기를 즐겨야 한다. 역경은 인생사의 매 경우를 64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경우에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를 서술한다. 또한 그런 결과를 암시하는 기미가 무엇인지도 서술한다. 그러므로 율곡은 역경을 읽고 나서 이를 토대로 현실에서 내가 처한 상황의 기미를 포착하도록 힘쓰라고 조언한다. 기미를 포착하면 앞으로 전개될 나의 길흉과 존망, 진퇴, 소장의 추세를 알게 되어 그에 맞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미라는 것은 은미하게 나타나므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군자라면 기미를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의 기미를 살핌이 치밀하지 못한 즉 성취에 해를 끼친다.” <계사상전> 8

 

오직 기미를 살피는 연고로 능히 천하의 책무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계사상전> 10

 

사람이 나이 오십에 이르면 인생 경륜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역경이 오직 기미를 살피는 연고로 능히 천하의 책무를 달성할 수 있다라고 조언하는 것은 경륜의 요체가 기미를 살필 줄 아는 지혜에 있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사람이 나이 오십에 이르면 무엇보다 기미를 살핌에 힘쓸 일이다.

 

 마음을 쏟아야 할 때, 의리를 지켜야 할 때를 구분하라

 

이 세상의기미를 관찰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이 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대인, 소인, 비인 중 누구인가를 보아내는 것이다. 군자가 대인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이로움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이 때문에 대인은 흔히 귀인(貴人)으로도 불린다. 반면 내가 만난 사람이 비인인데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면 기가 막힌 꼴을 보게 된다.

 

사람의 기미를 관찰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역시 내가 속한 모임이나 공동체의 기미를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태의 공동체인지 비의 공동체인지를 보아내서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역경은 아예 이 세상이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上經의 세계와 下經의 세계, 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데, 대략 비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상이 상경의 세계요, 태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상이 하경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아래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경은 상경의 세계와 하경의 세계를 완전히 구분해서 각기 상경과 하경으로 권을 나누어 띠로 편제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다. 각각의 세계에 적용되는 의 특성도 서로 다르다. 양자를 서로 전혀 다른 세계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미를 통해 보아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보고 두 세계를 구분해서 살아내는 것이다.

 

하경의 세계는 쉽게 말해 치세라고 할 수 있다. 군자와 대인이 주도권을 확립한 세계이며, 그에 따라 규범이 확립된 세계다. 소인은 대세를 따르게 마련이므로 이 세계에서는 소인도 대의를 따르게 된다.

 

반면 상경의 세계는 난세라고 할 수 있으며, 규범이 채 확립되지 못하여 비인이 설쳐대는 세상이다. 이 세계에서 소인은 비인을 따라 부화뇌동한다.

상경의 계와 하경의 세계

 

 

두 세계의 구분 기준

 

 

흥미 있는 점은 역경이 예와 의리는 하경의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은 예의(禮儀)라는 말을 하나의 단어이자 개념처럼 쓰고 있지만, 예와 의는 일정 부분 겹칠 수는 있어도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 거동, 의식, 법식 등의 뜻을 가지며, ‘사람의 올바른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서양의 에티켓과 같다.

 

이에 비해 예()는 제단 앞에서 신에게 합당한 예를 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신을) 공경한다는 뜻을 가진다. 즉 의는 겉으로 표시하는 행동거지의 문제인 데 비해 예는 공경하는 마음, 진실된 마음까지 다해야 하는 것이다.

 

군자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비인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경이 비인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할 때 일상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상대와 말을 섞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의 진심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상대에게 나의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섞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라는 말의 취지는 신뢰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신뢰하여 나의 진심을 드러내면 기막힌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역경이 비인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한 취지도 마찬가지다. 비인에게도 의()를 다함으로써 그를 존중하고 그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해야 하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경은 의와 예를 구분해서 인식하고 예의 질서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경의 내용을 보면, 하경의 세계로 들어갈 때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생각보다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 정도면 예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법한데도 웬만해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의 질서에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한번 들어간 이상 나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비인이 출몰하는 상경의 세상에서 의리를 다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큰 곤욕을 치르는 사람 중에는 이 문제를 헷갈린 경우가 많다. 비인이 섞여 있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비인일수록 이런 사람을 잘 알아보고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인생에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주저앉는 일도 있기 때문에 주의할 일이다.

 

결국 진실된 마음은 그리 쉽게 쏟는 것이 아니며, 의리 역시 그리 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와 의리가 적용되는 하경의 세계와 상경의 세계를 구분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아침에 집을 나서면 순간순간 하나의 관계망에서 또 다른 관계망으로 넘어간다. 그때마다 하경의 세계와 상경의 세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이다. 오십의 연륜이라면 그때마다 합당하게 자신의 관점과 태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개운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십이 놓인 세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하경의 세계여야 한다. 그래야 나잇값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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