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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길갈을 회복하라, 호 9:15-17, 호세아 시리즈 설교(20)

by tat tvam asi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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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을 회복하라

 9:15-17

 

 9:15 /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하나님은 타락하여 망하게 된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원인이 길갈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길갈이 어떤 곳인가요? 길갈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지파 수대로 큰 돌을 하나씩 갖고 와서 기념탑을 쌓은 곳이 길갈입니다(여호수아 4). 길갈의 뜻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입니.

 

 5:9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 한 수치, 광야 40년 동안 지은 죄의 수치를 버려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을 선언한 곳이 길갈입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민족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할례를 시행한 곳이 길갈이고( 5:2~7), 그가 임시 수도로 정하고 이스라엘을 통치한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가나안 다섯 부족을 무찌르고 승리한 곳이었습니다( 10:7, 15, 43). 길갈은 이처럼 이스라엘 정체성의 장소이며 정결과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곳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애굽의 수치가 너희에게서 떠나간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면, 그동안 좋지 않은 것이 덮여 있었다는 것이고, 덮여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뜯겨져 나갔다는 말입니다. 덮여지지 말아야 될 것이 굳은 살처럼 덮여 있으니까 그 덮여 있는 것을 강제로 떼어내서 “저리가!” 하고 갖다 버리는, 굴러가게 하는 일이 벌어진 장소가 길갈이라는 말입니다. 뭐가 굴러갔나요? ‘애굽의 수치’가 너희에게서 굴러갔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요즘으로 비교해서 말해 본다면 '세상'일 텐데요, 히브리인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우기며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 체질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4백 년 동안 거기 살면서 완전히 체질화된 거예요.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구체화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껍질이 벗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더러운 것에 눌려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굴러가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넣어 주신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요단강 건너는 이야기 나오지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에 있지도 않은 홍수를 갑자기 일으켜서 도저히 다리를 만들 수도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고, 그래서 약속의 땅에 건너갈 수 없게 의도적으로 만들어요.

이때 제사장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 요단강 물이 멈춰 길이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갔잖아요.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가나안이라는 꿈을 주시고, 또한 애굽의 노예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순히 자기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수아 5장에는 길갈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할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5:2-3 /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할례라는 것은 우리 자아와의 결별, 어쩌면 우리 자신이 가장 중시하던 '몸'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과의 결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기 위해 ‘할례’를 배풀어 주셨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연합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사울 왕은 아말렉의 아각 왕과 양과 소 중에 기름진 것과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살려둡니다. 길갈에서 ‘애굽을 수치를 굴려 버려야 할 시간에’ 오히려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채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상 15:9 /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그런데 우리도 세상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번영과 부요함을 추구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9:16 /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에게, “내가 과실을 맺지 못하게 하고 자식을 낳을지라도 그 자식을 죽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죽음을 끝 지점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끝점이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끝점으로 데려가서, 나의 에고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내 에고가 죽은 자리, 나의 부정적인 모든 생각&감정, 오감을 부인하는 자리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신의 성품에 참여한 우리가 새로이 일을 개시하게 함으로 새롭게 거듭난 나로 변신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습관적인 생각과 감정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완전에 참여하는 자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릇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벧전 2:9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호세아는 지금 큰 이야기를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코 앞에 있는 일 밖에 모르고 있지요.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어떻게 되었습니까?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방랑하는 가련한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분명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주재자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주의 법칙을 세우시고 그 법칙을 운행하십니다.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한 순간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주께 나와, 그분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온전히 알 때 우리 삶에 참 평안이 깃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으며 즐기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어야 합니다. 내면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생각과 감정, 우리의 오감에 이끌리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여러 모로 어려움이 수반됩니다.

 

 9:17 /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 권세와 능력의 성령님, 부활 승천하시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의 영께서 내 안에서 어떤 음성을 들려주시는지, 고요히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기를, 권능의 주와 화합하기를 강력하게 전했습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벌벌 떨면서, 요단강 한가운데서 버티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빨리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요. 그 때 백성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 제사장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물론 홍해가 갈라지듯 물이 벽처럼 서지는 않고 말랐다고 했지만 언제 또 물이 몰려올지 알 수가 없잖아요.

 

할례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단강, 길갈, 기적적으로 살아왔지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사기 2 1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마치 요즘 시대 급부상한 드론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드론을 띄워, 시가지를 위에서 보게 하는 거예요.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렬을 지켜보시며,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끄집어냈다. 이것은 바로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 내 언약을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이시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화 된 하나님. 인간의 몸이 된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작은 예수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 14:16-20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게 복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애굽 땅에서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서, 그 피로 살아왔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전부를 대신하신 예수의 영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내 존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BC 490년 마라톤 전쟁에서 그리스가 3백 명으로 페르시아를 이겼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을 이겨서 기념으로 세운 신전이 파르테논 신전인데요. 그 신전 중심으로 ‘아고라’라는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아테나 여신 덕에 자기들이 이겼으니, 그 여신을 기념한다고 신전을 세운 것입니다.

 

원래 길갈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너왔다는 그 사실, 할례 언약, 다시 말해 자아를 십자가에 내려놓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바알을 섬기는 자리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할례를 지시했던 그 장소에 바알신전을 세운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나, 눈에 보이는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보다 잘 사는 것 같은 이방민족의 신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 더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길갈 할례의 정신적 의미가 나중에 다윗으로 오게 되면 인격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격화되면서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 그것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그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네요. 사무엘이 아말렉 민족과 전쟁하면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는데 그 장소가 길갈이에요. 사무엘상 15 33“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길갈이라는 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인간의 힘으로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적들을 쳐부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도착되지 않는 지점 그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이 장소적 개념이 나중에 인격적 개념으로 바뀝니다. 사무엘하 12 13, 14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밧세바와 간음했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인 그 죄지요.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당신이 낳은 아들이 정녕 죽으리이다. 오늘 본문 호세아 9 16에도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새생명이라는 것은 길갈 같은, '나' 중심의 삶이 십자가에 못박힌 과정을 통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어서 죽어 마땅한데 그 다윗의 낳은 자식이, 밧세바와 간음해서 낳은 자식이 대신해서 다윗을 살렸습니다. 다윗을 살려 솔로몬을 낳게 하는 것이지요. 솔로몬의 뜻은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죄 중에 잉태된 그 자식은 대신 희생 당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길갈입니다. 길갈의 정신이요,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우리 자신은 늘 길갈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자리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 성령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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