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역사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창조하신 것은 우주의 기본적 요소인 시간, 공간, 물질이고(창 1:1), 두 번째는 물고기 새와 같은 동물들을(창 1:21),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그런데 여기서 흥미가 있는 것은 식물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물에 대해서 창조하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image)'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식물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고 ‘내라 하시니’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창세기 1장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동물에 대해서는 ‘내라 하시니’라는 말과 ‘창조’라는 말이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식물에게 사용되지 않았던 창조라는 말이 동물에게 사용되었을까요? 식물과 동물의 차이가 있다면, 동물에게는 식물에게 없는 ‘혼’ 즉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실 때 혼을 부여해서 동물을 만드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십니다.
즉 동물과 다르게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요.
하나님이 동물을 만드실 때에 식물에는 없는 ‘혼’을 만드시고 동물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동물에게는 없는 ‘하나님 형상’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거나 아니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고 고귀한 존재로 창조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체적인 예가 삶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사람이 사는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함이라 말합니다. 결혼이나 공부하는 목적도, 돈을 벌고 출세하는 목적도 행복하게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진국일수록 잘사는 지역일수록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물질이 많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세상에서 최상의 삶을 누린 사람이 있다면 솔로몬 왕일 것입니다. 당시 솔로몬 왕은 보화로 장식한 화려한 왕궁에서, 가장 화려한 옷과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많은 처와 첩을 거느리며, 시중을 드는 많은 여인들 품에 있었지만, 그가 쓴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다 해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먹을 것과 쉴 곳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 비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어린아이라면 부모와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좋은 장난감을 주어도 울고불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살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하나님 형상을 넣어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속한 가장 아름다운 믿음 소망 사랑의 성품이,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신의 성품을 잊고 살면서, 공허한 삶을 살 때가 있지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이 궁금하시지요!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많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 되니까요.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속에 창조의 이유가 있지요.
그런데 누구에게 주셨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운행하는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을 보면 세상과 생물들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임무까지 나에게 주셨습니다.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신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사랑은 나누어줄수록 많아진다.
둘째, 사랑은 받으려고만 하면 멀리 간다.
셋째, 사랑은 도적을 당하지 않는다.
넷째, (물론 돈도 필요합니다)그러나 사랑은 돈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다섯째, 사랑은 인생을 고치는 특효약이다.
누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풍성히 받아 본 사람이, 또한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어요.
우리가 믿음이 잘 자라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의 첫 출발점을,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믿음으로 나가겠다"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첫 출발점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알 때 믿음의 첫 출발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 1서 4장 16절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랑을 풍성히 받은 사람이 또한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였는데, 문제는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내가 정말 사람들에게 뜨거운 생명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시대가 바뀐 것 같아도 사람이 변한 것 같아도 마음에 불이 있는 성도의 전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초대교회는 전도에 굉장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깨뜨리고 전도에 열심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전도에 대한 생각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의 문을 열기 전 바울과 베드로를 변화시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세 번이나 반항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4절을 보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주님이, "깨끗하니 먹으라" 말하여도, 베드로는 자기 생각이 분명하였기에 주님의 말씀도 거절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였던 베드로는 마지 못하여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긴 하였지만, 억지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온 가족에게 성령님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방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구나!’ 깨닫고 자기 생각을 내리고 전도의 문을 열어 갑니다.
사도 바울은 더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박해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전도의 문이 열리기 전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내가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에서 속을 때가 있지요.
인생에 대하여,
"사람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야. 그것이 인생이야..."라구요.
아닙니다. 인생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에요.
2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내 안에 두어 창조하시며,
'인생은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라 말씀하였어요.
'인생은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문제가 해결되고, 운명이 바뀌며,
마침내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에 따라 때론 흔들리기도 하며 살아왔다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다면,
오늘 이 자리에 참 잘 오셨습니다.
나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모든 문제마다 해결되는 사람으로 서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운명을 바꾸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서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만일 내 인생이 이것이 전부일까? 인생을 고민하던 분이 계시다면, 주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엄마의 손을 잡고가는 어린이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엄마를 믿고 맡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맡기는 것이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를 못합니다. 맡기지 못하니까 염려, 근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참 평안은 맡기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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