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14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만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도 하고, 또한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일반적인 지식을 전해줍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말씀을 주십니까? 하나는 기록된 말씀(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실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19편을 보겠습니다.
1.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시 19:1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일반계시의 역할은 하나님에 대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늘", "궁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하늘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눈으로 보는 파란 하늘, 밤 하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더 확장시키면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말할 때도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늘과 궁창도 그런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 넓은 의미의 우주와 행성, 항성 등의 천체들이 포함된 개념입니다. 그런 우주가 하는 일에 대해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늘과 우주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손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직접적인 관여를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창조주가 계시다', '그가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 먼저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다음으로는 그림을 그린 작가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시 19:2 /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 말씀은 '하늘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지식을 전한다'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샘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늘은 날마다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소리로 들릴 듯 안 들릴 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 시 19:3 /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했는데, 무언가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어떠한 언어도 없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자연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방법은 우리의 언어를 통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말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것은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좋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입니다. 자연은 말없는 말, 소리 없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자연 만물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구도 하늘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시 19:4a /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
하늘의 선포는 장소의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세상 끝까지 그 소리가 이릅니다. 땅과 바다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늘이 하나님에 대해 선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지에 살아도 외딴 섬에 살아도 하늘은 그곳에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반계시들이 특징은 '보편성', '일반성'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하늘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그것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늘, 나무, 바다 등의 자연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들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분의 능력, 일반적인 속성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시 19:4b-6 / ...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당시에 다윗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밤을 지새우고 이른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으로부터 몸을 숨겨 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태양이 어딘가에서 자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 해에게 휴식처를 제공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태양은 경외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태양신에 대한 숭배와 전설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태양조차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태양이 하룻밤을 자고 출격할 준비를 합니다. 그 태양을 '신랑'과 '힘센 장사'로 표현합니다. 왜 하필 '신랑'과 '힘센 장사'로 비유했을까요? 둘의 공통점은 힘과 에너지, 그리고 기쁨입니다. 태양은 하루만 떴다가 지면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뜨고 지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처럼 태양은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일을 합니다.
결국 자연 계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조주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나는 그와 같은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7절부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름과 특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 시 19:7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①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②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들마다 그 결과까지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 시 19:8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③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따라서 약을 지어서 먹으면, 아프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 처방전이 바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따라서 약을 지어 먹으면 그 효과가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순종하면 그 결과가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④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할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 시 19:9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1원칙은 정결함입니다. '정결함'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정결한 제물을 드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⑥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
세상의 재판은 옳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말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말씀)이 이러하기에, 그 말씀이 어떠한지 증거합니다.
❚ 시 19:10-11 /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사람들의 사모하는 대상의 제일 첫 번째는 금(순금)으로 표현되는 재물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불철주야 일하고, 동분서주 뛰어보지만, 소유가 더 많아진다고 해서 인생이 더 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재물이 인생의 맛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참 맛을 내고, 더 나아가 영원의 맛을 맛보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깊이 품음으로 인생이 변화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재물은 인생을 변질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서, 변화하게 하게하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깊은 맛을 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유용함에 대해서 깨달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시 19:12-13 /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는 '자기 허물'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고의로 죄를 짓지도, 주장하지도 말게 해 달라'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짓는 죄, 알고도 짓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지 우리의 결심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심할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를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온전히 얹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 시 19:14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크게 여겨지는 것은 단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목동이었을 때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던 다윗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그곳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과 믿음의 터전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읽고 듣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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