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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문이 되신 예수님, 요 10 : 7-10,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50)

by tat tvam asi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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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되신 예수님

요 10:7-10

 

<()>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 갈 때는 '쉼' '안전' 그리고 '보호'의 입구가 됩니다.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새로운 출발' '시작'이라는 설레임과 함께 '위험'에 노출이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0: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던 양들이 이제 저녁이 되어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딱 하나밖에 없지요. 곧 양 우리에 나 있는 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양의 문은 말 그대로 양들이 드나드는 양 우리의 문을 말합니다. 목자가 하는 역할 중에 하나는 양의 문과 같은 것입니다. 양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양입니다. 양의 문은 양들을 해할 만한 다른 것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우리에 문이 없어서 양도 들어가고, 이리와 맹수들과 같은 동물들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양 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양은 한 마리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서 문이 되신 것은, 양들을 해하려고 하는 절도, 강도, 도둑과 같은 악한 존재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양들이 살기 위해서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과해서 그 안에 들어갈 때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해하려는 절도와 강도와 같은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요 10:8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요, 구약의 참된 선지자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에 속합니다. 그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자요, 누가 그리스도의 양 떼의 절도요 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구원자가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요 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백수를 누리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찾아와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양의 문이 되시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였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서 사람들은 죄에 빠지게 되고, 그 죄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 전에 왔던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끊어 놓고, 죽음으로 멸망케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고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셔서 양들이 들어가고 나가며 꼴을 얻게 되는데 더 풍성한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에게 그 필요한 꼴을 주십니다. 꼴이라고 하는 것은 목자가 양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풀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꼴을 풍성하게 양들에게 주시면서 양들을 풍요케 하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많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풍성한지를 깨닫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초장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선한 목자와 반대되는 사람이 있다면 삯군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는 가짜 목자입니다. 그는 위기가 닥치고 이리 떼가 몰려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양들을 이용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약탈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수가 많고 적음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섭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밤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섭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목자는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리더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더불어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요, 부활이요, 구원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행복의 핵심도 생명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부터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이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위기, 절망, 고통, 어려움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 순간 예수님으로 인한 생명의 에너지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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