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
요 9:13-23
예수님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에 붙여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이 치유되고 나서 이웃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나오고, 맹인이었던 사람의 반응이 나오고, 또 그의 부모의 반응이 나옵니다.
아마도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니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엄청난 기쁨과 감격과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 요 9:13-14 /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다는 뉘앙스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종교적으로 옳은 일인가 판단을 바리새인들에게 받기 원했던 겁니다. 제자들이 이 사람이 장애인이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면, 이웃 사람들은 그가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에 합당한 것인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려 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다면 함께 감격하고 기뻐해 주어야 할텐데, 그들의 마음에는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율법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잔인함과 무정함이 엿보이는 모습입니다.
❚ 요 9:15 /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이 증언을 들으면서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을 느꼈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기적을 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안식일에 저를 고쳤다니 어찌 그가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일 수가 있겠느냐 색안경을 쓰고 바라봅니다.
❚ 요 9:16 /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알아보는 데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예수가 이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께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으나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하여 보일 수가 있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는데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뜬 소경이 말합니다.
❚ 요 9:17 /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너무나 명백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고, 자기들도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물을 때 어떤 대답을 기대합니까? '모르겠습니다'라든지, '별 것 아닙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는데 "선지자니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맹인의 입장에서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찬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분이 나를 치유하여 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어제는 단지 예수라는 사람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했더니 나았다는 정도로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선지자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이처럼 이 사람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의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과는 안 되겠다 싶어 그의 부모를 부릅니다.
❚ 요 9:18-19 /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던 것과 또 그 부모의 아들인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그 부모를 불러다가 '이 사람이 너희의 아들이냐?' 하고 묻는 것은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더욱이 본인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이미 설명했는데, 직접 목격하지 않은 부모에게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도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의 부모를 부른 이유는 사실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위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로 이 사람이 진짜 아들인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입 조심을 시키라는 것, 입을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떴다고 자꾸 떠들고 다니면 부모인 너들에게도 해가 미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 겁니다.
부모는 아침만 해도 아들이 다른 날과 똑같이 구걸하러 더듬으며 밖에 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에 들어오는 아들은 눈을 멀쩡히 뜨고 들어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입니까? 그때 이 부모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동시에 감동, 감격, 감사가 아니었겠습니까?
눈을 뜬 당사자는 분명히 청년이었는데, 이 사람 못지않은 아픔과 상처가 부모에게도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될 때까지 돌보고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당했겠습니까? 그들은 눈을 뜨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았을 때 펑펑 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렀다' 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들도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으로 눈을 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반응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부모를 불러서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 요 9:20-21 /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왜 그 질문을 하겠습니까? 그 의도를 이 부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우리는 모르겠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했다가는 유대 사람들에게 출교처분을 받게 됩니다.
❚ 요 9:22-23 /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옛날에는 자급자족의 시대라 마을에서부터 쫓겨나면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중요한 것은 어떤 일어난 사건 자체보다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두려움으로 해석을 하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부모도 고난을 당할 것이 겁났습니다. 알고 있지만 아는 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분명히 아들도 같이 있었는데 아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하지만 부모는 위협 앞에 비겁한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비겁한 믿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운데, 날마다 승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 9:35-41,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48) (0) | 2025.03.27 |
---|---|
예수님을 만난 소경, 요 9:24-34,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47) (0) | 2025.03.27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5-51, 사순절 설교문 (0) | 2025.03.26 |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행 8:9-24, 사도행전 시리즈 설교(36) (0) | 2025.03.25 |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요 13:12~15, 남선교회 헌신 예배 설교문 (0)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