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 (spiritual) enlightenment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어떤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고 고귀하여 찬양할 만한 의식 상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 건 열반에 수반되는 것들이다. 깨달음은 오로지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이다. ‘열반의 환희’보다 ‘열반이 어떤 구성 요소로 만들어져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 중요하다. 인간의 지적 영역을 무한대로 확대해 존재의 비밀을 모두 알아차렸을 때의 전지적(全知的) 자각(自覺), 이것이 곧 깨달음이다. 따라서 당신이 깨닫고자 한다면 당신이 열반 속에 숨어 이성을 마취시키면 안 된다. 당신은 쉼 없이 생각을 일으켜 실존(實存)의 코드를 풀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열반의 환희와 실존의 깨달음을 잠시 맛보고는 이것들마저 훌훌 털어버리고 평범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깨달음이니까!!!!!!!!!!
깨달음을 얻은 내가, 깨달음을 얻은 현자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며 삶을 깨워나가는 별저(別邸)를 갖고 싶다. 세계 곳곳에...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스트레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잉 생산은 분노, 두려움, 질투, 증오와 같은 감정을 일으키고, 공격, 낙담, 걱정, 불안 등의 느낌을 유발하며, 통증, 고통, 슬픔, 절망, 우울 등의 경험을 야기한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에 사로잡혀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과연 모든 상황이 어둡고 어려워서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스트레스를 예상하며 살거나 기억을 통해 스트레스를 다시 경험할 때 보정적인 생각과 느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대부분 강력한 스트레스 호르몬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던 거다.
스트레스 반응이 커질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세 가지에 집중한다.
▶ 몸(반드시 돌보아야 한다.)
▶ 환경(이 위협을 피해 어디로 달아날 것인가?)
▶ 시간(이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가?)
생존 모드가 촉발하는 스트레스 반응과 호르몬은 우리로 하여금 몸, 환경, 시간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로 한정 짓게 되며, 점점 덜 영적이고 덜 의식적이 되어간다. 즉 우리는 물질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외부 환경 속에 있는 것들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누군가(somebody)’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진짜 나의 모습은 몸, 환경, 시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양자장의 지성과 연결된 하나의 의식(consciousness)이다.
내가 ‘누군가(somebody)’가 되어 생존 모드로 살아가면 진정한 나의 모습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점점 우주적 지성의 장에서 떨어져 나오며 분리감을 느끼게 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충격을 받으며 살수록 더 많은 화학물질이 분비되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것이라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다.
그러나...
'창조의 비밀(THINKING AND CREATING)' 의 내용을 통해 전해진 온 우주적 메시지...
나는 먼저, '내 존재'의 비밀이 감추어진 모든 신비의 문을 열어젖힐 열쇠를 그대에게 준다.
이 열쇠는, 그대가 일단 그 사용법을 알기만 한다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과 모든 지혜의 문을 열어주리라.
그렇다, 그것은 '하늘 왕국'의 문을 열어 줄 것이고,
그러면 그대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나'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열쇠는 곧 이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신이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을 온전히 깨달을 때, 그 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신과 나는 분리되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안에 신이 있고 신은 거대한 힘이다.
내 안에 신의 마음, 신성한 마음이 있고 이것은 모든 마음의 근원이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고 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책이다. 이 책은 심리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종교적 경험을 탐구한 고전적 작품으로, 제임스가 1901년과 1902년에 에든버러 대학에서 진행한 기포드 강연을 토대로 쓰여졌으며, 개인의 신비주의적 경험과 종교적 감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전통을 넘어서는 종교적 경험의 보편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482p까지 읽다가, 내가 알아두고 싶은 내용을 기록해본다.
요즘에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시시한 신비주의자라도, 신비적 순간의 존재를 완전히 특별한 성질의 의식 상태로서, 그리고 그 순간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심층적 인상을 불러내는 의식 상태로서 확신한다.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인 버크 박사는 이러한 현상들의 좀 더 뚜렷한 특징을 우주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버크 박사는 “그것의 보다 정확한 예들 속에서 우주적 의식이란 단순히 우리에게 친숙한 자아의식적 마음의 확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자아의식이 한 고등동물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기능과도 구별되듯이, 그 의식 상태는 보통의 사람이 소유한 어떠한 것과도 구별되는 한 가지 기능이 첨부된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적 의식의 중요한 특징은 우주의 질서와 삶에 대한, 우주에 대한 의식이다. 그 우주의 의식과 더불어 개인을 새로운 존재의 지평에 외롭게 세워두는, 즉 그를 거의 새로운 종(種)의 한 일원으로 만드는 지적 계발이 생기게 된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고양의 상태, 표현 불가능할 정도로 의기양양하고 기쁜 느낌, 그리고 강화된 지성적 힘보다 더 현저히 눈에 띄는 도덕적 감각 등이 주어진다. 이런 것들과 함께 이른바 영혼 불멸성의 느낌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이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가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는 영원한 생명의 의식이다.
다음은 버크박사에게 일어난 우주적 의식의 경험담이다.
“나는 한 대도시에서 두 친구와 함께 시와 철학에 관하여 토론하며 저녁을 보냈다. 우리는 한밤중에 헤어졌다. 나는 오랜 시간 이륜마차를 타고서 하숙집에 도착하였다. 독서와 토론으로 인하여 상기된 생각들, 영상들 그리고 감정들의 영향 속에 깊숙이 빠져 있는 나의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조용하고 거의 수동적인 즐거움의 상태에 있었는데, 실제로 그것은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말하자면 생각들, 영상들 그리고 감정들이 나의 마음을 관통하여 그것들 스스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그런 상태였다. 갑자기 어떠한 준비 단계도 없이 나는 화염과 같은 색깔의 구름으로 뒤덮인 나 지신을 발견하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대도시 어딘가에서 큰 화재가 났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 불은 내 자신 속에서 났음을 알았다. 얼마 후 거대한 기쁨, 곧 환희의 감정이 내게 엄습해왔으며, 형언할 수 없는 지적 깨달음이 주어졌다.
나는 단순히 믿게 되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가 죽음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살아 있는 실재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때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불멸이라는 것, 우주질서는 한 점의 의구심도 없이 모든 것들이 개체와 전체의 善을 위하여 서로 협력한다는 것, 모든 세상의 근본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개체와 전체의 행복이란 결국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임을 보았다. 그 광경을 몇 초간 지속되다가 사라졌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가르쳐주었던 것에 대한 실제 감각은 그 이후 25년 동안 남아 있었다.“
이제 종교적 삶의 요소로 신비주의적 의식을 조직적으로 육성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힌두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그리스도교도들은 모두 신비적 의식을 조직적으로 육성해왔다.
인도에서는 태곳적부터 요가라는 이름의 신비적 통찰을 얻기 위한 훈련이 알려져 왔다. 요가는 개인과 신의 실험적 결합을 의도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훈련에 기초하고 있어서, 그것을 가르치는 조직에 따라 식사조절, 자세, 호흡법, 지적 집중법 그리고 도덕적 훈련이 조금씩 다르다. 요가 수도자 또는 문하생은 자신의 저급한 본성의 미몽(迷夢)을 극복하고, 삼매(三昧〔산 samādhi〕)라는 상태에 입문하게 되어, “본능이나 이성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직접 대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운다.
정신 그 자체가 이성을 넘어선 존재의 고차적 상태, 즉 초의식적 상태를 소유한다는 것과 정신이 고차적 상태에 다다르면, 그때 이성을 초월한 이러한 지식이 온다는 것을...... 요가의 모든 각기 다른 단계들은 초의식적 상태, 또는 삼매로 우리를 과학적으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바로 무의식적 작업이 의식 아래에 놓임으로써 의식 위에 또 다른 작업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 '나'라는 느낌은 없고 욕망도 없이, 안절부절함도 없이, 목적 없이 단지 무형의 정신만이 활동한다. 그때 진리는 그것의 충만한 광채로 빛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불멸하고 전능하며, 유한성과 선악의 대비로 부터 해방되어 있고,아트만 또는 우주적 영혼과 동일한 상태인 삼매가 우리 전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베단타주의자들(Vedantists)은 누구나 사전 훈련 없이 간헐적으로 초의식 속으로 우연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의 순수성에 대한 시험은 종교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시험과 같이 경험적이다. 즉 그것의 열매들은 삶에 유익해야만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삼매로부터 벗어나면, 그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갖게 되며, 현자, 선지자, 성인이 되며, 그의 전 인격이 변화되며, 그의 삶이 변화되고 밝아졌음'을 확인시켜 준다.
유럽의 어떤 증인은 신중히 요가의 결과를, 인위적으로 우리도 생산해낼 수 있는 최면이나 꿈 같은 상태의 결과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가는 그것의 참된 제자들을 선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 요가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몸을 지배하여 어떤 '인물'이 된다. 충동과 성벽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의지를 선의 이상에 고정시킴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인격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당 또는 영매라고 상상하는 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힌두교도들뿐만 아니라 불교도들도 '삼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좀더 높은 명상 상태는 '선정'(禪定)이라는 특별한 단어로 말하기도 한다. 선정 속에서의 깨달음에는 네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정신을 한 점에 집중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통찰력이나 판단력이 아니라 욕망을 제거한다. 즉 이것은 아직도 지적 단계이다.
두 번째는 지적 기능이 사라지고 합일의 만족스런 감각이 남아 있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만족감이 떠나가고 무관심이 기억과 자아의식과 함께 시작되는 단계이다.
네 번째는 무관심, 기억 그리고 자아의식 모두가 완벽해지는 단계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기억'과 '자아의식'이 의미하는 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저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유사한 기능일 수가 없다.]
명상의 보다 고차적 단계들이 언굽된다, 그 단계에서는 무(無, nothingness)가 존재하므로 그곳에서 중재자가 "절대적으로 무가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멈춘다. 그때 그가 "거기엔 관념도, 무관념도 없다"라고 말하는 또 다른 영역에 다다른 다음 그는 다시 멈춘다. 그리고 나서 "관념과 인식의 끝에 도달한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멈추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이것은 아직 열반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현세가 제공해주는 열반에 근접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수피 종파와 다양한 탁발승 집단들이 신비적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다. 수피들은 오래 전부터 페르시아에 존재해 왔다. 그들의 다신교는 아랍 정신의 열광적이고 경색된 일신교와는 모순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수피 종파가 힌두교의 영향을 이슬람교 안에 심어 온 것이 틀림없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수피 종파의 비밀에 대해서는 단지 그들의 입문시기 때만 공개되기 때문에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황홀경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신비적 진리는 황홀경의 경험자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 윌리엄 제임스가 어떤 책으로부터 신의 현존 속에서 느끼는 행복에 대한 신비적 표현을 발췌한 것을 기록해 본다.
"예수는 내 마음에 거처를 취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은 거주나 교제라기보다는 일종의 합일이다.
오, 새롭고 축복 받은 삶! 매일 더욱 빛나는 삶. ...... 내 앞에 있는 벽은 몇 분 전에는 어두웠지만 태양이 그 위에 빛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빛난다. 햇살이 드리워지는 곳마다 그 햇살은 영광의 큰 불을 붙인다. 가장 작은 유리 조각이 반짝거리고 모래알은 각각 불을 발산한다.
그럴지라도 내 마음에는 훌륭한 승리의 노래가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날들을 서로서로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청명한 맑은 날씨였고 오늘은 흐렸다. 밤에는 이상한 꿈으로 가득 찼고, 눈을 뜨고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자마자 언제나 내 앞에는 똑같은 모습, 즉 언제나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운 똑같은 존재가 있었다. ...... 이전의 날들은 주님이 내 마음 속에 없었기 때문에 따분하였다. 나는 모든 형태의 슬픈 인상이 엄습했기 때문에 깨어나곤 하였고, 나의 길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나와 함께 있다.
사물을 뒤덮는 구름도 내가 그와 함께 소통하는 데 어떤 방해물도 되지 못한다. 나는 그의 손의 밀착을 느낀다. 나는 평온한 기쁨으로 가득 채운 그 밖의 다른 것을 느낀다. 내가 감히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한 진실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단순히 나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날개를 펴고 나를 밤에 남겨두는 현혹적 환영이 아니라 내 안에 영원히 거주한다. 성령은 나는 데리고 갈 때에만 떠난다. 그것 이사이다. 그는 나 지신 이외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나와 함께 있다. 이것은 병렬이 아니라 관통, 나의 본성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나의 존재의 새로운 양태이다."
힌두교에서, 신플라톤주의에서, 수피즘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휘트먼주의에서 우리는 똑같은 것으로 상기되는 어조를 발견한다. 그래서 신비적 언사들에는 영원한 일치가 있다. 그 영원한 일치는 마땅히 비평가의 비평을 정지시키고 생각하게 만들며, 그리고 회자되어 왔듯이 신비적인 고전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날이나 특정한 장소에서 생겨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끊임없이 신과 인간의 합일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이야기는 언어를 앞서가며, 그래서 그들은 쇠퇴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다!"라고 우파니샤드는 말하며, 베단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것의 한 부분이나 양태가 아니라, 그것 자체, 즉 세상의 절대적 영." "그러므로 오 가우타마여, 맑은 물 속으로 퍼부어진 맑은 물이 똑같은 물로 남아 있듯이 진리를 알고 있는 사상가의 자아도 그렇다. 어느 누구도 물 속에 있는 물, 불 속에 있는 불, 에테르 속에 있는 에테르를 구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자아 안으로 들어간 마음을 자아와 구별하지 못한다."
수피인 굴샨 라즈(Gulshan-Raz)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더 이상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모두 거기에 일자(一者)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안다. 그의 신적 권위 안에서는 나도 너도 우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일자 안에서는 구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소멸된 모든 존재는 '나는 신이다'라는 음성과 메아리가 자기 밖에서 울려퍼지는 것을 듣는다. 그는 현존하는 영원한 길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제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신의 환상 속에서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아니고, 선험적이며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보고 있는 자는 두 개의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들을 구변하거나 상상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기를 멈추고 변하여, 그 자신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유지하지 않는다. 신 안에 흡수되면, 그는 단지 한 원의 중심이 다른 중심과 일치하는 것처럼, 그와 함께 하나를 이룬다."
주조는 이렇게 기술한다. "여기서 그 영혼은 죽지만, 신의 불가사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그리고 영광스럽고 눈부신 모호함과 적나라하고 단순한 일치의 고요 속에서 그 영혼은 상실된다. 최고의 축복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이러한 무형이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는 "나는 신만큼이나 크다. 신은 나만큼이나 작다. 그는 나보다 클 수 없으며 나 또한 그분보다 작을 수 없다"라고 노래한다.
신비적 문학작품에서 우리는 '눈부신 어둠', '속삭이는 침묵', '풍요로운 사막'과 같은 자기모순적 구절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것들은 신비적 진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요소는 개념적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수많은 신비적 경전들은 실로 음악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다(Nada)의 소리인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다라나(Dhâranâ)의 본질을 배워야 한다. 그 자신에게 그의 형상이 마치 그가 꿈에서 보는 모든 형상들을 깨우면서 보는 것같이 비현실적으로 비쳐졌을 때, 그가 많은 것을 듣는 것을 멈췄을 때, 그는 그 일자, 즉 외부의 소리를 죽이는 내면의 소리를 분별하게 된다. 그런 후에 영헌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것이고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침묵의 소리는 내면의 귀에다 말할 것이다. ...... 그리고 이제 너의 자아는 자아 안에서, 너 자신은 너 자신 안에서 사라지며, 너를 처음 방출시켰던 그 자아와 연합한다. 보라! 너는 빛이 되었다. 너는 소리가 되었다. 너는 너의 주인이고 너의 신이다. 너는 네가 찾고 있는 대상인 너 자신이 된다. 변화와 죄악으로부터 멋어나 영원을 반향시키는 소멸되지 않는 목소리, 즉 일곱 가지가 하나로 들리는 소리, 즉 침묵의 소리. 그것이 옴이다(Om tat Sat).
......
가능한 한 광범위한 방법으로 종교적 삶의 특징들을 요약해보면, 다음 몇 가지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1.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것의 주된 의미를 파생시킨 보다 영적인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
2. 고차적 우주와 통합하거나 조화롭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목표라는 것.
3. 기도 또는 그것의 영 - 신 또는 '법칙' - 과 내적 교감을 이룩하는 것은 실제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심리학적이든 물질적이든 현상세계에서 영적 에너지가 유입되어 효과를 나타내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
물론 종교는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4. 삶에 선물처럼 그 자체를 첨가시키고 서정적 황홀이나 진지함과 영웅적 자질에 호소하는 형태를 띤 새로운 열정.
5. 안전에 대한 확신과 평화의 기질,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감정의 우세.
다투는 신들과 다양한 종교들의 형식들은 사실 서로 상극이지만, 종교들 모두가 충족할 통일된 구원책이 있다. 그것은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어떤 불안감.
2. 그것의 해소책.
첫째, 불안감은 가장 단순한 말로 줄여보면,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주위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느낌이다.
들째, 해소책은 고차적 힘과 적절히 연계시킴으로써 우리가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구원 받는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잘못을 괴로워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개인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고차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보다 고차적인 것과 가급적 교통할 것이다. 잘못된 부분과 더불어, 설사 그것이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더 나은 부분이 있다. 그가 자신의 실재적 존재와 일치시키려는 부분은 결코 이 단계에서는 분명치 않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해소 또는 구원의 단계)에 도달할 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갑자기, 다른 이들에게는 점진적으로 온다. 반면에 또 다른 이들은 실질적으로 평생 동한 그것을 즐긴다.) 그는 자신의 실재적 존재를 그 자신의 근원적인 고차적 부분과 동일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그는 이 고차적 부분이 동일한 성질의 보다 고차적 부분과 인접하며 접속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 동일한 성질의 고차적 부분은 그의 밖에 있는 우주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그는 그것을 교감할 수 있고, 그것은 모든 그의 하위존재가 파편으로 부서질 때 어느 정도 거기에 편승하여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 모든 현상들은 이러한 단순한 일반용어로도 정확하게 묘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적 어려움은 이러하다. 1. 사람의 고차적 부분의 '실재를 깨닫는' 것, 2. 자신의 자아와 실재를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 3. 그것을 여타 이상적 존재 모두와 동일시하는 것.) 그것들은 분리된 자아와의 투쟁을 허용한다. 그것들은 인격의 중심 변동 및 하위자아의 항복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도움을 주는 힘의 외적 현상을 표현해주며 그것과의 일체감까지도 설명한다. 신비적 활동이 정점에 이를 때, 우리는 의식이 과도함과 동시에 그 자아와 동일시되는 한 존재의 감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신이 되기에 충분히 위대한 감각, 내가 되기에 충분한 내적 감각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안전과 기쁨의 감정을 충분히 증거한다.
......
우리가 우리의 초한계의식(transmarginal consciousness)을 아주 끝까지 따라가보면, 그리고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물을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여기에 신비주의와 회심, 황홀경과 베단타주의와 선험적 관념론이 일원론적 해석을 불러와 유한의 자아가 절대적 자아와 재결합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세상의 영혼과 하나였고, 신과 하나됨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모든 다양한 종교들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환상, 환청, 황홀경 그리고 다른 계시들을 들고 나와 자신의 특정한 신앙을 입주하려고 한다.
의식적인 인간은 구원 경험이 일어나는 보다 광대한 자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런 경험이 있는 한 문자 그대고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인 종교적 경험의 긍정적 내용을 갖게 된다.
우리 존재의 추가적 경계는 감각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그것을 신비한 영역 또는 초자연적 영역이라고 부르자.
우리의 이상적 충동들이 이 영역에 뿌리를 두는 한(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그 영역에 연원을 둔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들이 우리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시적 세계에 속할 때보다 더 친근한 감각으로 거기에 소속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친근한 감각으로 우리의 이상이 속한 세계이면 어디에나 소속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역과 교통할 때 새 사람으로 변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의 유한한 인격성에 변화가 이루어지고, 행위의 결과는 우리의 재생적 변화가 일어난 다음 자연계에서도 계속된다.
그러나 또 다른 실재 속에서 효과를 미치는 것은 실재 그 자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이지 않고 신비에 싸인 세계를 비실재적이라고 부를 철학적 이유가 없다.
사실상 최후의 종교철학은 지금까지 다원론의 가설을 기꺼이 고려한 것보다 더 진지하게 그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천적 삶은 어쨌든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가능성을 갖고서 기꺼이 살아간다는 사실보다 더 특징적인 사실은 없다. 가능성의 존재는 삶의 바탕이 체념인 것과 삶의 바탕이 희망인 것 사이에 차별을 한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어가면서,
1. 개인적 경험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개인이 겪는 다양한 종교적 경험의 심리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윌리엄 제임스의 접근법이 종교와 심리학의 교차 영역을 탐구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 이로써 종교적 경험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 심리의 역할을 고려하게 되었다.
3. 종교적 경험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보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이 인간에게 공통적이며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문화권과 전통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경험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배울 수 있었다.
4.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통찰을 볼 수 있었다. 종교적 진리가 하나의 권위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제임스의 관점은 종교 다원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5.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이해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강조했다. 이 책을 통해 과학과 신앙 사이의 관계를 더 폭넓게 탐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사이트들은 나의 신념체계를 고찰하고, 다른 문화 및 신념 체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심리학과 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랄까...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중요한 사상적 및 심리학적 저작으로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1.사상적 영향
◾프래그마티즘의 확산: 제임스의 프래그마티즘 및 실용주의 철학이 현대 사회에서 결정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2. 종교 문화적 영향
◾종교와 과학의 양립: 제임스의 저작은 종교와 과학이 양립할 수 있다는 관점을 보다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종교다원주의 및 문화다원주의: 다양한 종교적 경험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태도를 견고하게 만든 바탕이 되었다.
3. 사회 정치적 영향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가치: 제임스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적 가치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4. 심리학적 영향
◾인간 심리의 이해: 제임스의 작업은 종교적 경험이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영향들은 현대 사회 형성에 기여했으며, 개인의 신앙과 자기 이해, 그리고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존중과 포용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제임스의 저작은 지속적으로 다른 학자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참조되고 있으며, 현대의 종교적 다양성과 사상적 유연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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