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에 대한 종교철학적, 조직신학적 해석>
♦ 천국은 존재하는가?
내세의 개념들
(1) 기억에 의한 불사 : 죽은 사람들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계속 살게 된다는 입장.(예술 작품, 정치, 사회적 공헌 등)
(2) 영생은 죽음을 넘어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가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3) 죽음 후에 존재의 순환에서 자유로워진 자들이 불이(不二)나 일자(一者)와의 결합을 경험한다는 입장. (힌두교, 대승불교) 불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자아상이 착각이라는 것을 죽음 이후에 깨닫게 될 때, 인간은 해방되어 일자와 결합하게 된다.
(4) 내세의 인격적 삶 : 각 사람은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살아가거나, 죽은 후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입장. (기독교) 죽음 이후의 사람은 죽기 전의 사람과 동일해야 하며, 스스로 자기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2. 영혼의 존재를 위한 논변들
몸 전체 또는 두뇌와 같은 신체 기관들의 지속성만으로는 사람의 지속성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개인의 기억, 개념적 범주와 의식 상태는 자아동일성의 상실 없이도 변경되거나 상실될 수 있다. 또한 기억에 관한 진술들이 들릴 때도 있다.
(1) 인간의 자의식, 믿음, 욕구, 의도, 느낌 등으로 이루어진 심적 경험들의 개별화된 집합을 지닌 의식적 존재다.
(2)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결정론적인 인과 연쇄의 단순한 물리적 존재여서는 안 된다.
(3) 어떤 것이 지향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을 넘어서 있는 무언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지향성을 지닌 심적 상태들은 물리적이지 않다.
(4) 텔레파시, 투시력, 염력 등에 관한 내용이 보고되고 있다.
* 죽음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물리적으로 재창조한 후, 우리가 죽기 전에 지녔던 모든 물리적, 심리적 특징들이 담긴 프로그램을 주입할 수 있을 것이다.
* 시간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아도 속성의 연속성이 보장된다.
3. 내세에 다한 선험적(철학적) 논변들
(1) 플라톤(B.C.428-347) : 영혼은 부분으로 나눠지지 않으므로 파괴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멸하여, 불멸하므로 불사적이다.
(2)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 우리는 행복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는데, 이 행복은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운명은 불안정하고 우리의 몸과 의지는 약하며 지식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헛되이 만들었을 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이 목적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이후에도 계속 살아야 한다.
(3) 임마누엘 칸트(1724- 1804) : 도덕률은 우리에게 최고선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라고 말하지만, 최고선은 이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도덕률에 따라 살아야 할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시점까지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세의 삶은 도덕률의 요청이다.
4. 내세에 대한 경험적 논변들
(1)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
병실에서 자기가 임종에 가까웠을 때, 간병인들이 자기를 보고 임종을 맞고 있다, 또는 죽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그들은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자기 몸보다 높은 위치에서 병실 주변을 보게 되고, 자기 몸을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의료진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었는데, 이 몸은 이전의 물리적인 신체와 같은 형태의 영적인 몸이거나 무정형적인 구름으로 묘사되었고, 또한 원래의 몸 주위에 있던 물리적인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들은 터널과 같은 어두운 곳을 통과해서 지금까지 지내던 세상과는 다른 곳에 이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가 알았던 사람도 만나고, 낯선 사람들도 만났는데, 그들은 물리적인 몸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알아볼 수 있었고, 그들과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맑게 빛나는 어떤 존재자를 만났는데, 이 존재자는 사랑과 동정심이 넘쳤고, 그들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해내고 즉석 비디오를 보듯이 평가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평화롭고 행복한 경험을 계속 즐기면서 머물고 싶었지만, 그들은 자기의 물리적인 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거나, 그 존재가가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비교적 일관된 진술은 스트레스나 마약으로 인해 생겨난 증세와는 상당히 다르다. 마약을 먹은 사람에 비해 주변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때로는 그 방에서는 볼 수 없는 옆방의 내용을 정확하게 진술하기도 했다. 내세를 진술한 사람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받은 교육과 자신들이 경험한 내용이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 종교적 훈련에 의한 경험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2) 죽은 사람들의 환영이 나타나는 사건이나 영매를 통해서 그들과 소통하는 경우
이런 경우가 보고되고 있는데, 이것들이 맞다면,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생존하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예“ 즉은 후 4년 뒤에 아들에게 나타나 유언장의 위치를 알려준 사건,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타나는 일 등)
(3)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경우
고전 15:16-20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5. 하나님 나라(종말론)에 대한 역사적 이해
* 바르트 : ”전체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몰트만 : ”종말론은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 자체의 매개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의 한 부분일 수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 전망은 모든 기독교의 선포와 모든 기독교의 실존과 전체 교회의 특성이다.“
(1) 종말론의 성서적 근원
구약에서는 야훼의 날, 심판의 날, 메시아의 도래,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 등으로 종말론적 구원이 선포되었다. 이스라엘 인들의 종말에 대한 비전은 이 세계의 공간과 시간에 속한 것이었고, 예언자들은 지상에 낙원이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이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포로기를 지나며,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으로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매우 가까운 미래에 임할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의 메시지가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을 말하는지, 현재 지향적인 종말론을 말하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 16 :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부활절과 오순절 후 초기교회는 예수가 메시아, 즉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오는 분으로 확신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를 고대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1:4, 8) 분으로 묘사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따라 그들 가운데 실제로 현존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가 곧 재림할 것이며, 역사는 곧 파국적인 종말을 맞을 것으로 확신했다.
(2) 교부 시대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임박한 종말론적 의식은 2-3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기한으로 지연된 종말론에 적응해야 했으며, 점차 교회론과 종말론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 세계의 종말 등은 여전히 긍정되었지만, 이제 먼 미래의 일로 물러났다.
교부 시대의 종말론은 헬레니즘 철학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우주는 영원하고,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해야 한다. 우주는 순환적이며,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교부들은 이 사상과 반대로 창조론과 종말론의 틀을 만들었으며,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고, 종말에는 만물의 시작을 능가하는 진보, 성취, 성숙, 새로움이 드러나는 영광스런 완성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대 철학자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보며, 몸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교부들은 바울의 주장처럼(너의 몸은 성령의 전), 몸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몸과 함께 하는 구원을 희망했다.
(3) 스콜라주의의 영향
스콜라주의는 교부철학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 했던 중세 철학의 흐름을 말한다. 스콜라적 체계에 있어서 죽음은 한 인간의 완전한 소멸로 여겨지지 않았다. 죽으면 몸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혼은 지체의 온전한 능력으로 존재한다. 스콜라주의 사상가들은 몸이 부활해 영혼과 재결합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몸은 부활 전의 몸과 동일한 몸이지만 영적인 속성들을 부여 받아, 영원히 지속되며, 완전함을 누릴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뒤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 개신교는 연옥설과 림보(limbo,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 아이의 영혼과 그리스도 초림 이전에 죽은 족장들의 영혼을 위해 마련된 특별 장소)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콜라주의 종말론의 기저에는 현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비관주의가 있다. 이 세계는 영화로운 완성을 향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멸될 것으로 본다.
(4) 계몽주의의 영향
17세기부터 기독교 종말론은 합리주의, 자연주의, 관념주의, 실증주의로 불리는 계몽주의 사상들과 혼합되기 시작했다. 뉴턴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영원한 법칙에 따라 우주를 형성하는 합리적인 신적 존재로 묘사했다. 계몽주의 세계관은 성서적인 역사의 하나님을 자연의 법칙으로 대체시켰으며, 기독교의 종말론적 비전은 조화로운 사회질서로 변형시켰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인간에 의해 실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 이 세계의 차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하기 시작했고, 종말론적인 평화와 의의 나라를 이 지상에서의 평등과 정의의 사회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19세기 개신교 신학은 진보의 신학을 그 자신의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상 속으로 통합시켰다.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활동의 결과로,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도덕적 진보를 통해 실현될 새로운 사회질서를 표상했다.
(5) 현대 신학적 관점
계몽주의 시대를 지니며 종말론은 점차 신학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는데, 20세기에 들어 종말론은 다시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슈바이처는 복음서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종말론적인 전제의 빛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폴 틸리히는 역사를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독특하고 반복 불가능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도 미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으로 보았다. ”새로운 존재“는 수직적인 방향보다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출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틸리히는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평화와 사랑과 의의 신적 통치의 실현을 희망한다고 본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가져 오시는 종말론적 미래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운명을 결정하는 미래의 능력으로 이해된다. 몰트만은 미래를 ”새로운 초월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미래는 현재에서 발전되는 세계의 진보 과정이 아니라, 오직 현재 안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6. 부활과 영생
* 기독교의 영생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영생에 대한 용어는 상징과 이미지가 풍성한 언어다. 미래의 소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죽음 이후의 생명, 부활한 육체, 새 하늘과 새 땅 등은 주로 비유적 언어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마틴 루터 :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듯, 우리도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종말론적 상징은 이원론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차원에서 성취와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이 풍부한 상징은 인간이 창조적 활동을 촉발시킨다. 기독교적 소망은 인간의 상상력과 행동을 마비시키기보다는 더 활기 있게 만들어, 도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더욱 풍성히 경험하게 할 것이다.
7. 영생을 의미하는 기독교 상징들
(1) 그리스도의 재림(παρουσια)
파루시아는 ‘도착’, ‘도래’를 의미하며, 부활․승천한 예수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소망은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소망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말씀과 성례 속에 지속적으로 임하시는 분에 대한 소망이다. 세상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도래와 그의 완성된 통치를 소망하면서도, 그가 오시는 정확한 날짜와 방식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것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막 13:32-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2) 죽은 자들의 부활과 몸의 부활
부활의 상징은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한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몸의 부활은 영혼불멸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은 인ㄴ간의 생명에는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요소가 있고, 이 요소는 부패하고 소멸하는 육체와 분리될 수 있으며, 이 본질적 요소는 육체 안에 임시적으로 거주함을 가정한다.)
영혼불멸의 교리가 함축하는 개인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와는 대조적ㅇ,로, 부활에 대한 소망은 단순히 나 자신이나 나의 가족, 그리고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미래(세 하늘과 새 땅)를 소망한다.
(3)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보복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심판을 너무 자유롭게 해석해서 무력화 시키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심판자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분이시다. 따라서 심판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즉 남을 포괄하는 사랑이다(마 7장, 25장). 심판의 기준을 우리 멋대로 판단해서 남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4)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천국)과 영원한 형벌(지옥)
성경에서는 영원과 생명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비중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천국)에 대한 설명은 종종 언급되지만, 멸망과 지옥에 대한 언급은 경고로써 기증한다.
영생의 삶은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경험하는 화해를 상당히 초과하는 만물의 화해(골 1:15-20)가 될 것이다.
조나단 에즈워드 : ”천국 그곳에서는 사랑의 샘인 영원한 삼위일체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어서 여기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은 어떤 장애물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영광스로윤 하나님이 충만한 영광 중에 드러나며, 사랑의 광선을 뿜으며 빛난다. 사랑의 샘은 애정과 환희의 시내와 강들도 흘러 넘쳐서, 모두가 마시고 헤엄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에 흘러 넘쳐 사랑의 홍수로 범람하는 것과 같다.“
천국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성취된 화해와 삶의 기쁨으로 해석한다면, 이 천국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삶 모두의 완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영생은 자아의 존재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도, 개인주의를 무한히 영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영원한 복된 사회 안에 끊임없이 참여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와 분리되어 이웃과 소외된 채로 스스로 혼자이기를 원하는 곳이다. 지옥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자의적인 처벌, 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보복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8. 보편 구원은 가능할까?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에는 구원과 멸망을 동시에 강조하는 구절이 있는 반면(마 24:36-42, 25:31-46), 만물의 구원을 암시하는 구절도 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지를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세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하는 일이다.
계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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