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주일 예배 설교문, 벧전 2:21, 부르심

by tat tvam asi 2024. 5. 24.
반응형

 

 

 

부르심

 

벧전 2:21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홍수 심판을 준비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응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응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부 시몬을 부르셨고, 시몬은 응답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나를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있는 나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오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도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강원도 산골 산리초등학교에 홍연이라는 열일곱 살 늦깎이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는 학생입니다. 나이는 17살이지만, 아직 홍연은 철없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정신없이 놀다가, 빨래 삶는 것을 잘 보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잊고 빨래를 태워버리기까지 하는 천방지축 말괄량이입니다. 집에 돌아와 태운 빨래를 보고 야단치는 엄마를 피해 도망 가다가 산리초등학교에 부임하는 스물한 살 강수하 선생님과 만나게 됩니다. 강선생은 자기반 학생인 줄도 모르고 홍연에게 길을 묻습니다. “아가씨! 여기 초등학교가 어디 있어요?

 

홍연은 자기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부끄러운 표정으로 초등학교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선생님이 간 뒤에 혼자 남은 홍연은 굵은 남자 목소리로 선생님의 흉내를 냅니다. “아가쉬!” “아가쉬!” 이 영화는 그 이후로 홍연이가 선생님을 좋아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과정을 그린 마음 따뜻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홍연이에게 선생님이 불러준 “아가씨!”라는 그 한마디가 동생들과 싸우기만 하고 철딱서니가 없던 그를 아가씨로 변하게 합니다. 자신이 아가씨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동생들과 다투지도 않고, 고무줄놀이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홍연이를 아가씨로 부른 한마디가 그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뜨게 했습니다.

영상 -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일부 장면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선생님이 늦깎이 초등학생 열일곱 살 홍연이를 ‘아가씨’라고 부름으로 그가 드디어 자신이 누구인지 눈을 뜨게 되어 성숙한 아가씨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시인 김춘수의 ‘꽃’ 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한 줌 흙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던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어딘지,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우리들을 불러 하나의 의미가 되고, 소중한 가치가 되고, 영원한 삶을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로마의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자기가 3년 동안 애써서 개척한 에베소 교인들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알고 눈물로 편지를 써내려 갑니다. 그런데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3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 하나님은 나를 하늘의 신령한 복덩어리로 세우기 원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기가 막힌 복인가를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생의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나를 하나님의 친구로 세우시기 원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1:4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친구로 나를 세우시기 위하여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3. 나를 예수님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원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1:5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허물이 많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존귀한 자로 여기시기에 그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고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4.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기 원하음을 알게 됩니다.  

 

 1:6 /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은 ① 하늘의 신령한 복덩이로, ②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③ 예수님만큼 존귀한 자로 만들기 원하시며, ④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어딜 가기 전에 행로와 행선지를 먼저 정확히 알고 떠납니다.

무턱대고 비행기에 올라타고 비행하는 조종사는 없습니다.

비행하다 보면 기류에 밀리 기도하고, 폭풍우를 우회하기도 하지만, 조종사들은 항로를 계속 꾸준히 유지하면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정표가 없는 하늘위에서 어떻게 비행항로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제일 먼저는 비행기 안에 달려 있는 계기판들을 모니터하겠지요. 그리고 지상의 관제탑과 교신을 하면서, 지금 비행기의 위치가 어디인가 체크 하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참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도, 가정도 방향을 잃어버리고 흔들릴 때가 많이 있잖습니까?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이 있잖습니까?

이때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까?

비행기가 관제탑과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 받듯이,

우리도 하늘 관제탑의 피드백을 주고 받고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전투기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 보면 자주 '비행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여객기는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성이 적지만, 제트엔진 전투기의 경우  같은 고도에서 비행기가 선회 하면서 회전을 할 때는, 속력을 좀 내면 비행기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속력을 좀 늦추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가 비행 착각을 일으켜 어느 쪽이 바다이며 어느 쪽이 하늘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을 때나, 비행기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지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감각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계기판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신앙의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 착각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생각이 분명히 다른데도 말씀보다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 착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계기판을 믿는 훈련을 하듯이, 우리 신앙인들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1.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 훈련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의 첫 마디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걱정하지마세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vs “안되요. 틀렸어요.

 

어느 말이 우리에게 마음에 힘을 줍니까? 그럼으로 우리의 첫 마디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공하는 교회와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2. 더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잘 웃어야 합니다.

 

잘 웃는 사람들이 성공을 잘하고, 무너졌다가도 빨리 만회합니다. 오늘부터 웃어 보세요. 오늘부터 웃음을 선택하는 거에요. 우리가 심각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힘듭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좇기 보다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갑니다.

 

결국 믿음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기준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벧전 2:21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여기서 본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과 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사랑과 섬김의 길로 나아가면 반드시 새로운 살 길이 열린다, 우리에게 새 길이 열린다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자취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이 많이 온 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발자국이 있으면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길이 나옵니다. 결국 예수님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우리가 따라가면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믿음이란 더 높은 기준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결국 오늘 말씀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면 더 높은 기준을 선택해 나가자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8 /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죄란 내면적인 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 속에 온갖 탐심’이란 ‘내 마음 가운데 나타난 죄악’입니다.

마귀는 죄를 성도들의 마음속에 달라붙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주는 생각이 내 마음과 생각을 훑고 지나가면, 어느 순간에 내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불평만 나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이 망가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십자가를 보고 내려가십니다.

그 이유는 나를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날지라도, 선한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정결한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바란다” 말씀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고난을 당하여 모범을 보여 주심으로써,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고난의 모범을 따르는 자세가 무엇입니까? 

 

벧전 2:18 /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예수를 믿는 성도는 종의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대답은 예입니다. 어떤 명령에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입니다.  

그런데 "예"라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벧전 2:25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를 보호해 주는 감독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목자를 잃은 양처럼 방황했는데, 내가 예라고 순종하면 나아가길 시작하자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양이 되었다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나를 부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주님의 복된 자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