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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 존재 증명(종교철학 강의 내용)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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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13세기 활동했던 신학자)의 신 존재 논증

 

1. 운동으로부터의 논증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며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있을 것이다. 부동의 동자(Prime Mover)”가 바로 신이다.

 

2. 능동인으로부터의 논증

그 자체가 본래부터 능동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어떤 사물이 그 자체가 원인이 되려면, 자신보다 먼지 존재해야 되는데, 이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알려져 있는 모든 원인은 동시에 다른 원인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인들이 무한정 계속해서 소급될 수 없고, 결국 제1원인 (First Cause)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다.

 

3. 가능성과 필요성으로부터의 논증

관찰된 대상은 본질에 있어 우연적이다. 우연적이라 함은 대상이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의 존재는 그들이 존재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이다. 이러한 계열의 존재의 가능성은 그 이외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인 존재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필연적 존재가 바로 신이다.

 

4. 자연의 위계에서 관찰되는 사물의 단계에 근거하는 논증

우리는 어떤 사물은 다른 사물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교적인 등급은 필연적으로 판단의 규정과 일치하는 절대 기준을 시사한다. 선함, 아름다움, 완전함 등의 기준은 바로 신이다.

 

5.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질서와 조화에 근거하는 논증

세계의 모든 일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맞는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질서의 조화를 운명이나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는 한 지적 설계자가 있음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논증 가운데서 세 가지는 우주론적 논증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 내지 세계의 몇몇 경험된 속성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논증을 목적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목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일이 없는 자연적 물체들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요, 바로 그런 목적들은 우연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하여 어떤 방향으로 겨눠지고 있듯이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에 의하여 겨눠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적인 존재가 바로 신이다,

 

존재론적 논증

 

* 안셀무스(1033-1109)의 기도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신을 더 이상 위대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재가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 존재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위대한 존재는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마음속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실재하는 존재자는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위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 즉 실재하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는 없다.

그런데 45를 합치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 가우닐로(Gaunilo, 994-1083)의 반박

전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란 말을 들을 때, 낱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낱말이 가리키는 존재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자라는 정도만 알면 된다.

2. 모든 종류의 비실재적인 사물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섬보다 도 훌륭한 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요롭고 즐거움을 주는 섬을 생각한다면, 이 섬은 존 재해야 한다. 온갖 허구적인 것들의 존재를 부당하게 중명할 수 있게 된다.

안셀무스의 논변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해서만 적용 가능하다.

 

* 칸트(Kant, 1724-1804) : “‘있음은 분명 진짜 술어가 아니다. 즉 그것은 한 사물의 개념에 덧붙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물을 상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순수이성비판, A598)

존재의 상이한 종류(관념상의 존재, 실재하는 존재, 신화상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 하트숀(Charles Hartshorne, 1897-2000) : 안셀무스의 두 번째 논변에 관심을 가짐. 비록 존재 자체는 속성이 아니더라도 필연적 존재는 속성이므로, 임의의 두 대상 중 어느 하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우연적으로 존재한다면, 전자다 후자보다 더 위대하다. 만일 신의 존재가 우연적이라면, 그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연이거나 어떤 원인으로 인한 것이어서 신은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존재자로서의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논리적 필연성에 근거한 논증)

 

* 개념들에 근거해 실재를 논증할 수 있을까?

 

* 존재론적 논증은 그럴 듯하지만, 뭔가 의심스럽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우주론적 논증

 

이 논증은 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사실들을 끌어들이며(우연적 존재자들이 존재한다, 운동하는 무언가가 있다,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했다 등), 어떤 필연적인 존재자나 제1원인, 또는 인격적인 작인이 존재해야 그런 사실들이 설명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우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

이 우연적인 존재자는 원인을 갖거나 그것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갖는다.

그것의 존재 원인이나 설명은 그 우연적인 존재자 외의 어떤 것이다.

이 우연적인 것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해주는 것은 다른 우연적인 존재자들이거나, 아니면 필연적인 존재자를 포함해야 한다.

우연적인 존재자들만으로는 우연적인 것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우연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해주는 것은 필연적인 존재자를 포함해야 한다.

7. 그러므로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

 

유비에 의한 목적론적 논증

 

* 윌리엄 페일리( William Paley, 1743-1895) : 자연신학(1802)에서 설계론적 논증을 시계의 비유로 설명한다. 누군가가 사막에서 시계를 발견한다면, 이 시계가 우연히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시계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찬가지로 우주도 저절로 생긴 것이라기보다, 누군가가 설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데, 그 존재가 신이다.

 

* (David Hume, 1711-1776)의 반론

유비되는 두 대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세계는 시계보다 유기체에 더 가깝다.

제한된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를 자연계의 다른 영역이나 전 우주의 생성에 투사할 수 없다.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물질이 그 자체로 조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류발생론에 근거한 목적론적 논증

 

* Anthropic Argument

우주초기의 미세한 조건만 달랐어도, 현재와 같은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식적인 생명체를 산출하는 우주는, 엄청나게 낮은 우연의 무한한 조합으로 설명하기보다, 창조자의 의도적인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

 

존재 가능성이 무한히 낮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Stephen Gould).

 

지적 설계에 근거한 목적론적 논증

 

* 지적 설계 논변(Intelligent Design Argument)

여러 개의 배합이 잘 된 상호 작용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부분들은 기본적인 기능에 기여한다. 그런 점에서 그 부분들 중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그 체계의 기능은 멈춰버린다.”(Michael Behe, 1996 : 39)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체계들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생체 조직이나 세포의 구성 요소들의 기능이 바뀌기도 한다.

 

* 진화론적 설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인류발생론에 근거한 논증과 다르고, 환원 불가능한 복잡한 체계들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페일리와도 다르다.

 

도덕론적 논증

 

* 애덤스(Robert Adams)의 논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은 도덕적 사실에 관한 판단들이다.

2. 그것들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그것들의 진리를 위해 더 많은 사실들을 인간의 믿음에 의존케 하는 이론보다 더 나은 이론이다.

3. 도덕적 사실들은 신의 명령들이 갖는 비자연적인 속성들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바로 그런 이론이다.

4. 그런데 그런 이론이 참이기 위해서는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5. 따라서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들의 존재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를 제공한다.

 

만일 실제로 그러하듯이,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거역할 때 책임감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것은 그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그의 요청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J. H. Cardinal Newman, 1870)

 

철학의 신 vs 종교의 신

 

* 앞의 논증들 중 일부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 논증들은 특정 종교의 신을 말하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존재자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적 논증에서 상정한 절대자의 개념과 각 종교의 신 개념을 비교해서 논증을(또는 신 개념을) 확장, 수정할 필요가 있다.

) 유신론적 논증들은 인격적이고, 사랑을 베풀고, 창조주가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 어떤 논증도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택한, 또는 개발한 논증이 모두에게 설득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하지만 남들의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이 특정한 논증을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들여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갖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증거주의(evidentialism)

 

* 증거주의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다양한 논변들의 타당성 vs 유신론에 대한 반론, 악에 근거한 논변들의 타당성

이들을 견주면서 신에 대한 믿음이 온당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변이나 반박하는 논변에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을 믿거나 안 믿는 이유는, 증거와는 상관없이 심리적, 사회적, 감정적인 이유들이 작동한다.

ex) 신천지

 

증거주의에 대한 비판

 

* 월터스토프(Nicolas Wolterstorff, 1932-)가 말한 증거주의자의 도전

첫째로, 어떤 사람이 기독교나 기타 유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 한,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다른 믿음들이 그의 종교적인 확신을 지지해주는 증거가 되지 않은 한, 그러한 확신을 갖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종교도 합리적이지 않는 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어떠한 종교도 증거에 의해서 지지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바로 증거주의자의 도전인 것이다.”

그럴 듯한 비판이다. 그러면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토대주의(foundationalism)

 

* 토대주의 : 한 믿음이 참이고, 그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근본 믿음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

 

* 추론된 믿음(derived belief) : 다른 믿음들이 증거가 되어 지지해주는 믿음

기초적 믿음(basic belief) : 다른 믿음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도 받아들여지는 믿음

 

* 강한 토대주의자의 입장 : 우리가 임의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자명하거나(1+2=3) 교정 불가능하든지, 아니면 자명하거나 교정 불가능한 믿음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되든지 해야 한다.

 

이 진술문은 자명한가? 강한 토대주의가 옳다면, 어느 누구도 강한 토대주의를 받아들일 때, 합리적일 수 없다.

 

우리의 일상적 믿음들 중 상당수가 이 기준으로지지 받지 못할 것이다.

ex) 나는 존재하는가? [복제했을 가능성]

나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 다니고 있는가? [기억을 주입했을 가능성]

 

치즘(Roderick Chisholm, 1916-1999)

 

* 치즘 : “우리는 일상인들이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치에 맞고 정당화된 믿음을 택해서, 이 믿음이 다른 믿음이 지지해 주어서 믿는지, 아니면 그렇게 믿는 것이 합당하기에 믿는지 자문해서, 후자라면 기초적인 믿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상적인 지각에 의한 믿음 : 내 책상에 컴퓨터가 있다.

기억에 대한 믿음 : 나는 지난주에 종교철학 강의를 들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에 관한 믿음 : 어머니는 나의 선물을 받고 참 기뻐하셨다.

 

플란팅가(Alvin Plantinga, 1932-)

 

* 플란팅가 : 치즘에 동의하며, 더 깊은 질문을 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왜 기초적인 믿음이 될 수 없는가?”

유신론자들의 믿음은 다른 믿음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이 이렇게 생각함) 이 믿음은 기초적 믿음이 된다. 이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라면, 신 존재 논증 자체가 불필요하게 된다.

 

하나의 믿음이 기초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참인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기초적 믿음이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 옆집 피아노 소리

 

하지만 어떤 믿음이 누군가에게 정확히 기초적이라면, 그의 믿음은 합리적으로 정당화된다.

신이 존재한다가 누군가에게 기초적이라면, 그가 신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 거팅(Gary Gutting, 1942-)의 반론 :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경우만을 명백한 경우로 간주해야 한다.”

 

* 플란팅가 : “정확한 기초성의 기준들은 적합한 사례들에 의해 논증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례들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리라고 미리 전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신에 대한 믿음이 전적으로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전제한다. 그가 이 믿음을 다른 명제들에 근거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믿음이 그에 대해 기초적이되 정확히 기초적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아무것이나 믿는 사람도 그 믿음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호박 귀신 반론)

플란팅가 : 무엇이 문제인가? 이 방법을 사용하는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 플란팅가 : “우리가 꽃을 바라본다든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볼 때, 또는 광대한 우주를 생각할 때에 이 꽃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명제나, 이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종류의 명제들을 믿는 성향이 우리 안에 있다. ...... 성경을 읽자마자 어떤 사람은 신이 자신에게 말해주는 깊은 뜻에 감명을 받을 수도 있다. 내가 알기에 비열하거나 잘못된, 또는 사악한 짓을 하고 나서 나는 신의 면전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신은 내가 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뉘우칠 때 신은 내가 한 짓을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서 용서 받은 느낌을 갖게 한다.”

기초적인 믿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신의 현재나 과거 행위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이 신의 현존과 활동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비롯해서 신에 관한 여타의 믿음들이 기초적인 방식으로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얼스턴(William Alston, 1921-2009)

 

* 얼스턴 : “신에 대한 경험적인 인지는 신에 관한 믿음들 중 특정한 종류의 믿음들을 인식적으로 정당화해줄 수 있다. 신이 그 믿음의 주체에 대해 뭔가를 수행(강하게 함, 인도함)한다는 것을 믿는다든지, 신은 지각 가능한 속성(선함, 인지함)을 갖는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 감각적인 지각은 물리 세계를 알기 위한 본질적인 기반이 되듯이, 종교적 경험도 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위한 본질적 기반이 된다. 각각의 경우에, ‘기초적인믿음들은 문제의 경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정당화되고, ‘지각된것을 넘어서 있는 다른 믿음들은 여러 추리 과정을 통해 정당화 된다.(얼스턴)

 

*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믿음을 정당화시킬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편견과 독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적인 지각을 물리 세계에 관한 우리의 믿음들을 기초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적 경험이 신에 관한 믿음들을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며 그래야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얼스턴)

 

* 사회적으로 확립된 믿음 형성의 관행들은 그것들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또는 입증되지 않는 한, 신빙성을 갖는 것을 봐야 한다.

 

* 사물이 실재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경험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으므로, 세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로 인해, 또는 내가 아는 종교적 사실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뒤로 회전하는 것처럼 경험한다고 해서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을 경우,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종교적 믿음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들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얼스턴)

 

* 종교적 경험은 지각 경험들과 다르다 지각 경험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 반론 1) 감각 기관을 통해서 지각되는 것은, 감각 기관이 손상되지 않는 한, 서로 다른 관찰자들 사이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지만, 종교 경험은 그렇지 않다.

 

신은 너무 위대하고 신비로우며, 우리를 초월해 있기에 우리가 신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신의 현존은 특별한 조건들 속에서만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 반론 2) 사람들이 문화와 종교적 전통이 다르면, 신을 생각하고 경험하는 방식도 다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인격적 신을 경험하고, 신적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는 종교에서는 그런 경험을 한다.

 

* 얼스턴 : 어떤 사람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배운 종교적 믿음 관행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합리적이다. “박식하고 생각이 갚은 기독교인들은, 세계적인 종교들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들을 판정하기 위한 공통의 근거를 찾고, 경합하는 종교들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순환 오류에 빠지지 않고 보일 수 있는 길을 찾느라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노력이 어떤 성공을 거둘지에 대해서 예측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의 배후에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철저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신의 시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보장과 지식에 대한 플란팅가의 관점

 

* 유신론자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기초적인 방식으로 가질 때, 진정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당화된 믿음을 가지면서도 믿음의 내용이 참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 “다음 주에는 실시간으로 수업한다고 교수님이 말했고 학생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화된 믿음이지만, 예상치 못한 기술적 문제로 실시간 수업을 못했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인 믿음이 된다.

 

* 플란팅가 : “어떤 믿음이 S라는 사람에게서 보장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목표로 삼는 설계에 따라 정확히 기능하는(어떠한 기능 장애도 겪지 않는) 인지 기관들에 의해서 S에게서 산출되어야 한다. 이때의 인지 상황은 S의 인지 능력에 부합해야 한다.

 

* 우리의 일상적인 환경에서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입력들이 주어지면, 신에 대한 믿음을 산출하도록 명확히 설계된 인지 장치적 요소(신성감, sensus divinitatis)가 우리 각자에게 있다. 그 감각이 제 역할을 감당해서 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낼 때, 그것은 정확히 설계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산출된 신에 대한 믿음을 보장받을 모든 조건을 충족하며, 이 믿음이 확고부동할 경우, 이 믿음의 주체는 신의 존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플란팅가)

 

* 플란팅가 : 만일 기독교인들이나 다른 유신론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종류의 신이 존재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십중팔구 보장되고 지식을 구성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이 그가 묘사한 방식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럴 경우 그 믿음은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반론 1) 이런 종류의 신이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우리의 관심사이지만, 플란팅가는 우리가 그것을 아는 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플란팅가 1)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이 불합리하다거나 보장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에 대응하고자 한다. 이들에 대항해서 플란팅가는 우리가 종교적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만 그 믿음이 불합리하다고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플란팅가 2) 보편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유와 논변들에 의거해서 신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그런 믿음을 받아들이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신앙인들과 잠재적인 신앙인들을 안심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신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기 위한 어떠한 논변을 갖지 않더라도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정당화되고, 보장되며, 심지어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

 

강의를 들은 후, 신 존재 증명의 내용을 좀더 살펴보는 과정을 가져 보았다.

 

신의 존재 증명은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신학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고대로부터 시도되었다고 한다.

고대 교부들 가운데 탁월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론에 나타난 신 인식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데, 그는 빛과 선()과 영()이라는 원리와 어두움과 악과 물질이라는 원리를 주장하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반대하면서 특히 악()과 화()의 근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만물이 창조주 하느님 한 분에게로 소급된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존하는 존재자들의 인식 가능성과 그 존재의 근거이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존재의 근거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스토아 철학의 근본사상을 창조 신앙과 결부시켰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주신 것이다. 철학적 신론을 창조 신앙과 결부시켜 기독교 신학에 도입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안셀무스(1033-1109)는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서 하느님의 개념으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정통적이고 합리적인 접근법을 보여준다. 안셀무스에게 이성은 신앙을 도와주는 도구다. 그의 모토 중 하나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였다.

 

신학에서 안셀무스의 합리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보다 큰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자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더 큰 존재가 하나님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보다 더 큰 분이라면, 그는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이러한 신 존재 증명을 칸트 이래로 존재론적 신증명(神證明)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안셀무스의 이러한 사상은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 형식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um)에서 안셀무스는 우리는 당신이 보다 큰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분이심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을 상정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모순의 죄를 범한다고 안셀무스는 주장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했던 자보다 더 큰 존재, 즉 그 개념과 유사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에 대한 정의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접근법을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함께 시작한 다음 신앙에 이성을 더하려 한다.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가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그를 합리주의자로 만들었다.

 

안셀무스의 이 증명에 대해서 벌써 그 당대에 반론이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수도승 가우닐로(Gaunilo)란 사람이 만약 우리가 완전한 섬에 대한 관념이 있으면 그런 섬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안셀무스에게는 완전한 섬이란 그 자체가 논리적 모순일 수밖에 없다. 섬이란 벌써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완전한 자에 대해서 논한 것이지 완전한 섬 같은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안셀무스와는 다소 다르게 데카르트도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리들은 모두 완전한 자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관념이 어디서 왔겠는가, 한 번 물어볼 수 있다. 그것이 나 자신으로부터는 올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불완전한 존재며,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한 자에 대한 관념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세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올 수 있겠는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상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경험에서 완전한 자에 대한 관념이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 그 완전한 자에 대한 관념은 완전한 자 자신으로부터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방법은 그 뒤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또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비판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의 것으로, 그에 의하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존재란 것이 하나의 속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란 것이다. '완전하다'는 형용사는 다만 '아름답다''크다' 등의 속성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존재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나 데카르트는 모두 완전한 존재는 반드시 존재해야지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칸트의 이 비판은 매우 치명적인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정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칸트의 기본적 입장을 살펴보면,

 

(1) 존재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2) 개념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대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3) 하나의 개념의 대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존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나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각이야말로 현실성의 유일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4) 어떤 개념의 대상이 존재함이 알려진다 해서, 그 개념의 내용에 더해지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나의 마음의 상태가 바뀌어지는 것뿐인데, 이것을 칸트는 설정(Posi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개념과 존재를 선명하게 구분하고, 존재를 우리의 감각 경험과의 관련 속에서 찾으려 했던 칸트의 태도를 우리는 감각주의적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

 

칸트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증명이 전제하고 있었던 존재론과 전혀 다른 감각주의적 존재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존재 확인의 근거를 오직 감각에만 둔다는 것은 지나치게 존재자의 범위를 협소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감각에 포착 되지 않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생물, 가시권 밖의 광선들, 아직 관찰되지 않은 우주 내의 한 별 등. 게다가 만일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감각이 작동되지 않는 장애인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일 뿐인가?

(2) 존재를 개념과 철저히 구별한 것은 너무 자의적이다.

(3) 설령 감각주의적 존재론이 유한한 존재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감각 경험을 초월한 같은 무한한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존재론의 기본적인 특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아무 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 운동의 원인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들어가면 어떤 경우에는 미묘하게, 또 다른 경우에는 좀 더 분명하게 철학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중세 철학의 특징이 신학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리에서 그의 인식론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범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개된다. 아퀴나스는 구체적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 합성체이며 물질적 세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한다. 그는 존재란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으로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본질은 이러한 존재와 합성하여 구체적 존재자이게 한다. 즉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활용하여 존재가 현실태라면 본질은 가능태에 해당한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의 존재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원인의 원인, 그리고 그 원인의 원인... 이렇게 계속해서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원인이 없는 최초의 원인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인 없는 원인 혹은 최초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이다. 이 생각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운동은 반드시 그것을 일으키는 다른 운동이 있고, 그것은 또 다른 운동... 이렇게 소급해서 결국 최초로 운동을 가능케 하는 '부동의 시동자(始動者)'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얼른 보면 이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우리가 우리 주위에 온갖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느 하나도 원인 없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 원인들도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 원인들은 또다시 다른 원인들이 있어야 함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딘가 원인을 가지지 않은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증명도 자세히 따져보면 많은 약점을 안고 있다. 우선 그 최초의 원인과 하나님을 동일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최초의 원인은 구태여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일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시동자로서 충분한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의 원인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만든 창조의 신으로 나타나는데, 최초의 원인과 창조주는 논리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것의 원인이 반드시 하나일 필요는 없다. 대개 생물의 경우에는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수가 줄어지고 마침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모든 후손이 생겨난다 할 수 있지만, 모든 다른 존재들도 동일한 방법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참고

3천년 기독교 역사/CLC(디아메이드맥클로흐 지음)

조직신학/대한기독교서회(김광식 지음)

모놀로기온&프로슬로기온/아카넷(캔터베리 안셀무스 지음, 박승찬 역)

성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이성과 신앙(ratio et fides)', 김영철, 요약 정리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dpsjk&logNo=20023076441&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그런데 강의를 들으며, 이런 물음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가? 신의 존재를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증명의 용어법을 채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내 견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신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기 위한 어떠한 논변을 갖지 않더라도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정당화되고, 보장되며, 심지어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라고 말한 플란팅가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플란팅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특정한 조건하에서 우리는 창조 시에 발휘된 신의 위엄 있는 지혜에 대한 경험이라든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경험, 또는 신이 우리의 죄를 용납하지 않지만 회개한 후에 용서를 받게 되는 것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가질 때, 기초적 믿음[(basic belief) : 다른 믿음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도 받아들여지는 믿음]이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창조 시에 발휘된 신의 위엄 있는 지혜에 대한 경험이라든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경험, 또는 신이 우리의 죄를 용납하지 않지만 회개한 후에 용서를 받게 되는 것에 대한 경험 등에서의 기초적인 믿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신의 현재나 과거 행위라든지, 신이 현재나 과거에 말한 것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들 중 어느 것도 일 수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아울러, 종교적 경험이 지각 경험과 유사하다는 얼스턴의 논변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신에 대한 경험적인 인지는 신에 관한 믿음들 중 특정한 종류의 믿음들을 인식적으로 정당화해줄 수 있다. 신이 그 믿음의 주체에 대해 뭔가를 수행(강하게 함, 인도함)한다는 것을 믿는다든지, 신은 지각 가능한 속성(선함, 인지함)을 갖는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 감각적인 지각은 물리 세계를 알기 위한 본질적인 기반이 되듯이, 종교적 경험도 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위한 본질적 기반이 된다. 각각의 경우에, ‘기초적인믿음들은 문제의 경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정당화되고, ‘지각된것을 넘어서 있는 다른 믿음들은 여러 추리 과정을 통해 정당화 된다.

 

*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믿음을 정당화시킬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편견과 독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적인 지각을 물리 세계에 관한 우리의 믿음들을 기초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적 경험이 신에 관한 믿음들을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며 그래야 공정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 사회적으로 확립된 믿음 형성의 관행들은 그것들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또는 입증되지 않는 한, 신빙성을 갖는 것을 봐야 한다.

 

* 사물이 실재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경험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으므로, 세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로 인해, 또는 내가 아는 종교적 사실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뒤로 회전하는 것처럼 경험한다고 해서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을 경우,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종교적 믿음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들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얼스턴의 논변에 깊이 동조하면서 아울러 덧붙이고 싶은 것은, 매튜 폭스의 창조 영성을 촘촘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다. 뜬금없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주적 에너지인 창조성, 신적 깊이와 신적 풍요를 표현하는 하느님의 모상, 창조주의 모상을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심겨진 신성을 새롭게 재조명해보고 싶다!

 

신성은 창조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창세기에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들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춰내는 가운데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모습이 바뀌면서 점점 더 눈부시게 자라게 될 것이니, 이것은 영이신 주님의 행업이십니다

 

이 말씀에 의거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므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더불어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창 1:26의 본문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지는 끊임없는 논쟁 중이라 하더라도...

 

나의 자아(self), ‘사람마다 하느님의 씨앗과 하느님의 모상과 신적 창조력을 부여 받았으니 우리 모두 자기 안에 있는 예술가를 골방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설파하고 있다.

 

이야기하는 일과 상담하는 일, 목공 일이나 수리하는 일, 글쓰기나 춤추기, 그림그리기나 클레이 만들기, 가르치는 일이나 부모 노릇하기, 노래하기나 영화 찍기 등 형태는 어떻든 우리 안에서 나오게 함이 참으로 우리의 심부(心府)에서 발현(發顯) 되는 것이라면, 또한 하느님의 심부에서 나오는 것이고 우주를 고취(鼓吹)시키는 유일한 원천인 다바르(דָּבָר)의 신적 창조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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