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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함이 없는 사랑, 호 11:1-4, 호세아 시리즈 설교(23)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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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이 없는 사랑

 11:1-4

 

감옥을 자기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어머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던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범죄하면 교도소에 들어가서 몇 개월을 살다가 다시 석방되어 나옵니다. 그러면 어머니 앞에 와서 다시는 그런 범죄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작심일이라고, 얼마  지나면 다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또 출소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또 출소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큰 범죄를 저질러서 오랫동안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제 출소하는 날이 가까워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습니다. 제가 번번이 어머님께 약속을 드렸지만 어머니를 배신하고 어머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나가면 꼭 좋은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시고 아들로 받아 주신다면 제게 답장을 써 주세요.” 그렇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몹시 상실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교도소 문을 나서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이번에 출소를 하면 저의 고향을 지나갈 것인데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시면 저희 집 앞 대추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주세요. 그러면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는 것으로 알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노란 손수건을 달지 않으면 그냥 세상으로 가서 또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은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가 고향을 지나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라스베가스는 미국 최고의 유흥의 도시이며, 카지노의 도시입니다. 라스베가스로 가는 시끄러운 버스 안에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라스베가스 가는 길이 기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슬퍼하시오?” 이 젊은이는 지나간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불효자입니다. 몹쓸 아들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번번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과연 어머니가 저를 받아 주실는지 용서해 주실는지 걱정이 됩니다.

 

버스가 동네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차에 탄 사람들도 관심이 있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동네를 돌아서는 순간에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젊은이 저것 좀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온 동네 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버스는 세워졌고 이 젊은이는 버스에서 내려서 어머님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이러한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몇 개월 동안 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자식에게 병을 알리고 싶지 않으셔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병이 너무 심해서 아들에게 편지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들 출소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이야기를 했더니 온 동네 사람들이 감동해서 나무마다 노란 손수건을 달아 아들을 돌아온 탕자처럼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사랑도 위대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작가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 할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º 고마움을 알지 못하면

 

오늘 본문도 반역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그를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습니다.

 

 11:1 /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우상들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창조주의 슬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탐욕이 제도화된 세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이스라엘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이방 나라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복을 준다는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온갖 신상들 앞에 향을 피워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11:2 /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결과가 참담합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못났다"하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은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허망한 길을 찾지 못하게 막으셨지만(2:6), 그들에 대한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11:3-4 /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고마움을 모릅니다.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혼자 난관을 헤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 분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들처럼 가련한 이들이 또 있을까요? 사람이 고마움을 알지 못하면 사람 구실하기 어렵습니다.

 

º  나를 비우면

 

인류학자인 김현경 선생은 '인간' '사람'을 구별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머물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비로서 사람이 됩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갈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이들은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으로 누군가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환대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환대하는 삶을 살라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자기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지는 않는 지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최용덕 작사, 작곡)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받을 사랑만 계수’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받을 사랑만 계수하는 사람은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거나 불평하며 삽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그들은 자기 권리를 내세우는 데는 재빠르지만, 사람 도리를 하는 일에는 무지하거나 게으릅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시간부터,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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