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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사렛 예수 연구의 필연성과 딜레마(dilemma)'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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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우리가 신앙고백하게 된 예수보다 더 전제(前提), 한 인간으로 살았던 유대인 예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30여 년 동안 인간 예수로 살았던 예수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지금까지 내가 읽고 믿고 있는 복음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을 찾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신앙문서인 복음서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 있는가? 만약 찾아낼 수 없다면 기독교의 역사적 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믿음의 고백서인 복음서가 최소한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는 전제 하에, 어렵더라도 역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찾아간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몸 되는 글

 

복음서의 저자들은, 저작 당시에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현재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현재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예수라는 과거의 인물 혹은 역사의 틀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항상 살아계시며 오고 오는 모든 역사와 사람들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말하고자 했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예수는 과거 갈릴리에서 살았던 바로 그 예수와 동일한 분이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실제로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살았던 예수 그분과 복음서 저자들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살아계셨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예수 그분을 동시에 읽고 만나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 찾기

 

실제로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한 인간, 그것도 유대인으로 살았던 예수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창조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하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느 정도로 동일하며, 어느 면에서 구별되어야 하는가는, 신학의 영원한 숙제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고 그분이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던 인간 예수와 동일하다고 여긴다. 복음서 저자들도 그랬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역사 에서 한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문제는 역사의 한 인간 예수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역사적 예수 찾기의 역사와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19세기의 '옛 물음'(Old Quest)

 

계몽주의가 일어나기 이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서 역사와 신앙이 일치한다고 믿었으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이성적 측면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복음서가 말하는 모든 사건들이 실제로 역사에서 그대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믿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복음서는 객관적인 역사 자료가 아니라, 해석된 역사 곧 신학적인 자료라는 것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근거하여, 19세기 신학자들은 복음서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예수를 찾기 위해 신약성서, 그것도 공관복음서를 연구하여 예수에 관한 수많은 연구 서적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모든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들은 각기 달랐다. 나사렛 예수는 한 사람인데, 그에 관한 연구 결과로서 예수는 여럿이었다. 20세기 초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슈바이처(A. Schweitzer)1906예수연구라는 책에서 그 당시 출판된 600여 권의 예수연구서적들을 읽고 분석하였는데, 600여 명의 학자들이 복원해 놓은 예수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런 연구들을 분석한 후 역사적인 예수를 찾는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뒤로 예수 상()을 찾으려는 작업이 시들해졌다. 그래서 19세기 학자들의 시도를 '옛 질문'이라고 규정하여, 신학의 한 쪽에 보존하는 것에 그치는 것처럼 보였다.

 

2. 20세기의 '새로운 질문'(New Quest)

 

시들었던 연구를 다시 부활시킨 사람은 독일 튀빙엔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케제만(E. Käsemann)이었다. 그는 그의 스승 불트만(R. Bultmann)에 맞서서, 아무리 역사적인 예수 찾기가 힘들더라도 결코 그 작업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물어야 한다는 소위 새로운 질문(New Quest)을 제기하였다. 만일 역사적인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사건 위에 토대를 세우지 못하는 일종의 가현설(Docetism)에 빠지고 만다는 전제 때문이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았던 시대를 종식시키고 보른캄(G. Bornkamm)1957년에 나사렛 예수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해냈다. 이 시대의 학자들은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를 편집비평적인 방식으로 읽고 분석하면서 예수를 연구하였다. 그들은 예수 상()을 그리기보다는 복음서를 채색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예수라는 객관적인 인물과 그의 말씀 및 그를 둘러싼 사건에 근거되어 있는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학자들은 복음서에 예수의 말씀으로 전해진 말씀들을 진정성과 비진정성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복음서에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Kerygma)와 역사적인 예수의 육성 말씀(ipsissima vox)을 구분하는 데 주력하였다.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의 선포(케리그마)와 부활 이전의 역사적인 예수 사이에는 비연속성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연속성을 찾는 데 주력한 것이다.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며,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선포하였다. 그 믿음과 선포의 침전물이 지금의 신약성서의 문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그렇게 믿고 선포한 근거는 단순히 부활 체험뿐인가?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이 그러한 믿음과 선포를 가능하게 했으나 그것이 역사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면, 케제만이 염려한대로 기독교는 뿌리 없는 신기루, 가현설에 빠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오히려 부활 체험과 성령 체험은 그 이전의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과 말씀 그리고 여러 사역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초대교회 케리그마의 뿌리는 항상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와 함께 나사렛 예수를 말할 수밖에 없다. 복음서들이 말하는 예수 이야기는 역사에 실존하지 않은 가공된 인간에 관한 신화가 아니다. 나사렛 예수는 역사의 인물이다. 복음서들은 부활절 이후 신학적 반성으로 기록한 산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실존 인물로서 예수에 관해 말한다. 나사렛 예수는 그 자신에 관한 이후의 모든 선포(케리그마)의 출발점이고 내용이며, 더 나아가 그 선포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말하지 않고서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는 이후의 선포와 믿음의 고백을 말할 수 없다. 부활절 이후의 선포와 고백은 어떤 식으로든 부활 이전의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 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에 관한 연구는 필연적이다.

 

3. 역사적인 예수를 찾기 위한 '3의 물음'(Third Quest)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세 번째 질문은 복음서라는 정경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역사적인 예수 상()을 찾으려고 하여 학자들은 이 시기의 연구를 '옛 물음', '새로운 물음'에 이어지는 '3의 물음'이라고 한다.

 

'3의 물음'은 이전 연구와 구별되게 다음과 같은 학문적인 발전이 있었다.

 

보다 풍부한 자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방법론의 적용이다.

 

정경을 초월하는 연구 방향이다.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투표 방식을 통해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 말씀의 진정성 여부 를 결정한다. 이들 역시 그 이전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이 있는 그 대로 역사적인 예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 이후 40-60여 년이 지나 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문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서에는 역사적인 예수의 말씀도 있고(진정성), 반대로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이 서 있는 상황에서 예수의 말씀인 것처럼 기록한 말씀도 있다(비진정성)고 전제한다.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를 생각하 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예수 상()을 거부하고, 예수를 철저히 현세적인 평등과 인권을 위한, 그러므로 인간 특히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농부들과 민중의 평등과 인권을 짓밟는 로마의 지배 체 제와 그에 동조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데 급급한 유대교 종교체제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지혜교사 라는 예수 상()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찾는 것에만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예수가 그 당시 사회에서 죄 인으로 외면 받던 사람들과 나눈 식탁교제, 병자치유, 기적행위 등과 같은 예수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4. 역사적인 예수 찾기의 딜레마(dilemma)

 

역사적인 예수를 인정하고 전제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한다는 명제에 찬성한다면,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라는 말은 매우 모호하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찾아내려고 노력한 예수를 '역사적인 예수'라고 한다면, 그처럼 학문적으로 복원된 다수의 예수들에 맞서서 우리는 '실제의 예수', '인간 예수', '진정한 예수', '유대인 예수', '나사렛 예수',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예수' 등을 말해야 하는가?

 

여기서 잠시, 역사적 예수 시대의 상황, 사상, 언어들을 비교하면서 예수의 전통(傳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준 제임스 던의 책을 조금 살펴보기로 한다.

 

제임스 던의 주장에 따르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 전통(傳統)을 통하여 여전히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예수는 전통(傳統) 속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며 치유한다고 말한다. 예수 전통을 읽을 때, 최초의 제자들과 교회 집단들이 함께 더불어 앉아 예수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증언과 교훈을 얻었을 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교가 발원한 예수, 기억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훔베르그는 제임스 던과 20세기 방법론들이 복음서에 대해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다. 복음서는 고고학처럼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구전과 기록이 역사적 예수를 그려내는 데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훔베르그는 기억된 예수를 따라가서,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역사를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역사는 그전처럼 똑같이 서술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역사적 예수는 단지 소수 사람 외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다.

 

홈베르그는 제임스 던이 말했던 것처럼 기억된 예수가 결코 원천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 공동체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거나 첨가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변질될 가능성이 많고, 역사적 사건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므로,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와 가까울 뿐, 역사 자료들이 역사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던이 말한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 역사는 오직 전해진 것이나 기록된 것에만 집중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단 두 명의 학자들도 그들이 복원한 예수의 모습이 다르다고 말한 알버트 슈바이처(A. Schweitzer)의 말대로라면, 어떤 학자가 복원한 예수가 진정한 예수인가?

 

이러한 복잡한 사정 앞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예수 찾기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세상의 어느 유명한 학자들보다 예수를 가장 정확하게 보도해 주는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다.

 

정경 안에 있는,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을 결정해 온 복음서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연구 사료이다.

 

예수의 구체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굵직한 틀 안에서 예수 상()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역사적인 것만이 진리라는 전제를 거부한다. 진리는 역사적인 것이지만, 역사적인 것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진리는 역사보다 오히려 믿음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예수 찾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서 복음서에 증언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더 중요하다. 그런 믿음이 없이 인산 예수를 찾는다면, 그 예수는 인류의 여러 성현들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류의 구주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가는 글

 

나사렛 연구의 필요성을 상고(詳考)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신앙의 예수''역사적 예수'의 연속성을 강조한 케제만의 학설에 공감(共感)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예수가 복음의 핵심 내용이므로 신약성서 신학은 나사렛 예수로부터 출발해야 함이 옳다.

 

초대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며 선포했던 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복음과 나사렛 예수가 분리될 때, 복음은 역사적인 토대를 상실한다.

 

복음은 추상적인 진리나 비역사적인 신화가 아니다. 신약성서의 문헌들, 특히 복음서들은 인간으로 와서 유대인으로 살았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한다.

 

신약성서신학이 초대교회가 믿고 고백하며 선포한 복음을 기록한 신약정경들의 문헌의 메시지들을 서술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나사렛 예수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 때문에 예수의 선포를 말해야 하고 예수의 역사적인 인격과 사역을 물어야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복음(처음교회의 케리그마)과 예수의 관계가 신약성서신학의 출발점으로 드러난다.

 

심각한 자료 문제가 있음에도 우리는 신약성서 본문에 근거해 예수를 말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예수에 대해 듣고 기록한 사람들이 신약성서의 저자들이라면, 그들보다 더 정확하게 나사렛 예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증언이 부활절 이후 신앙에 따라 채색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신앙이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서 문헌들, 특히 공관복음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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