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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예수의 십자가 사랑...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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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6-17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세상과 특히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되고 궁극적인 관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관심과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어렵게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오늘 본문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하)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하)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나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마음은 단순히 이 땅에서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찬란하고 아름다운 영생을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구원의 길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생에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되는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에 살고 있던 한 가난한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구원의 능력과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의 이름은 2가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마태복음 1 23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역사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신, 크고 복된 기쁜 사건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한 복판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마구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은,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존귀한 분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말씀입니까?

 

둘째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신에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6 41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와 같이 육신은 죄에 굴복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믿음에서 빗나가게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육신의 경향성이 결국은 사단의 통로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육신의 경향성을 넘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요일 2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서두에, 사랑하는 자들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그의 감정이 매우 따사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나 교사, 설교가들이 요한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할 때 꼭 사랑 안에서 말씀을 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옛 계명

19:18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 되는 한 가지 계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

 

 13:34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이라 하였습니까?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까지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셨으므로, 사람들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십니다.

 

롬 5: 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생명이요, 사랑이요,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독신이었던 호세아로서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짝이라서 감사한 마음으로 고멜을 데려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멜의 과거가 음란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중매쟁이나 친구소개도 아니고 하나님이 소개하신 여자입니다. 고민하던 호세아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조용히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결심을 알아채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을 건네는 것입니다.

 "내가 소개해준 네 아내를 내 허락도 없이 내보낼 수 없다. 모든 걸 덮고 용서하도록 하라"

 

호세아로서는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어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과 다짐합니다.

"지난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소 그러나 다시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마시오"

 

고멜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아들 딸 낳고 사는데 낌새가 이상했습니다. 호세아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날 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견디다 못한 호세아는 이혼을 결심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인내도 용서도 한계가 있지 어떻게 더 참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래도 참고 그럼에도 용서하라"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호세아는 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터졌습니다. 호세아가 밖에 나갔다 왔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일이 있어서 나갔다보다 여기고 기다렸지만 밤이 돼도 그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해가 뜨고 달이 져도 소식이 없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얼마 후 풍편에 들려오는 소문은 고멜이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쳐 살림을 차렸는데 그 남자가 고멜을 배신하고 도망치면서 술집에 팔아넘겼고 술집작부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아내가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결혼한 고멜이 그런 신세로 전락했으니 호세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쯤 되면 호세아의 인내도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가 구박한 것도 아닙니다 제 발로 딴 남자에게 속아 가출했고 술집여자로 전락했습니다 저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도 기다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고멜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3:1-3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 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야. 빨리 찾아가서 몸값 다 지불하고 네 아내 고멜을 데려오너라.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용서하여라"

 

아마도 호세아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다면 아마도 답답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나 자신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호세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바라보라 했습니다. 

 

 12: 6 /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또한 성경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탕자가 되고, 그 방탕함의 결과로 죽게 된 자식이 생명을 위하여 선택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탕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얻어먹을 수 없게 된 비참한 자리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용서해 주실까?'

그와 같은 스스로의 질문에 탕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자식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못하였지요. 그것을 요구할 염치도 없었습니다. 그냥 품꾼으로 삼아 주시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 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나 탕자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사랑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탕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날부터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이고 사랑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질 십자가도 있습니다.  

 

 16:24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런데 내가 질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6:3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결국 내가 질 십자가란 자아(ego)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라고 할 때 세례는 내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 자아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4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내 자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주님이 나를 다스리기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세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마지막을 아시지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아마도 그 잔치는 돌아온 탕자에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잔치였을 것입니다.

 

입 달린 모든 사람들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 자식이 아버지 재산 말아먹고 돌아온 아들이래."

그 자리에서 돌아온 탕자가 무엇을 다짐했을까요?

'다시는 부끄러운 자리에 서지 말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자리에 우리 모두 서십시다~~~~~

십자가란, 바로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의 추함과 작별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절대로 우연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과 아름다움에는 하나님의 피와 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땀과 피로 생명과 아름다움을 사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선택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길 때,

우리 삶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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