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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약성서와 신학함, 그리고 신약학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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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약성서의 시작과 신학함

 

이승현교수에 따르면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 정체성의 근거를 발견하였고, 또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본질에 대한 교훈을 배웠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구약성경 본문에 기록된 역사적 상황들과 후대 유대인 해석자들의 역사적 상황들이 달라졌을 때, 후대의 해석자들은 옛 본문들을 자신들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해석 작업에 돌입했다고 본다. 이 정경화 과정에서 탄생한 그들의 다양한 성서 해석들은 구약성서와 함께 권위 있는 전통으로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구약성경에 부여한 정경적 권위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성서의 해석학적 열쇠로 인식되는 순간, 예수는 구약성서의 권위를 상대화시켜 버리는 패러다임 체인저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구약성경의 해석학적 열쇠라는 이해에 도달하는 순간, 이 믿음은 예수의 빛 아래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상대화시켜 버렸고, 율법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한 동료유대인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음을 주장한다.

 

 

2. 신약성서의 정경화와 신학함

 

그에 따르면 2세기 초반부 교회들의 예전을 보면, 복음서의 기록된 문서가 아니라, 그 문서가 증거하는 내용인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이 예배에서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유세비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저는 책들로부터 얻는 정보가 살아 있는 음성으로 전달되는 말씀보다도 더 저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Eusebius, H.E. 3.39.4)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1세기에서 2세기 초반에 걸쳐서 교회들이 문서들 그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이유는 예수가 어떤 책도 기록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세기 초반까지 교회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증거가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교회의 선생들을 통해서 구전으로 증거 되고 있기에, 문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성도들에게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했던 것에 반하여, 2세기 중반부터는 문서화된 형태의 복음서들도 구약과 함께 성경으로 불리기 시작했음을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변증론자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2세기 중반 로마교회에 대해 묘사하면서, 성도들이 대중적인 예배에서 복음서들을 구약성서와 함께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2세기 중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2 Clement에 보면, 주 예수와 그의 말씀의 권위가 그 말씀들을 포함하고 있는 복음서의 문서들에도 전가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2 Clement의 저자는 마가복음 2:17 혹은 마태복음 9:13을 인용하면서, 그 본문을 성경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 서신서들의 권위도 일찍부터 교회에 의해서 인식되었다고 주장한다.

 

폴리캅의 증언을 따르면, 이미 1세기 말경에 바울의 일곱 편지들은 교회들 간에 회람되고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서신서들이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세기 초·중반에는 말시온과 그를 추종하는 영지주의적 성향의 교회들이 바울을 자신들의 주 사도로 삼고, 그의 서신서들을 자신들의 성경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2세기 초·중반에 주류 교회와 비주류 교회 간에 발생한 다양한 논쟁들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은 그와 그의 서신서들에게 다양한 교회들이 부여한 성서적 권위에 대한 반증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복음서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생생한 기억과 이해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복음서의 모든 저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함께, 그 예수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제자들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런 이유로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아울러 바울 서신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자신들의 궁극적인 규범으로 믿고 받아들인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규정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내외적인 도전들과 씨름하면서 수행한 그들의 처절한 신학함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3. 계속되는 신학함에의 참여로서의 신약학

 

정경화된 신약성경은 이후 교회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약학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고, 성경을 학문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혹은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은 신약성서를 고대인들이 탄생시킨 여러 인간의 문서들 중의 하나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비평이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학자들이 제시한 다양한 가설들을 통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크게 타격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신약학자들은 과학이라는 미명(美名)아래, 맹신과 과학의 우상화 속에 갇힐 수 있음 에 대하여 크게 우려를 나타낸다.

 

한편 저자는 종교적 체험을 객관화라는 명목아래, 학문적 대상에서 배제하는 신약학 방법론도 지적한다. 사실 과학적인 방법론을 근거로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려는 신약학의 경향성과 종교적인 체험의 문제는 함께 공존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종교적 체험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적인 체험을 학문에서 논하는 것이 학문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보는 일부 학자들에 대하여 편견이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그 시작과 정경화 과정에서, 저자와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자들 및 초대 교인들이 경험했던 종교적 체험은 복음서 및 서신서의 기초라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고대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다양한 배경들을 근거로 예수운동의 다양한 표현들이 상호 충돌하고 소통한 결과로 탄생한 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들의 문서들에 대한 깊은 이해는 신약성경과 초기교회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주장한다.

 

4. 응답

 

저자는 신약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크게 3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첫째,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한 세계 속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신학함

둘째, 신약성서 정경화 과정에서 교회 안팎의 도전 앞에서 신학함

셋째, 현대 세계 속에서 신학함

 

본 글을 통하여 신약성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특별히 신약성서가 정경화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규정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내외적인 도전들과 씨름하면서 수행한 그들의 처절한 신학함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현대 세계 속에 신학함의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먼저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맹신과 과학의 우상화 속에 갇힐 수 있음에 대하여 크게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려는 신약학이 종교적 체험을 다루는 것은 학문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말하는 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그 시작과 정경화 과정에서, 저자와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자들 및 초대 교인들이 경험했던 종교적 체험은 복음서 및 서신서의 기초라 지적한다. 아울러 저자는 고대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다양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신약함을 열어가는 단초가 될 것이라 말한다.

 

본인은 책을 읽으면서 신학함을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정경화 과정이 공동체의 종교적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시대와 문화에 의하여 착색된 것이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헬레니즘화 된 복음을 다시 히브리화 시키는 신학함도 필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나와 서양에서 자라나고 발전된 신약성서의 정경화 과정을 그렇다면 한국역사와 교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즉 정경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약성서가 탄생하였지만, 그렇게 얻은 대답이 정말 옳은 대답인가? 본인은 한국 역사의 현장에서 다시 실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루터는 교황에게서 성서 해석권을 빼앗기 위해 성서를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주었다. 그는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라는 해석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성서를 직접 읽기 시작한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그는 봉건 군주의 힘을 빌려 진압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복음서를 직접 읽지 말고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읽고 이것을 성서의 기준으로 삼으라 말한다.

 

물음은 대답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사회 속에서 신약함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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