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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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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음을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에 의하여 한글 성경이 번역되고 이로 인하여 성경연구 모임이 태동되고 한국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던 단초를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오늘 한국교회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개혁은 순교의 역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물질 만능주의, 맹목적 믿음, 기복 신앙, 성직 매매, 교회 세습, 교회의 물신화 현상 등은 오늘 한국교회가 마치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맞이하였던 개혁의 대상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사회를 향하여 개혁을 외치던 시대에서 이제는 사회가 한국교회를 향해 개혁하라 요구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살피며 종교개혁은 지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철저하게 복음 앞에 서고자 하였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2.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국가의 보호 가운데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군주제의 보호 가운데 준비되고, 세워지고, 재건되었다. 헨리 8세는 로마와 결별하면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고,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종교개혁을 세웠으며, 엘리자베스는 이복 언니인 메리 튜더에 의해 가톨릭으로 회귀한 영국을 다시 종교개혁으로 회복시켰다.

 

헨리 8

 

16세기 초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은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 유럽 대륙의 두 강대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적의는 브리튼에 있는 두 왕국의 관계에 반영되었다. 영국의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의 상속자인 맏아들 아더와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의 막내 딸 당시 15살이던 캐서린을 결혼 시켰다. 150111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헨리 8(1509~1547)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왕자가 없이 딸만 있다는 것은 자칫 영국이 후계자 문제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헨리 8세는 로마에 자기와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해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다. 그 후에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왕위 계승자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요청은 앤 볼린(Anne Bolyne)과 사랑에 빠지기 전이였으므로 연애감정이 아니라 국가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헨리는 1527년에 캐서린과의 결혼무효를 교황청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황 클레멘스 7(Clemens)는 헨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황제인 칼 5(Karl )는 캐서린의 조카였으므로 결혼무효를 선언할 경우 교황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보고 제일 처음 논문을 써 이를 반박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1521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렇듯 그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에서 교황은 헨리 8세의 결혼무효를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 의도적으로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헨리는 1530년경부터 로마와의 결별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항소를 제한하는 법령을 부활함으로 성직자를 직접적인 국왕의 권위 아래 두었다. 아울러 로마로 흘러들어가는 각종 자금을 봉쇄할 것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는 헨리가 당시 대륙에서 발생하고 있던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생각하였다기 보다는 교황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는 국왕의 권리를 강화하려 한 목적이었다.

 

로마와의 최종결렬은 1534년 발생하였다. 의회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각종 헌금을 봉쇄시켰으며,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로 판결하였다. 그리고 앤과의 결혼이 합법적임을 선언하였다. 토마스 크랜머가 1533523일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무효이며 앤과의 결혼은 합법적임을 선언하였을 때 교황은 헨리가 9월까지 앤을 내보내고 캐서린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고(1533711),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했다. 그러나 헨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15347월 교황 바오로 3세는 헨리와 앤 그리고 크랜머를 파문하였다.

 

이 때 헨리 8세는 영국의 교회를 가톨릭교회와 분리하여 로마와의 행정적 단절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영국의 왕일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의 유일한 대표임을 선언하고 수장령을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에게 분파주의자나 이단이라고 칭하는 행위 자체를 모반죄에 해당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영국 교회의 분리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법률적으로 봉쇄하였다. 이로써 국왕은 각종 종교단체와 교회에 대한 방문, 조사권, 부조리 시정권, 처벌권 등을 소유하게 되었다. 수장령의 핵심은 영국으로부터 교황의 모든 권한을 배제하고 이를 국왕에게 돌리는데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 완전한 단절을 택하게 되었다.

 

헨리 8세는 교회의 수장이 되자마자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앤 볼린과의 비밀결혼을 공식화 하였다. 그러나 앤 볼린에게서도 왕자가 태어나지 않자 딸 앨리자베스만 얻고 앤은 간음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다. 이후 헨리 8세는 수도원 해산령을 시행하였다. 수도원 해산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중세교회의 봉건세력으로부터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재산을 풍족히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교회의 경제력 상실은 교회의 정치적 역량의 쇠퇴를 가져왔고, 상원으로부터 수도원장들을 제거시킨 것은 상원에 있어서 성직층의 절대적 다수가 소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처럼 수도원 해산은 절대왕정의 권력기구를 정비하는 재원과 성직자계층의 세력약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영국의 종교개혁 정책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왕권지지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왕국 전체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에드워드 6

 

헨리의 외아들 에드워드 6(1547-1553)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삼촌이었던 서머셋 공작이 3년 동안 섭정을 하였다. 병약했던 에드워드는 부친의 사후 6년을 더 살았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교회개혁이 크게 진보했다.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포도주가 주어졌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고, 교회의 성상들이 철거되었다. 서머셋의 섭정 기간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업적은 공동기도서의 출판인데, 주로 크랜머가 작성한 이 기도서를 통해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나라 언어로 된 예배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서머셋의 뒤를 이어 노덤벌랜드의 공작이었다. 그의 섭정 기간 중 공동기도서의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여기에 목회자가 수찬자들에게 떡을 주면서 하는 말을 비교해 보면 이 개정판은 츠빙글리적 경향이 드러난다. 원래 기도서에서 사용된 말은 그대를 위하여 주어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니 그대의 육체와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보존하시는 것이다였고, 개정판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를 취하여 먹으라, 믿음과 감사의 심정으로 그의 몸에 참예 할지어다이다. 초판이 가톨릭 혹은 루터파 입장을 대변하였다면, 개정판은 츠빙글리 및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 두 섭정의 차이점은 당시 영국의 상황이 어떻게 변모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메리 튜더

 

에드워드 6세의 사망 이후에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메리(1553-1558)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는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녀가 어렸을 때 왕이 계승자로서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헨리 8세의 주장대로 헨리가 교회의 수장임과 동시에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라고 한다면 메리는 사생아가 되기에 그녀에게는 왕위 계승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개인적 문제와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메리는 영국에서 가톨릭교회를 회복해야할 입장에 있었다. 그녀는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여 가톨릭 합스부르크가와 유대를 공고히 하였다. 1554년 말 영국은 공식적으로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성직자들에게는 아내를 내보내라 명령을 내리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300여명이 처형되었으며, 투옥되거나 유배되거나 망명을 떠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녀에게는 피에 젖은 메리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메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 토마스 크랜머이다. 크랜머 대주교는 성공회 전례와 성사의 기준인 성공회 기도서를 1549년 작성한 개혁자였다. 그는 자신의 중요한 지지자인 라티머와 리들리가 화형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였다. 결국 정부의 공작에 의해 성공회 신앙을 버렸지만,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 이었는데, 대주교는 그를 세인트 메리 교회당으로 끌고 가 이곳에서 설교를 행한 후 그의 입장을 철회한다는 것을 공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와 실수와 인간의 약함에 관해 서두를 꺼냈다. 사람들은 그가 가톨릭교회를 떠나는 것을 회개함으로 끝맺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철회 사실을 다시 취소하고, 실제로 불속에 두 손을 집어넣어 불 태웠다. 그의 본보기에 용기를 얻은 많은 이들이 프로테스탄의 가르침을 계속 전파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1559-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시대에 시행된 정책들을 무효화하였다. 메리가 자신의 신념과 아울러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가톨릭 신도였듯이, 엘리자베스도 비슷한 이유로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영국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아니라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유효한 것이 되며, 따라서 캐서린이 살아 있을 때 앤 볼린에게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황 바울 4세는 만약 엘리자베스가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헨리의 합법적 결혼을 인정하겠다고 암시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자기의 즉위 사실조차 교황에게 통지 하지 않았으며, 로마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등 아버지가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것이 옳은 조치였다고 확신하였다.

 

이후 종교적 이유로 영국을 떠난 많은 인사들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대륙에서 획득한 츠빙글리 및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치하에 다시 출판된 공동기도서를 보면 그녀의 신학적 포용 정책을 알려준다. “그대의 육체와 영혼을 영생으로 보전하기 위해 주어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니라. 믿음과 감사의 심정으로 이에 참여하고 그대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물론 이러한 이중구조의 목적은 성찬을 상징적 행위라고 주장한 자들과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자들을 포용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영국교회의 교리적 기초로 사용하기 위해 1562년 반포한 “39개 신조에서도 동일한 정책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신조들은 의식적으로 중용을 추구하여 가톨릭 신자들과 극단적으로 교리를 엄수하는 프로테스탄트들만 제외하면 다 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엘리자베스의 재위 기간 말에 청교도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칼빈주의 이상을 간직한 인물들로서 신양성경이 제시하는 순수한 종교생활과 교리들을 실현하고자 애썼기 때문에 청교도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 영국의 종교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더 후기의 일이다.

 

 

3.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역사적 배경

 

영국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자주 영토를 침입하는 영국인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지원을 구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스코틀랜드는 양분되어 일부는 전통적 정책을 고수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영국과 밀접한 유대를 확립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정책의 주창자들은 1502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영국 헨리 7세의 딸 마가렛 튜더와 결혼을 성사시켜 나갔다. 따라서 헨리 8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 두 왕국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다. 제임스 4세와 마가렛 튜더 사이에 제임스 5세는 헨리의 조카였는데, 헨리는 자기의 딸 메리를 제임스와 결혼 시키려 하였으나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전통적 동맹관계로 선회 하여 프랑스의 메리와 결혼을 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스코틀랜드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독일에 유학하였던 많은 스코틀랜드 학생들은 루터 및 다른 개혁가들의 사상과 저서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교회개혁운동에 크게 동화됨으로써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1520년대에 교회 내부에서 개혁을 갈망하는 신부들과 수도사들은 대부분 순교의 장으로 나아갔다. 그중에 한 명이 1528229일에 성 앤드류에서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 1494?-1546) 추기경에게 화형당한 패트릭 해밀턴(Ratrick Hamilton, 1504-1528)이다. 비튼이 너무 서둘러 화형을 집행하였기에 아직 장작들이 마르지 않고 습기가 있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고 한다. 패트릭 해밀턴의 죽음 이후 약 20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은 영국과 유럽으로 망명한 자들도 있고 재산을 잃고 투옥되는 이들도 있었다.

 

해밀턴이 화형당한 지 약18년이 지난 154631일에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의 순교가 있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었던 존 녹스의 스승이기도 했다. 녹스는 그의 죽음에 대해 평하기를 이 복된 하나님의 순교자가 죽은 뒤 사람들은 노골적인 어조로 교회가 벌인 잔혹행위를 욕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스크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순교도 불사하는 개혁의 길을 걸었다. 그들의 순교는 민중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힘이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피는 개혁을 가속화 시켰다. 1525년과 1527년 스코틀랜드의 의회는 대륙으로부터의 프로테스탄트 서적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이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귀족들과 상인, 선원들에 의해 읽혀지게 되었고, 이들이 그것을 전파함으로 박해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1542년 제임스 5세가 사망하였을 때 왕위를 이을 계승자는 아직 어린 아이 메리 스튜어트였다. 이 때문에 권력투쟁이 발생하였다. 헨리 8세는 아직 젖먹이인 공주를 자기의 맏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대부분 친영파였으므로 이 계획에 찬성하였으며, 반면 친불파인 가톨릭은 메리를 프랑스로 보내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자와 결혼시키기를 원하였다. 결국 친불파가 승리하여 헨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중요한 사건일 방생하였다. 프랑스로 보내진 메리 스튜어트가 15584월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하여 16세인 메리는 프랑스의 황비요 스코틀랜드의 명목상 여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합법적인 여왕임을 주장하였다. 당시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국의 엘리자베스가 불법적으로 여왕의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증손의 자격으로 정당한 계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친 가톨릭 정책은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입지를 약화 시켰다. 이 때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즉 1557년 스스로 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섬기겠다고 서약한 회중 지도자들은 그들이 목표하는 바가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들과 유사함을 깨닫고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스위스에 망명하고 있던 녹스에게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한다.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녹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녹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이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 틀을 가진 것이다. 1559년 녹스와 이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은 퍼스(Perth)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 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섭정은 4,000여 명의 정부군과 900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녹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000여 명이었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녹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은 일만 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윈터(Winter) 제독이 156018척의 함대를 이끌고 녹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1560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녹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에든버러 중심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St. Giles Church)를 담임했다. 녹스는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여왕에게 녹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만큼 녹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녹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4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다. 15606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156076일 에든버러 조약에 따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퇴각하였다. 이제 종교 개혁을 저지할 방해물은 거의 다 제거되었다.

 

존 녹스

 

존 녹스의 유년기에 대하여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출생지 또한 이스트 로디언주 해딩턴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퍼드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해딩턴 마을 안에 있는 기퍼드 게이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아버지인 윌리엄 녹스(William Knox)는 농부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싱글레어(Sinclair)가 출신이다. 15463, 성 앤드류에서 위샤트의 순교는 녹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비톤 추기경의 죽음으로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성 앤드류성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1547년 성 앤드류성에 있던 설교자 라우(Joho Rough)와 그의 개혁파 동료들이 녹스에게 자신들의 설교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녹스는 그 때부터 설교자의 길을 가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퇴각 후 1560710일 녹스와 4명의 개혁가들에 의해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녹스의 인도 하에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여왕의 부재와 귀족들의 분열 가운데 녹스와 평민들을 주축으로 1560817신앙고백서치리서4일 만에 만들어졌다. 곧 바로 의회로부터 승인이 되었다.

 

1) 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는 총25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성부(1-5), 성자(6-11), 성령(12-15), 교회와 국가(16-24), 종말(25)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중요한 요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누구든지 이 우리 고백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어긋나는 조항이나 문장을 발견하면,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것을 글을 통해 우리에게 조언해 주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명예와 신실성을 걸고 그에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만족을 주기로 약속한다. 혹시 그가 잘못되었을지라도 그것을 수정하여 제시해 주기로 약속한다.”(서론)

 

2) 치리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6명의 목사들은 교회 행정과 권징 시행에 관한 치리서도 만들었다. 16장으로 되어 있는 치리서는 녹스가 1556년 제네바에서 자신의 교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을 초안으로 하였다. 치리서는 공식적으로 귀족들에게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재산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스는 현재 교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 수입 가운데 목회자들의 사례를 지급하되, 소유권은 종신토록 가진다는 조건하에 서명을 받아 내었다. 1항 교리에 대한 내용을 보면 비록 간단하지만 치리서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이 (교회의)유일한 머리로 명령하여 세우시고 그의 양들이 따르도록 하신 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그의 복음이 이 왕국의 모든 교회와 모든 모임에서 참되고도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것이 필요하며, 그의 복음에 위반 되는 모든 교리들은 사람의 구원에 도움이 안 될 정도가 아니라 정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져서 온전히 배제되어야만 한다.”.....“복음의 선포라는 말로써 우리들은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도 포함하여 이해하니, 즉 그 율법과 선지자들과 역사들, 그 안에서 (신약에 사는) 우리들이 참되게 소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도 지칭하는 것이다.”

 

교회재산은 1560년을 계기로 로마교회가 없어짐으로 교회의 막대한 세입은 3부분으로 지출되었다. 첫째 복음사역의 유지로 지출을 했다. 여기에는 목회자 가족 교육비도 포함되었다. 둘째 전국적으로 교육진흥기금으로 사용했다. “각 교구마다 한 교회, 한 학교라는 녹스의 생각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육증진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셋째 빈민 구제비로 사용되었다. 존 녹스의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이 스코틀랜드의 부흥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스코틀랜드교회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스코틀랜드교회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무엇보다 한글 성경번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성경이 읽혀지기 시작한 때는 1880년대 초부터였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부터 조선인에 의해 성경을 번역, 출판, 반포되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고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중심에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첫 미국선교사 의사 알렌이 1884년 조선에 입국하기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와 맥킨 타이어(John Mclntyre)가 한글로 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조선인을 찾았다. 마침 의주 상인 이응찬, 서상륜 등은 로스를 만나게 되었고 로스는 이들과 함께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하였다. 당시 로스는 함께 성경번역을 한 한국교회 최초의 교인 서상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씨는 5년 전(1878)에 나에게 왔다. 그 때 그는 자살을 하려다가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그보다 앞서서 성경번역을 위해 몇 사람의 한국인을 데려온 일이 있었다. 서씨는 내가 한국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 그의 희망은 오직 내게 달려 있었다. 나는 내키진 않았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자살의 검은 구름 속에 싸여 있던 무신론자가 누가복음을 번역했고 번역을 마치자 세례를 요청해 오는 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당국의 어떠한 심각한 괴롭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조선인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보급되면서 권서들의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에 있는 한인촌을 돌며 성경을 보급했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와 성경을 팔았다. 심지어 1883년에는 평양과 서울에까지 성경책이 전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연구모임도 생기고 자연스럽게 신앙공동체가 생기게 되었다. 신앙공동체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생겨났다. 이 모든 일은 스코틀랜드 성서공의회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과 더 나아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4. 나가는 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순교의 피로 가능했다. 순교자들의 순교는 백성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존 녹스의 설교는 백성들을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하여 주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가능했다.

 

한국교회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스코틀랜드 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산물이다! 개혁교회에 기반한 역사상 최초의 국가, 스코틀랜드! 그 중심에는 존 녹스가 있었다! 개인의 안락은 포기해야 할지라도 끝까지 개혁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준 녹스의 헌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기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무엇이, 왜 위기일까? 성도가 적어서 위기일까? 복음을 붙들고 사는 대신,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 가치관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숙보다 성장에 집중하며 시대를 읽지 못하고 지난 50년의 방식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때에 순교자적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순교자적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치,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금의 시대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이 시대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자면, 한국사회의 위기가 한국교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의 위기는 무언가? 기업경쟁력의 약화, 기존산업의 성장 한계, 아시아 금융위기,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변화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한다.

 

이런 문제들을 안고 '기도해야 할 자'들이 바로, 감신에서 신학을 익히는 '우리들' 아니겠는가!!! 존 녹스를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존 녹스에 의해 쫓겨난 메리 여왕이 쫓겨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존 녹스의 기도는 10만 대군보다 무섭다!"

 

그리고 이 곳 감신에서, 제반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폭넓은 기독교의 지성'을 온 맘 다해 공부해야 자들이 바로, '우리들' 아니겠는가!

 

우리가 신학생의 이름으로 이곳에 함께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연을 자아내기 위한 전초전이리라! 우리는 모두 주 앞에서 'one thing'의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寸刻'을 아끼느라 밤샘을 하고 쪽잠을 자며, 공부에 全力投球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힘써 자기를 위해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time schedule'을 비껴 갈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노라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time schedule'대로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실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온 개신교도들을 인재로 길러낸 곳이 제네바 아카데미(1559년 설립)라고 한다면,

개신교의 사관학교 같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교육 받은 하나님의 인재들이 전 유럽의 색깔을 바꿔 놓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이곳 감신에서 목숨 걸고 全心으로 공부하여 한국교회의 색채를 바꿔 놓아야 할 것이다!!!

 

사회 전반의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겠으나, 그것들의 본질인 영적인 문제가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 수준이 하향평준화 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지난 수 십 년 동안의 방식을 고수하고만 있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훈련과 자기반성 & 자아성찰을 통하여 믿음의 가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

 

 

 

참고도서

중세교회사, 은성, 유토스 L. 곤잘레스

존 녹스의 정치사상, 그리심, 최선

대한성서공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존 낙스의 신학, 예영커뮤니케이션, 황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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