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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감리교 신학대학원 과제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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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M. Div. 3학기 과정을 밟는 중에 수강했던, '기독교교육학 이해'의 과제이다. 벌써 6년이 흘렀다...

 

-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태 옮김/ IVP -

 

 

. 들어가는 글

 

과거에 연연하는 자세를 버리고 과거로부터 배운 것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미래 세대를 세우는 것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목표이다.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공동체는 불확실성이 크게 증폭된 시기, 엄청난 위기와 기회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통찰력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의 미래적 사활(死活)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삶을 관조하고, 지속적으로 영성(靈性)과 사고(思考) 훈련을 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함께 살아나는 마을과 교회를 소망하며 미래 세대를 준비한다는 것은, 나와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 성도들을 포함하여 많은 청소년, 청년, ()중년(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세대, 50~70)들이 하나님의 인재(人材)로서, 조화와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춧돌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목적으로, 우선 새로운 미래의 하나님의 인재로서 준비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함께 숙지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새로운 미래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인재상은 무엇인가?’이고 또 하나는 변화된 패러다임에 맞추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어떤 기독교적 훈련이 필요한가?’이다.

 

미래 세대를 세우기 위해 교육의 바람을 바꿀 것이다. 공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다. 교회는 100여 년 전 조선의 선교사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공교육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교회가 교육을 바로 세워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여 년 전에도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했다. 100여 년 전에도 교회가 했다면 그때보다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충분히 교육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교회가 앞장선다면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 학원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에 덧붙여 미래 인재를 위해서는 교육의 대상을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청소년뿐 아니라 청년과 신중년에게까지 교육의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인재로 세워져야 세상이 변한다.

 

21세기에 진입한 새로운 차원의 4차 산업혁명은 삶의 모든 방식을 재편할 것이라고 한다. 일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선택하는 방식,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 선택의 방식, 의사결정의 방식, 심지어는 쉬는 방식까지 모든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한다.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지만 미래 변화는 우리가 준비할 시간과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자연스럽게 녹아들 리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준비 없는 무방비 상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아직사이의 위기(危機), 우리 모두에게 위험(危險)한 기회(機會)라는 것!!! 이 시점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읽고 있다...

 

. 몸 되는 글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이는 파지(perception), 인지(recognition), (knowing)의 순서로 진행된다. 가장 처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해에서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그것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그 사물의 전체를 알고, 소화하였다고 생각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마지막 단계인 에는 필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대상과 앎의 주체()이다. 앎의 구조 안에 속한 필수 조건인, 앎의 주체가 지닌 주관성에 따라 앎의 결과는 달라진다. 객체와 주체 사이에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말하던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작은 연필 하나도 누군가에게는 필기도구, 장난감, 또는 무기 등으로 인식되고, 사용될 수 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지극히 작은 사물이라도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공동체를 인정할 수 있는 다양성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입장, 지식에 빠져서 주위를 들쑤시는 어리석은 선동가나 아니면 그를 따르는 우매한 관중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받아드리기 전, 먼저 대상이 아닌 앎의 주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떠한 목적으로 지식을 쌓기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보편적인 두 가지의 지식 추구경로를 이야기한다. 바로 호기심(본능적 욕구)통제(무지에서 나오는 두려움, 지식 추구로 인한 안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의 안전과 만족을 위한 지식이 항상 선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21세기에 크게 대두되는 문제가 있다. 지구의 반절을 파괴시킬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핵무기는 지구를 지배하에 두고, 지식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밖에 대하지 못하는 인간들에 의해 발명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위한 지식이, 사람을 위협하는 지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앎은 책임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이다. 호기심과 통제의 목적으로만 지식을 대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하다. 지식의 목적이 개인의 호기심과 통제에 국한된 것이라면, 이는 지식을 사용하여 천박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600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한 아이히만의 사고의 무능성을 지적한다. 정신분석학자들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상적인 사람이 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명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 없음이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타자가 어떠한 상황인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지,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타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가에 대하여 비열하였다. 사랑 없는 마음이 만들어 낸 피해는 어머어마하다. 사랑이 없는 개인의 욕망 -호기심, 통제- 의 실현은 홀로코스트와 핵무기와 같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과신할 때가 많다. 지식을 우리의 통제 하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의 발명과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에게 지식이 우리를 우리 자신도 원하지 않는 목적을 향해 몰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지식이 반대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의 목적으로 실현된 앎은 사람을 살리고, 웃게 하는 일을 해낸다. 지식의 추구가 개인의 욕망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게 될 때, 가려져 있던 앎의 사랑의 역할을 모두가 깨달을 때 세상은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흔히 사람과 동물, 즉 고차원의 영역을 나누는 기준을 생각, 사고의 차이라고 한다. 로뎅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 조각품이 지닌 예술성 때문이 아닌, 인간의 존재성을 생각으로 규명하는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성경 창세기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속성 사랑이 우리 안에도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바라보는 인간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서로 사랑함에 있다. 그러나 세상에 미치는 종교의 힘이 약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이성, 과학적 사고, 합리성 등이 각광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종류의 가치들이 마치 신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이로써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이,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앎에서 필요한 두 객체, 즉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 사이에서의 관계가 사라지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가치를 잃어버리니,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 관심의 영역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었다.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인식론은 소리 없이 우리의 윤리로 탈바꿈한다.” / p.76

 

이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교육이 중요한 것은 한 사람, 개인의 인생과 더 나아가 세상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교육이 바로서지 못하면 사회는 당연히 거짓과 악을 좇아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 세상에는 절대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함을 추구해 나가는 존재이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시대를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맘모니즘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세상에서 돈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행복과 성공을 돈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지구와 인류에 결정적으로 피해를 주는 여러 문제들을 낳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것은 아마 환경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는 비단 한 나라, 한 명의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가해지는 악영향이기 때문이다. 좋은 품질과 싼 가격이 경제적 이익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공장은 경제의 가치에만 눈이 멀어 환경이라는 중요성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는 개인을, 더 나아가 지구 전체를 악화시키는 심각한 문제이다. 비효율, 비도덕의 문제가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순환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성찰이 없이는 내려놓음이 불가능하다. 시야의 한계에 갇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여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길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이제 우리는 지구를, 우리 모두를 위해 사랑의 실재에 접근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저자는 3가지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성경과 기도(깊은 심사숙고와 관상훈련), 그리고 공동체이다. 신학적 접근으로의 사랑으로 세상의 만연한 비효율의 순환을 깰 수 있다. 이는 비현실적인 대답 같지만,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 된다. 인간의 창조목적이자 그리스도의 지식 사랑을 마음에 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지식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신다. ‘’(예수 자신)를 따르라고 명하신다. 이는 자시와의 관계 속에 인간을 초대하신 것이다.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 (What)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진리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다가간 그는 진리에 관하여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핍박하여 서슴치 않고 살해하며, 예수님을 만날 당일에도 그리스도인을 죽이기 위해 쫓아가는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그 앞에 나타나셨다. 바울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Who). 그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그의 이 한 번의 질문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가 예수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니, 그의 인생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변하였다.

 

진리는 삶을 완전히 바꿀 만한 힘을 가졌다.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고 이 책의 내용과 같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삶에서 추구할 가치(진리)를 배우고, 삶의 방향성의 설정함으로 먼저 나를 세우고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성, 다양성의 중요성을 알아 공동의 선을 추구함으로 전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

 

관계를 해치는 지식은 진짜 지식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해악을 미쳤다면 그것은 진정한 발전이 아니다. 과학이 최고의 가치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과연 진리란....?”

 

우리는 곧잘 학습의 범주에 한계를 짓는다. 감성과 사랑, 침묵 등의 가치를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상식적으로 치부하고는 교육의 테두리를 객관성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론’, ‘객관적’, ‘실재이 단어들은 현재 우리의 교육의 지배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험 문제의 답을 위해 정보를 하나라도 더 외우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가르침을 공간의 창조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한다. 가르침은 진리를 향한 탐구이고, 여기서 진리란 인격적 관계속에서 탄생하는 앎이 아닌 을 향한 접근이라고 앞서 이야기하였다. 개인적 앎을 위한 학습은 그 끝이 공동체의 파멸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에서 벗어나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교육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결과를 이루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위해 저자가 말한 공간의 창조가 필요하다.

 

공간의 창조는 추상적인 계념이 아니다. 삶 가운데서 물리적, 시간적 표현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혼잡한 버스 안에서, 다가오는 마감일 앞에서, 압박을 가하는 상사 밑에서 창조적 생각과 감정이 분출할 수 없듯이, 여러 지식으로 가득 채워진 머리로는 정작 중요한 진리를 담을 수 없다. 학문은 탐구의 끝이 아닌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의 창조는 비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쌓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리 탐구의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껏 가르침은 공간을 메우는 것이라 생각해왔지만 저자는 가르침이란 비우는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백지의 상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놓여, 스스로를 비워나가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공간의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는 먼저 침묵에서 시작한다. 내 생각과 자아를 잠시 내려놓음으로 지식의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또한 공간의 창조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생각, 즉 관계 안으로 상대를 초대하고, 또 반대로 상대의 자리에 내가 섬으로써 서로를 열어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함으로, 그들의 경험과 삶이 내 일부가 되는 것을 느낀다. 이렇듯 대화는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자 연결고리이다. 이로 인한 공간의 창조는 개인에게 있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교훈을 남긴다. 관계 속에서 진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았을 때 얻게 된 선한 결과가 많이 있다. 이를테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에게 먼저 다가간다던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던지, 이해되지 않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기꺼운 마음을 품는다던지 등의 작은 시작으로 큰 결과를 얻은 적이 많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는 모든 관계(진리)는 내가 움켜잡던 것을 푸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보편적 생각, 분석, 비판, 이성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의 진리인 순종에 도전해보는 것이다. 순종은 곧 진리와의 관계이자 참된 자유이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말과 침묵의 동행이다. 여기서 침묵이란 내 생각을 멈추고 나를 비우는 작업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와 이성만으로 지혜를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여러 감정을 지니고 창조되었기에, 감정이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큰 모순이다. 창조 그대로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껏 관습적 교육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저쪽 바깥의 세계이며 저쪽 뒤의 과거이며 저쪽 앞의 미래이다. 우리의 현재 순간의 실재는 무시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교실 안에서 발생하는 일을 보는 관점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다. 교실은 앎의 대상과 주체, 앎의 주체와 주체가 만나는 작은 단위의 공간이다. 또한 교실은 아직 서로의 미성숙한 모습을 다듬어나가며 함께 진리를 추구하는 공간이다. 교실은 진리의 공동체이다. 진리는 저쪽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다. 우리의 현재에, 이 실재에 주목함으로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학생(청소년)의 자살률은 높아져만 간다. 수험에 대한 두려움, 앞이 보이지 않는 학업의 압박과 스트레스, 인간관계 문제, 집단 따돌림 등의 많은 상황들이 아이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 진리를 추구해야할 교실 안에서 오히려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바로 진리를 오해하고 이에 관한 방향 설정을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레슬리 드워트의 말을 빌려 진리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한다. “[진리란] 부합(conformity)이 아니라 충실(fidelity)이다. 부합은 밖으로부터 부여되는 의무지만, 충실은 우리 안으로부터 부여되는 의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는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틀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자신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대상을 초대하여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틀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서로의 틀을 존중하며 다양성을 키워나가 결국에 공동의 선을 이루는 것이 학교가 당연히 감당해야할 우선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가르침과 배움에서 진리로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순종에서 발견된다. 순종이란 나의 관계 속으로 대상과 다른 주체를 초대하여, 대상의 인격적 의미에 집중하고 또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이야기한다. 순종은 남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라서 좇는 복종과는 다르다. 노예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분별하여 듣고 바라보며 기꺼이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은 너와 나의 인격적 관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개인의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는 자율적 행위자가 아닌 서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존재이다.

 

먼 미래의 물질적 풍요와 명예의 가치를 학교의 최종 가치로 설정하니, 지금의 교육은 개인의 욕망의 실현을 위한 천박한 것이 되었고 학교는 성적으로 나누어진 등급, 계급을 아이들에게 낙인찍었다. 같은 반에 있는 아이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경쟁자가 되었다. 이 심각한 문제는 학교가 진리도, 진리로 가기위한 방법에도 눈을 감았기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다시 진리와 이에 대한 순종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교육은 인간의 전 인생에 있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바로 잡지 못한 지식추구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사건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능력은 평생에 걸쳐 개인과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사회문제를 예로 들어 강조해보고자 한다. 최근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문제는 이 단어가 그저 순간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흔히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고 이야기 한다. 남성보다 힘이 없고, 연약하기에 보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녀의 차이가 차별을 낳고 이 차별이 혐오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21세기에서 여성이기에 느끼는 두려움 중, 살인이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보며 한 가지 매우 놀란 사실이 있다. 이 와중에도 남자와 여자가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남녀 사이의 골만 더 깊게 만들어 놓고 끝이 났다. 이렇듯 그동안 한국에 등장하는 사회적 시사적 문제들은 해결되어 지나간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며 관심이 줄어들고 새롭게 등장한 다음 이슈에 의해 뒤로 밀려날 뿐이다. 교육이 진리 추구의 길-순종과 사랑-과 이러한 실천의 공간을 만드는 실패하자,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분열과 다툼으로 인한 피해가 커지고 있다.

 

사랑이 없이 행하는 행동은 아무런 이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특히 공동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진리와 순종의 길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 베드로전서 3: 1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 베드로전서 3: 7

 

성경에서는 이처럼 순종과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것을 명한다. 이 간단하지만 명료한 길이 문제의 해결이자 진리이다. 교육이 추구해야할 최종의 가치인 것이다.

 

. 나가는 글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사회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100, 1,000, 10,000개의 건물일까? 아니다!!!!! 100, 1,000, 10,000개의 건물을 건축해낼 수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한 사람'이다~~~ 바로 나로부터,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우선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막혀도 안주하지 않도록 나 자신부터 훈련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훈련의 길을 지향할 것이다. 시대의 바람과 물결을 파악하고 헌신을 이어가며 주어진 시대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훈련할 것이다. 어떻게?!!!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을 읽으며 깨달은 것처럼, ‘가르침배움의 세계로부터 공동체의 이미지를 가져와, ‘변화를 위한 분별의 삶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파커 팔머가 이야기한 교육에서의 공동체 회복,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지적(知的) 삶의 최전선에 서 있는 학자들이 교육자의 삶을 묘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는 공동체의 회복... 그것을 숨어 있는 온전성에 대한 영적 이해의 뿌리와 연결 짓는 저자의 오롯한 마음을 읽었으니, 분별은 가슴으로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사람 안의 마음, 감정, 가슴에 민감한 영적 감수성을 훈련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인간 이해와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한 학문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실제적인 훈련을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의 느낌들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 더 나아가 이를 지속 가능하도록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리고 강철 같은 기도와 순수한 믿음, 자기 초월의 사랑, 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대를 회복할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우() - 과거 집착 -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올바로 예측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 공동체 멤버들 각자의 역량 현실적 능력, 달란트, 잠재적 가능성 을 철저히 분석하게 할 것이다. 그것에서 출발하여 분별이 가능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로 서게 할 것이다.

 

사람들 저마다 삶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자신의 독특한 색채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존재의 목적대로 각 사람마다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공동체를 회복하는 교육, 사랑을 회복하는 교육, 실천을 회복하는 교육의 자리에 나아가리라!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가르침의 자리이기에,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에서 순종의 자리에 머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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