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과 장재호 교수 -
M. Div. 과정의 마지막 한 학기(2020년 3월 ~ 7월)가, Zoom 수업으로 진행되면서, 여러 분야의 많은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그로인해 지식의 반경이 넓혀졌다.
장재호교수님과의 좋은 만남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아름다운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
양자역학의 발전을 목도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는 중에,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의 글이 감리교신학대학 학보지에 실린 것을 보게 되었다.
장재호교수님의 글을 띄워보기로 한다.
※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
한국 교회 내에는 '젊은 지구 창조론'으로 표현되는 창조과학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은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소속된 프라이스로부터 시작된 성서 문자주의 운동으로,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으로도 불린다. 프라이스(George Price)가 '새로운 대격변설(new catastrophism)'을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휘트컴(John Whitcomb)과 모리스(Henry Morris)가 『창세기 홍수』(1961)를 저술한 이후, 창조과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과학적 사실로 간주하기에, 창세기와 다르게 말하는 현대과학의 발견들을 부정한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도 비판을 받지만,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성경은 과학적 내용을 다루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초월적 세계,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를 다룬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되기에 믿을 수 있다면, 성경 말씀이 아니라 최첨단의 과학을 믿으면 된다. 과학은 원리상 자연 세계의 현상을 다루고, 성경은 자연 세계를 창조하시고 관리하시는 초월자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은 본질상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성경을 현대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만, 혹시라도 증명이된다면 더 큰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영원한 진리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 가능한 한 시대의 과학으로 증명이 된다면, 시간이 지나 새로운 과학 이론이 등장하게 될 때, 이전 이론으로 증명한 성경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성경 말씀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천지창조를 말하는 창세기 1장이 과학으로 증명 가능하다면, 예수님의 기적과 부활 사건 등은 믿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창세기 1장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 불가능한 성경 전채에 흐르는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적 원리를 초월하신다. 인간이 발견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원리들일 뿐이다. 중력을 만드신 하나님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중력(표면장력)을 초월하실 수도 있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설득하시는 방식으로 종종 다가오신다.
다음으로 '지적 설계' 논증은 1980-90년대에 미국에서 활발히 논의되었지만, 이 주장은 페일리(William Paley)로 거슬러 올라라간다. 페일리는 영국의 성직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그의 책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신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신을 시계공에 비유했다. 누군가 바다를 거닐다 우연히 시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시계가 우연히 조립되어 거기에 존재하기보다 시계공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듯이, 시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우주가 우연히 존재했다기보다는, 이것을 창조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현대의 지적 설계론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의 측면에서 설명한다. 즉 쥐덫이나 박테리아 편모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의 한 부분만 없어도 전체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진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지적 존재자의 창조의 결과라는 것이다.
창조과학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지적 설계의 주장은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취약하다.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눈먼 시계공』을 통해 페일리의 시계공 논증을 비판한다.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이 말하는 자연선택이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임을 지적하며, 여기에 목적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에 비해 지적 설계론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타당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현대 과학과 직접 충돌하는 반면, 지적 설계론은 목적론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기 때문에 현대 과학과 직접적인 충돌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적 설계론도 창조과학처럼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태초에 한 번 창조하시고, 어딘가에 숨어 계시는 이신론(Deism)적 하나님일 수는 없다. 진화 생물학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종의 99.9%는 멸종을 했고, 계속 멸종과 새로운 종의 출현이 반복되고 있다. 태초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이라기보다 지금도 계속해서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에서 묘사하는 하나님 이해에 더 가깝다. 따라서 지적 설계론은 현대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 과학신학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방향성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이안 바버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의 4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갈등(Conflict)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갈등을 일으키며 공존할 수 없다고 보는 모델로, 성서문자주의와 무신론적 과학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독립(Independent)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본성상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서로 독립된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모델이다. 대화(Dialogue)모델은 통합 모델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과학과 종교가 상호 보완 가능한 질문들을 제기한다고 보는 모델이다. 통합(Integration)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보다 체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모델로, 자연신학, 자연의 신학, 체계적 융합이 여기에 속한다.
존 호트는 종교와 과학 간의 관계를, 갈등, 분리, 접촉, 지지의 4가지 모델로 제시했다. 갈등(Conflict)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화해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분리(Contrast) 모델은 과학과 종교가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교류도 없지만 충돌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접촉(Contact) 모델은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수용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 지지(Confirmation) 모델은 종교가 과학적 사고와 발견을 기저에서 도울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나누어 보면,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갈등 모델에 한정된 주장에 불과하다. 분리 또는 독립 모델에서 말하는 것처럼,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과 신학이 완전히 별개의 학문은 아니다. 과학과 신학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과학신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과의 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진화론을 배우는 중학교 3학년에게 교회에서 창조과학을 가르치게 되면, 이들은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거나, 반대로 세상의 지식을 멀리하고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고립된 신앙인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소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신론자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따라서 과학신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과의 대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현대 과학의 연구들을 받아들여 신학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과 타협해 신학의 본질을 왜곡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을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과학에서 발견한 수많은 객관적 증거들 앞에서 자신들의 왜곡된 주장만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진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커트 놀(Kurt Noll)은 "기독교인이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글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현대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과학과 신학의 건전한 대화는 자연세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보다 명확하고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를 들면, 빅뱅 우주론의 등장으로 우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사역에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는 보통 태초에 초점이 맞춰있지만, 빅뱅 우주론은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즉, 계속해서 창조되고 있는 우주를 경험하게 한다.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새로운 창조'도 영원한 우주를 말했던 기존의 우주론보다는, 시작과 끝의 가능성을 보여준 빅뱅 우주론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그려볼 수 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등장은 성경에 등장하는 시공간에 대한 은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상대성 이론은 객관적이고 고정적으로만 여겨졌던 측정 결과들이 관찰 주체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 중력을 통한 시공간의 휘어짐은 우리와는 다른 시공간에 있는 존재가 우리와는 다른 시공간 개념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라면 더욱 더 그렇다. 상대론으로 인해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공간 은유를 보다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편 90편 4절)."
진화론의 등장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오랜 역사 동안 만물이 수많은 진화 과정을 거쳐 스스로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한 결과이다.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지구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랜드 캐니언 같은 대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진화의 과정은 ,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는 하나님의 계속된 창조 과정의 일부이다. 진화론이 말하는 종의 변화, 우연(돌연변이)의 반복, 자연선택의 고통 등은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과정의 놀라움을 더 잘 보여준다.
화학의 발전은 인간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요소까지도 비교적 잘 설명해준다. 화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티끌'(창 2:7)과 같은 것들이 결합된 존재이다. 화학의 발전은 환원주의자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학적 난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여, 창조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우리는 '티끌'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약 37조 개나 되는 세포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다.
※ 결론 : 과학신학의 가능성과 한계점
창조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서 시작해서, 종말의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말하며 끝난다. 천지만물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 과학은 원리상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증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학의 발전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위대함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물론 과학신학은 한계점도 존재한다. 과학의 발전이 신학적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학적 해석을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이 점차 발전하듯이,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도 점점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설령 일부의 논의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고 해서, 과학신학의 전체 논의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또한 과한신학은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받아들여 신학을 전개하는 것일 뿐, 과학적 탐구가 진실임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과학이 발전하여 이전의 과학 이론이 폐기된다면, 이에 따른 신학 이론도 약간의 수정을 요할 수도 있다.
앞으로 연구가 계속되면서 과학 이론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다. 인류에 대한 화석이 추가로 발견되거나 새로운 DNA가 추출되면, 인류 기원의 시기, 내용 등이 조금씩 수정될 수도 있다. 공룡 화석이 계속 발견되면서 그동안 공룡의 모습도 조금씩 계속 변해왔다. 이런 미세한 수정을 넘어, 빅뱅 초기에 대한 연구 같은 분야는 계속된 연구를 통해 비교적 큰 틀의 수정을 요할 수도 있다. 우주에 대한 연구 중에 혹시라도 외계 생명체를 발견한다거나 다중 우주를 드러내는 증거들이 발견될 수도 있다. 아직은 미스터리인,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의 정체가 밝혀져 우주 전체의 질량과 에너지를 정확히 계산하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과학 이론이 수정된다고 해서 그것이 신학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과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탐구할 뿐,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성경은 과학의 발전과는 별개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최고의 지침서로 남게 될 것이다. 성경이 과학의 잣대에 한정되어 판단되어서는 안 되지만, 과학 이론과 대화를 할 때에, 성경은 더욱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 과학 이론을 무작정 거부할 것이 아니라, 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펴보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주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 물리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과학과 신학의 간(間) 학문적 대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가를 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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