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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I AM THAT'에 관한 어떤 변론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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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2:21-28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우리 안의 의식, 상상력이 그 창조력을 발휘하여 그대로 보이는 현실에 투영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의식의 창조법칙, 우리 안의 '존재의 의식', 'I AM'이 바로 성경에서 의인화로 표현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고기가 아니다. 눈 코 입이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 자체가 의식의 절대법칙으로서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란 무엇일가? 내 안의 하나님 창조주의 현존을 지금 이 순간 몰입하여 함께 하나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의식이 가야할 길, 즉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 욕망을, 그 소망을 내 안에서 믿음 가운데 일깨우고 이미 구한 그것을 받은 줄로 아는 의식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이고 감사와 찬양이며 그것이 참 제사인 것이다.

 

이처럼 아담은 현실 결과 fact들로부터 철저하게 등을 돌린 채, 모든 욕망이 성취된 결과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포효하는 상상력, 그리스도 구원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즉 4차원 원인 세계의 창조의 영, 상상의 인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하나님과의 평안이다. 사실 하나님 진리 자체가 이미 평강 자체이고, 평강의 왕이시기에 우리 인간이 아담을 내려놓고 오직 창조의 원인 세계인 주와 동행하는 삶, 즉 우리 스스로 창조의 주체가 되어 현실 겉모습을 우리 상상력의 종이 되도록 따라오게 하는 그것이다. 이것이 복이기에, 그 복은 우리에게 그대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기가 아니기에 사람처럼 입이 없다. 우리 안의 의식이 스스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 무엇을 성취해야 할지, 의식의 주체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르침, 말씀, 진리의 길, 그것들에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즉 우리 안의 인생 궁극의 욕망, 소망을 우리 믿음의 푯대로 세워야만 한다.

 

'I AM THAT'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우리가 이처럼 아담이 추구하는 현실 반응분석 fact 지상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고, 우리 안에 잠자고 계신 창조의 영 상상력으로 영적 시선을 회복한다면, 그 때 우리의 현실은 주의 권능으로 새롭게 지은 바 될 것이며,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장막'은 우리의 의식 창조의 영이 거하는 우리 아담의 고깃덩어리, 가죽 옷, 즉 가죽으로 만든 성막, 우리 자신을 말한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는 우리 자신을, 즉 우리 안의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 법칙 그대로 올바르게 쓰이도록 해야 함을 뜻한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란 결국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의식의 절대법칙의 올바른 의로운 옳은 방향으로 우리의 상상력 구원자 그리스도가 우편, 오른편, 올바른 편에 영원의 세계인 4차원 의식 시스템 가운데 거해야 함을 뜻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재물, 보화, 금' 등은 현실 세계의 창조 결과물에 우리가 그대로 반응하면서 그것에 최고의 절대 값어치를 부여하는 우리의 현실 반응 의식을 의미한다. 현실이 힘든 상황이든, 아니면 엄청난 성과가 현출된 그것이든, 여하튼 이미 결과 지워진 것들에 상상력이 반응하면, 그 상상력 창조주하나님은 더 이상 현실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영으로 부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간 현실의 에고 가운데 가치를 부여한 모든 현실인식들, 즉 우리의 모든 현실 결과 값들 '보화, 오빌의 금'을 티끌과 돌멩이로 여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렇게 현실의 결과 값들에서 인식을 철수시킬 때 비로소 우리 안의 하나님은 진정한 창조주로 깨어나 일하신다. 우리의 상상력 그리스도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소망을 믿음의 능력을 통해 없음에서 있음으로 불러낼 수 있게 된다.

 

글자 그대로 우리 안의 전능자 'I AM'이 우리의 참 보화 진정 은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우리 아담 안에서 깨어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우리가 진리로서 밝히 알게 되어 영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전능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의 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말한다. 4차원 형이상학적으로 되새겨 보면 될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영적 느낌을 통해서만 통찰하고 교감하며 나눌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전달에 한계가 있기에 성경은 비의적 상징 비유 등으로 숨겨 말하는 것이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사실 기도란 것은 우리 고깃덩어리가 드리는 게 아니다. 우리 안의 인식의 힘, 창조의 영이 하나님 자체이기에, 그 하나님과 합일됨을 우리가 영적으로 느끼며 'I AM'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의인화된 표현일 뿐이다. 우리 아담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으로 말이다.

 

마지막 표현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이것이 비밀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서원을 우리 스스로가 갚아줄 것이라 성경 저자는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 안에서 깨어나 기도하는 주체도 하나님이요, 그 기도를 믿음의 힘으로 창조시켜 현실에 드러내어 갚아주시는 주체도 즉, 욕망의 선물을 부여하는 그 주체도 하나님 즉 우리 자신, 우리 의식이란 의미이다. 분명 "너의 서원을 그가 갚으리라"라고 하지 않고,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라고 의도해서 저자는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고깃덩어리 마인드를 깨뜨려주고자 함이다.

 

마지막 구절이자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이사야 55장 6-11절,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빛은 의식의 에너지, 빛의 알갱이, 양자에너지장을 의미한다. 우리 믿음의 힘으로 무엇을 인식하여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 안의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 선포 그대로, 우리 잠재의식 가운데 심어진 그대로, 현실에서 그것은 역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우리 의식이 그 입술로 내뱉는 모든 관념 생각들을 소리 내어 말하든 속으로 말하든 모두가 우리 안의 'I AM' 하나님의 창조 영이 발산하는 인식에너지이다. 그 생각에너지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온 세상을 적시며 그 생명력을 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헛되이 아무 하는 일없이 도로아미타불 되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함부로 험담하거나 질투 증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영이 스스로 기뻐할 만한 최상급의 관념을 머금어 세상에 발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식의 법칙은 무조건 그 느낌 믿음 그대로 형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적 의미의 만사형통이란 그저 일이 현실에서 좋은 쪽으로 술술 풀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 마음 밭에 심어진 그대로 어떠한 거리낌이나 막힘 예외 없이 법칙이 운용된다는 의미이다. '좌우에 날이 선 검'처럼 진리는 우리가 소망하고 원하는 오른편으로도 또 그 반대인 그릇된 왼 편으로도 날이 서서 그 예리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진리 그대로 우리가 전심으로 세상을 향하여 무언가를 명령한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세상에서 스스로 그러하라고 명령했던 것이 과거에 그대로 그렇게 나타났고,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의 현존이 자각하는 자아관념이 그대로 세상에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아담 인간임을 인식하는 한, 시공간이란 3차원 스크린 가운데 이런 명령은 지속적으로 그 결과를 현출할 것이다.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아무 원인 없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말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시험해 보라!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의 인식이 그 인식 내용 관념들을 현실 세상에 그대로 명하여 현출시키는 바로 이 절대 진리 이 기반 가운데 우리가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하고자 시험해볼지라도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 진리가 진리 됨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될 뿐이니까 말이다.

 

구강과 뼈의 울림을 통한 물리적 소리, 즉 우리의 말소리로서 세상이 그 명령을 받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육체적 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느낌, 영이니까 말이다. 우리 안의 인식의 에너지 파워는 소리 없이 강하다. 이미 스스로 그러하다 느껴버린 자는 결코 그 진위 여부를 외부 사람들과 따지거나 논증하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을 향한 창조주의 명령은 언제나 우리 의식 안에서 결정되고 완성된다. 우리가 현실감 있게 느껴서 인식한 것들 모두는 자연스레 바깥 세상에 현현된다. 우리 안의 하나님, '존재의 의식', 'I AM'은 절대 인위적으로 노동하지 않고 어떤 말소리를 목청껏 내뱉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자신이 어떤 모습이라 느끼며 인식하고 있고 또 무언가를 이미 가지고 있다 인지하기에 스스로의 의심 없는 그 모습과 그 소유들을 그대로 세상에 명령하고 있다.

 

이처럼 만고불변 영원불멸 '현현의 원리'는 성경 속에서 비유 상징 등의 비의적 스토리로 은밀히 표현되었다. 이 신성한 책의 작가들, 즉 그들의 삶의 두루마리 안에서 이미 진리 그리스도로 깨어난 신들은 이미 온전히 깨어난 신비주의자들이자, 마음의 기법에 통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혼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그것을 보존하고, 아직 진리에 눈뜨지 못한 절대다수 고깃덩어리 아담들의 우매한 눈을 피하기 위해, 비인격(非人格)의 원리, 즉 영과 진리를 하나의 히스토리 역사퍼즐 형태로 담아내 남겼다. 오늘날 이 위대한 절대보물이 세상의 성직자들 손 안에 놓이게 되었지만, 애당초 그들은 성경이 마음에 관한 드라마라는 진실을 망각한 상태다. 무지가 시스템으로 무지를 교육시켜 그 무지를 진리로 둔갑시킨 것 아니겠는가? 무지에 덮인 눈으로 성경 두루마리 종이책을 바라보면서 옛날 옛적 그 어느 날 시공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말했던 고깃덩어리 육체 어느 남자들 어느 여자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성경 속 고깃덩어리 인물들을 높이 들어 올려 숭배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성경이란 것이 마음에 관련하여 전하는 위대한 절대 진리 드라마이고, 그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배우들이 단지 우리 의식의 특정한 모습 상태들을 그대로 의인화 인격화시킨 것일 뿐임을 실로 깨닫게 되었을 때만 비로소 우리의 진리안(眼)은 조금씩 그 무겁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종이 두루마리의 본질을 인생 두루마리 가운데 찾아내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고기가 아닌 비인격의 '만물의 창조주체', '인식주체', '생명의 원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인격화되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인 '창조의 원인 세계', '주 하나님'이 인간 아담 우리 스스로 각자 '나'가 존재한다 라고 여기는 그 '나' 즉 '존재의 의식' 'I AM'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그룻된 전통적 세뇌 교리에 덜 얽매여 있고, 또 나름의 영적 통찰, 영감 직관이 보다 좀 더 예리했다면, 그동안 수없이 통독한 문장들 가운데 성경에서 '존재의 의식' 'I AM' '나는 하나님'이란 뜻의 단어들을 이미 수백 번도 더 언급했음을 벌써 일찍이 눈치 챘을 것이다. 즉 성경 저자의 비밀스런 마음을 눈치 챘을 것이란 말이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즉 스스로 있는 자 '존재의 의식' 상상력이 현실 인간으로 하여금 그 모습이 되도록 그대로 3차원 시공간 스크린 속에 투사시켰다는 의미이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육체 이성적 겉 자아를 가만히 내려놓을 때 스스로의 인식이 하나님 창조주 만유의 주재 근원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 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인식의 주체, 그 의식 시스템 밖에는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할 수 없노라

 

욜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요 10:11, 14, 9, 7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우리가 품는 욕망의 대상 관념들을 양떼들에 비유하여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영원 세계의 의식을 'I AM'이라는 문에 비유한 것이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즉 나와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라는 뜻이다. 나의 실체를 자각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이란 말이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I AM'이라는 의식의 문을 통해서 시작된 알파, 욕망은 현실에 그것을 결과물로 투영시킨 오메가로 끝맺는다는 의미이다.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3차원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일인칭 단수 현재 'I AM'으로 존재하는 우리 실체 ‘나’를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 두루마리 종이 안에서는 인간의 '조건 지워지지 않은 존재의 의식'인 'I AM'을 모든 '조건 지워져 나타난 상태' 즉 현실 시공간 3차원 세계의 원인자 즉 창조주 하나님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스스로와 분리된 제3의 존재로서 바깥 현실 결과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고깃덩어리적 시야, 거짓 진리, '그릇된 믿음'을 과감히 버리고서 우리들 각자 '나'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인식', '존재의 의식' 'I AM'이 하나님이라는 진실을 실로 깨닫게 된다면 즉 그 인식이 그것 스스로의 형상과 모양대로 현실 환경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물론 우리 주위 사람들 세상은 황폐한 불모지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변화 혁명을 정말 일구어낸다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I AM THAT'이란 인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은 보다 근원적인 우리 참 자아 'I AM' '모든 존재, 모든 있음의 전부' 하나님과 동체이지만 그 아버지 'I AM'은 우리라는 한 사람 'I AM THAT' 인식상태보다 큰 존재라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우리 안의 'I AM' '하나님' '존재의 의식'은 'I AM THAT' 내가 스스로 무엇이라 인식하는 그 상태와 하나이지만 우리 안의 절대자아, '조건 지워지지 않은 존재의 의식' 'I AM'은 '조건 지워진 상태', 즉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눈을 통하여 우리가 현실에서 육체 고기로 존재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할지는 몰라도 진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하는 힘', '상상력', '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 3차원 고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의식이 분명 사람이 아닌 존재 즉 비인격(非人格)으로서의 현현의 권능이고, 그 인식이란 권능은 영원히 자신에 대한 관념 안에서 스스로를 현실 3차원 스크린 상에서 인격화 시킨다는 것을 진정 깨달아 알게 된다면 그렇게 진리 안으로 깨어난 우리 인식 'I AM'은 더 이상 기존 현실 외부 환경에 쫄거나 두려워하지 않고서 그 현실 스크린 가운데 우리 인식이 스스로 나타내고자 하는 그 상태만을, 궁극의 욕망의 목적 상태만을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취하려 할 것이다.

 

영적 자유의지가 비로소 진리 가운데 이렇게 회복되는 것이다. 즉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권능을 회복하여 잠재의식의 주인이 됨을 의미한다.

 

'I AM THAT'

 

그것으로 우리 인식이 스스로 자신이라 받아들인 자아관념 모습은 외부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욥 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이 구절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그대가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된 것을 인식하고, 욕망하는 그 어떤 것을 이미 가진 것으로 인식한다면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의 법칙은 현현이 일어나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모두가 요한복음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깨어나는 진리는 이렇게 진리의 속성 본질을 포효하며 우리라는 아담 고깃덩어리 무덤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 반드시 부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은 인간이 스스로 나 자신이라 인식하는 것을 현실 삶에서 언제나 부활시키고 외부로 모습을 표출시키는 권능 파워 에너지 생명력이자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진정 소망하는 그 모습이 되기 위해 그리고 원하는 그것을 갖기 위해 자신이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강렬히 느끼며 인식하지도 않으면서 현실 외부 세상에서 노동적 싸움 투쟁으로써 그것을 쟁취하려고 하는 ‘우매한 투쟁’으로부터 지금 당장 등을 돌리라! 그리고 이 불변하는 법칙 진리의 토대 위에서 원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기꺼이 선포하는 'I AM THAT' '깨어있는 신비주의자'가 되라!

 

우리 스스로 구하는 바로 그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믿고 느끼며 의식 안에서 자신 스스로를 주장하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 욕망을 이미 나의 것이 된 걸로 간주해 취하라!

 

우리가 실로 그렇게 한다면 다음과 같은 신비주의자 의 선언을 참으로 이해하게 되리라.

이미 나는 그것이 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인식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한 것이 완벽하게 그 객관적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나는 그렇게 계속 인식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 느낄 것이다. 그렇게 투명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다.

 

'I AM THAT'

 

그렇다. 내가 세상에 명령하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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