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
▎여는 글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의 연속이며 이런 시련을 이겨내려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의견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들 모두, 자신의 존재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만나는 이들에게 늘 이야기해오곤 했다. 나 자신부터, 내 존재의 목적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사랑하며 섬기는 우리교회 성도님들과 이미 공유(共有)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교회 생활 중에 번번이 맞닥뜨리는 ’관계의 문제‘들을 볼 때,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듯싶다...
빅터 프랭클이 강조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 인생의 의미가 이미 부여되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실감하게 된다. 그 의미는 바로 사랑, 대상을 향한 사랑이 그 의미 자체라는 깨달음이, 수많은 관문들을 통과하면서 더욱 짙어진다. 내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미 의미가 주어져 있음이 분명히 깨달아진다. 그 의미란 바로 ‘자기 이탈 & 자기 초월적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우리들 모두가 말하면서도 자기초월이 그렇게도 어려울 수가 없다...
섬기고 있는 우리교회 성도님 몇 분들이 관계의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때로는 교회를 떠나고 있는데도, 이렇다 할 해결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나와 목회자인 남편을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를 요즈음 깊이 고민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내게, “너는 지금 뭘 원하니?”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주님! 저는요... 성도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기뻐함을 누리고 그 기쁨을 가정과 사회에서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어요...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하늘가는 길을, 성도들과 함께 걷고 싶어요...”
우리가 원하는 바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던가!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이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며 우리 행동과 태도가 흘러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금 주님이 내게 가장 원하는 것을 물으신다면,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게 하늘가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를 위해 여러 방법들을 강구(講求)하는 중에, 빅터 프랭클의 책들을 읽게 되었다.
▎몸 되는 글
프랭클(Viktor E. Frankl)이 정신분석과 개인심리학에서 가져온, ‘모든 인간의 생각, 정서와 행동의 기저에는 추동(推動)이 있다’는 가설이, 나에게는 참 중요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는 쾌락 욕구의 원칙이 그 추동이고 아들러(Alfred Adler)에게는 권력 욕구가, 그리고 프랭클에게는 ‘의미 추구’가 추동이라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심리학의 흐름과 전(全) 발전과정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의지를 발현시켰기 때문이다.
프랭클의 저서들 속에서, 자신이 종교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론에는 종교적 신념들이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이론인 로고테라피에는 유대인의 탈무드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 사상은 인간은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각각의 사람은 인생의 고유한 과업을 위해 소명(召命)을 받았고, 고통 ‧ 죄책감 ‧ 불안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프랭클은 『심리의 발견』에서 불안신경증에 대한 원인들을 전격 부인하면서, 근대 심리학의 근간이 되는 의견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우리가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거나 불안이 서구 문명의 전형적인 질병이라는 이야기들을 학문적 문제제기가 아닌 쓸데없고 싱거운 수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신경증이 생겨나는 원인도 정신적 충격이나 혹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즉 정신적 상처가 되는 경험을 한 바람에 불안신경증이 생긴다는 것을 부인한다. 트라우마나 감당하기 힘든 어떤 경험이 사람의 정신을 온통 상처로 뒤덮을 수 있는지, 장기간에 거쳐 해를 미칠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성격 구조에 달린 것이지 경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환경이 인간에게 얼마나,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의 글을 쭉 읽어 나가면서, 마음의 상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보았다.
☞ 상처는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떤 상처를 겪었는가!’보다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있다. 상처가 행복과 성장을 위한 자원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인 삶의 원천이 되어 불행을 전염시키는 병균이 될지는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상처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불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도 하며 불안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왜곡된 관점을 견고히 구축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 삶에 응답해야 한다.
심리학이 여기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고통의 기억을 없애주거나 끔찍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해 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상처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주는 것에 있다. 자기 인생의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 준 상처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불행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한 번 고정된 관점은 변화되기 쉽지 않다. 그러기에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불행에 대한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다. 불행에 대한 의미의 전환은 우리에게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상처의 궁극적 도달 지점은 상처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에 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뜻하지 않던 소중한 가치들을 얻을 수 있다. 삶의 만족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리적인 환경이 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가’이다. 의미의 전환을 통해 내면의 판단 기준과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
하지만 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겪는 ‘관계의 문제’를 보면서, 프랭클의 의견만을 따르기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이론’에 더 깊은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이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어린 시절 양육되는 과정 속에서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아프기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상처 받은 영혼은 내면의 고통을 피하려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찾게 된다. 자신만의 방어와 전략이 더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춰갈수록 본질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상처 받은 영혼은 깊은 불안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성격으로 나타난다. 우리 내면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상처로 인해 변형되어 나타나는 성격은 만 6세까지 형성되고 확정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개인의 내면에 있는 6살짜리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와 맺었던 관계의 방식으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결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돌봄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빅터 프랭클의 책들을 대할 때,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고생하는 교회 성도님들과 무엇을 나누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물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신앙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복음전파와 구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인 이웃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이웃, 사회, 국가에서 평화를 이루는 기능도 당연히 중요한 기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애(自己愛)적 인격장애를 가진 성도님들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평가가 나오는 경우에는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갈 때 진심으로 조언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주변에 부추기는 사람들이 포진하기 때문에 약점을 보완하거나 강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힘들게 된다. 또한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진 성도님들은 불안정한 인간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평소에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으로 활동을 하면서 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때 마음이 많이 어려워진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경계선(borderline)이라는 표현은 신경증(neurosis)과 정신증(psychosis)의 경계선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용어는 이분법적이고 판단적인 용어로 간주되어서 사용하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진 구성원의 경우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모습이 공존하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한 패턴을 종종 보인다. 간혹 충동적이거나 폭력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지도자에 대한 음모성의 소문을 퍼뜨려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운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정신인성적 신경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삶의 의미, 목적 그리고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로고테라피의 목적이라고 프랭클은 말하고 있다. 로고테라피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창조’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로고테라피 치료사들은 각 개인의 실존에는 최고의, 궁극의 의미가 주어져 있다고 보고, 그 개인만이 할 수 있고, 책임져야 하며, 이루어내야 하는 궁극적 의미, 특별히 ‘소명’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나아가 그들은 개인이 맞닥뜨리는 각 상황에는 ‘단 하나의 참 의미’가 있으며, 그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이 참 의미를 해독해 내는 것이 그 사람의 의무라고 믿는다. 상황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 참의미는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지?’가 아니라, ‘이 상황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식’이 갖고 있는 직관적 통찰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신념에 있다. 하이데거처럼 프랭클도 자유를 ‘자기 좋을 대로 할 수 있음’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특정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자유로 보았다. 우리는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의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랭클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 가치는 일이나 예술품 등을 통해 발현되는 것과 같은 창조적 가치다. 예를 들어, 직장을 잃게 되는 상황은 새로운 진로를 발견할 수 있는 창조적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치는 ‘경험적 가치’로 자신의 세상을 더 깊이 받아들임을 통해 발현될 수 있는데, 사랑과 같은 것을 통해 더 증대되는 가치라고 한다. 로고테라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세 번째 것으로 ‘태도적 가치’다. 사람은 상황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의미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영혼의 병을 치료받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하나님과 영생과 절대 평안에 대한 무한한 갈증과 열망을 저마다 지니고 있다. 절대 평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인격의 성장과 성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병적인 증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으며, 자주적이고 건설적으로 자기 생활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를 갖추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인 ‘삶의 의미’를 찾고,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의미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로고테라피는 외부에서 비롯된 고통은 물론 내부에서 비롯된 고통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프랭클은 인간의 ‘영혼’은 물리적인 경험이나 심리적인 경험을 견뎌내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심리적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선택들은 고통에 증가되는 위험성을 줄여준다고 말해 주고 있다. 우울증을 수치스러워 하게 되면 우울은 더 심해지고, 심해진 우울은 더 심한 수치심을 가져오게 되는데, 의미 찾기는 이런 끝없는 악순환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로고테라피를 통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시사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무의미를 ‘근원적’ 심리문제의 증상 중 하나로 보지 말고, 직접적으로 진지하게 다루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감 자체가 사람들의 문제의 근원일 수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것만큼이나 미래에 대해서도 우울이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공동체의 평화와 성숙을 이루기 위해 공감과 직면을 균형 있게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도달한다. 공감은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원하는 욕구이고, 직면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공감만 제공하고 직면이 없을 경우에는 공동체의 변화와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 성도들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상담과 훈련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공감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많은 신앙공동체의 평화와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인격이 건강하지 않으면 교회가 고난 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갈등이 된다. 우리 공동체가 갈등하고 있다. 자신(나)의 불안을 당신(너)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불안을 느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 자기나 자기 가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건강이 위태로워졌을 때, 중요한 시험을 치르기 전, 인생의 큰 결단을 혼자서 내려야 할 때, 낯익은 상황에서 혼자 떨어져 나가 낯선 곳에 혼자 남게 될 때 누구나 불안해진다. 그러므로 불안한 것 자체가 모두 병적이고 어리석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아니다.
또한 불안의 원인이 항상 분명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경증의 불안은 신경증적 장애의 다른 증상과 같이 원인뿐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 행동이 내 속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는 목적을 가진 일종의 경계신호와 같은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불안은 신뢰의 부족에서 생긴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 부족뿐 아니라 삶과 숙명에 대한 신뢰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익숙하고 보호 받는 세계,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며 아버지처럼 든든하고 확실한 터전을 떠나 별안간 낯선 세계에 내던져졌을 때 사람은 불안하고 외롭고 때론 절망한다. 불안은 인간에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 미지의 운명과 맞서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불안의 불쾌감에서 우선 벗어나기를 원한다. 괴로운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불안은 피함으로 오히려 불안의 포로가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불안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로고테라피가 ‘심리치료의 대체물이라기보다 보조물’과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해준 프랭클의 의견을 짚어보게 된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는 상황이 아무리 구속적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항상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실존적 신념을 발견했다. 누구든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 수 있지만, 결국 어떻게 살지는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이 말하는 실존을 고찰해 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본능과 충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양심, 종교심 등이 잠재해 있어서,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들을 이끌어 내어 자신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위하여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의미를 찾고 그것을 위해 결단하는 것은 각 개인의 “의지의 자유”에 달려 있고 그 결단 여하에 따라 삶의 참다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재에 대한 감정이 형성된다고 한다. 미래는 며칠 뒤에나 우리에게 찾아오는 막연하고 희미한 어떤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 꿈과 계획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어떤 것을 바라거나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부분이 오늘의 나를 계속 이끌어 나가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즉,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현재가 행복하고 불행해질 수도 있듯이 미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도 우리의 현재가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걱정은 주로 미래를 다룬다. 걱정은 외로운 행위이다. 걱정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며 초조하고 긴장하게 한다. 걱정은 희망을 잃고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우리가 현재의 삶을 건강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미래에 관한 비생산적인 걱정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불안은 미래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불안하게 한다. ‘불안’하면 미래를 대비하게 되기 때문에 불안은 부정적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불안이 우리를 더 굳건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을 성도님들과 나누도록 하겠다.
< UN이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 >
* 0세 ~ 17세 : 미성년자
* 18세 ~ 65세 : 청년
* 66세 ~ 79세 : 중년
* 80세 ~ 99세 : 노년
* 100세 이후 : 장수 노인
한편, 『심리의 발견』의 내용 가운데, ‘노화의 정신위생’, ‘원숙의 정신위생’을 읽으면서,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120세의 순간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성도들과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UN이 평생연령 기준을 앞의 표와 같이 재정립한 것을 함께 보면서, 마음가짐을 더욱 새롭게 가지자고 이야기하겠다. 성공에 대한 몰입이 아닌, ‘의미’라는 새 잣대로 연장된 중년의 인생을 다시 보고 살아가자고 말이다. 아울러 이웃과 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능력, 그리고 물질을 의미 있는 것에 투자할 수 있도록 방향을 다시 설정해 보자고 성도들을 권유하겠다.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며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처해진 상황마다 가장 온전한 행동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상기하며, 직면을 통해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려 드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는 것,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깨우침을 주는 것, 나만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검토해 보도록 요청하는 것, 자신의 현재의 처지와 관계를 성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지금 있는 나’보다 ‘더 나은 나’가 되고, 어린아이 상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는 것도 자기초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은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초월이라고 불렀다. 내가 나의 상태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더 쉽게 마음을 연다. 나 자신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자아에 익숙한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이해하고, 자아를 내려놓을 때, 더 깊고 더 높은 실재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보면,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되고 그러다가 성장해 가고, 자기개방을 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 안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고 열어가야 더 성숙한 온전한 관계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 끝에 우주가 있고, 사회가 있는 수평적 관계에서 초월자와 수직적 관계를 맺어야 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초월자에게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 참 자유를 느낄 수 있고, 실재의 완전함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영적인 성장을,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정말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계를 허물고 다시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맺는 글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만 해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 의미는 구체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내는 삶을 통해 내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분별은 가슴으로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사람 안의 마음, 감정, 가슴에 민감한 영적 감수성, 그리고 갈망을 훈련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인간 이해와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한 학문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실제적인 훈련을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의 느낌들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 더 나아가 이를 지속 가능하도록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리고 강철 같은 기도와 순수한 믿음, 자기 초월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대를 회복할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우(愚) - 과거 집착 -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올바로 예측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 공동체 멤버들 각자의 역량 – 현실적 능력, 달란트, 잠재적 가능성 –을 철저히 분석하게 할 것이다. 그것에서 출발하여 분별이 가능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로 서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사역을 펼치고 싶은 것인가?
인류에게 오랫동안 신비한 영역으로 남아 있었던 인간정신세계를 연구하여, 정신세계에 있는 여러 길을 찾고 정신현상에 대해 이해하며, 우리의 정신세계가 가지는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려 바른 치유의 길을 걷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아마도 모든 학문의 마지막 대상은 인간정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인간', '인간정신의 내면세계', '무의식의 세계', '자기형성', '타락의 성향을 지닌 현재적 자기', '인간의 변화', '인간이해', '인간정신의 자동성', '정신의 통제', '영원한 존재', '삶의 수동성', '엄마됨', '아빠됨', '남편됨', '아내됨', '지향적 삶', '본래적 자기', 등등의 의식이 깊어져, 자기 자신과 자기 삶에 대한 통제성이 높아지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적 자기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이 실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일까'하는 물음에 관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우리 내면의 세계에 원인적으로 잇닿아 있다.
'인간 이해'에 '사랑'의 인격적 요소를 더하여, 치유의 길로 이끌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주된 정체성은, 사랑이 담긴 인격적 행위가 있어야 함을 꼭 마음에 두고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인생 나그네 길을 가는 길동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 상담' 또는 '인생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누는 만남'을 가질 것이다.
바른 ‘영혼 돌봄이’가 되어, 자기 외적 환경은 변함없이 그냥 안으면서, 내적 환경인 자기 마음을 변화시켜 점차 의연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향했던 마음의 방향을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향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뇌를 도와준다는 뜻에서 목회자와 전문의(專門醫)는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경증이나 성격장애, 정신병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성도를 도우려면, 현대의학의 성과인 임상정신의학의 진단과 치료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신학연구와 더불어, 정신건강의학과 심층심리학, 아울러 에너지심리학에 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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