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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Secrets of the Lost Mode of Prayer)』 북 리뷰, 천 칠백 년 간 잠들어 있던 신과 소통하는 언어

by tat tvam asi 2024.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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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렉 브레이든 지음, 황소연 옮김 / 김영사 -

 

이제 곧, 카리브해 지역에 위치한 섬나라 '그레나다'에서 웨슬리컬리지 교목으로 사역할, 아들 전도사의 신학 논문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ὃ ἐὰν θέλητε αἰτήσασθε καὶ γενήσεται ὑμῖν.)

예수님께는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이신 것을 아셨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어디에도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천지간을 가득 채우고 계신 분임을 아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아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용하시도록 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권능과 연결 되어 있음을 의식-그것을 그리스도 의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하며 사셨기에, 항상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셨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도 하나가 되신 것이다.

우리는 천지간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연결점을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으로 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룰 때 가능하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이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 14:26). 성령은 예수의 영,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 하나님의 영이시며, 만유(萬有)를 포괄하는 영이시다. 전능자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온 인류를 구속하셨으며,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며, 모든 우주 위에도 계시고 우주를 관통해 계시며, 모든 사람 안에도 계시며 하늘과 땅을 주관하고 계신다.

성령,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와 사랑의 영이며, 우리를 해방시키고 용기 있게 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고 모든 것을 잘 인내하게 해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자신과 연합시켜 하나님과 본래의 관계로 돌아가게 하신다. 우리를 신령한 지혜로 채워 이 세상과 우주 만물의 신비와 모든 깊은 신령한 것까지라도 바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인간 본성을 물질적 속박에서 해방시켜 신성으로 환원시키신다.

그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때로는 극적인 방식으로 환상을 통해서, 때로는 덜 극적으로 우리의 꿈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경건 훈련과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내적으로 “자극하거나” “인도하심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때로 성령님은 평안과 감동함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심으로 말씀하시기도 한다.

요한복음은 인간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신성의 회복’으로 안내하며, 진정한 자신을 보고, 기억해 내고, 깨달아가면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베풀고 보살피는 인간 본연의 타고 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것을 독려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근원적인 창조력이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진 이후부터 그 창조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영이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은 사방천지 어디에나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접속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실제적인 현존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령이 거기에 아니 계신 것과 같다.

주의 영은 주의 영을 깨달아 아는 곳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밀은 '의식'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활동을 의식한다면, 그 때 그것은 우리에게 현실이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의 권능과 연결 되어 있음을 의식(그리스도 의식)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사시며 사랑과 조화, 완전함을 실현하셨다.

영적인 의식, 그리스도 의식이란 모든 면에서 보이지 않는 무한한 힘, 존재의 근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마음속의 공간을 무한한 선(善)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울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성령께서 그 생각이 씨가 되어 그에 맞는 결과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다. 어쩌면 진정한 ‘우리 자신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 마음속 열망이 실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95%가 우주를 창조한 신비로운 힘의 존재를 믿고 있고, 그 존재에게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의 해결이나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를 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명 간절히, 지속적으로 기도해왔는데 많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람들은 큰 의구심을 갖기도 하고 자신의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탓하기도 하며, 혹자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원망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서 지구 곳곳을 여행하고 20여 년 간 고대 종교문헌부터 현대의 과학 자료까지를 연구하여 되찾았다는 기도의 작동 원리를 잠시 소개해 보려 한다.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의 저자, 그렉 브레이든은 현대인에게 잊힌 고대인의 기도 양식, 즉 만물의 에너지장과 소통하는 언어를 되찾기 위해 티베트 중부의 어느 사원으로 22일 간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 사는 승려들은 4세기 경 성경 판본과 함께 서구 문명에서는 대부분 사라진 기도 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문서와 전통 속에 대대로 보존되어온 ‘잃어버린’ 기도 양식은 어떤 특별한 기도문이나 표현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감정에 의존할 뿐이다. 특히 이 기도는 더 높은 근원을 향해 무기력한 심정으로 도움을 간청하기보다는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느낄 것을 권장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우리를 세상과 연결하는 에너지장에게 ‘말을 거는’ 것은 바로 이 응답받았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감정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세상은 물론 삶과 관계를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의심을 떨쳐내고 감정의 언어로 기도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누구에게 빼앗길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우리의 일부가 깨어난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이다.

이 기도는 기도가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한다. 고대인들은 이런 감정을 통해 우리가 창조의 힘, 곧 ‘신의 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 들어 현대 과학은 ‘신의 영’이 일반적인 에너지 형태와는 다른 에너지장이라는 것을 재발견한 듯하다.

‘신의 영’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어디에서나, 언제나 존재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막스 플랑크는 이 에너지장의 존재가 물질세계를 책임지는 위대한 지성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이 힘 뒤에 의식과 지성을 가진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한다.”그러면서 그는 “이 마음이 바로 모든 물질의 매트릭스”라고 결론짓는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이를 통일장(Unified Field) 등의 용어로 언급하면서, 플랑크의 매트릭스가 사실상 지성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고대인들이 암시했듯이, 이 에너지장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한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언어는 우리 모두의 아주 일반적인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느낌과 감정의 경험이다.

마음에 일어나는 특별한 느낌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4세기 경 편집된 성경이 보급된 이후 사람들에게 잊힌 기도 양식을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느낌과 감정을 기도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도는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2천 여 년 전 고대 그노시스파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기록된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번역본(요 16:24)에는 바라는 바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기분에 흠뻑 젖음으로써 기도에 힘을 부여하라는 권면의 말이 있다.

“동기를 숨기지 말고 진솔하게 요청하고, 이미 응답받았다는 기분에 젖어들어라!”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긍정적인 바람에 수반되곤 하는 의심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나그함마디문서(1945~1946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로, 그노시스파의 성서사본과 그것을 해석한 주석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예수는 양극단을 오가는 마음을 극복하는 힘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다음, 의심을 떨쳐내기만 하면 우리가 “산아, 움직여라‘라고 외치면 산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분야를 연구하여 여러 저서들을 펴내고,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Temoieton Prize)후보에 올랐다. (그렉 브레이든,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황소연 역, (경기도 파주시: 김영사, 2021), 188~191.)

기도를 하나의 ‘행위’로 여기면,
기도를 멈추면 기도의 효과 또한 멈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기도로 여긴다면,
기도는 짧은 시간 동안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20세기에 발견된 고대 문서들을 보면,
기도는 행위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감정이 기도이고 우리는 언제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아람어로 된 에세네파의 고대 문서를 현대어로 해석한 번역본을 보면, 기도에 대한 기록들이 왜 그렇게 모호해 보이는지 그 이유를 새롭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원본이 수 세기에 걸쳐 재번역 되면서, 원저자가 선택한 단어와 의도가 왜곡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원래의 생각을 압축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를 원본과 비교해보면, 핵심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곧장 똑바로 (...) 내 이름 안에서 구하면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동기를 숨기지 말고 응답에 둘러싸여 구하라.
너희가 바라는 것에 에워싸이면 기쁨이 충만하리라.”

응답에 ‘둘러싸이고’ 바라는 것에 ‘에워싸이라’는 구절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응답 받았을 때의 충만감을 진심으로 느껴야만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이 내용을 양자물리학과 연결시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플라시보다』 조 디스펜자 지음/추미란 옮김 - 샨티 - 를 참고해보면,

양자물리학자들은 양자 세계 속의 아원자 물질을 연구하다가, 뭔가 매우 기묘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양자 세계 속의 아원자 물질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 것이다. 즉 뉴턴 물리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보일 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법칙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원자보다 작은 양자 수준에서 물질의 존재는 순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은 한 순간 여기에 있다가, 다음 순간 사라지고 없다. 물질은 단지 하나의 경향성, 확률, 혹은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양자 수준에서 절대적인 물질적 존재는 없는 것이다.

 

​양자 우주에서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아원자 입자들을 관찰하는 자신들의 행동 자체가 그 입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입자들이 계속해서 있다가 사라지고 또 있다가 사라지고 하는 이유는 이 입자들이 모두 사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양자 에너지장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 또는 확률의 배열 위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전자에 집중할 때만이 그 전자가 실제로 그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에 따르면 물질은 우리가 관찰할 때까지, 즉 우리가 알아채고 의식하고 집중하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도 나타날 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의식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라져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물질은, 물질로 나타나고 에너지로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실제로 초당 7.8회 반복한다)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 그리고 관찰자인 인간의 마음이 물질의 행동과 출현에 그렇게 밀접하게 관여하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양자 역학적인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의 미세한 세계에서는 주관적인 마음이 객관적인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음이 곧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아원자 입자들이 파동이나 에너지 형태로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주의를 기울이는 그 순간 관찰자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입자 또는 물질로서)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무한한 수의 가능한 현실들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고 싶어 상상하는 일들이 시공간 너머 양자장 속 어딘가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관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를 이런 원리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열린 우리 영혼의 간구를 들으신다. 내면 깊은 곳에서 아버지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망을 이루는 힘이 자신을 통하여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의 영혼 은밀한 것에 거하시는 아버지를 보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하나님께 맡기고, 단지 구하는 순간 이미 얻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아버지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생각을 고정할 때, 구한 대로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고 이루어진 일에 대해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좋은 것만을 구했기에 좋은 것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아뢴 모든 것이 영혼 중심의 바람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까지 아낌없이 부어주실 것이다. 그분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나 붓지 않나 나를 시험해보아라”

예수 안에서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가 구하는 소원이 우리 영혼의 토양 속에 씨앗으로 심겨져서 생기를 부여하는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싹이 터서 현실로 활짝 피어나게 된다. 성령의 역사로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초미의 관심사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아버지(근원적인 우주에너지)와의 '하나됨'이다!

다음은 『뇌파진동』이라는 책에 인용된 내용이다.

 

☞ ​우리 민족의 3대 경전 중에 하나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성기원도(聲氣願禱)하면 절친견(絶親見)이니

자성구자(自性求子)하라, 강재이뇌(降在爾腦)시니라.”

이 말을 풀이하면 이렇다.

"언어나 생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해서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아라. 너의 뇌 속에 이미 내려와 계시느니라."

『뇌파진동』의 저자는 세상에서 깨달음을 정의한 가장 짧은 단어가 바로 '강재이뇌(降在爾腦)'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 전에 이미 천지만물이 하나의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삶의 근원적인 답이 바로 '뇌'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재이뇌(降在爾腦)', 즉 하느님이 뇌 속에 내려와 계신다는 말은 삶의 근원적인 해답이 이미 우리 뇌(腦) 속에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나의 생각에는, 저자가 아마도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표현을 대신해서'뇌'라는 신체기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의식'과 '뇌'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상태를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깨달음은 우리 뇌 속에(나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의식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우주에너지와 통하는 것이요, 우주의 정보장(Information Field)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에너지와 공명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참자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우주와 하나라는 신성(神性)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근원적인 힘과 연결되기 시작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위대한 영혼'이 깨어나고 세상을 포용하는 거룩한 마음이 솟아난다. 근원의 에너지와 활발하게 소통할수록 사랑과 지혜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도 깊어진다. 또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성(神性)한 에너지가 이미 우리의 뇌에 내려와 있으며,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뇌파를 통해 교류할 수 있다(사실 나는 '뇌'라는 표현보다는 '의식'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신비이다!

 

저자는 말한다. 뇌의 원리를 아는 창조의 주체로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뇌에 직접 입력하라. 이 때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그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넣는 것이 좋다. 따르고 싶은 성공 모델이 있다면 그 모습을 참고해도 좋다. 가령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직장에 출근하여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뇌에 입력하라. 자신이 앉아 있을 사무실의 풍경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까지 영화를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보라!

 

​뇌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기만 한다면, 뇌는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라고 느끼며 그에 맞는 뇌파를 발신한다. 결국 '에너지 공명 현상'에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과 사건, 에너지 등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뇌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보물상자를 가진 것과 진배없다.

 

그대에게는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는 뇌가 있다! 원하기만 하면 뇌 속에 잠재된 무한한 지혜를 향해 언제든지 조언을 청할 수 있다.

『뇌파진동』을 읽으면서 기도의 비밀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급해 보았다.

 

다시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된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사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이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질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이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예수님께는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아들 전도사의 논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이신 것을 아셨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어디에도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천지간을 가득 채우고 계신 분임을 아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아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용하시도록 한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권능과 연결 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사셨기에, 항상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마치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며 그와 대화하셨다.

 

​바로 이러한 내적인 은밀한 관계가 예수님을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불이나 지진이나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고요한 음성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도 하나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우리가 영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 알고 있는가?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이 계시고 영혼 속에서 작고 고요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영혼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사물이나 사건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눈이 뜨이고, 혼란했던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정리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일을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들을 침묵 속으로 가지고 오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바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감을 느끼거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지 말고, 자신의 은밀한 골방인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 안에서 모든 권능과 힘과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고 있는 제단을 발견하라!

 

그대 안에 선한 소원이 있는가? 마음에 소원을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대의 선한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필요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창조해 놓으신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제한에서 해방되어 풍성한 자유를 누리기 원하신다.

 

나와 그대는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 없으며 따라서 바람직한 환경과 필요한 것들을 창조해낼 수 없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동안 나와 그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그것을 드러내는 대신 우리 스스로를 껍질 속에 가두어버리고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꽁꽁 묶어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소원을 완전히 표현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수 있고,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의 눈을 뜨이게 해주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찬영전도사의 논문과 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완전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천지간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연결점을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열린 우리 영혼의 간구를 들으신다.

내면 깊은 곳에서 아버지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망을 이루는 힘이 자신을 통하여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의 영혼 은밀한 것에 거하시는 아버지를 보게 될 때,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닿게 되어,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 안에 신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신성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창조력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생각에 젖어있었는가? 어떤 에너지를 뿜어냈는가? 내가 생각하는 바가,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대의 생각을 모두 ‘사랑’으로 바꾸라! 그럴 때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창고(寶庫)가 열린다.

 

​온 우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신이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깨달을 때,

자신이 사랑 받는다는 것을 알 때 두려움이 물러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결국 사랑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아끼신다. 그의 마음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리신다. 하나님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우리를 향해 움직이며,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바삐 움직이시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시면서도, 자신이 손수 흙을 빚어 생기 불어 만드신 우리를 늘 아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극진한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 이곳에서 ‘나’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 기분 좋은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말고 음미하며 즐거워 할 수 있다!

 

웃고 즐거워하며 기뻐하자!. 삶을 너무 무겁게 가져가지 말고 가볍게 느끼고 잘 웃도록 하자!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를 통해 흐르고 우리를 감싸며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붙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 그 자체가 되어, 두려움 없이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올바로 깨닫기만 하면, 흥분되고 커다란 모험이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보호하시도록 나의 궁극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게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저 나 자신이 ‘사랑’이 되기만 하면된니다.

 

매 순간을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백지로 보고, 그 순간순간마다 내 안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 마음의 소원을 찾아 그것을 기쁘게 하는 것, 스스로의 기분을 다운되지 않게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배워서, 우리도 자기 스스로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삶이 즐거워지고 활기차며 우리 자신 본래의 장엄함에 닿을 수 있다.

이 장엄함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세상의 모든 일은 참으로 흥미진진해지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큼 커지고 넓어질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진행 중인 완전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진행 중인 완전성’으로 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무한한 우주 안에서 모두 제각기 다르면서도 하나도 빠질 수 없는 각각의 부분들임을 깊이 깨닫게 되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one)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임’(Oneness)을 알게 되고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분리되어 나왔다가 결국에는 다시 전체(Whole)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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