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성해영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종교와 신비체험에 관한 강의였는데, 참 재미있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를 나누어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 책의 도움이 컸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몇 년 전 늦깍이 신학생으로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영성심리학과 더불어 다방면의 책들을 촘촘히 읽어가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1. 심층종교로 가는 길
진정한 종교를 찾아서
종교에 대한 정의로 많이 활용되는 것은 루돌프 오토와 폴 틸리히의 정의이다.
오토는 종교는 엄청나며,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의 체험이라고 정의 내린린다. 이는 경외심, 압도적인 것, 타자성, 매혹적인 것과 같은 특성들이 통합되어 있는 엄청난 실재 앞에서 우리 인간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는 뜻이다. 폴 틸리히의 경우 종교를 궁극적인 관심이라 말한다.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여기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장 궁극적인 것은 죽음, 삶, 신과 같은 것이다.
특별히 저자들은 종교란 인간의 영성, 나아가 인간성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시대적 갈등과 불화를 넘어서는 통합적인 종교가 오늘 우리시대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속적인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나아가 종교적 세계관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을 건설적으로 통합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종교학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한다.
이들은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궁극적으로 체험이라 보았다. 종교적 체험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 네 가지 특성이 있는데,
첫째는 궁극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체험,
둘째는 그것이 지·정·의를 포함하는 인간 전존재와 관련된 체험이라는 것,
셋째는 인간의 다른 어떤 체험보다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체험이라는 것,
넷째는 행동을 불러 오는 체험이라는 것이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윌리암 제임스는 신비체험의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불가형언성,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앎의 특성으로 신비체험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적인 앎을 준다는 것,
셋째는 수동성으로 신비체험은 본인이 의도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실 때 가능하다는 것,
넷째는 일시성으로 변형된 인간 의식상태의 하나인 신비적 합일은 일시적인 상태이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오강남은, 종교의 핵심이란 다름 아닌 궁극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성해영은, 종교는 깨달음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고, 나아가 신비주의라는 개념은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체험, 다른 말로 신비적 합일에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깨달음' 체험에 뿌리를 둔 종교를 지칭하는 것이 '심층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2.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
모든 종교에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가 있는데, 사도 바울이 어린아이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 표층종교라 하면 장성한 자의 신앙은 심층종교라 말할 수 있다.
고전 13:11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먼저 표층종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문자주의적으로 문자의 표면적 뜻에 집착한다.
둘째,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즉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내가 잘되기 위함이다. 즉 기복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심층종교의 특징은 문자를 넘어서 더 깊은 뜻을 찾으려는 것이다. 즉 속내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심층종교는 지금의 나를 벗어나 '참나', '큰나'로 부활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신성(神性) , 혹은 불성(佛性), 인성(人性)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창 1: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점에 있어 종교적 발달 과정이 있다면 ‘작은 나’는 죽고 ‘더 큰 세계관을 지 나’로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달리 말하면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의 차원으로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헌금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헌금을 하는 목적이 복을 받기 위해 혹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기 위한 선행이라 생각하면 문자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헌금의 중요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마 25:40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결국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분별하는 차이가 있다.
3. 경전은 무엇인가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서양 속담에 ‘목욕물은 버려도 아이를 버려서는 안된다’ 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아이란 바로 문자주의적 표층종교 밑에서 발견되는 심층종교이다. 종교의 껍질은 버리되 아이, 즉 종교의 진수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경향은 전통적인 종교인들이 경전의 연구에 집착함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25년 미국에서 있었던 원숭이 재판이다. 당시 테네시주에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금하는 법이 있었는데, 고둥학교 교사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 끝에 벌금 100달러를 물게 되었다. 근본주의적 종교인들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화론이 성경 내용과 문자 그대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뜻하지 않게도 '종교가 인간의 합리성이나 현대의 과학적 발견을 무시하는 엉터리다'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의 심층적 차원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이 버려지면, 종교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에 기초한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더더욱 화해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는 다 같은 이야기이다. 사실 종교적 체험을 표현한 문자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문자 자체를 진리로 여기는 표층적인 문자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의 진리가 상충될 수밖에 없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과 저쪽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을 문자로만 보면 서로 다른 게 불가피하고, 나는 옳은데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다르므로 상대방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층종교 차원에서는 말에 숨겨진 깊은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말 자체는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달라 보이는 이야기를 해도 그 속내에서 통하면, '그래 맞다'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종교 간의 싸움은 각각의 종교 안에 있는 표층종교끼리 서로 싸우는 것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싸운다는 것은 맞는 표현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와 기독교의 근본주의가 싸우는 것이다.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일수록 배타적이다. 한국 기독교의 95%는 근본주의자, 문자주의자라고 한다. 신앙이 처음에는 대부분 문자주의에서 시작하지만 문자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문자주의는 문자의 표피적인 뜻에만 머무르고 더 이상 가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그릇된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종교가 심층적인 면에서는 서로 대화할 수 있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쓴 경전들을 문자 그대로 시대를 초월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면, 문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이 불가피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내부에서주차 표층과 심층 차원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이 자라면서 더 깊고 넓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신앙은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을 억지로 표층에 머물도록 한다면 결국 종교에서 상처받고 떠나기 십상이고, 심할 경우 그 종교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도 한다. 표층에서 심층으로 가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기 때문에, 한 종교 내부에서도 심층과 표층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기독교나 이슬람의 역사에서 신비주의자들이 탄압받았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신비주의자들을 심층종교인들로 이해한다면, 그 사람들은 제도 종교가 경전을 다른 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고 억누르는 것을 그들의 체험에 근거해서 반발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표층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심층에 들어가려는 사람, 들어간 사람, 하느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이단시했고 지금도 그렇다.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더 넓은 맥락에서 보는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절대자와의 하나됨', '歸一', ' 不二' 등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로 종교는 신, 영혼 또는 초자연적 존재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으로서 종교는 신앙, 의례 및 공동체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인간 경험의 한 형태이이다. 그럼으로 심층종교는 종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대조되어, 보다 포괄적인 종교 정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신앙은 종교의 핵심 요소이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와 가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의례는 신앙을 표현하고 공동체 의식을 조성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예배, 기도, 의식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공동체는 종교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이제 새로운 시각은 종교가 단순히 신념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실천과 관계의 문제이다. 종교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서로 연결하고,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심층종교는 깨달음과 영성에 중점을 두고서, 궁극적 실재를 깨닫고 자신과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심층종교는 종종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경전이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표층종교는 종종 문자 그대로의 믿음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표층적인 사람들은 문자에 매여 있기 때문에 서로 조금만 다르면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갈라선다. 그들은 경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그 안에 있는 교리를 따른다. 이처럼 표층종교는 의식(儀式)에 중점을 둔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는 종교의 한 형태이지만 매우 다르다. 표층종교가 종종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지는 반면, 심층종교는 통합과 조화로 이어질 수 있는 미래의 종교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역사 속의 심층종교와 표층종교
과학, 표층종교와 충돌하다
기독교 역사를 예로 들면, 4세기 이전에는 기독교에도 심층적인 차원이 분명히 있었다.≪도마복음≫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심층적 차원을 배제해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화시켜 버린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전까지는 표층적 측면 만으로도 기독교가 견디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세계관의 급격한 확장을 가지고 왔다. 이에 기독교의 반작용으로 근본주의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종교가 양날의 칼과 같게 되었다. 잘 사용하면 종교만이 줄 수 있는 유용함과 날카로움이 우리 것이되는데, 잘못 사용하면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심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지식이 확대될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라도 표층종교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또한 현대가 종교에 대한 정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의 선택과 접근이라는 차원에서도 열려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는 종교가 이제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표층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심층으로 가야 한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시원함을 맛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심층종교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도마복음≫의 표현을 빌자면,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에 두 명'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맹률이 97% 이상이었던 그 당시와 비교할 때 오늘날은 거의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스승을 직접 만나지 못하면 배울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고 더 깊은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8~9세기에 동서양이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등장한 비교종교학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 종교를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다.
비교종교는 종교에 대한 시각을 넓혀줄 뿐 아니라, 종교의 비교를 통해 종교의 심층 차원도 알려준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가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한 말은 진실이다.
문자주의, 근본주의, 표층적 차원의 종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더욱 유연해져야 한다.
5. 심층종교와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마술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모든 종교에서 찾을 수 있는 경험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초월적 또는 신성한 것과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이 경험을 설명할 수 없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심층종교는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다. 심층종교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반면 표층종교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믿음을 강조한다.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해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 'Mystismus'는 일반적으로 영매, 유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과 같은 초자연적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을 지칭한다.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를 'Mystik'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로 구분한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대가로 알려진 칼 라너는 21세기에 기독교가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다. 기독교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신비주의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심층종교란 한마디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성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우리가 종교의 심층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여러 가지 통찰들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신비주의적 통찰이 있다. 그런데 심층종교라는 말은 분명 엄격한 의미의 신비주의 보다는 조금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층는 단지 신비적인 합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인 종교성이나 깨달음이 각각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의 심층과 표층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고차원에서 바라보면 자신의 예전은 모두 표층이라는 것이다. 심층이 드러나는 순간 이전의 층위는 모두 표층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표층/심층 개념이 신앙이 나날이 깊어지고 확장된다는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어느 시점부터 표층과 심층이 구분되는지 꼭 집어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비주의에도 길이 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첫째는, 자의식으로서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왜 이런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둘째는, 자기의 모자람을 없애고 ‘사랑을 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이다.
셋째는, 이런 연후에 이른바 빛을 보는 ‘조명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를 통해 내면적 통찰과 직관이 가능해지는 깨침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이다. 온 세계와의 합일, 모든 만물과의 합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나도 없고 남도 없는 주객이 일치하는 주객을 넘어서는 단계이다.
신비주의의 대가들
에크하르트는 신성과 신의 개념을 구분하였다. 그는 신비적 하나 됨의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신비적 하나 됨의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완전한 신의 초월성과 자족성을 신성의 개념으로, 그 이전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관계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측면을 신으로 개념화 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에크하르트는 신비적 결합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신을 지워내기를 갈구하였다. 그 점에서 그는 신과 인간 사이의 도무지 넘기 힘든 이원성을 상정하는 통상적인 기독교 신학을 넘어 서게 된다.
종교의 표층차원은 개인의 ‘믿음’을 강조한다면, 심층종교는 ‘깨침’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할 때 회개는 원문에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의식의 변환' 곧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 기독교에는 표층만 아니라 심층적인 차원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심층으로 가는 과정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다.
6.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동서양의 모든 종교에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다. 동양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동일성(identity)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활발했던 반면에, 유일신 전통이 강한 서양 종교에서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종교사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서양 종교에서는 표층과 심층 간의 갈등이 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깨침을 강조하던 영지주의 전통이 초기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매도되어 탄압되는 바람에 신비주의 전통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뒤를 이은 서로마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영성은 성공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반면 위 디오니소스의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보다 활발하게 살아 있었다. 이슬람의 경우도 표층종교가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수피즘이라고 하는 독특한 신비주의적 전통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렇지만 서방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주류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유대교는 이슬람교나 기독교만큼 종교가 정치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제도화되지 못한 탓에 신비주의적 흐름이 탄압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고, 표층과 심층 간의 갈등이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대표적으로 카발리즘이 있었고, 근대로 들어와서는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띤 하시디즘이라는 신비주의적 전통을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동양으로 눈을 돌리면, 불교와 힌두이즘은 대표적인 신비주의 전통이라 부를 수 있다. 특히 동서양의 교류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힌두이즘의 비이원론적 베단타 전통이 서양의 영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교의 가장 심층에 신비주의 전통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동양은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서양은 합일보다는 신랑과 신부와 같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신화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오만이 아니라 자기가 없어진다는 겸손의 극치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신을 단순히 사랑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바울이 삼층천을 경험한 경험일 것이다.
고후 12:1-4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수피즘 역시 신에게 흡입되는 것을 지향한다.
또 심층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지만, 심층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것도 있는데, 동방정교회의 ‘예수기도’가 대표적인 것이다. 반복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 외우는 수행법인데, 하루에 3천 번, 그러다가 6천번, 나중에는 1만 2천 번을 반복한다. 그리고 나면 자동적으로 기도가 튀어나오게 된다.그리고 계속 이것을 외우다 보면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절대자와 합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이 자체로 표층인지 심층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동기나 의도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속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얼마나 깊게 들어가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 참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동양이 궁극적 실재와의 동일성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는 데 반해, 서양 종교사에서는 비록 신비적 합일체험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이 어떻게 다르고, 이 관계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물론 이것만으로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구분해서는 안 되지만 동서양 종교사에서 '신비적 합일'과 '신비적 동일성'이라는 두 차원의 긴장 관계로 나타난 적이 많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쉽게 비교해 보자면, 동양 전통은 신비주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흐름인 데 반해, 서양은 신비주의적 합일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양 종교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인 신과 인간의 동일성을 곧바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스레 받아들여졌다. 즉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 신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근원적 동일성 주장이 통상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힌두이즘의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선언이나 동학의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동일성의 주장이다.
종교적 상징과 신비주의
'신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신을 존재(being)로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같은 레벨에 불과하다. 결국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고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으므로 결국 절대적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심층종교에서는 신을 존재라 하지 않고 비존재(non-being)라 말한다. 다른 존재와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이라는 뜻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없음[無]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빔[空]이라 이야기한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이런 궁극적인 실재를 ‘없이 계시는이’라 표현하였다. 이처럼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표현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중세의 신비주의자 니콜라스 쿠자누스는 '대극의 통합'이라 표현했다.
7. 깨달음으로 가는 길
신비적 합일체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다. 깨달음은 하나의 길이나 방법에 국한되지 않으며, 개인의 필요와 선호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깨달음의 길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다.
· 명상: 명상은 마음을 조절하고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명상이 있다.
· 수행: 수행은 자신의 삶에서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 연구: 연구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된된다.
· 교사 찾기: 교사는 깨달음의 길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지침, 지원 및 영감을 제공한다.
깨달음은 목표가 아니라 여정이다.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여정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 의식의 변화를 깨침과 깨달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깨달음'은 단계적이고, '깨침'은 항아리가 깨어지듯, 팡! 하고 터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삶을 등산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을 조금씩 오르다 보면 확 트인 경관을 볼 수 있다. 깨달음과 깨침의 끝이 있는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아하!"를 연발하며 오르다 보면 가끔씩 "와!" 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좀더 극적인 깨침의 순간들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때 우리는 신비에 합일할 수 있게 되고 심층종교로 나아갈 수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7개 방>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의 성에서 처음 방도 아니라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깥마당에서 살고 있는 처참한 삶을 산다. 여기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분주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성벽 내부에 있는 보물을 알아 볼 여유조차 없다. 그래도 더러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료하지마느 그들의 기도가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라도 정말로 하나님께 가깝게 나아갈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성 안쪽에 있는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겨서 그리로 들어간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덧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명심하고, 영혼의 성 밖의 삶은 결코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둘째 방에서는 사람들의 좀 더 큰 힘을 얻기 시작한다. 영적 길을 계속 가기 위해 하나님의 것들을 추구하고 기도를 통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셋째 방에 이르면 우리는 사람들 눈에 착한 사람,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에는 우리가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내면의 성에서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문지방에 서 있는 셈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느냐 혹은 우리 자신의 이성을 믿는 입장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방으로 들어가면 여기가 바로 신비주의적 경험의 초기 단계에 해당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는 대신 신을 더욱 의존하며 신뢰심을 가지고 그의 품으로 들어간다. 이 단계의 방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이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묘사해 줄수 없다. 노력이나 애씀의 방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의 방인 것이다.
다섯째 방에서 하나님과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유명한 누애 비유를 사용한다.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양분을 먹고 사는 누애와 같아서, 우리가 완전한 신뢰 상태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고치를 틀고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건의 보호막 속에서만 우리는 그전에 없었던 가벼움을 지닌 나비로 태어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벌레였을 때 하던 일, 천천히 실을 뽑던 일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비는 이제 날개를 가졌다. 날 수 있는데 어찌 꾸물거리며 기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여섯째 방에서 영혼은 하나님과 약혼관계에 들어간다. 하나님은 결혼 직전에 영혼을 조금 더 시험하려 하신다. 영혼은 더욱 큰 사랑을 받지만, 시련도 그만큼 더 커진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겪게되는 '영혼의 어두움 밤'이다.
일곱째 방에서 완전한 평화와 안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혼인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영혼이 그 자신에 대해 죽을 때 그 사람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여러 가지 사건이나 시련이 아직 다가오지만, 이런 것들은 그 사람 주위에서 일어날 뿐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데레사에 의하면 처음 셋째 방까지는 인간의 노력과 일상의 은혜로 이를 수 있지만, 나머지 네 개의 방은 오로지 신비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을 때 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때 기도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뜻에 더욱 가깝게 나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9. 심층종교의 경전 해석
문자주의적 경전 읽기와 영지주의
초기 기독교가 성립할 시점에 '영지주의'라는 흐름이 있었다. '영지'를 '깨침'이라 본다면 '영지주의'는 '깨침 중심 주의'라고 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영지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완전하게 달ㄴ 종교는 아니었고, 기독교의 심층 차원을 발전시켰던 흐름을 말한다. 영지주의에도 각각 기독교, 유대교, 그리스적 흐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즈음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복음서이지만, 2세기 무렵의 물질세계를 악으로 보았던 이원론적 영지주의적 흐름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도마복음≫식 영지주의는 한마디로 깨달음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은 물질을 배척하지 않는다. 거기 나오는 예수님은 자기가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말을 한다. 물질세계를 죄악시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종교학계에서도 '영지주의'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당시의 다양한 전통들을 망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있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그러한 논쟁이 의미가 있겠으나, 깨달음 체험과 그 체홈이 주는 비일상적인 람을 영지(靈知, gnosis)라고 정의한다면, 이러한 주장을 핵심으로 삼는 일련의 종교적 운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운동이 경전의 깊이 있는 해석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는 종교 텍스트를 읽을 때 네가지 다른 해석의 차원을 제시한다.
첫 번째가 문자적 해석이고, 두 번째는 심리적, 세 번째는 영적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신비주의적 해석이다. 고대 당시 유행하였던 4원소론에 따르면 땅, 물, 바람, 불의 차원으로도 상징화된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바람과 같은 의미)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이런 얘기는 흙 차원과 물 차원을 넘어선, 바람과 불로 주는 세례가 있다는 이야기이고 경전을 읽을 때 바람과 불로 주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도록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지주의 전통뿐 아니라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전통헤서도 비슷한 해석의 차원을 이야기한다. 경전을 읽을 때 문자적/표면적으로 읽기,비유나 은유적으로 읽기, 마드라쉬식으로 읽기, 신비주의적으로 읽기 등으로 나눈다. 유대교에서는 미드라쉬의 해석이 아주 중요하다. 예컨대 구약 성경에 모세가 '물을 갈랐다, 여호수아가 물을 갈랐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를 탐구한다. 결국 물을 갈랐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했단는 말과 같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는 말이 있다. 그 당시는 파란 하늘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물을 갈랐다는 이야기이고, 물을 갈랐다는 것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경우같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신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식으로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빗대어 읽는 법을 미드라쉬적 독법이라 했다. 예수 탄생 때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모세 출생 당시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도 모세처럼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푸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 카발라 전통에 의하면 이런 해석 방법도 최종적인 해석방법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경전을 읽을 때에는 그 읽음으로 인해 나와 하나님이 하나 되는 신비적 체험을 유도할 수있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런 식 독법을 '소드(sod)' 독법이라 했다.
이와 비슷하게 선불교와 같은 전통에서는 경전의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읽는 이들의 깨침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불립문자라고 하여 경전의문자적 뜻에 매이지 말라고 한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때문에 손가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리켜지는 달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층종교 혹은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은 모두 이 점을 강조한다. 경전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그 말에 담긴 속내를 궁구해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심층종교의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첫째, 경전의 문맥을 고려해서 읽는 법,
둘째, 경전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며 읽는 법,
셋째, 경전의 내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 방법이 있다.
왜 경전을 잘못 읽는가
일반적으로 종교 창시자의 종교체험과 종교적 통찰은 창시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경전이라는 텍스트의 형태로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창시자가 사라지면서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 생기고, 이 과정에 해석에 따라서 종교의 표층과 심층이 분리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이 아쉬워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표층과 심층간의 구분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종교 창시자가 도달했고 설파하였던 심층적 가르침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프린스턴대학의 종교학 교수 중 하나인 '일레인 페이즐스'는, ≪도마복음≫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린 학자인데, 깨침 중심의 영지주의가 사라진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라고 지적한다. 영지주의 같은 심층종교는 자기 속에서 신을 찾기에,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럴 경우 제도 종교의 중개 역할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에 당시의 주교 등 성직에 있는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다. 중간 상인 입장에서는 직거래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자칫 자기들의 수지타산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영지주의 같은 심층종교가 지하로 숨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정치적 이유라는 것이다.
10. 한국의 심층종교
대안종교로서의 동학
우리나라에서도 '하나 됨'을 강조하는 종교 전통이 있었다. 또 우리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전통들이 서로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학은 유불선뿐만 아니라 당시에 서학이라 불리던 기독교의 영향도 흡수해 대단히 통합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동학은 대중 종교의 측면도 강한데다, 깨달음이라는 심층적 차원의 종교성도 풍부하게 지닌다. 나아가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이 개인의 깨달음만을 강조해 사회적 측면을 도외시할 가능성이 큰 데 비해, 동학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현실 참여적인 경향도 강하다. 요컨대 한울님의 뜻이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현세 지향적 의지와 더불어, 보든 인간의 내면에서 한울님을 각자가 발견해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성향 역시 명확하다. 퀘이커와 유사하게, 동학 역시 놀라울 정도의 균형 감각을 여러 모로 갖춘 훌륭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인간과 궁극적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상대성이라는 두 축을 아주 잘 결합하고 있다.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인간이 곧 한울님이라는 동일성 주장과 더불어 한울님을 내면 깊숙이 모시고 공경할 것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또 여기에다 다른 사람들은 한울님으로 존중하라는 가르침을 함께 펴고 있다.
우리나라의 심층종교 혹은 심층적 종교인 한 분을 꼽는다면 다석 류영모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분 가르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제나, 몸나, 곧 탐진치(貪嗔癡) 삼독에 찌든 지금의 나에서 해방되어 참나, 얼나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얼나는 곧 '하나님과 하나 된 나'이다.
대안적 영성이라 할 때 우리가 모두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기본적인 방향성과 정신을 살려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심층종교는 불교, 유교, 기독교, 천주교, 무속 등 다양한 종교가 혼재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심층종교는 단일한 종교 체계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 속에는 우리 존재의 근원과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고 본다.
한국의 심층종교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의 심층종교는 개인의 내면을 강조한다.
· 한국의 심층종교는 개인의 내면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국의 심층종교는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을 중요시한다.
· 한국의 심층종교는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를 강조한다.
자연과 우주가 하나이며, 우리는 자연과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도마복음에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속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이 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 속에 있으므로 내 스스로도 의젓한 자유인의 삶을 살고 이웃도 하나님 대하듯 대하라는 의미이다.
11. 영성과 지성의 통합
열정과 이성 사이
지성의 끝은 결국 자신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성이 갈 수 있는 최고점에서 그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탁 놓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이를 지성과 감정의 차원에 적용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깊어질 때 종교적인 열정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이 지성에 의해서 보완되고 균형 잡아 나갈 때 더 깊은 신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지성은 말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앎을 가능케하는 힘이라고 본다면, 그 힘은 단순히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이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다.
신이 창조적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지성을 인간에게 부여해 신과 창조된 것들이 경이를 알게 해주었다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이성과 직관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앎의 능력을 갖겠다는 인간의 하나님의 뜻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심층종교와 지성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설명을 잘하고 설명을 잘 받아들이면 이것을 신앙이 깊을 것으로 보는데, 심층종교란 결국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성과 자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첫 걸음이다.
·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후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
· 다른 사람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대해야 한다. 영성과 지성의 통합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다른 사람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12. 미래의 종교
뉴에이지(New Age), 어떻게 볼 것인가
서구권에서는 “당신은 종교적인가? 라는 물음에 나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 라는 답변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 말은 표층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제도화된 종교에서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고, 표층종교를 벗어나 심층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영적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나타내내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들이 뉴에이지와 관련되어 있다.
뉴에이지는 사실 서양의 용어이다. 서양에서나 '뉴'이지 동양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대적으로 뉴에이지냐 올드에이지냐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표층이냐 심층이냐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 종교는 뉴에이지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해 놓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다가 이 이름을 붙이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런 태도는 종교적 매카시즘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비판하고 싶은 것에다가는 덮어놓고 뉴에이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 운동은 미국과 유럽지역에서 이미 화석화된 표층적인 제도 종교에 반발해, 종교의 심층적인 차원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제도 종교 속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영성을 찾겠다는 대안적인 시도로 뉴에이지가 등장했는데, 많은 기성 종교 교단들은 그런 문제의식이나 맥락을 무시한 채,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모두 싸잡아 비난할 때 이 용어를 차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서양에서 뉴에이지라고 하면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뉴에이지 운동을 통하여 서구권에서는 기독교의 심층적 차원을 재발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균형이 필요하다. 예컨대 전통적인 제도 종교는 수천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영성 추구가 지나치게 개인화될 경우 발생하는 어려움을 잘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는 지혜들을 축적했다. 그런데 뉴에이지 운동이 전통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만 초점을 두다 보면, 개인의 체험이나 개인의 영적 성취 혹은 우월감만을 강조하는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또 개인의 영성 추구가 자본주의적 시스템과 결합될 경우, 물질적인 성공 등이 영적 활동의 주된 목적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크다. 그저 물질적 풍요만을 약속하는 각종 자기계발서가 범람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럼으로 제도라는 틀을 통해 개인을 보호해 줌으로서, 영적 수행 과정에서 나타날 여러 부작용들을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즉 개인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뉴에이지 운동 나름의 장점과 필요성을 살리면서, 뉴에이지가 지나친 극단화로 치달아 사회적 · 집단적 차원을 도외시해 영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개인의 자율성은 충분히 확보하되, 제도가 갖는 장점 역시 잘 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뉴에이지가 이런 차원에서 다른 종교를 올바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또 뉴에이지에 속했던 사람들이 1960년대에는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면, 1990년대와 2천 년대가 되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 주류가 되었다. 그 사람들의 안목은 기독교만 보던 시각에서 한층 넓어지면서 전 지구적 관점과 간-종교적(inter-religious)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폴 니터 같은 학자는 '종교적이라는 것은 곧 간-종교적인 것이다(To be religious means to be interreligious)'라는 말을 한다. 또 신에 대해 논할 때에는 기독교 전통만을 가지고 얘기해서는 안 되고, 신을 얘기하는 다른 종교의 신관을 섭렵한 이후에 자신의 신관을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종교를 말하는 것은 마치 자기 집 뒷마당만 파고서, 지구를 다 안다고 하는 엉터리 지질학자와 비슷하가는 것이다.^^
자기 경전만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하는 주장은 여전히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진리가 '특정언어'로 적힌 경전에만 들어 있다는 생각은 아직도 강력하다. Ⅰ
심층종교에서 바라보는 종교의 참모습
심층종교로 들어가면 언어의 비중이 작아지고, 언어의 이면을 보기에 언어의 ‘속내’나 참뜻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이에 관련하여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류의 책들은 표층종교로 말미암아 종교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종교의 참된 모습이 아닌 단지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런 공격을 이길 수 있는 방법도 결국은 종교의 심층적 차원을 살려 내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말은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에서 해석하자면 경건에 나타난 사건을 진리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서 주고자하는 참된 의미, 내적 변화나 사랑의 정신과 같은 것을 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구현하라는 뜻이다.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그럼으로 심층종교로 들어가기 위해서 말씀을 잘 듣는 것이 필요하다. 그 후에 깨달음이 오고, 그 다음에는 깨달음의 열매를 타인과 나누려는 결의를 한다. 이런 노력 없이는 심층으로 들어 갈 수 없다. 그리고 빠르게가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의 길은 희생의 길이 아니라 걸어가는 자체가 즐거움의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신이 나는 것이다. 무얼 꼭 하려고 명령을 받고, 안 하면 벌을 받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삶이 종교적 삶이라면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종교적인 삶도 결국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무슨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종교적 삶도 신이 나야 한다. '너 이거 안 하면 지옥 간다'고 하면 당연히 억압이고 고통이다. 그러니까 심층종교는 종교를 신나는 종교로 되살리는 것이다. 상벌에 관계없이 자기의 수행이 나날이 깊어져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발견하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리고 이 여정 끝에서 자연스럽게 참나를 발견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면 정말 신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표층에서 심층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발전을 막을 수도 없지만, 발전하도록 강제하거나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심층종교는 세계를 하나의 얼개로 본다. 표층종교는 세상을 개별적으로만 본다. 예를 들면 종이가 종이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비와 구름이나 햇볕 등 나무를 비롯하여 나무를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월감에 기반한 관점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중요하다. 집을 예를 들면 집이 존재하기 위해 창이나 문 그리고 다른 요소들이 함께 할 때 아름다운 집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13. 심층종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종교에서 구원이라는 문제를 빠뜨릴릴 수 없다. 표층적 차원에서 구원이라 한다면 대부분 지금의 내가 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다음 세상에서도 잘 되는 걸 의미한다. 즉 지금의 나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 표현을 따르면, 몸나, 제나가 잘되는 것을 말한다. 심층종교에서는 지금의 나, 즉 몸나, 제나 혹은 일상적인 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이기적인 감정이라든지 편협한 생각들을 벗어나 참나, 얼나, 큰나라고 표현되는 새로운 나 또는 진정한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층적 기독교를 예를 들자면,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신의 불멸성이 그대로 내 안에 체득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죽지 않듯이 나도 죽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심층 기독교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표층종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말과 같이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서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내 속의 신과 신의 불멸성을 아는 질적으로 바뀐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영생이라는 단어가 갖는 본래 의미는 '새로운 세대의 삶'이다. 어느 면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옆으로 계속 뻗어가며 살려는 마음을 끊고 위로 새로운 삶을 찾아 솟아오름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원과 관련해서 살펴볼 때, 한 가지 기억할 필요가 있는 점은 더 깊어질수록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몰두해 현세에서 이웃과의 삶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타인과 함께 나눔으로써 지상천국을 구현하려고 애쓰게 될 거라는 것이다. 구원은 체험을 통해 참된 본성을 체득하는 개인적인 사건이자,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의식은 당연히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의 동정이나 자비가 컴패션(compassion)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패션(Passion)이라 부르는 것은, 남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이야 말로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또 덧붙이고 싶은 것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데, 라틴어로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한다. 3세기부터 내려오던 주장인데 중세에 들어와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 확정되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때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구원은 지금의 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 보는 것이 상당수 심층종교인들의 견해이다. 적어도 지금의 이기적인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장되는 것이 참된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데 본다면 결국 천국과 지옥이, 현세와 내세가 따로 있지 않고 통합된 것이야말로 심층종교의 공통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천국과 지옥의 얘기를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마치 지옥과 같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노력해 더 나은 곳, 곧 지상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대승불교의 사례를 들어 조금 더 살펴보자면,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어서 더 이상 육도로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열반에 이를 때까지 거듭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겠다는 보살의 서원(誓願)이 바로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 심층적 구원이 아닌가 싶다.
결국 천국과 지옥이, 현세와 내세가 따로 있지 않고 통합된 것이야말로 심층종교의 공통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천국과 지옥의 얘기를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마치 지옥과 같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노력해서 더 나은 곳, 곧 지상천국으로 만들기 이해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중 받는 개벽된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은 심층종교의 특성을 분명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한 가지 예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웃사랑이라는 대의에 지나치게 매달려, 자칫 타인의 자율성을 무시한 재 종교적 가르침을 전달할 수있다는 점 말이다. 즉 내가 느끼는 기쁨을 당신도 맛보면 좋겠다는 의도는 좋은 것일 수 있지만, 현실에 적용할 때에는 대단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나만이 참된 기쁨을 알고 있다는 오만과 우월감에 빠지기 쉽고, 자칫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데 왜 내 충고를 안 받아들여"라는 독선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도 크다.
자신이 느낀 기쁨을 타인도 누리길 원하는 태도는 분명 훌룽하다. 그렇지만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종교를 선택하는 일을 비롯해 신앙 생활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자신의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인데, 자기가 앞장서서 타인들을 지도하고, 심지어 타인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강압적으로라도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심층종교적 차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다.
종교의 심층적 차원에 들어가면 결코 내 종교만 옳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폴니터 같은 학자는 종교 간의 관계에서 너의 종교를 버리고 나의 종교로 대체하라는 이런 식 태도를 두고 '대체 모델'이라 했다. 이런 것들이 서로 부딪히면 당연히 싸움이 일어난다. 표층적 기독교와 표층적 이슬람의 오랜 대립도 이런 맥락에사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월감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것은 영적인 우월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더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고, 또 자신의 선한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분노를 폭발시키기 십상이다. 자신이 보기에 '정당하고 거룩한' 분노로 인해 남들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적절한 시기에 때맞추어 발달해 간다는 발달심리학의 통찰을 종교에 적용하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타당한 종교적 가르침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개이느이 발달 과정에 걸맞게 발전해 가는 종교생활이 있을 따름이다.
그 점에서 비록 좋은 의도일지라도 남이 처한 상황과 더불어 그들의 의사를 잘 고려한 이후에 조심스럽게표현되어야 한다. 특히나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유일한 길을 소유하고 있다는 독선적인 생각은 다양성과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와 전혀 맞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든 개인에게는 저마다의 종교적 성숙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점을 나누어 줄 수는 있겠지만, 이마저도 정말 조심스럽고 겸허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열림이 진리'라 했다.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런 열림처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성경에 보면 성령을 거스른 죈느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결국 열리지 않음, 성령의 미세한 소리에 닫혀 있음이 아닐까...
성경에 나온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거나 양자의 균형을 잃게 되면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진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보통 뱀과 비둘기는 서로 양립 불가한 대립 개념처럼 여겨지는데, ≪도마복음≫에서는 뱀과 비둘기가 같다고 한다.^^ 뱀도 비둘기도 모두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기어다니는 뱀은 나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서 있는 뱀은 아주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말이 있다. 뱀은 허물을 벗기에 새로운 의식으로 변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의사협회 문장에도 위를 향하고 있는 뱀이 나온다. 이집트의 왕 왕관에도 서 있는 뱀이 있다. 이처럼 뱀은 의식의 변화와 치유의 상징이다. 한편 비둘기는 순결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올 때 성령이 바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여기서 비들기는 성령과 깨침을 뜻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서 있는 뱀처럼, 비둘기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 인도의 탄트라 전통 중에서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을 강조하는 쿤달리니 탄트라를 보면, 인간의 육체에 잠들어 있는 영적 에너지를 뱀으로 묘사한다. 척추 아래 부분에 세 바퀴 반 또아리를 틀고서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있는 뱀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우주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뱀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면서 차크라를 각성시키면 여러 가지 초자연적 능력이나 통찰이 개발된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에너지가 정수리에 있는 마지막 차크라에 올라가면 신과 합일되는 신비적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사협회 문장에는 실제로 의슬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가 들어 있다. 그냥 지팡에가 아니라 뱀이 그걸 타고 올라가는 그런 지팡이다. 이 상징에 대하서도 이런 저런 해석이 많지만, 의학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보면 인간의 생명과 뱀이 연관된다는 건 분명하다. 또 쿤달리니 에너지가 뱀으로 그려져 있고, 그 뱀이 척추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때 우리가 영혼의 불멸성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고 보면, 역시 뱀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결국 뱀은 육체적, 영적 불멸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동서양에서 고루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거기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잘 이해하도록 풀어쓴 것이 권정생의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가 아닐까...강아지 똥이 쓸모없다고 여겨져, 없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민들레를 피우는 데 쓰이는 쓸모 있는 무엇이 된다는 얘기다. 결국 그것은 형태를 바꾸어 민들레의 일부가 된 셈이다.
한마디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다.
죽음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모든 종교는 죽음이 최종적인 마침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적 세계관은 육체적 탄생 이전에,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무엇인가 영속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심층종교는 탄생, 삶, 죽음을 하나의 통합적인 과정으로 바라본다. 표층적 차원의 종교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죽음 이후에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서 그걸로 끝이라고 주장한다. 근원적인 단절이 있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과 태어난 후 그릐고 죽은 이후라는 세 단계를 서로 연결해 이른바 커다란 순환주기를 상정한다. 죽음은 이 커다란 원에서 탄생과 더불어 큰 원을 완성하는 불가결한 연결고리가 된다.
이런 관점을 근사체험과 연결시켜 보면 매우 흥미롭다.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다는 얘기를 한다. 태어날 때에는 어머니의 산도를 통해 밝은 곳으로 나오고, 근사체험 역시 이와 비슷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난다고 보고했다. 탄생이나 죽음 모두 터널을 통과해 다른 세계나 다른 차원으로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또 커다란 원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탄생은 이전에 자신이 존재했던 세상에서 볼 때에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이고, 반대로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죽지만 저 세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사건이 된다.
결국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고, 단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에 보면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의미다. 반면 ≪마태복음≫에만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유다인들은 신이라는 단어를 직접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늘이라는 단어를 대신 사용했는데, 하늘이란 실제로 하느님이란 말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아니다. ≪도마복음≫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면, 새들이 우리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건 하느님의 나라라는 게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심층종교가 주장하듯 우리는 내면 깊은 것에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느님의 임재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이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된다면, 우리가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에 갈 것인가를 두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체험으로 알게 된 천국의 기쁨을 타인과 함께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려 노력한다면,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까! 그게 바로 심층종교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또 그렇게 되면 두려움과 공포에 뿌리 내린 종교가 아닌, 희망과 기쁨 속에서 커가는 종교가 될 것이다.
류영모 선생님은 종교는 결국 죽음을 없이하자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때 그가 말하는 종교는 물론 심층종교이다. 제나가 절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절대 생명에 동참하므로 사실 몸이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14. 종교학과 심층종교의 의미
한스 큉이라는 스위스 신학자는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종교 간의 대화란 결국 이웃 종교를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타종교의 가치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비교종교학을 통해 여러 종교 전통들을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다종교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더더욱 여러 종교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절실하다. 단순히 종교를 통해 인간을 더 깊게 이해한다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교류함으로써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도! 전세계적으로 종교적 갈등과 긴장이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종교학의 도움을 받아 종교의 평화적 공존 모델을 만들어낸다면, 지구인 모두에게 정말 멋진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 예수나 붓다와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 가르치는 종교는, 무지에서 생겨난 미망과 허상을 깨뜨리고 날마다 점점 더 깊은, 혹은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실상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쑤셔박고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헛된 위안을 팔고 사는 닫힌 종교가 아니라, 독수리처럼 더욱 높이, 더욱 멀리 봄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열린 종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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