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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를 읽으며...

by tat tvam asi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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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타 무르자니 / 샨티-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를 소개 받았다. '샨티' 출판사의 대표님께서 직접 추천해 주셨다.

 

먼저 그녀의 소개를 해본다. 교보문고에서 작성해준 아니타 무르자니에 대한 정보이다. 

 

 암과의 사투 끝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온 인도인 여성이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뒤 줄곧 홍콩에서 살았다.

 

2002 4, 임파선암이 발견된 뒤 4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2006 2 2, 악성세포가 차지한 그의 몸은 마침내 기능을 멈추었고, 그때 그는 임사체험 상태로 들어간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우주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암을 만든 건 바로 두려움과 자기 사랑의 부족이 합쳐진 결과였음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삶의 두려움들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정한 장엄함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왜 우리가 사랑일 수밖에 없는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등을 깨닫는다. 그 경험 후 아니타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았고, 임사 체험의 경이로움과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 통찰을 이 책에 담았다.

 

아니타는 세계적 영성가인 고 웨인 다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2011년부터 세계무대에 섰다. 닥터 오즈 쇼Dr. Oz Show, 폭스 뉴스, 투데이쇼, CNN의 앤더슨 쿠퍼360˚,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등에 출연하였으며, 영국의 권위있는 저널 왓킨스The Watkins Journal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인’ 100인에 8년 연속 선정됐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이 책 외에 나로 살아가는 기쁨What If This Is Heaven〉 〈두려움 없이, 당신 자신이 되세요Sensitive Is the New Strong등을 썼다. 특히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Dying to Be Me 4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백만 부 이상 팔렸다.

 

현재 남편 대니와 함께 미국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과 거기에서 얻은 교훈들, 치유와 변형의 힘, 제한 없고 충만한 삶에 관한 이야기를 전 세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www.anitamoorjani.com  

 

Anita Moorjani ∞ International Speaker and New York Times Best Selling Author

Anita Moorjani is an international speaker and author of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 "Dying to Be Me". In 2006, after a four-year battle with cancer, she fell into a coma and journeyed into a near-death experience (NDE).

www.anitamoorjani.com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를 읽을 때에, 내 마음을 두드렸던 문장들을 펼쳐 보이련다. 

 

삶을, 깨끗한 도화지에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살자!

 

두려움 없이 내 삶을 살자!

 

나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가장 중심에서 우리의 본질은 사랑이며, 우리는 장엄한 존재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 사로잡혀서 그저 순간에 머문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았는가?

 

일상에 사로잡혀, 마음이 온통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에만 가 있는가?

 

흥분되고 커다란 모험이 펼쳐질 것이다!

 

그 일이 펼쳐지게 하려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난 그저 내 자신이면 된다, 두려움 없이!!!!!!!!

 

그것은 곧 내가 사랑의 도구가 되게끔 나를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나 지구를 위해서나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혹은 우리 각자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살아 있다는 것, 이곳(여기)에서 나를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이제 더는 이 위대한 모험의 단 1분도 허비하지 말자!

 

될 수 있는 한 가장 많이 '내'가 되자!

 

살아 있는 이 기분 좋은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말고 음미하며 즐거워하자!

 

온갖 잡다한 세상사, 미래나 돈, 직장, 집, 집안 일 걱정에 빠져 있지 말자!

 

웃고 즐거워하는 게 더 중요하다!

 

가벼움을 느끼고 잘 웃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란 오직 자신을 사랑함으로써만,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슴을 따름으로써만, 그리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함으로써만 얻어진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무한한 우주에서 각기 다르면서도 하나도 빠질 수 없는 각각의 부분들이다.

 

내 무한한 자아의 지혜를 신뢰하라!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장엄하며 조건 없이 사랑 받고 또 사랑하는 힘이다. 

 

이 에너지가 나를 통해 흐르고 나를 감싸며 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붙어 있다. 사실 그 에너지는 본연의 나이다. 그 에너지를 믿는 것이 곧 나를 믿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나를 이끌고 보호하도록, 내 궁극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게 주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저 내가 '나'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오직 내 자신인 장엄한 사랑이 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내 삶속의 사건과 조건이 나에게 최고의 유익함을 주는 쪽으로 펼쳐지게끔 나를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미리 예상한 결과대로 되느냐에 상관 없이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내 자신이 될 때, 나의 그 독특하면서도 완전한 장엄함이 내 자신과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러니 내가 내 자신이 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그 때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진실로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가장 마술적인 방식으로, 상상도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내 삶 안으로 들어온다. 내 본연의 모습인 힘과 사랑을 날마다 보여주면서...

 

시간은 매순간이 다 다르며, 각각의 순간은 한번 지나고 나면 이 물리적 차원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에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고, 순간에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나는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어떤 감정적 짐도 옮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보다는 매순간을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깨끗한 백지로 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기분을 끌어올려주는 것,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한다. 그것은 명상일수도 있지만, 그 순간 내가 하고싶기만 하다면 그게 쇼핑일 수도 있고, 초콜릿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자기 자신과 더 큰 조화 속에 사는 것은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것이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내 안의 열정을 불러 일으켜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서 삶이 즐거워지고 활기 차지는 것을 느낄 때가 바로 우리가 자신의 장엄함에 닿아 있을 때이다. 이 장엄함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세상의 모든 일은 참으로 흥미진진해지고, 우리는 모든 것이 동시성 속에서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우주와 하나이고,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장엄한 자아가 되는 것이며, 외부 세계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는 무한하다. 우주는 우리가 커지는 만큼 커지고 넓어지는 만큼 넓어질 수 있다. 

 

우주가 확장되고 허용하는 정도는 우리가 얼마나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내 무한한 자아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마자, 나는 내 자신을 '진행 중인 완전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동적인 것이었다. 

 

내 목표는 자신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결과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된 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했을 때 외부 세계 또한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나는 보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최선의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우주를 위해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친절하면 할수록 외부의 일들도 그런 내 태도를 반영해 내게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하거나 판단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마찬가지로 그에 상응하는 상황들이 펼쳐질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내 상각이 맞다며 내 편에 서준다. 내가 나에게 대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말이다!!!

 

과거에 나는 내가 뭔가를 해야 하고 손에 넣어야 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추구하곤' 했다. 

 

하지만 뭔가를 추구하는 행동 그 자체가 바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못 가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원성 안에 갇히고 만다. 애초부터 좇는 나와 좇을 대상이라는 그 '분리'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허용(allow)'할 뿐이다. 

 

예를 들어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 때, 만일 내가 그것을 공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로 인해 나는 우주 에너지에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에 반해 허용하는 것은 힘이 들지 않는다. 

 

허용이란 '놓아버림(release)'에 가깝다. 

 

놓아버린다는 건, 모든 것이 하나이므로 내가 얻고자 하는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허용의 과정은 먼저는 신뢰하는 데서, 그 다음은 자기 자신에게 늘 진실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할 때 나는 오직 진실로 내 것인 것을 끌어당기게 되며, 모든 것은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속도로 일어난다. 

 

나는 걱정되는 것 혹은 내가 부족하거나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만 계속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내 삶이 내가 경험하고 싶어하는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지금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경험을 신뢰하고 허용함으로써 내 의식을 넓히기 보다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뭔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얼마나 빨리 걱정들을 놓아버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이완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을 현실화하는 것을 더 느리게도 할 수 있고 더 빠르게도 할 수 있다. 특정 사고 방식이나 결과에 더 집착하면 할수록, 혹은 새로운 모험을 겁내면 겁낼수록, 그 전개는 더욱 느려질 것이다. 내가 과정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 에너지가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만히 앉아 그 모든 선택이나 가능성을 일일이 따진다는 것은 아니다. 매순간 내가 진실로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바깥에는 내가 추구해야 할 것도 없고 끌어당겨야 할 것도 없다. 

 

우주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안에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은 저 무한한 비물질적 차원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내가 할 일이라곤 이 무한한 영역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지구 차원에 있는 내 자아를 확장시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밖으로 나가서 구하려고 할 게 아니라자신의 의식을 확장해 우주 에너지가 여기 내 현실 속으로 흘러들도록 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걸 애써 추구하면 오히려 분리만 더욱 강화할 분이다. 그와 달리 '허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거, 따라서 내가 바라는 것이 이미 내게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부인하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자신의 일부분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러면 우리 안에 장애물이 생겨서 우리의 장엄함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감정이 우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프리즘에서 어떤 색깔이 굴절되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다. 우리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을 판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 중심에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의 순수한  본질에 닿을 수 있다. 

 

삶은 원래 그렇게 발버둥쳐야 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즐기면 되는 것, 재미있게 살면 되는 거다~

 

모든 어리석은 생각과 자신에 대한 판단, 제한적인 믿음 때문에 몸이 아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온 건 그저 우리 자신을 기분 좋게 느끼고 삶을 기분 좋게 느끼기 위해서다! 그저 우리는 표현하고 재미있어 하기 위해서!!!

 

임사체험을 한 아니타 무르자니는, 천국은 정말이지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고 돌아왔다. 

 

우리의 '진짜 집(true home)'은 역시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 같다고 느꼈다고 했다.

 

"바로 지금, 나는 내가 집에 있다고 느낀다. 다른 어디로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

 

아니타는 이제 여기 있든 다른 세계에 있든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모든 건 우리의 더 크고 확장된, 무한하며 장엄한 자아가 경험하는 것의 서로 다른 부분들일 뿐이라는 것!!!

 

우리의 진짜 집은 각자 안에 있고, 어디를 가든 우리와 함께 있다.

 

불확실성을 편안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에 나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다. 불명료하기에 무한한 잠재성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확실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기대하지 않은 것을 향한 자신의 잠재성에 족쇄를 채운다. 

 

'나는 모른다'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나나 한번 보자'라고 느낄 때 내 확장된 자아는 아주 유연한 일치처럼 또는 정말 터무니 없어 보이는 동시성의 형태로 어떤 대답이나 해결책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불명료함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 놓을 대 실제로 나는 가장 강력해진다. 

 

이전에 가졌던 모든 믿음과 불신, 신조와 교리를 놓아버릴 때 무한한 우주는 내 뜻과  하나가 되며, 내 삶에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기 위해 일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마법이 벌어진다. 

 

과거의 집착을 모두 내려 놓는다는 것은 자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내 자신의 신성함과 장엄함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치유의 한 형태이다. 육체적으로 나아갸 한다는 생각을 놓아버리자, 삶은 더욱 자유롭고 온전하며 즐거운 것이 되었다고 한다. 

 

<질문>  근원에 대한 신뢰가 치유의 요인이었다고 보는 겁니까?

 

<대답>  내 경험에 따르면 나는 근원이 '되었고',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했다. 내 확장된 자아 외에는 다른 어떤 근원도 없었다. 내가 전체를 다 망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낫기 위해 뭔가를 믿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명료했고, 모든 것이 다 알려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건 내가 모든 것이 되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모든 것 안에 존재했고, 모든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 

 

나는 영원했고 무한해졌다. 나는 이 명징함 속으로 께어났고, 그래서 그냥 이해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돌아가기로 선택했다면 몸이 나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중심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one)라는 것 알았다. 

 

우리 모두는 일체(Unity)에서 분리 되어 나왔다가 다시 전체(Whole)로 돌아간다. 

 

나는 임사체험이 그 '하나임'(Oneness)의 단면을 살짝 엿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the Divine)을 내 자신이나 다른 누구와도 떨어져 있는 분리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나에게 신은 분리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다. 

 

신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고, 따라서 나는 내면으로부터 영원히 합일 되어 있으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 물질적 표현은 이 전체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질문>  우리의 개인적인 의지와 전체의 의지가 연결되어 있는 장소가 있나요?

 

<대답>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누구나 그 치유와 힘의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집단적 신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화란 수 세대에 걸쳐 우리 스스로에게 말해 온 이야기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 믿음의 축적물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식하는 단절과 불일치를 이토록이나 많이 유발했다고 본다. 우리 몸 안에도 마찬가지고!!!

 

신화라는 이 보이지 않는 문화적 요인을 계속 물려주고 받으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단절시켜 왔다. 

 

그 결과 우리가  우주 에너지로부터 분리 되어 있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창조적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계속 이원성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이끌고 가는 것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이러한 이야기가 바뀔 때 우리의 물질적 현실도 이 변화를 반영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치유를 더 자주 보려면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 믿음을 한 차원 더 진보시키고 우리 신화를 변형시켜야 한다. 

 

바로 '우리가 우주 에너지와 하나'임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믿음으로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창조적 중심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더욱 긍정적인 에너지를 언제 어디서든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치유는 우리 개인의 창조적 의도가 우주의 생명력 에너지에 일치되도록 힘쓰고, 그리하여 그것을 '하나'로 볼 수 있을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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