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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로 살아가는 기쁨' 북 리뷰

by tat tvam asi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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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타 무르자니 / 샨티 -

 

 

임사 체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몸만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별, 인종, 문화, 종교, 믿음, 에고까지 떠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떠났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사라지거나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는다고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었고 더욱 강력하고 장엄한 존재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실은 자신을 더욱 쪼그라들게 하고 제한하고 실제의 자신보다 훨씬 작은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좁은 공간 속에 가두고 제한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자 자신이 한계 없는 존재가 되었고 자신이 모든 것의 일부였고 모든 것과 하나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타는 자신의 물질적 자아가 마음속에 일생동안 쌓아왔던 가지와 믿음의 층들을 모두 벗겨낸 상태에서, 물질적 삶의 정체성을 이루던 모든 것이 자신 본래의 무한한 자아와는 아무 상관도 없음에 놀랐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무한한 자아가 그러한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모든 층들을 벗겨낸 다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층들을 벗겨내도 우리 자아는 작아지지 않는다. 아니, 훨씬 더 큰 무엇이 되어 있다. 우리는 순수한 본질pure essence이고, 순수한 의식pure consciousness이고, 순수한 사랑pure love이다. 그리고 아니타는 자신이 신 자체였다고도 표현한다.

 

아니타는 임사 체험 과정 중에,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면서 만난 사람들-자신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 모든 사람에게 오직 공감과 연민과 사랑만을 느꼈다. 그리고 아니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그들도 아니타 자신도 몰랐지만, 다 아니타 자신을 위해 그랬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는 과정을 ‘인생 평가 과정life review’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그 경험이 너무도 황홀했다고 한다. 아니타는 그 과정에서 고통도 분노도 느끼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심판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더할 수 없이 사랑 받고 있다고,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니타는 이 세상의 자신의 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 얼마나 순수한 존재인지, 얼마나 놀랍고 강력하고 장엄한 존재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했다고 한다.

 

아니타는, ‘심판 따위는 없다는 걸 왜 우리는 배우지 못했는지, 우리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일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란 걸 돼 배우지 못했는지’가 궁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대부분 사후 세계가 어떠한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조차 사후 세계가 어떠한지 잘 모른다. 단지 우리 문화나 정교에서 하는 말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비이원성의 세계에서는 오직 순수한 의식,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 그리고 완전한 수용만이 존재한다고 아니타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분명하며,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같은 의식의 부분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임사 체험을 한 아니타는 말한다.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그 대신 나 자신과 지구 위 모든 인간 가족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갖는 법을 배우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간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사후 세계에서 우리를 늘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정말 잘되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며 무조건적으로 사랑 받는 존재라는 진실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서로 간에 진정한 공감과 연민을 나누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어겨진다. 이것을 우리 모두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 이웃, 나아가 이 지구에게도 훨씬 더 공경하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뿐만 아니라 죽음조차도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 3차원 세상에서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꼭 대조하고 구분한다. 이런 특징을 우리는 이원성duality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는 대조가 없이는 인식도 할 수 없다, 하니만 늘 그렇게 그분하다 보니 서로를 적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이 생에서는 남을 평가하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는 늘 분간하고 식별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삶을 헤쳐 나가는 방식이다. 이 세상에서는 좋고 나쁨, 긍정과 부정, 밝음과 어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서로 대조해야 인식되는 성질들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비교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고 믿고 있고, 그런 더 나은 선택은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어떤 선택이 제일 좋은지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임사 체험 상태에서의 아니타 무르자니는 우리가 서로 반대된다고 인식하는 성질들이 실은 전혀 반대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들은 서로 협력하며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중의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한쪽을 모른 채 다른 한쪽만 알 수는 없다. 임사 체험 상태에서는 전체가 한꺼번에 명확히 드러났고 모든 것이 동시에 인식되었으므로, 무언가를 구분하고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

 

이 말은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그리고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 양면이 실제로 같은 것 – 뫼비우스 띠가 양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면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 임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비이원성non-duality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동전이 ‘되고’, 무언가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양면이 있어야 함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면으로만 이루어진 동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이원성의 세계에서는 삶이 작동하는 방식( 그 양면 모두)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아니타 무르자니는 임사 체험 당시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들에 공감과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왔고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그 삶이 얼마나 나쁘고 해로운지에 상관없이- 완전히 이해했다.

 

육체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의식consciousness과 함께 에고를 갖게 된다. 이원성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이원성 상태의 우리는 순수한 의식만 갖는다. 말하자면 그곳에는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개별적인 경험으로 존재하는 개인적 행복 같은 건 인식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 상태에서는 고통이 다른 감정들이나 경험들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는 구별된 감정으로서의 기쁨도 인식할 수 없다. 왜냐 하면 하나의 독특한 현상으로 경험되는 괴로움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그 비물질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감정들과 경험들이 합쳐진 것, 즉 조건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oneness의 상태, 그 보편의 상태에서 방출되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뿐이다.

 

하지만 여기 이 물질 세상에 있는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기쁨이 없는 상태를 알기 때문이다. 고통도 느낀다. 역시 고통이 없는 상태를 알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조가 가능한 기준이 있다.

 

비이원성의 상태에는 그런 기준이 없다. 반대점이 없다. 하나임과 조건 없는 사랑이 있을 뿐이고 자아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Everything just is.) 아니타는 우리가 분리의 현실을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기로 ‘선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분리의 현실을 느끼고 이런 느낌들을 경험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에고이다. 에고가 없다면 우리는 비이원성의 상태, 하나님의 상태, 순수 의식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우리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자신을 최고로 표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사실을 알면,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느라 자아를 잃어버릴 때 우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드라마와 트라우마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아니타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지 안다는 뜻이다. 또 어떤 길이 진정한 사랑과 안녕으로 향하는 길인지 알고 그 길을 선택할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자신보다 우리가 훨씬 크고 힘 있고 장엄한 존재임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을 온전히 알고 또 사랑할 때 그 사랑과 알아차림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할 수 있다. 두려움 가득하고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기능도 못하는 자아가 아니라 온전히 깨어 있고 충분히 보살핌 받고 최고조에 맞춰져 있으며, 기쁨으로 가득한 자아를 지니고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에고를 받아들이고 껴안고 그것의 목적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에고는 커지지 않는다. 우리는 더 솔직해질뿐더러, 더 이상은 에고를 먹여 살릴 필요도, 억압할 필요도, 부인할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식으로 에고를 즐기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그렇듯 이 삶 속으로 현현한 신이란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믿을 수 없이 강력한 존재이고 절대 그 힘을 빼앗길 수 없다. 오직 우리의 믿음과 습관만이 내면에 존재하는 그 신성하고 보편적인 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매순간 그 신성으로 숨 쉬고 그 신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니타는 임사 체험을 하는 동안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자신의 신성한 진실을 따라 사는 것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이고 단지 자기 자신으로 살기만 해도 그것이 자신의 진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을 자기 존재의 모든 세포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신성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수많은 방식 중에 하나이다. 우리 모두는 이 몸을 통해 이 시간과 장소,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표현되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알아차림은 없다.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신(God) 과 합일하여 신(a god)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바, 테오시스(Theosis : 거듭난 환생을 통해서 자아가 물질계의 경험을 완전히 거친 다음에 오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 신과의 재합일)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gods)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다. 목표는 우리가 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늘 그럴, 바로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 탐구자’들의 목표이다.

 

신(a god)으로서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진리와 동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심령(아스트랄계)-이지계(멘탈계)의 힘과 능력을 얻는 것을 뜻한다.

 

참고 <지중해의 성자 다스칼로스 1>

영혼과 영구인격, 현재인격 간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영혼은 지상의 체험으로 체색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 자신의 일부이다. ~

 

 

⸙ 진실

 

◾ 에고는 우리의 적이 아니고 초월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에고는 이 물질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 우리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온갖 다채롭고 대조적인 성질들을 통해 분리와 이원성을 경험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왔다. 에고 없이 이런 경험은 불가능하다.

 

◾ 우리는 건강한 에고와 건강한 알아차림 둘 다를 갖고 태어났다.

 

◾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오히려 최고의 건강과 행복에 꼭 필요한 것이다.

 

◾ 자신을 사랑하고 에고를 포용할수록 에고를 초월해 영원한 자아를 알아차리기가 더 쉬워진다.

 

 

 연습과 요령

 

◾ 당신의 생각과 감정을 살피고 당신이 사는 방식과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을 살펴라. 일단은 알아차림 다이얼과 에고 다이얼의 현재 위치부터 확인하자.

 

◾ 사랑하는 사람의 에고 다이얼과 알아차림 다이얼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꿈이나 열망,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게 해보자. 그의 알아차림 다이얼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당신이 당신만의 신성을 알아차릴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 오는지 수첩에 그때그때 적어두자. 반대로 신성과의 연결이 끊어질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 오는지도 적어두자. 그리고 그 둘을 비교해 보자.

 

◾ 불안, 두려움, 나아가 분노를 느낄 때면 자신 안에 신의 힘God-force을 없앨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신의 힘을 강화하고 진정한 신성에 가 닿으려면, 두려움이나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대신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기억하자.

 

⸙ 스스로에게 묻기

 

◾ 나쁘게 평가 받을까봐 두려워 진정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억압하고 있지는 않는가? 자신을 맨 마지막에 생각하지는 않는가?

 

◾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면 어떨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대신 협력한다면 어떨까?

 

◾ 사람들의 판단에 위축되어 나만의 알아차림 다이얼을 낮추지는 않았는가? 자진해서 진짜 나보다 훨씬 못한 나로 행동하지는 않았는가?

 

◾ 나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있기에 내가 이 물질 세상에 나타난 수많은 신의 현현 가운데 하나임을 자꾸만 잊어버리는가? 나의 본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믿음과 습관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을 때 내 에고 다이얼과 알아차림 다이얼이 최고 상태에 있고, 그래서 내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고통에 짓눌리지 않을 때.

 

◾ 나의 독특함을 드러내주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며 내가 왜 이 세상에 오기로 선택했는지 알려준다고 생각하고 에고에 감사할 때.

 

◾ 초월하지 못했다며 영적 지도자들을 비판하지 않을 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그들이 모르고 그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거나, 힘들어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이해할 때.

 

◾두려움과 결핍으로 망가진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지 않을 때, 내 본연의 온전하고 행복한 자아가 될 때,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힘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 때.

 

⚘ 우리는 태어날 때- 자신의 성과 자신의 성적 지향을 포함해-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진실을 잊어버리고 사회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수정edit하고’(점점 자신의 빛을 잃어가고) 사회가 받아들이고 원하는 사람이 된다.

 

순회 강연을 하던 아니타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청중 중에, 하나 뿐인 어린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하며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는 젊은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껴안고 함께 울어주고 마무리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많은 청중들 가운데 쇼나라는 여성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다녀온 아니타가, 어린 아들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 그 아들에 대해 묻는 그 젊은 엄마에게 그녀의 아들이 저쪽 세상에서 계속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피드백을 보내왔다. 젊은 엄마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다시는 어린 아들을 이 땅에서 볼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타는 그 순간 자신 속의 매우 인간적인 부분이 발동하면서 무기력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저 세상에 갔다 오묜서 자신이 얻은 모든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그 자리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것도 그 젊은 엄마의 슬픔을 진정으로 덜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실컷 울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 아니타의 강연을 들으러 온 쇼나라는 한 여성이, 울어준 것으로 끝맺음한 아니타에게 실망한 것에 대해 피드백을 보내왔다.

 

쇼나는 아니타가 임사 체험으로 알게 된 것을 열렬히 가르쳐주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진짜 현실에 부딪혔을 때 아니타가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지하기 보다 고통의 망상에 빠져버린 것에 실망했다고 썼다. 아니타의 역할은 , 쇼나에 따르면, 사람들은 고무시키고 희망을 주는 것인데, 그 본분을 잃고 망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수준으로 몰락했다는 것이었다.

 

아니타는 그 메시지를 읽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쇼나라는 여성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다른 청중들도 다 실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타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아니타는 숙소로 돌아와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늘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우리 자신이 빛을 발하기 어렵게 된다고 강의해 오던 그녀는, ‘왜 늘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우리가 본래 충분히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긍정의 베일로 숨기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누군가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리는 첩경이다. 진정한 자신을 허락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밤 내가 설령 세상 사람들 전부를 실망시킨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지 고심하던 예전의 나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주고 또 주었고 결국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게 되자 암에 걸렸었다...”

 

영성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자기 계발 강좌를 섭렵한 사람들이 좋은 의도에서 그녀에게 선언하듯 “너의 생각이 너의 현실을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네 생각이 이 암을 만들어냈음에 틀림 없어! 그러니 생각을 잘 들여다봐야해!”라고 말했다.

 

그 조언에 따라, 아니타는 먼저 자신이 어떻게 암을 끌어당겼는지 알기 위해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그 싹부터 잘라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은 계속 떠올랐고, 암세포도 계속 퍼져 나갔다.

 

노력이 부족한 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는 데 자신을 더욱 몰아붙이고 열심을 부렸다. 암이나 죽음에 대해 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질 거라 믿으며 더 무서워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타는, 자신에게 ‘너는 왜 아직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니? 부정적인 생각을 통제하고 긍정적이 되어 긍정적인 현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아직도 이 모양인 거지...’라고 다그쳤다.

 

그 때 아니타는 상당한 두려움과 좌절을 느꼈고,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해서 해주는 이런저런 조언을 들을 때면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암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믿음이 강력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생각이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혹은 그 둘 다라고 확신했다.

 

오늘날 인기를 끌고 있는, “긍정적인 자세가 긍정적인 현실을 만든다”는 믿음은, 지금 당장 괴롭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더 괴롭고 힘들게 만든다. 이들은 긍정적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까지 감내해야 한다. 고통과 상실을 겪을 때 힘든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불편하게 느낀다. 이른바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하면 인간으로서 겪는 진짜 감정들을 품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고통을 느끼면 어떤 점에서는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을 갖고 긍정적이 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 그런 위기 앞에서도 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에 된다. 영성이 부족해 그런 고통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런 고통을 드러낸 여지를 주기보다 진부한 조언을 일삼게 된다.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가 많은 점에서 좋기는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가 오히려 상처가 보이지 않게 덮어만 두는 반창고 같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고통은 정면 돌파하는 것이 최선이라느 말이 있다. 그래야 정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먼저 고통이 거기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모든 고통에는 선물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도 고통은 우리에게 공감능력을 주어, 상실과 슬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실제로 우리를 더 인간적이게 하고, 그때 우리는 오히려 신성에 훨씬 더 가까이 가게 된다.

 

아니타는 암에 걸리기 전 늘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자신을 기억했다. 사랑 받고 싶었으므로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살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면 재빨리 억눌러버렸고,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절대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랬으니 늘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생각이 암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러자 자신의 생각이 두려워졌다. 그러자 또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아니타는 두려움의 끝없는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자신을 회고했다.

 

하지만 아니타는 임사 체험을 하는 동안, 중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다만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내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정적인 내 상각도 나의 일부임을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내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고 그러한 부정성이 나쁘다고 믿었던 탓에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사람들을 기운 나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단지 당신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반대로 당신 자신을 기운 나게 하는 건 뭐든 다 해보세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배운 것을 나누세요. 초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어야 해요. 당신 스스로 기운 내서 열정적으로 사는 한, 당신은 그저 가슴 속에서 나오는 진실만 말하면 된다. 그게 다다.”

 

“다른 사람들을 기운 나게 하려고 애쓰는 순간, 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하려고 애쓰거나 그들이 바라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속이게 된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살게 된다. 그러나 가슴으로 살 때, 우리는 메시지가 우리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나올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된다. 나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실하라고 말하고 다닌다. 내 가슴이 시킨 일을 하라! 우리는 늘 우리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무엇이 진실일까?

 

 진실

 

◾ 부정적인 생각들은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몰아내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잠시 억압할 수 있을 뿐이다.

 

◾ 고통, 분노, 슬픔, 좌절,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들이다.

 

◾ 이른바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고 해서 실패한 것도, 수행이 부적한 것도 아니다.

 

◾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 고통에 숨겨진 선물을 볼 기회가 생간다. 이 선물과 고통은 동정의 양면 같은 것으로 늘 함께 올 수 밖에 없다.

 

◾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을 외면하고 방치할 때 몸이 아플 확률이 더 높다.

 

◾ 자신을 사랑할 때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긍정적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낙관주의는 깊은 자기 사랑에서 나오고, 그것이 ‘긍정적이 되려고 애쓰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효과적이다.

 

◾ 우리의 생각과 태도만이 인생의 여러 일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건과 상황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받아들이고 잘 드러낼수록 더 긍정적인 사건과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연습과 요령

 

◾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쁜 일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당신이 인간임을 보여줄 뿐이다.

 

◾ 두려움을 느끼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그 느낌과 싸우지 말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 자신을 심판하지도 말자. 그보다는 그런 감정과 생각을 인정하고 온전히 느껴보자. 그래야 그 감정들을 해소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자신을 사랑하는 법과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워서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기쁨을 누리자.

 

◾ 도저히 기쁨을 누리기가 어렵다면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 다음 현재 상황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어느 정도 평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 감사할 때 기쁨도 찾아들 것이다. 기쁨은 현재 우리 삶에 감사할 때 자연스럽게 생긴다.

 

◾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보고 그 일로 무엇을 얻었는지 생각해 보자. 크게 얻은 것도 좋고 작게 얻은 것도 좋다. 그 선물들에 감사하자.

 

◾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느끼는 감정을, 그것이 무엇이든, 느끼도록 허용해 주라.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말고 연민을 보내자.

 

 스스로에게 묻기

 

◾ 나는 진정 내 가슴에서 나온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일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껴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나는 무엇이 두려워 내 생각과 행동을 심판할까? 그 심판을 그만두면 어떤 기분이 들까?

 

◾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도(그래야 그 사람도 고통을 억압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이원성에 함몰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까?

 

 나는 다음과 같을 때 내 모든 생각과 감정을 포함한 진정한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안다.

 

◾ 부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며 온전히 느껴볼 때.

 

◾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때.

 

◾ 내 모든 감정들을 심판 없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 기쁘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로 진정한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때.

 

※ 창조성을 발휘하며 삶을 살라! 모든 발견, 모든 탐구가 중요하다.

 

당신의 가슴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우주가 펼쳐 보여주는 화려한 색상들을 신나게 조합해 당신만의 걸작을 만들어내라. 그러면 당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스스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연주할 때 우리의 목적은 음악을 다 듣거나 연주를 다 끝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의 음표 하나하나가 들려주는 감미롭고 즐거운 여정을 즐기는 것이다.

 

내 안의 노래를 부르라! 제대로 못할까봐 혹은 잘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자.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잘하고 못하고도 아니고, 크고 작은 질문들에 답을 찾고 못 찾고도 아니다. 온갖 좋은 책을 읽고 온갖 좋은 강좌를 듣고 대가들과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영적으로 심오한 경험을 하는 것도,,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도, 구루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돌아와 그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스스로를 허락해 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간단하다. 그냥 당신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진정한 당신 자신으로 말이다!!! 우리 본연의 모습인 ‘사랑’으로 살자. 우리의 빛을 최대한 밝게 밝히자.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삶의 이 여정을 누리고 즐기자! 마음껏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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