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누군가?’를 먼저 물어야 했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하기 전에, 인생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Frederick Buechner 는, 소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진정한 소명은,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다.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해서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self에서 시작된다.”
먼저, 나의 소명(召命)에 대한 분별의 과정을 살펴보게 되었다.
2009년 1월 18일, 사랑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내게, 주님이 조용히 다가오셔서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영의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느냐? 네가 교회와 성도를 목숨처럼 사랑하느냐? 그 사랑을 보여 다오..."
결국, 주님 말씀에 의거(依據)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고,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주님 앞에 머물러 있었다, '성서'와 함께...
그 이후 많은 어려움들을 통과하게 되면서, ‘어제’는 교회에 나왔지만 ‘오늘’은 교회를 떠난 많은 성도님들이, ‘내일’ 다시 나가고 싶은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해야만 했다. 한국교회를 위기라고 평가한다. 아니, 한국교회까지 갈 것 없이 바로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위기임이 분명하다. 목회자인 남편과 함께 개척교회에서 8년을 섬기다가 청빈 받아 오게 된 교회에서 23년을 전력투구하고 있는데, 교회가 '부흥이냐 침체냐' 그 기로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2017년 5월, 성령님의 임재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개인적이면서 & 공동체적인 영적 갱신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머물러 있을 때,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시며 강하게 부르신 주님의 Calling이 있었다. 그 해 4월 16일, 사랑하는 아빠의 갑작스런 소천과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섬기시던 장로님이 동작지방 내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인해 느닷없이 대전으로 거처를 옮기신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다. 너무도 가슴이 아팠던 그 때...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했던 그 당시...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가신다고 나가셨던 아빠가 열흘 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홀로 남아 아파하시는 엄마를 보듬어 드려야 하는 때에, 교회의 기둥이시던 장로님이 떠나가셨다. 성전에서 울고 가슴 치며 기도로 주님 앞에 머물러 있을 때, 주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목회의 길을 가라고... 나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고... 주님의 Calling에 '망설이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기에, 곧바로 원서 접수를 하고 M. div.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다가, 불현듯 ‘내 삶을 대표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 5가지를 고른다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① 갈망 ② 헌신 ③ 목회자의 돕는 배필 ④ 영성 ⑤ 강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를 바라는 갈망’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로운 황홀에 대한 갈망’이 늘 내 안에 있어서, 헌신(獻身)으로 점철(點綴)되는 삶을 살았다. 내 인생의 절반 가까이 되는 긴 시간을 목회자의 돕는 배필로 살면서 영(靈 : 하나님과의 연합, 합일, 신비, 하나님을 아는 지혜 etc)과 성(性 : 성품, 성격, 인성), 두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될 때 비로소 영성(靈性)이 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완벽에 대한 뿌리 깊은 강박이 나의 뒷덜미를 잡고 많은 아픔을 자아냈지만, 그럼에도 가정 ‧ 교회 ‧ 속한 공동체 등 나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두려움과 불안 대신 기쁨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영성에 대한 갈망이, 그리고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희망'이 열렬하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가는 길동무들과 나의 신뢰와 희망 얘기를 하며 살련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진동하며, 진동하는 대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는 누구나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래서 만약 중요한 과학적 정보가 제공되고 그 정보를 적용하는 데 필요한 방법까지 알 수 있다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성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적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가능성’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 양자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을 신경과학, 신경 내분비학, 후성 유전학, 세포생물학, 뇌 과학, 에너지 심리학, 정신신경면역학 등의 최신 정보들과 연결 지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과 연관 지어 읽으면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학문 간의 대화가 내면 안에 일어나면서 성경의 깊이가 더해져 가고 있다.
과학이란 어쩌면 신비주의의 이 시대 언어일 것이다. 과학은 종교나 문화, 전통에 매이지 않고, 신비적인 것에서 신비를 벗겨내며,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명상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명상 중에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지적&개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배운 것을 반복하면서, 향상된 지식을 조금씩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향상된 지식을 설명할 때, 설명된 모델이 뇌에 더 단단히 고정이 되고, 신경의 새로운 하드웨어가 구축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배운 것들을 충분히 반복하면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완전히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새롭게 배운 지식을 제대로 잘 적용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경험으로 이끄는 선구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을 정렬시키면 새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새 경험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정보를 구현(具顯)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이 지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에게 감정적으로 이해하라고 화학적으로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한 번이 아니라 굳은 의지로 여러 번 경험해서 그 경험이 새로운 기술, 습관 혹은 존재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이런 경험을 습관적으로 해서 일관성을 획득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을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반복 가능하다. 만약 생각만으로 능숙하게 내면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측정되고 기록된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과학 법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때 우리는 세상이 현재 수준에서 전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적 모델에 실재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더할 수 있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선택이 만들어내는 강한 에너지가 우리의 뇌 속 잠재의식적이고 신경학적인 프로그램들과 내 몸 속의 감정적이고 유전적인 프로그램들을 다시 쓸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에너지로 자신 몸의 생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힘나는 이야기 아닌가!
플라시보 효과란, 생각만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하는데, 생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아직 구현되지 못한 감정(unmanifested emo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포용되어야만 그 생각은 실재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적 의미가 더해지지 않은 생각은 텅 빈 경험으로, 알려지게 될 때를 기다리며 잠자고 있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생각을 경험화해서 지혜로 만들 때 비로소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려서부터 익힌 삶에 대한 사고방식을 포기하는 일이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그 노력이 쉬울 리 없다. 왜 그럴까? ‘변화하는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재란 불편함을 무릅쓰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리라.
안락함을 박차고 나와 구시대적인 믿음들에 맞서 싸운 그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바보로 취급 되었던가! 나중에 천재나 성자, 대가로 인정받게 된 사람들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가? 먼저 부자연스러운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위기가 고조돼 모두가 부족하고 가난하다고 느낄 때 베풀고, 모두가 화를 내고 서로를 비난할 때 사랑을 주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용기와 평화를 보여주고, 모두가 적대적이고 공격적일 때 자애를 베풀고, 세상사람 모두가 결과를 조작하며 맨 꼭대기에 오르려고 끝없이 질주하고 경쟁하고 공격적으로 대할 때 다른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모험을 떠나고, 역경에 처했을 때 의연한 미소를 짓고, 아픔이 있을 때에도 자신의 온전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① 과거의 일이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② 전에 그런 일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제껏 없던 일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수많은 작은 변화들을 내 안에서부터 보게 될 것을 예견한다. 아니 이미 많은 변화들이 내 안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감정을 놓아보내는 연습을 하면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얻었다.
▸기쁨이 담겨 있는 생각, 진리를 담고 있는 말, 사랑의 느낌으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에고(ego)를 알아차리고 참 나(self)의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비(非)물질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의식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순간 몸 안에서 호르몬이라고 하는 물질을 분비하게 되고, 바로 그 화학 물질의 변화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특히 감사하는 마음가짐은 우리 몸에 생명 친화적인 화학물질인 호르몬을 분출해서 면역체계를 강화한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로 밝혀진 것을 보면서, 또한 이 때 일어난 화학적 변화가 모든 창조물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비한 물질을 통해서 우리 몸 밖으로 양자효과(quantum effect)를 일으킨다는 이론을 읽으면서, ‘악’에 대한 집중 연구를 하기보다 ‘선’에 대해 내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양자 세계 속의 아원자 물질을 연구하다가, 뭔가 매우 기묘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양자 세계 속의 아원자 물질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 것이다. 즉 뉴턴 물리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보일 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법칙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원자보다 작은 양자 수준에서 물질의 존재는 순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은 한 순간 여기에 있다가, 다음 순간 사라지고 없다. 물질은 단지 하나의 경향성, 확률, 혹은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양자 수준에서 절대적인 물질적 존재는 없는 것이다.
양자 우주에서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아원자 입자들을 관찰하는 자신들의 행동 자체가 그 입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입자들이 계속해서 있다가 사라지고 또 있다가 사라지고 하는 이유는 이 입자들이 모두 사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양자 에너지장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 또는 확률의 배열 위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전자에 집중할 때만이 그 전자가 실제로 그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찰자 효과'에 따르면 물질은 우리가 관찰할 때까지, 즉 우리가 알아채고 의식하고 집중하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도 나타날 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의식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라져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물질은, 물질로 나타나고 에너지로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실제로 초당 7.8회 반복한다)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 그리고 관찰자인 인간의 마음이 물질의 행동과 출현에 그렇게 밀접하게 관여하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양자 역학적인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의 미세한 세계에서는 주관적인 마음이 객관적인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음이 곧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아원자 입자들이 파동이나 에너지 형태로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주의를 기울이는 그 순간 관찰자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입자 또는 물질로서)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무한한 수의 가능한 현실들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고 싶어 상상하는 일들이 시공간 너머 양자장 속 어딘가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관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조절한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과 소원하는 것들을 현실 세계로 연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과거와 다른 미래를 관찰하고,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을 감정적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그 순간 미래의 현실에 사는 것이고, 우리 몸으로 하여금 현재 순간 그 미래에 살고 있다고 믿게끔 조건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안에 모든 가능성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양자 모델은 사실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선택하고 그것을 관찰해 현실로 만들어도 된다고 허락하는 셈이다.
우주가, 99% 에너지(가능성)인 원자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능성들이 매우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주의 기반은 넘실대는 에너지의 바다와 같다고들 하지 않는가! 우주를 광대한 양자의 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바로 우주의 모든 것이 나머지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인간의 지각은 뇌의 아원자 입자들과 양자에너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와 공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릿속 시연, 즉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것은 결코 한갓 희망이나 몽상이 아닌 것이다. 머릿속 시연(mental rehearsal)은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삶, 예를 들어 고통도 질병도 가난도 관계의 어려움도 없는 삶을 의도적으로 펼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것보다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우리는 원하는 존재 상태를 불러올 수 있고, 동시에 원하지 않는 것은 그것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 우리의 에너지가 놓인다고 한다.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의식이나 마음을 둔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에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그 결과 관심 혹은 관찰을 통해 우리는 물질 세계, 현실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는 '바라는 것'과 '바라는 것의 결핍' 두 가지가 시간을 초월해서 늘 존재하고 있으며, 매 순간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기에, 나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일의 주제는 '바라는 것'과 '바라는 것의 결핍' 두 가지로 귀결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본다면,
건강 / 질병(건강의 결핍)
힘의 넘침 / 피곤함(힘의 결핍)
앎 / 의심(앎의 결핍)
명확함 / 혼란스러움(명확함의 결핍)
흥미 있음 / 지루함(흥미의 결핍)
행복 / 불행(행복의 결핍)
풍요 / 빈곤(풍요의 결핍)
그 일을 할 수 있다 /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을 사고 싶다 / 그것을 살 능력이 안 된다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 기분이 나쁘다
나는 더 많은 돈을 바란다 / 나는 충분한 돈이 없다
나는 날씬해지고 싶다 / 나는 뚱뚱하다
단순하지만 내가 놓치고 지나갔던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해 말하기 보다 그 주제에 대한 실제적인 현실을 말해야 한다고 느끼고 살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바라는 것들이 삶 속에 들어올 수 없었던 요인이었다. 이제 내가 이전과 다른 결과를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면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나는 실제로는 바라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항상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원한다. 하니만 나의 기분(감정)이 상황에 따라 좌우 된다면 결코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킬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내가 하는 생각을 통해서 나 스스로가 무엇을 내 삶 가운데 만들어내고 있는 중인가를 아는 데에 도움을 주는 안내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삶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해도, 나에게는 생각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항상 기뻐하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의 삶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가기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의 느낌(기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기쁘고 기분 좋은 생각을 찾아내면 반드시 신나는 일들이 뒤따라 구현될 것이다.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면서 나의 생각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간다면, 내 존재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기쁨 가득한 인생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만을 바라보면서 나의 삶에 긍정적인 것들만을 펼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오늘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와 함께 일을 하든, 내 자신이 보기 원하는 것을 찾는 데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바라고 있는 것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내가 삶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것과 본질이 같은 것을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에서 반드시 배달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느낌의 감정에 토대를 둔 기도를 하나님아버지께 아뢸 것이다.
☞ 감정에 기반한 기도란 무기력감에 이끌려 절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구걸하듯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지성의 힘과 소통하고 그 결과의 실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기도이다.
감정의 기도는 말도 손짓도 그 어떤 물리적 표현도 필요치 않다. 단지 기도가 이미 응답 받은 것처럼 분명하고 강력한 느낌이 피어나도록 유도할 뿐이다. 우리는 이 신비한 언어를 통해서 몸을 치유하고 가족과 주위에 내리는 풍요로운 축복을 느끼며 나라 사이에 퍼지는 평화의 기운을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게 되면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에 힘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치유를 요구하는 기도는 질병에게 힘을 넘겨주고, 비를 요구하는 기도는 가뭄에게 힘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치 않는 것, 즉 결핍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원하는 풍요가 아닌 결핍에 초점이 맞추어져, 원치 않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 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동안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고 엉뚱한 결과만 나타났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이러한 것들)을 달라고 매달리면 '변화시키려는 것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여 바꾸려는 것에 더 에너지를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비가 필요하다면, 비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비가 주는 느낌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에 닿는 빗방울의 느낌을 실제로 감지하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즉 미래에서 현실을 상상하고, 기적의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고, ‘내가 그 느낌이라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까’를 상상해서 지금 그대로 acting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과 생각과 감정을 열어 젖혀서 머리와 가슴을 다 개방하여 ‘감사로 아멘’ 할 때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가능성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가 선택한 것들이 이 세상으로 오게 한다.
감사하는 마음가짐은 우리 몸에 생명 친화적인 화학물질인 호르몬을 분출해서 면역체계를 강화한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이 때 일어난 화학적 변화가 모든 창조물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비한 물질을 통해서 우리 몸 밖으로 양자효과(quantum effect)를 일으킨다고 한다.
아직 깊이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이 기도를 시작하려고 한다!
먼저 나의 인생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들을 생각한다! 무엇이든 좋다. '나'나 다른 사람의 치유든, 성공이든 물질이든 인생의 동반자든 무엇이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의 그 충만함을 구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느끼자!
이제는 기도가 응답 받고 나서 달라진 나의 인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느껴보자!
도움을 요청하면서 느끼는 간절함과 열망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편안함과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코로나를 종식시키고 싶다면, 코로나에 집중하지 말고 '회복된 일상으로 행복한 나 자신'에 마음을 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과학의 발견은 논리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논리적 형태는 그것을 나중에 기술하는 과정에서 입혀지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발견은 언제나 하나의 깨달음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몰래 귀띔해 주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문득 찾아온다.”
깨달음...
인간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옛 상태에서 탈피하여 더 깊은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소망할 것이다. 궁극적인 실재를 접해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는 새 사람으로 ‘변화(transformation)’하게 된다고 동서양 모두 말하고 있다.
인식의 변혁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즉 우리의 전존재를 뒤흔들고 뒤바꾸는 체험... 루돌프 오토가 말한 정말 ‘떨리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신비’를 직접 체험하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근본 실재인 궁극적 실재를 내면 깊은 곳에서 직접 체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自覺)과 변화의 체험 같은 것이 아닐까~~~
종교적 발달 과정을 살펴볼 때, ’작은 나‘가 죽고 ’더 큰 세계관을 지닌 나‘로 확장되는 것, 자기 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사람이 자아의 죽음과 재탄생을 거치면서 심층적인 체험을 통해 이타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 즉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서로 사랑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며, 이타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문자주의적 표층종교 밑에서 발견되는 심층종교의 모습이지 않을까...
현대에 이르러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가 보다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문자 자체를 진리로 여기는 표층적인 문자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서로의 진리가 상충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과 저쪽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을 문자로만 보면 서로 다른 게 불가피하고, 나는 옳은데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다르므로 상대방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싸운다는 것은 어쩌면 맞는 표현이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 면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와 기독교의 근본주의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적이고 근본주의적일수록 배타적이다. 한국 기독교의 95%는 근본주의자, 문자주의자라고 한다. 나 역시 신학을 공부하기 바로 전까지 극심한 근본주의자였다.
믿음이 자라면서 더 깊고 넓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신앙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을 억지로 표층에 머물도록 한다면 결국 종교에서 상처 받고 떠나기 십상이고 심할 경우 그 종교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율법의 참 뜻은 망각한 채 기계적인 적용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거기에 반발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표층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심층으로 가야 한다. 그리하여 시원함을 맛보아야 한다. 요즈음은 심층종교로 갈 준비가 된 사람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심층종교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도마복음》의 표현을 빌자면,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에 두 명‘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은 거의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새롭고 더 깊은 가르침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게 되어, 심층종교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이 엄청나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동서양 모든 종교에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다. 동양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동일성(identity)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활발했고, 서양 종교에서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종교사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깨침을 강조하던 영지주의 전통이 초기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매도되어 탄압되는 바람에 신비주의 전통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서로마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영성은 성공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위 디오니소스(Pseudo Dionysius)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보다 활발하게 살아 있었다.
종교의 가장 심층에는 신비주의 전통이 있는데, 그 층위의 두께는 종요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우선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동양은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서양은 합일보다는 신랑과 신부와 같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닌 듯하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합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좀 더 부연해 보자면 동양이 궁극적 실재와의 동일성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는 데 반해, 서양 종교사에서는 비록 신비적 합일 체험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이 어떻게 다르고, 이 관계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섣불리 구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동서양 종교사에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ty)'과 '신비적 동일성(mystical identity)'이라는 두 차원이 긴장 관계로 나타난 적이 많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나 친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동양 전통은 신비주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흐름인 데 반해, 서양은 신비주의적 합일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양 종교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인 신과 인간의 동일성을 곧바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즉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 신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했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근원적 동일성 주장이 통상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힌두이즘의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선언이나 동학의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동일성의 주장이다.
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의 신비적 합일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데레사는 신비적 합일 이후 신비가들에게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자신의 책 『영혼의 성(Interior Castle)』에서 논의하고 있는데, 그녀는 인간 영혼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성으로 비유하고 인간 영혼이 일곱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신심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보다 더 깊숙이 자리 잡은 방으로 옮아가는데 다섯 번째 방이 바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on)을 통해 얻게 되는 신의 상태, 즉 신이 됨(deification)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다섯 번째 방은 인간은 죽고 신만이 존재하는 신의 상태인데, 데레사는 이 방에 대해서는 다른 방에 비해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자기 비움으로 유명하다. 그는, 하나님은 떠나서는 모든 것이 무(無)이고 '나'라는 독립된 존재 역시 무(無)임을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이 전부임을 알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비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채워질 것을 말하며, 이 세상에 있는 신비적 생활의 절정인 영적 혼인(靈的 婚姻)에 대해 언급한다. 영적 혼인 상태에서 “신랑은 당신의 놀라운 비밀을 영혼에게, 말하자면 그의 충실한 배우자에게 매우 쉽게 자주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숨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긴 침묵 기도를 선호하거나 고독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생생활에서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거룩한 협력자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점을 더욱 강조했다. 자신이 경험한 무아경(無我境)과 정신적 비상(飛翔)에도 불구하고 데레사는 예수님 모방과 이웃 사랑이 기도 중의 숭고한 체험보다 더 중요하다고 늘 주장했다.
어쨌든 다섯 번째 방을 통과한 인간의 영혼은 다시 여섯 번째 단계인 이른바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으로 돌아온다. 인간 영혼이 왜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이 지상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냐고 탄식한다는 점에서 이 단계는 인간적인 고뇌와 혼란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아가서》에서 문을 두드리던 연인이, 밖으로 사라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문을 두드리던 연인은 두 사람 모두가 동경한 완전한 합일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 사랑하는 여인이 밖으로 나와 자기를 찾아 헤매게 했을까? 왜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런 고생을 시켰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대답만 있을 법하다. 그는 자신이 사살하는 여인이 밖으로 나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안온한 집과 잠자리를 떠나 어두운 밤 속으로 그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가 인색함과 걱정과 두려움이 함께하는 그녀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습관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가 위안과 안전이라는 이기적 사랑이 함께하는 작은 자아(自我)의 집을 떠나 그가 숨기고 있던 신앙의 광대하고 신비스런 밤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녀는 무아지경(無我地境), 즉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이 혼란의 상태를 거친 후에야 인간 영혼은 마침내 일곱 번째이자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단계는 다섯 번째 맛보았던 신적인 기쁨의 상태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현하는 인간 영혼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과정은 작은 자아에서는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이 과정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신비 작업이다. 그것은 영혼으로 흘러드는 하나님의 유입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모든 교파의 신비가(神祕家)들은 존재의 근원과 영혼의 중심과 진정한 자기와 공허와 텅 빈 충만(充滿)과 우주적 에너지에 관해 말한다.
뉴턴 물리학이 자연의 물리 법칙과 우주를 거시적으로 설명한다면, 양자 세상은 원자, 아원자(亞元子) 입자 같은 미시적인 것들의 근본적인 성질을 다룬다. 양자 법칙은 예측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 파동, 주파수, 정보, 의식, 그리고 빛의 스펙트럼의 세계를 다룬다. 양자 세계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에너지에 의해 통합되어 있는, 아니 마음과 물질이 너무도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 분리가 불가능한 주관성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에너지를 이용해서 신비적 현상을 설명하면 현대과학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 이래, 물리학은 에너지와 광속에 몰두해 왔다.
E = mc2은 모든 물리학도에게 익숙한 공식이다. 물리학과 신학을 결합하려고 한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인간의 에너지를 빌려 사랑을 이야기했다. 또한 감정을 움직이는 에너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 하면 모든 감정은 각각 다른 주파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사랑, 기쁨, 감사 같은 창조적이고 고양된 감정들의 주파수는 두려움, 분노 같은 스트레스 감정들보다 훨씬 높다. 다른 수준의 의도와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를 두는 곳에 에너지가 흐른다. 우리의 모든 창의적인 에너지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의 주의 집중을 애타게 기다리는 외부 세계의 온갖 것들(ex : 아들&딸, 배우자, 건강상태, 동료, 은행계좌, 집안일, 직장, 휴대폰, 노트북 등)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의 주의와 에너지가 대부분 외부의 물질 세상으로 향해 있다면, 생각과 느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내면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말 그대로 우리의 개인적 현실을 창조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주의[attention])과 다른 느낌(에너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인생 모든 곳에 전자기적 신호를 보내며 영향을 주고 있다면, 우리는 습관을 따라 늘 똑같은 전자기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고, 따라서 항상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삶의 창조자가 되려면, 과거와는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내면세계의 균형을 잡고 우리 뇌를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진화하는 우주 에너지의 원천이자 최고 에너지로 보게 되지 않을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주의를 집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그 미지(未知)의 것을 우주 에너지를 통해 내게 흘려보내셨을 때,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가 그 전자구름 속의 어디에서 나타날지 절대 알 수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떤 것이 나온다. 양자역학이 흥미진진하고 예측 불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전자가 늘 물질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너지로 혹은 파동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전자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관찰자(마음)가 와서 전자를 찾으려 들면, 그 관찰 행위(유도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모든 에너지를 전자(물질)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전자가 무한한 가능성(미지)의 세상에서 기지(旣知)의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전자로서 국소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관찰자가 사라지면 전자는 다시 가능성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른 말로 에너지로, 미지의 세계로, 자신만의 용무(agenda)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에너지와 가능성으로 돌아갈 때 전자는 비국소적 성질을 갖게 된다. 양자역학에서는 마음과 물질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뉴턴 물리학이 예측 가능한 세상에 대한 것이라면, 양자역학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관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무한한 공간으로 초점을 열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이것이 아닐까?!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공간, 정보, 가능성에 더 많이 주의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 영역보다 비물질 영역을 더 알아차리게 된다.
명상할 때 나는 예측 가능한 기지의 것에서 에너지와 주의를 거둬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에너지를 쏟으려 한다.
에너지를 기초로 신비체험을 설명하면 기독교는 아시아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는 생명 에너지, 생명력, 곧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 의학에서는 에너지의 불균형으로 병이 생긴다고 보고, 몸의 에너지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에너지의 흐름은 다도(茶道)와 무술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에너지의 흐름이 명상의 핵심이다.
내면의 감정적 중독(ex : 죄책감, 괴로움, 두려움, 좌절, 불안, 원망, 무가치감 등)에서 벗어날 때, 우리 몸도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던 습관과 감정들의 사슬에서 벗어나, 그것들에 묶여 있던 에너지도 풀려나게 된다. 묶여 있던 감정의 에너지가 모두 풀려나면 우리 몸은 이제 더 이상 우리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반대가 용기임을, 부적함의 반대가 온전함임을 발견하고, 의심 너머에 앎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지의 세상으로 발을 들이고 분노나 미움을 내려놓을 때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된다. 그 에너지는 사실 서로 다르지 않다. 전에는 그 에너지가 몸속에 갇혀 있었고, 지금은 풀려나서 새로운 운명을 설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같은 심리학자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우주 공간(outer space)을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 내 속의 내면 공간(inner space)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은 곧 명상의 중요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그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한 시간 내내 명상하면서 내면의 빛(inner light)을 기다리다가 그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서로 나눈다. 이건 명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21세기 영성 혹은 심층종교는 기도와 명상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환갑이 다 되도록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껴온 탓에 몸이 곧 마음(mind)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는 생존 모드가 아닌 창조 모드로 나의 에너지를 배분하여, 내 존재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깨닫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닦아야 하고, 인간에게는 그 닦음이라는 것이 무한에 가까운 일임을 안다.
아울러, 거의 모든 심층종교들이 그들의 종교적 삶의 마지막 단계로 이웃을 위한 봉사를 강조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된 후에는, 자기가 잘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팔과 다리가 언뜻 보면 서로 떨어진 다른 것들로 보이지만, 큰 차원에서는 한 몸이고 서로 도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에 입각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가장 못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께 베푸는 일'(마 25:40)이라는 말씀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모든 게 '하나'라는 것이다. 상호 연관, 상호 의존성이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인위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심층 차원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저절로 나타나는 자연스런 행동인 셈이다. 결국 도덕의 완성은 종교적인 완성이 있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심층으로 가는 과정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심층은 단지 신비적인 합일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내면적인 종교성이나 깨달음이 각각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Sydney Spencer가 쓴 『세계 종교에서의 신비주의』를 보면, 도교에서의 신비주의, 기독교의 신비주의, 불교의 신비주의 등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무아(無我)와 자유스러움에 대한 강조라든지, 하나 됨의 체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 등 서로 통하는 것이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라든지, 네 이웃을 존중하라는 윤리적 측면도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신비주의 전통이 설파하는 궁극적 실재 혹은 신에 대한 내용 역시 너무도 흡사한 점이 많다.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신학을 살펴보면, 그들은 신을 전체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은 저 하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있다는 것이다. 특정하게 한계 지어진 어떤 존재로서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얘기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존재의 근거라 했다. 이런 이야기를 현대 신학자 중에서 가장 잘 수용한 사람이 폴 틸리히(Paul Tillich)이다. 그는 신을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신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기독교를 신나는 종교로 되살리고 싶다. 자기의 수행이 나날이 깊어져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발견하는 기쁨을 나 자신부터 온전히 누리고, ‘하늘가는 길의 동반자’요, 한 몸의 ‘다른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벗들도 누리게 하고 싶다.
기독교가 너무 심각해진 것은 아닐까!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죄와 벌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깨달음도 신 체험도 마찬가지다. 즐겁고 기쁘게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 심하게 매달리는 것은 일종의 ’강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강박적 행위 속에는 참된 기쁨과 평안, 즐거움보다는 잘못된 감정과 그릇된 자만심이나 우월감이 자리하기 십상일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 존재의 근원이시고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 ’웃음‘이 넘쳐나도록 할 것이다.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만 해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 의미는 구체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내는 삶을 통해 내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분별은 가슴으로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사람 안의 마음, 감정, 가슴에 민감한 영적 감수성, 그리고 갈망을 훈련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인간 이해와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한 학문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실제적인 훈련을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의 느낌들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 더 나아가 이를 지속 가능하도록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리고 강철 같은 기도와 순수한 믿음, 자기 초월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대를 회복할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우(愚) - 과거 집착 -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올바로 예측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 공동체 멤버들 각자의 역량 – 현실적 능력, 달란트, 잠재적 가능성 –을 철저히 분석하게 할 것이다. 그것에서 출발하여 분별이 가능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로 서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사역을 펼치고 싶은 것인가?
인류에게 오랫동안 신비한 영역으로 남아 있었던 인간정신세계를 연구하여, 정신세계에 있는 여러 길을 찾고 정신현상에 대해 이해하며, 우리의 정신세계가 가지는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려 바른 치유의 길을 걷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아마도 모든 학문의 마지막 대상은 인간정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인간', '인간정신의 내면세계', '무의식의 세계', '자기형성', '타락의 성향을 지닌 현재적 자기', '인간의 변화', '인간이해', '인간정신의 자동성', '정신의 통제', '영원한 존재', '삶의 수동성', '엄마됨', '아빠됨', '남편됨', '아내됨', '지향적 삶', '본래적 자기', 등등의 의식이 깊어져, 자기 자신과 자기 삶에 대한 통제성이 높아지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적 자기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이 실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일까'하는 물음에 관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우리 내면의 세계에 원인적으로 잇닿아 있다.
'인간 이해'에 '사랑'의 인격적 요소를 더하여, 치유의 길로 이끌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주된 정체성은, 사랑이 담긴 인격적 행위가 있어야 함을 꼭 마음에 두고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인생 나그네 길을 가는 길동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 상담' 또는 '인생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누는 만남'을 가질 것이다.
바른 ‘영혼 돌봄이’가 되어, 자기 외적 환경은 변함없이 그냥 안으면서, 내적 환경인 자기 마음을 변화시켜 점차 의연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향했던 마음의 방향을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향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나를 찾아오는 내담자들 내면에 숨겨진 잠재의식의 힘을 함께 찾아내고, 내담자가 그 힘을 발휘하여 비상(飛上)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겠다.
바른 '영혼 돌봄이'가 되어, 내담자가 자신 안의 무한한 가능성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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