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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마 21:4-5, 종려주일 설교문

by tat tvam asi 202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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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마 21:4-5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입니다. 이때에 수많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가에 펴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래서, 다음 주일을 가리켜 우리는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루살렘에는 두 번째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소동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을 때였습니다.

 

두 번째 소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이란 도시를 품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품기 위해 입성하십니다.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시고자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이미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1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마 21:1-2 /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환영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려나무'와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주전 2세기, 시리아 출신의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는 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이때 유다 마카비 장군이 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군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던 전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종려나무를 흔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유다 마카비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나타나시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세상은, 백성들이 원하였던 세계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큰 세상을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려고 오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등을 타시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품기 위해 입성하십니다.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이 망가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나를 다시 세우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도 가장 낮은 마굿간 말구유에 오셔서,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섬기시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보여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마 21:3-4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여기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 고 말씀하신 부분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나귀새끼가 자신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것처럼, 나를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를 타심으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슥 9: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2. 섬김과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합니다.

마 21:8-9 /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지금 예수님 눈 앞에는 뜨거운 환호와 영광스런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향연을 마다하시고, 그  어려운 십자가를 어떻게 지실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고전 1: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주는 능력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이미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1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리고 담대히 에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왜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누가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눅 19:37 /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감람산 내리막길'이라는 말은 벳바게에서 감람산 정상을 넘어 예루살렘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길에 황금문이 있습니다. '황금문'이란 명칭은 예루살렘의 성문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서 붙어진 이름으로 일명 '미문'(Beautiful Gate)으로도 불립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통과하신 문도 바로 이 황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메시아가 이곳을 통과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감람산 정상을 넘어오시자,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펴기도 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주전 2세기 시리아 출신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을 위해서 마카비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12년간에 걸친 마카비 전쟁에서 결국 유다 마카비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사람들은 유다 마카비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나타나시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아는 아닙니다.

마 20:27-28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이 결코 영광을 취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등을 타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귀영화를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마 21:4-5 /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을 섬기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편 사람들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와서 길에 펴는 사람들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끼나귀 위에 올라 타셔서 이같이 열렬한 환영을 받으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보게 됩니다. 물론, 당시에 무리들이 겉으로는 그토록 뜨겁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바로 저들이 또다시 빌라도의 법정으로 몰려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칠 사람들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면 다시는 살아 내려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같은 죽음의 길을 향하여묵묵히 올라가셔야 했던 주님의 심정은 복잡하였을 것입니다더군다나예수님만 믿고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동거동락하였던 12제자조차도예수님이 지금 걸어가시는 이 길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환호하는 군중들 틈에서 우쭐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세상을 원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품기 위해 입성하십니다.

즉 스스로 육체와 영혼에 갇혀 있는 줄 알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종려주일은 육체의 본성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우리라는 '작은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음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서 울려 퍼졌던 그 처절한 외침은 단순한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깨어지고 일그러졌던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합니다.

 

창 1: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 사랑과 정의를 반영하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마치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아름다운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우리 마음속에 어둠과 이기심, 욕망과 불순종을 심었습니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채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죄로 물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흘리신 보혈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마치 조각가가 깨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다듬어 원래의 아름다운 형상을 되살려내듯,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점점 더 사랑이 많아지고, 온유하고 겸손해지며, 정의롭고 거룩해집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가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결과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벧전 2:24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종 된 자리에서 해방하시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담당하시는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벧전 2:24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나음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벧전 2:25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전에는 목자를 잃은 양으로 방황했는데, 이제는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양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가 종려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십자가를 묵상하며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안의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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