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히 서 가는 교회
행 9:31-43
❚ 행 9:31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9장 31절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 또한 어떠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할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핍박의 시대 속에서도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든든함은 단순히 외적인 성장을 넘어, 내적인 평안과 믿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또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첫째로 교회는 '평안의 공동체' 가 되어야 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지친 몸과 마음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평안은 세상적인 안락함과는 다른, 하나님과의 화목과 그 안에서 비롯되는 심리적인 안정감,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깊은 이해와 사랑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핍박이라는 외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이 평안을 누렸습니다.
어떤 분이 여행을 갔는데, 주일날이 되어서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찾았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지역이라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 마침 서 있는 교통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처에 어디 예배드릴 좋은 교회가 있습니까?
교통경찰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 길로 한 블록을 가다가보면 우측으로 꺾어지는 거기 교회가 있습니다" 하고 안내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담 삼아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 그 교회 교인입니까?"라구요. 그랬더니, "아니요.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근처에 몇몇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 표정이 제일 밝고 평안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괜찮은 교회인가 봅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진정으로 평안한 공동체입니까? 혹시 우리 안에는 작은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는 성도는 없습니까?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소문과 비난, 무관심은 평안을 깨뜨리는 주범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온 성도가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 먼저 다가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은 평안을 심어주는 작은 실천입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성도에게 안부 전화를 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공동체의 평안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사랑으로 덮어줄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믿음으로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입니다.
"든든히 서 가고"라는 헬라어 표현은 마치 "집을 건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튼튼한 집은 견고한 기초 위에 정성껏 쌓아 올려진 벽돌 하나하나로 완성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서 가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토대와, 그 믿음 위에 굳건히 세워지는 성도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1. 터전이 든든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지탱하는 반석이십니다. 우리의 예배, 교육, 봉사, 교제의 모든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굳건히 자리해야 합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려면 내면에 말씀의 터전으로 다져져야 합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이 단순히 교훈이나 지식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의 믿음의 터전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2. 모든 성도가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튼튼한 건물은 각각의 벽돌이 제 역할을 다할 때 견고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교회는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설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그룹 모임을 통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삶을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각 성도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은 서로를 세워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한, 각자의 은사대로 교회의 다양한 사역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갈 때, 우리 모두는 더욱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자그마한 교회가 새로 단장했습니다. 새로 함석 지붕을 깨끗이 씌우고, 거기 못을 단단히 박았습니다. 지붕에 박힌 못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야 뭐 별 쓸모가 없는 존재야. 저 기둥처럼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창문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여름에는 더위와 씨름하고, 겨울에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야. 게다가 함석 지붕을 페인트로 칠을 하니 새 못이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못은 신세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못은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비틀다가 지붕에서 쑥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날 밤 태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빠진 못 자국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고, 바람이 휘몰아 불더니 그만 함석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더욱 단단히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으로 우리가 단단히 세워 져갈 때 교회는 든든히 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셋째, 교회는 성령의 위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증언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며, 절망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하시는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뜨거운 마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성도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은 성령님의 위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봉사활동을 통해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성령의 위로가 넘치는 교회는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 세상에 소망을 전하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돌아 보는 교회가 위로가 넘치는 교회로 든든히 서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성경에 이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욥바에 살고 있는 다비다라는 여인을 아시지요!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도르가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다비다는 이름의 뜻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양'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눈이란 육체적인 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눈이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 행 9:36 /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다비나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이 때 옆 동네 룻다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두 명이 베드로에게 가서 급히 말했습니다.
❚ 행 9:38 /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가서 보니, 다비다 시신이 다락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가난한 과부들이 시신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 순간 다비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 행 9:40 /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다비다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비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다비다가 과부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제자라는 말은 당시 혼자 살고 있는 여자를 의미하였습니다. 이 처럼 다비다는 주변가난한 과부들을 섬겼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다비다가 죽었을 때 다비다에게 사랑을 받았던 과부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 행 9:39 /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그런데 모여든 그 과부들의 손에는 옷들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울면서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다비다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에게 지어준 옷입니다."
다비다는, 가난할 때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비다는, 아플 때 더 아픈 사람을 위하는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비다는,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사랑을 나누어 주는 자리에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마을 과부들이 모두 모여 다비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보면, 다비다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비다는 최선을 다하여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였던 분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옷을 사준 것이 아닙니다. 옷을 얻어다가 가난한 과부들에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을 손수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비다는 옷 재단하는 법을 배웠던 여자인 것 같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다비다가 만들어준 옷을 들고 와서 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비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가난한 이웃을 사랑으로 섬겼던 분이었습니다.
또한 다비다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다비다는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플었습니다.
즉 댓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댓가를 바랄 수 없는 가난한 과부들을 사랑한 것이 다비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다비다가 사랑을 주니까 사랑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비다가 죽자, 수많은 과부들이 다비다가 만든 옷을 들고 와서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다비다 집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댓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비다가 살아날 뿐만 아니라,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일로 말미암아 욥바라는 마을에 있던 모든 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 행 9:41-42 /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의 세 가지 중요한 모습, 즉 평안의 공동체, 믿음으로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 그리고 성령의 위로가 넘치는 공동체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각자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고, 말씀을 통해 굳건한 믿음의 터전을 쌓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나아갈 때, 우리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발하는 건강하고 든든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자리에서부터 든든히 서 가는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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