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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향한 믿음, 요 11:17-27,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57)

by tat tvam asi 2025.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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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네가 믿느냐?" -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향한 믿음

요 11:17-27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시기,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그분의 메시아 되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단순히 병을 고치시는 치유자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정복하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인간 역사상 그 누구도 극복하지 못한 사망의 권세,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며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벽 앞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핵심적 정체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성숙해져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위험을 무릅쓰고 베다니로 향하시는 예수님

요 11:17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이 베다니로 향하시는 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의 거리는 불과 2-3킬로미터에 불과했고,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나사로가 병들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은 즉시 달려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체였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는 죽음을 맞이했고,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 유대인의 죽음관과 4일의 의미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3일까지는 영혼이 몸 주변을 맴돌며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3일까지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4일이 지나면 완전한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또한 시체의 부패가 시작되어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4일을 기다리신 것은 단순한 치유나 소생이 아닌, 진정한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소진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마르다의 신앙고백과 내적 갈등

요 11:18-22 /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첫 번째 반응에서 우리는 깊은 인간적 솔직함을 발견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표현에는 아쉬움, 서운함,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더욱 아팠던 상실감의 표현입니다.

 

♣ 과거 지향적 사고의 함정

 

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의 아쉬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재의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도 종종 "그때 이랬다면", "만약 저렇게 했다면"이라는 후회 속에서 지금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를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곧이어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과거의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현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 현대 신앙인의 모습

 

마르다의 이러한 내적 갈등은 오늘날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흔들립니다. 감사하면서도 아쉬워하고, 찬양하면서도 푸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여정에서 겪는 정상적인 과정임을 마르다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점진적 계시와 믿음의 성장

요 11:23-2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는 이를 종말론적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그녀의 신학적 이해는 정확했습니다.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전통적 믿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미래형에서 현재형으로의 전환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시선을 미래에서 현재로, 일반론에서 구체적 현실로 돌리고자 하셨습니다. 종말론적 부활은 분명한 진리이지만,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 점진적 계시의 교육학적 효과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깊은 교육학적 통찰이 있습니다. 마르다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시작하여 점차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갑작스럽게 높은 차원의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해 수준을 존중하면서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예수님의 자기 계시

요 11:25-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개의 "나는 ~이다"(I AM) 선언 중 하나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부활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라 부활 그 자체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심을 선언하십니다.

 

♣ 부활의 이중적 의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는 육체적 죽음을 경험한 후에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나사로에게 곧 일어날 일의 예표이면서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궁극적 부활을 가리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는 현재 살아있는 믿는 자들이 영적으로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육체적 죽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특유의 "현재적 종말론"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 현재형 질문의 중요성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질문에서 주목할 점은 동사의 시제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믿었는지, 미래에 믿을 것인지를 묻지 않으시고 현재 믿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믿음은 현재적 결단이며, 지금 이 순간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마르다의 성숙한 신앙고백

요11:27 /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최종적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마 16:16)과 맞먹는 수준의 완전한 기독론적 선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세 가지 차원에서 고백합니다.

 

♣ 삼중적 고백의 의미

 

첫째, "주"(퀴리오스)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존경의 표현을 넘어서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사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사명과 역할을 정확히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교적 배경에서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한 고백이었습니다.

 

♣ 환경과 무관한 믿음

 

이 고백이 더욱 놀라운 것은 상황적 배경입니다. 오라비의 시신에서는 여전히 부패의 냄새가 나고, 집안은 상중(喪中)의 분위기였으며, 아직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이러한 완전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된 믿음이 환경에 좌우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예시입니다.

 

6. 현대적 적용: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오늘날의 도전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과 권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불의가 득세하고 공의가 사라져가는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에 직면합니다.

 

♣ 믿음의 성숙을 위한 도전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일희일비하는 수준의 믿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 실제적 적용 방안

 

첫째,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나 아쉬움이 현재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기회를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셋째,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마르다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차원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지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든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보다 강하신 분, 모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 우리의 부족함을 완전함으로 채우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욱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은혜에 감사하며, 미래의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는 가운데 오늘을 승리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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