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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마 11:16-19, 은혜로운 전도사님의 수요 예배 설교

by tat tvam asi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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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마 11:16-19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할렐루야! 어느덧 시간이 빠르게 지나서 10월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지난 여름이 무척이나 길고 더웠던 터라 올해는 정녕 선선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심지어 오늘 오전에는 좀 춥게 느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그렇게 더울 때는 언제 가을이 오나, 언제 겨울이 오나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날씨가 바뀌니 올해 겨울은 무척 추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벌써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심지어는 아직 위기가 닥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작은 마음은 내 일상을 위협하는 모든 문제들에 흔들릴 때가 참 많습니다.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가도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고, 앞으로 더 추워지고 더워질 계절에 근심하는 제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근심, 걱정이 지나쳐지면 점차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어긋나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신앙에서, 마음의 평안과 서로를 향한 섬김에서 어긋나게 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묵상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부추기지요. 

 

그런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단지 죄로만 치부하기에는 좀 억울합니다. 불안은 사실 인간의 당연한 생존본능이요, 자기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보호수단이기도 하거든요. 만일 곧 닥쳐올 변화에 대비하지 않은 채, 마냥 해맑기만 하다면 그것은 믿음, 평안이 아니라 게으름과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의 마음 속에도 불안은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직접 여자가 낳은 이중에 가장 큰 자라 칭하신 세례 요한마저도 그러하였는데요, 오늘 읽은 본문의 바로 전 상황을 설명하는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 1절로 6 말씀을 교독하시겠습니다.

 

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혼란하던 시대에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던 선지자입니다. 누구보다 빨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포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고강직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죄악을 지적한 까닭이었는데요헤롯왕이 그의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위기를 앞둔 세례 요한은 옥 중에서도 그의 두 귀를 열어 제자들을 통해 밖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특별히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어떠한 행적을 보이시는지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요한은 의아해집니다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박한 순간에악이 판을 치는 이 때에 요한의 귀에 들려오는 소식은 그저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다혹은 어느 지역에 가서 가르치셨다 등의 소극적 행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이 바라고 꿈꾸던 메시아는 강한 힘으로 악을 벌하고 심판하시는 권능자 예수님이었습니다세례 요한의 기대는 마치 이 예언과도 같았는데함께 이사야 35장 1절로 4을 봉독하시겠습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두려워하지 말라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보복하시며 갚아주시는 주님, 강한 구원의 손길로 그 백성을 지키실 메시야가 잠잠히 계시니 그의 기대가 무참히 꺾기고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세례 요한을 옥죄어 옵니다. 아마 요한은 옥에 갇힌 자신의 상태보다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더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직접 질문합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속마음이 무엇인가요? ‘당신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야인지 내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면 나에게 확신을 주세요.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준 행보만으로는 내가 깨닫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세례 요한의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보면 그의 불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질문 앞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십니다.

 

'실족하다'라는 것은 '발을 헛디디다', '실수하다', '잘못을 행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소문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인 스캔들, 이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으로, '거꾸러 넘어뜨리는 함정'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포함하여 온 생애가 거대한 스캔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쉽고 빠르고 확실한 길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공통되게 꿈꾸고 바라는 이상이 있는데, 그 기대와 필요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그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시니 이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불안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하여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는데, 자기의 예상과는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말씀하시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십니다.

 

11: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35:5-6  /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아무리 조국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기인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 그분의 정체를 의심하는 질문을 하였다니 예수님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 7절로 11의 말씀을 합독하시겠습니다.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엄청난 극찬이지요. 세례 요한을 모든 사람들 중 가장 큰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천국이 어디인가요? 저기 먼 하늘나라인가요? 그렇다면 천국은 언제인가요? 죽어서 가는 먼 훗날인가요?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된 욕망보다 훨씬 크셔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주었고, 그분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의 모임 속에 있습니다. 율법 이외의 나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는 방법이 없었는데, 인간의 모든 행위와 노력 그 위에 예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바라만 보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그 영광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천국복음이 우리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걱정과 근심으로 인해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인생들을 향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마태복음 11 16절로 19입니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내 친구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고내 친척의 슬픔을 위로하지 않는 시대...

오로지 나의 안위와 이득만을 위하며 조금이라도 이에 반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시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가장 좋은 것으로 취급하여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시대...

메시야가 왔으나 복음도 구원도 하나님의 나라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시대...

비단 예수님 당시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순간 인간의 역사는 생존에 대한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져왔습니다. 나누기보다 빼앗고, 섬기기보다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이기심과 욕심. 하지만 가장 어둡고 추운 밤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것처럼 아무리 악한 시대라 할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밝게 빛을 냅니다. 

 

지난 수요 설교 중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하나님의 권세는 사랑과 섬김에 있음을 깊이 나누었던 것처럼, 오늘도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자칭 힘과 지혜를 표방하며 타락과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의 행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 바로 《쿠오 바디스》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를 라틴어로 "쿠오 바디스 도미네"라 하는데, 여기서 “쿠오”는 “어디”라는 뜻이고, “바디스”는 “가다”, “도미네”는 “주님”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책은 폴란드 출신의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소설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종교서적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권위 있는 책인데요, 이전 소개한 단편소설에 비해 1,2편으로 나눠진 조금은 긴 이야기입니다. 

 

내용으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부패함과 네로황제의 몰락, 대화재사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와 베드로의 순교라는 역사적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가상의 인물들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실감나게 이끌어 갑니다.

 

작품의 배경은 AD 1세기로 당시 로마의 황제는 그 이름도 유명한 네로였습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폭군이었고, 특히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던 인물이지요.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 신자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누명을 씌우고 대대적인 숙청을 벌인 사건이 있습니다. 책 안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선과 악, 평화와 혼란, 양보와 경쟁, 진실과 위선 등 양립된 가치관들이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가장 약하고 미련해보이는 기독교 신앙이 언제나 승리한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고백합니다. "고대 로마, 곧 그들의 신전과 문화와 가치관을 붕괴한 것은 로마 대화재가 아니었다. 미치광이 네로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기독교인들의 사랑이었노라" 이야기합니다.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은 사도 베드로가 극심한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려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미 극심한 박해로 인해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이 처형당해 죽게되자 남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간청하여 그가 죽음의 위기를 피해 다른 곳에 잠시 피신해 있기를 부탁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길을 떠나는 도중 그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지나쳐가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놀란 베드로가 흐느끼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 가십니까?" 예수님은 온화한 목소리로 응답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베드로는 다시 그의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향하였지만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평안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기쁨만이 가득합니다. 

 

성경에서도 쿠오 바디스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 36절로 38의 말씀입니다.

 

36 /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며 자신의 의와 혈기로 가득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자르며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로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질문, "주여 어디 가시나이까"하는 그 절박하고 심오한 물음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마지막장을 통해 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네로는 돌풍처럼, 천둥처럼, 불길처럼, 전쟁처럼, 그리고 역병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성당은 지금도 바티카누스 언덕에서 로마와 온 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주여 어디 가시나이까", 이 질문은 혼돈과 공허의 시대 속에서 던져지는 영원한 물음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인류는 불안과 불신 속에 함몰되어 길을 잃고 자신을 죄악의 욕망에 내어던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하나 된 우리는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먼저 가셨고, 또 이제는 나와 함께 가시는 사랑의 주님, 지혜의 주님, 능력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한탄하고 비통해하기 보다 그 위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주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하며, 이로 인해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하여주세요. 우리는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걷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사모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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